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상 율법과 자신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율법은 사실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자신은 예수님만 잘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사함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이 생긴다.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도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여전히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온갖 재앙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자식들이 귀신들려 고통받고 있으며,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회개도 같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왔으니, 지금 자기에게 저주를 가져다주는 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죄가 무엇인지 모르니 회개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정말 필요없는 것일까? 그런 자는 이 말씀에 주목해보기 바란다.
1. 들어가며
성경엔 서로 충돌되는 듯한 말씀들이 더러 있다. 율법에 관한 말씀에도 그러한 말씀이 있다. 에스겔 20장 13절을 읽어보면,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준행했을 때에 생명을 얻을 말씀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세대들은 그것을 준행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멸시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더럽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율법의 역할은 이것과는 달라 보인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살게 하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을 살게하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더라면, 의(義)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았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이처럼 소극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이 더 정확한 것인가? 우리는 어떤 말씀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충돌되는 듯한 경우에 우리는 어떤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종교개혁의 신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리기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와 정신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는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것인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B.C.1446년경 율법말씀을 주셨다. 그렇다면 그때 주어진 율법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법이었는가 아니면 지킬 수 있는 법이었는가? 이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에 관하여 놀라운 진술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율법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것을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스라엘 그것을 거역하고 일부러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깐, 에스겔서의 말씀을 인용해 보자.
20:11-13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생명)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만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율법을 그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지킬 수 없는데도 억지로 그들에게 그것을 주셔서, 죄인을 만드시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준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멸시하셨고 안식일마저도 업신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대부분을 광야에 엎드려 죽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살펴보면, 훗날 죽기 전에 모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B.C.1410년경 하나님께서 모압평지에서 출애굽2세대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계명)[들]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그렇다. 이 말씀을 늘 입에서 암송하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 그것들은 다 지킬 수가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빌립보서에서 자기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도 율법에서 규정하는 모든 규례들을 다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켜 의를 얻을 수 없다고 언급한 갈3:21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원래 율법말씀은 입으로 그 말씀을 늘 암송하면서 그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 두면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악해져서, 사람이 완악해져서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율법말씀을 들려주셨던 여호와께서는 구약의 율법말씀을 지키지 못해 저주받을 사람이 되라고 그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의 완악함이 그것을 지키지 않은 사람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3. 바울은 왜 율법을 사람이 지킬 수 없기에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법이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왜 바울은 율법을 소극적인 것으로 평가해야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살게하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기 때문이다(갈3:21). 바울은 왜 그렇게 판단해야 했을까? 그것은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게 그렇게 써야했던 특별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이라도 할례나 안식일과 같은 것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미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할례와 안식일같은 규정들은 율법(도덕법,의식법,재판법) 중에서도 "의식법"에 해당한다. 그런데 의식법은 사실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다 폐지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을 꼭 행해야 구원받는 것처럼 미혹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은 율법에 기록된 의식법을 꼭 준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식법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율법의 형식적인 문구에 빠져 있는 자들은 사도바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방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율법 특히 할례나 안식일 준수같은 의식법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할례파 유대인들이 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들의 적극적인 공격에 맞서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는 사실 율법 중에서 두번째 법으로서 의식법들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할례파 유대인들은 달랐다. 의식법을 문자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신자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 사항과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은 다 완성된 것이기에 폐지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먹는 것(우상의 제물, 목매어 죽인 것, 피)들과 음행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덕법인 십계명은 어떠한가? 십계명은 단 한 번도 폐지되었다고 언급된 적이 없다. 십계명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도덕법으로써 십계명에 대해서,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지키지 말라거나 폐지되었다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말씀을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4. 율법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지금까지의 실수는 무엇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체험하고 있는 실수는 무엇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런데 왜 사도바울을 자신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던 것일까?(빌3:6).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십자가의 원수로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모든 법규들을 다 지키며 살아왔는데, 그는 왜 십자가의 원수이자 죄인의 괴수로 살아온 것일까?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는 율법의 자구적인 규정에만 몰두했을 뿐 그것이 들려주고 있는 궁극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실체를 붙들지 못하고 그림자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율법말씀 중에서 의식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할례만 행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믿었고, 안식일 등의 절기들과 음식규정 그리고 정결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5:3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5:39 너희가 성경(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렇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말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자구적인 준수에만 몰두했을 뿐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바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니 율법에 정통했고 그 규정대로 보았을 때 흠이 하나도 없었던 사도바울도 의식법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율법이 말씀하고 있는 바가 그리스도 예수인 것을 전하는 자들을 감옥에 쳐넣어 가두고 심지어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만을 만나는 순간 그는 일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그리고 다시 10여년을 다시 율법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율법이 말하고 있는 것이 곧 예수님인 것을 증명하기 시작했으니, 그의 편지 속에는 그의 변화된 생각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실수는 율법말씀을 지키려고 시도했으나 그들은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실수는 무엇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반대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믿음만 있으면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 모든 죄는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죄용서에 있어서 한 가지 메카니즘을 빠뜨리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를 믿는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단 한 구절도 믿음으로 죄들의 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이 없다.