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지은 죄들을 회개의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천주교에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들을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를 통해서 용서받게 되고 그리고 세례를 받은 후부터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낱낱이 고백하지 못한 자범죄들이 혹 남아 있다면, 그 죄들 때문에 연옥으로 들어가 지은 죄들에 대한 벌을 받은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만약 세례를 받고 고해성사를 바쳤지만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려면, 눅7장 36~50절에 나오는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처럼 주님과 교회를 향하여 선행을 할 것을 권면한다. 그러면 이 여인처럼 "네 죄들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정말 그럴까?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낱낱이 고백하지 못한 죄들을 우리의 선행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죄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정확한 가르침이 오늘 이 메시지 안에 들어있다. 오늘을 그것을 주목해보자.
1. 들어가며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입술로 다 고백함으로 용서받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도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천주교(로마카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아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자가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세례이후에 지은 죄를 반드시 고해성사를 하라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미쳐 회개하지 못한 죄들이 혹시 남아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은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와같은 사람은 불타는 연옥에서 일정한 기간동안 연단을 받은 후에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때 연옥에서 연단받을 기간을 짧게 하거나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그것은 바로 7장에 나오는 향유부인 여인처럼 공로나 선행을 쌓게 되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곧바로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천주교의 가르침은 옳은 것일까? 정말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함의 방법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서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가?
2.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어떤 행동을 취했으며 예수께서는 그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께서 어떤 바리새인(이름은 "시몬")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떤 죄인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왔다. 하지만 예수님 뒤에서 옆걸음쳐서 앞으로 간 여인은 엎드리더니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예수님의 발에 물기를 닦아들인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가지고 간 향유를 깨뜨리더니 예수님의 발에 부어 발라드린다. 그후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행동을 칭찬해주신 후에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선포하신다. 그렇다. 오늘 이야기를 시간순서상으로 배열한다면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함을 받은 이유는 그녀가 행한 선한 행동들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예수께서는 그녀가 보인 행동들 때문에 그녀에게 죄사함을 선포해주셨을까? 만약 그것이 맞다면 오늘날 천주교의 구원론에 있어서 공로사상은 정당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 세례와 고해성사로 용서받은 못한 자범죄들은 선행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행했던 행동을 보시고 그 여인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인가?
3.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나?
우선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자. 이 여인은 당시 동네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인 여자"라고 불리워지고 있었다(눅7:37). 그들 생각에 이 여인은 과거에도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인이며 앞으로 언제까지 죄인일지 모를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 도시 사람들은 이 여인(결혼한 여자)를 죄인이라고 낙인찍었을까? 사실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죄인"이라 불리울 수 있는 자는 딱 2종류의 사람들 뿐이다. 그것은 만약 그 대상이 남자라면 세리들일 것이고, 여자라면 창녀들일 것이다(마9:10, 21:31~32). 그런데 그 여인이 현재도 죄인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죄인으로 살아갈른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때 당시 사람들의 평가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것은 눅7:39에 나온다. 사실 자기의 집 안으로 식사를 초대했던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서 기대하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그날밤 죄인인 여인이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행한 행동을 용납하는 것을 보았던 시몬은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이며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예수께서 알았더라면 그 여인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님마저도 선지자가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당시 그 동네의 바리새인들은 그녀를 창녀와 같은 여자로서 경멸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4. 주님께서는 왜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해주었고 죄사함까지 선포해주셨을까?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동을 그냥 지켜보았으며, 나중에는 그 여인을 향해 죄사함까지 선포해주셨던 것일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는 시야와 당시 시몬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의 시야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눈에 그 여인은 이미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여인이 행하는 모든 행동을 결코 말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여인이 예수님에 의해 어떻게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여인이 취했던 행동들은 그 여인이 예수님으로 죄사함을 받기 위해 취한 행동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여인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은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죄용서받은 감격을 예수님에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자신의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연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귀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는 일을 주님도 말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자신의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서 그러한 행동들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를 표시를 하려고 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날 그 여인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하나의 비유를 통해 일러주셨다. 그 비유는 이렇다(눅7:41~42). 빚주는 사람에게 두 사람의 빚진 자들이 있었다.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빚지고 있었다. 그런데 갚을 것이 없자 빚주는 주인은 그들의 죄를 탕감(면제)하여 주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바리새인인 시몬에게 물었다. "그들 둘 중에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의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녀가 이미 자신은 많이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바리새인은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자신의 죄가 용서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에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기는 했지만 그는 예수님에게 인색했다. 첫째, 그는 발 씻을 물조차 예수님께서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고 그녀의 머리털로 닦아주었다. 둘째, 그는 얼굴에 입맞춤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셋째, 그는 예수님의 머리에 그 흔한 감람유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값진 향유를 부어 예수님을 발에 향기롭게 해주었다. 그렇다. 그 여인처럼 그 바리새인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되어 죄들을 용서받게 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그처럼 냉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하필이면 그 여자가 그러한 행동들을 마친 후에 죄사함을 선포한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이미 그 여인은 죄사함을 받아 용서받은 자인데도 그 동네의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을 한사코 죄인이라고, 더러운 여자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선포를 통해서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듣는 데서 그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해주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이 선언은 그때 비로소 그녀가 행한 행동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다는 문장이 아니다. 이미 죄사함을 받은 상태에 있었음을 표현해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보면, 이 문장은 "직설법 완료 수동태"문장이다. 이 문장을 시제에 따라 번역해보면 이렇다. "너는 이미 네 죄들을 용서받은 채 있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 한글성경으로 보면, 이 여인은 그때 죄사함을 받았는지 이미 죄사함을 받은 채 있었는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특히 마9:2에도, 친구들에 의해 지붕에서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예수께서 죄사함을 선포했던 장면이 한 번 더 나온다. 하지만 이 본문은 "지금 죄사함이 주어지고 있다"는 "직설법 현재 수동태"의 문장에 해당한다. 헬라어로 보면, 그 중풍병자는 그때 죄사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아니다. 이미 죄사함을 받은 상태에 있었고 주님의 선포는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을 뿐이다.
5. 나오며(선행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오늘날까지 로마카톨릭에서는 이 여인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으로부터 하여금 죄사함을 선포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들 중에 세례와 그 이후의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 여인과 같은 선행을 통해 죄사함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버린 무식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선행으로 결코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행함이 결코 회개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선행으로 회개를 대신하여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거래가 되고 말 것이다. 죄사함을 위해 우리의 행동으로 주님과 거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의 그 어떤 선행이라 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죄사함을 가져오는 거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죄용서받는 것은 오로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그 댓가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그러한 용서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취한 행한 행동들은 자신이 어떻게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을을 뿐 결코 죄를 용서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공로사상은 틀린 주장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편리한대로 해석하여 악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한없는 긍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며 적은 것이나마 보답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것으로는 주님이 베푼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것이지만 그것이라도 표현함으로 주님 사랑에 보답하려 하는 우리의 노력인 것이다.
그렇다. 자신이 어떻게 되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되었는지를 아는 자는 이 여인처럼 행할 것이다. 가장 낮은 데 처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려도 그것이 아깝지가 않을 것이다. 여러분도 이 여인처럼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도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의 가치를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결국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2018년 3월 18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