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교회론에 관한 책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면 구원론에 관한 책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으며,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다가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탄생시킨 교회는 어떤 것인지가 잘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에베소서 1장이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예정론에 입각하여 기술되어있다고 한다면, 에베소서 2장은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다가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가 기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에베소서 1장이 커다랗고 높은 산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에베소서 2장은 작은 여러 개의 산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에베소서 1장에 이어, 에베소서 2장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에베소서 2장은 1장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다가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교회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번주와 다음주에 걸쳐서 2주간에 살펴보려고 한다. 특별히 이번주에는 에베소서 2:1~10에 나와있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과연 어떤 상태에 있다가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성격은 대체 어떠한 것이며,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에베소서의 2장의 위치는?
에베소서 2장은 1장과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다. 왜냐하면 둘다 결론은 다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로 끝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출발이 다르다. 에베소서 1장은 창세전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거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면, 에베소서 2장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인간의 실존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에베소서 2장에서 교회의 원래 상태였던 인간의 현실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 2장은 전반부(1~10절)과 후반부(11~22절)로 구분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으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된 교회가 어떤 상태에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 곧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인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시민이자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과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지금도 지어져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에베소서가 말하는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어떤 것인가?(엡1:3~14)
에베소서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볼 때, 교회의 출현과정을 소개하고 있는바, 창세전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소개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을 통하여 교회의 탄생이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결과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참된 예정론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시작되었고, 칼빈과 그의 후예들에 의해 완성된 이중예정론이 많이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중예정론은 성경에서 빗나간 내용들이 포함하고 있어서 성경적인 예정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1장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기록했던 서신서들을 통하여 제시했던 예정론이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성경적인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번 다섯차례의 시간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눴기에 여기에서는 핵심골자만을 소개한다.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어떤 것인가?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얻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가 될 자로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신을 회개하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면 그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불특정 다수의 예정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는 성경적인 예정론을 좀 더 구체화해보자. 첫째, 인간은 타락했고 무능한 것은 맞지만 전적으로 타락하거나 전적으로 무능해서 하나님의 구원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은 아니다. 즉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 되었기에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하지만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게 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여, 믿고 회개할 때에 비로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셋째,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성부가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다만 믿지 않는 자는 자신의 불신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효력을 받지 못하는 것 뿐이다. 넷째, 인간은 아직까지 조금이지만 남아있는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할 수 있다. 다섯째, 한 번 믿음과 회개로 이미 얻은 구원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소유한 믿음을 부인하거나 죄를 짓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이 죽는 날에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다. 즉 자신이 죽는 날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다.
4.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어떤 상태에 있었다가 구원얻는 것인가?(엡2:1~3)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1~10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다가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를 소개한다. 그는 먼저 "너희"라고 지칭되는 에베소교회의 성도들 즉 이방인들이 어떤 상태에 있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라고 지칭되는 바울팀 곧 유대인들이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먼저, 이방인들은 허물들(탈선들)과 죄들로 인하여 자신의 영이 죽어 있었다고 말했다(엡2:1). 그리고 허물들과 죄들 가운데서 있을 때에 그들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걸어갔으며, 공중의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영를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다고 말한다(엡2:2~3). 그렇다면 과연 이방인들만 이런 상태에 있었는가? 아니었다. 바울은 "우리"인 유대인들도 역시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행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유대인들도 육체와 생각들의 뜻을 따라 행하며 이방인들처럼 본래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소개한다(엡2:3).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나 구원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것이다.
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행하신 일은 무엇인가?(엡2:4~7)
하지만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죄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다고 말한다(엡2:4). 그래서 허물로 죽어있는 사람들(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그리스도 함께 구원의 과정에 동참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역시 그 구원의 과정에 함께 동참하고 있었다고 소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었고 둘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고, 셋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들을 안에 함께 앉히셨다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3단계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그러한 축복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6. 절대적인 은혜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것인가?(엡2:8~9)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 사도바울은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다시말해 허물들과 죄들로 인해 죽어있었던 인간이 구원받게 된 것은 인간에게서부터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였음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 안에서부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큰 사랑을 베푸셔서 은혜로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후에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그것을 성취하였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한 번 구원을 받았드면 절대적으로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하지만 우리말성경이나 영어성경에는 우리 인간의 구원이 이미 완료된 것처럼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아니다. 엡2:8의 문장은 현재완료 문장이 아니라 현재 직설법 능동태 구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엡2:8에는 동사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현재완료능동태 동사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보조동사이며, 또 하나는 현재 직설법 능동태 동사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현재직설법능동태 동사이며, 이것이 주동사라는 것이다. 이제, 헬라어원문에 입각하여, 엡2:8의 말씀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엡2:8[헬라어직역] 왜냐하면 너희는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채로 있기 때문이다(혹은 왜냐하면 너희는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채 있는 이들로 있기 때문이다).
고로, 엡2:8의 문장은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문장이 아니다.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이야기다. 다만 현재 그 사람의 구원의 상태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그러한 구원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이 문장을 왜곡하여 구원은 이미 믿을 때에 완성되어버린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이 문장은 이미 구원받은 채로 있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지, 그 사람의 나중형편을 보장해준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엡2:8의 문장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은혜요 둘째, 믿음이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인간이 취하고 있어야 할 입장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에 분명하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작정하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한 모든 준비는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셨다. 심지어 범죄한 인간이 받아야 할 죄값까지 다 처리해놓으셨다. 다만 그 사실을 들어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최종적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의 완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거부하여 조롱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7. 구원의 결과 탄생한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엡2:10)
그렇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지만 결국 그것을 반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죄인을 어떠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놓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의 작품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엡2:10). 그분이 직접 제작하는 위대한 걸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성도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수준을 반영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가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약해 보여도 자신이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수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이 순간에도 100% 반응하면 기적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도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요14:12). 하지만 인류의 2/3 정도는 안타깝게도 자기 속에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자 구원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다. 1/3만이 자기 안에 전능한 창조주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을 그분을 어떻게 누리며 살 수 있는지를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습작품으로 대강 만드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하나하나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수준의 귀한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 심지어 인간보다도 능력이 훨씬 뛰어난 천사라도 인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귀한 존재가 성도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구원받아, 장차 천사들을 다스리며 살아야 할 존재다. 하지만 천사는 아무리 뛰어나고 충성된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종으로 계속 일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천사들 앞에서 당당해야 하고, 꾸꿋하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진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사도바울은 외국에서 태어났던 헬라파유대인이었다. 그는 본토박이 히브리파 유대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에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종교적으로 엄한 바리새파에 속하여 율법을 공부했던 석학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자신이 비록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으며, 매주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가려먹던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자신도 이미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본성 아래에서 공중의 권세의 통치자인 마귀를 따르던 죄인이었으며, 허물들과 죄로 죽어있던 자였다고 말이다. 그렇다. 과거에 그들이 유대인들이었다고 해서 더 많이 구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은 별로 아니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들 중에 다만 몇몇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던 것 뿐이다. 그들도 역시 우리처럼 우상을 숭배를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믿을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인 우리 대한민국사람일지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모습이 돋보이는 위대한 걸작품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걸작품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2020년 11월 25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