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피로서 죄들의 용서를 받는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고로, 사람이 죄용서를 받으려면 십자가에서 치르신 예수님의 속죄행위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마음과 입술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율법을 공부한 적이 없기에 자신이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율법규정에 따라 어떠한 죄를 지으면 어떠한 형벌과 징계가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징계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도 왜 지금 그러한 징계에 머물러 있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저주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재앙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자녀들이 귀신들려 고생하고 자살하는 이들까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인데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율법을 모르니, 자신이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자신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니 그것을 회개할 것도 없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질병과 재앙과 자녀의 문제 속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왜 자신이 저주를 받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 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것은 율법의 규정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율법을 공부한 적이 없는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되었지 어찌 고리타분하게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느냐면서 율법공부를 등안히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율법의 저주에서 빠져나오려면 율법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받는 율법의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땅을 탈출하여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5.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신칭의가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고 말한 것일까? 그리고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사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은 율법이 말하고 있는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을 다 가리킨다. 그런데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것은 의식법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의식법(의식의 규정들)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의식법들은 다 장차 그리스도가 오시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말씀하고 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의식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대상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정결례를 행하고 있으면 자신은 구원받을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할례란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이뤄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안식일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의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벗어나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오직 예수의 피로만 모든 것들이 깨끗함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율법의 행위들 곧 "의식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런 것에는 첫째, 할례가 있다(갈5:1~6,11). 할례는 예수님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하려 할 때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절기법들이 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갈4:10, 골2:16).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셋째, 음식법도 마찬가지다(고전8:1~13, 고전10장, 행15:29). 먹고 마시는 것을 잘 지킨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정결법도 들어있다(행21:24~26). 하나님이 없는 성전 자체는 결코 거룩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피가 빠진 믿음이 아니고서는 정결의식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모든 의식법의 실체는 예수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이 말하고 있는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분이 오셔서 의식법들을 준수하심으로 완성하셔서 이제는 그것을 없애버리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이상 의식법들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장례식장에도 갈 수 있고, 오징어도 먹을 수 있으며, 유월절과 같은 절기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6.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가?
그런데 도덕법으로 십계명은 다르다. 십계명은 만고분별의 진리이기 때문이요, 이것으로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는 의식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을 두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 십계명을 가지고 판단하신다. 고로, 십계명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항상 관심을 가져야할 하나님의 중요지시사항이다. 그러나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식법들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고,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음을 회개함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서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심판대 앞에서 어떤 죄목으로 심판받을 것인지를 항상 염두해두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이 우리의 심판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오셔서 십계명을 한층 더 강화시키셨다.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한 것이요, 형제에 대해 욕하는 자는 심판에 나아간다고 했다. 즉 사람을 속으로 미워하는 것이 살인인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을 지키지 않음으로 오늘날 그리스도들이 얼마나 저주 가운데 머물러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십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니,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저주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질병에 시달리고 온갖 재앙들을 자기도 받고 있으며, 자녀들이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것이다. 특히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이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셨다(계14:12).
7. 나오며
그렇다. 예수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율법을 무시해서는 아니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부족해서 성도들이 저주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저주를 받고 있는데,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게 된데에는 그동안 강단에서 선포된 메시지와 교리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예수믿을 때에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범죄들을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에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공부하지 못했으니, 자기가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받고 있는 저주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채 그것을 받고 있다. 사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보라. 거기에 입원해 있는 자들을 보라. 예수믿는 사람이나 예수믿지 않는 사람이 별 찬 차이가 없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권사의 자녀와 목회자의 자녀에게도 귀신이 들려 있다. 그러한 자녀는 지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회개하지 않아서다. 죄가 무엇인지 몰라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더 잘 믿으려고 하면 할수록 율법을 공부를 더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유대인들은 의식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19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