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는 언제 무슨 이유 때문에 쓴 것일까? 요한사도는 요한일서를 어떤 특정한 교회를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당시 소아시아와 유럽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A.D.90년경에 교회는 이미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인지 듣고 있으면 금방 사람의 혼을 빼가버리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그래서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의 교묘한 속임수를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신앙인이라면 꼭 붙들어야 할 신앙의 핵심요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면 미혹의 영의 가르침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일서는 진리의 변증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강력한 책이다. 이 메시지를 들었다면 여러분에게 다시 요한일서를 정독하기를 강력히 권면해 본다.
1. 들어가며
교회사는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사실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알려주기도 한다. 특별히 교회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27권의 성경책이 어떻게 해서 교회가 인정하는 권위있는 성경책이 되었는지에 관하여 분명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요한일서는 누가 기록했으며, 왜 기록한 것일까? 보편적으로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요한일서는 사도요한이 늙그막에 쓴 책으로서 누구나 읽고 그리고 보기에 참 편한 책, 특별히 하나님이 빛이시며 사랑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책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영적 전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있다가 좀 더 살펴보겠지만 이 책은 "진리의 변증서"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위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변증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변증을 하게 되었던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요한일서를 쓴 목적과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일서는 누가 썼으며 왜 이 책을 써야만 했던 것인가?
요한일서는 A.D.90년경 사도요한이 쓴 편지들 가운데 하나.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이 누군지는 분명하지 않다. 추측컨데,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한 여러 교회의 성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이 편지에서는 지정된 수신인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 90살 가까운 사도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을 가리켜 "사랑하는 자들,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고로 나이든 사도요한에게는 여러 교회의 다양한 나이 때의 성도들을 가리켜 이러한 표현들을 쓰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어떤 정해진 교회가 아니라 당시 존재하고 있던 교회들 가운데에 회람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은 왜 편지를 쓴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를 바로잡아보고자 사도요힌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즉 사도요한은 이 편지에서 당시 교회를 흔들는 세력이 누군지를 알려주고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 사료된다. 특히 사도요한은 이 편지에서 교회의 성도들을 흔드는 세력을 가리켜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칭했다(요일2:26). 그리고 그들은 요한이 머물고 있던 교회나 교회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자들이라고 말했다(요일2:19). 고로 그들은 사도요한 즉 사도적인 가르침을 거부한 자들로서, 요한으로부터는 "거짓선지자(요일4:1)", "적그리스도"라고 불리움을 받던 자들(요일4:3, 2:18,22)을 가리킨다.
3. 당시에 교회의 성도들을 흔들며 미혹하던 자들은 누구였는가?
사도요한은 당시 헬라지역에 위치한 교회들을 흔들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는데(요일2:26), 이들은 요한이 섬기고 있는 교회나 요한이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한 자들이었다(요일2:19).
그런데 이들은 복음의 근간이 되는 내용을 거반 거부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첫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요일2:22). 둘째,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요일4:14~15). 셋째,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성육신)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요일4:2~3). 넷째, 거짓말로 예언하던 자들이었다(요일4:1). 다섯째, 이들은 자기들만이 진리를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진리를 몰라 어둠에 갇혀 있는 자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교회 가운데 들어와 거짓말을 유포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있다(요일2:21~22).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를 정리해본다면, 이들은 딱 한 마디로 "초기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을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언급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주장과 사상이 기독교이전의 영지주의자들과 너무나 유사하고 닮았기 때문이요, 이제는 기독교사상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자기들의 사상을 전파하기에 꼭맞는 성경구절을 이용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4. 당시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쓸 때에, 영지주의자들이란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가?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쓸 당시, 교회에는 이미 영지주들이 들어와 사도들이 가르쳐주고 전해주었던 참된 신앙을 거부하도록 미혹하고 있었다. 그런에 이들은 이미 자기들만의 고유한 사상적 쳬계를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A.D.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A.D.378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결국 이들은 갑자기 흔적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무엇을 주장하던 자들이었을까? 이들은 플라톤시대부터 있었던 영지주의의 사상을 기독교에 접목하여 예수님을 그들의 선각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입각하여, 신적 존재는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신념하에, 모든 것을 재편한다. 그리하여 신적 존재(단일자=모나드)로부터 멀어질수록 빛은 희미해진다고 본다. 그리고 구약의 여호와는 물질을 만든 신이므로 제일 저급한 신이라고 본다. 그리고 예수님은 신적 존재로부터 제일 처음 방출한 존재로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해 주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선각자요 철학자다. 사람은 사실 빛(신적 존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해 무지(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어서, 예수님과 같은 선각자들의 영지를 자신이 누군지를 깨우치게 되면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의 아들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육체를 가지지 않았다고 본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가 예수 위에 임하여 있었고, 3년반동안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빌려쓰다가 십자가 사건 때에 육체를 버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빛 중의 빛이요, 영 중의 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빛은 신적 존재가 가득한 상태를 의미하며, 어둠은 신적 존재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지킨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구원은 자신이 빛이 자녀인 것을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죄로부터의 구원같은 것은 없다. 다만 영지를 깨닫는 것이 구원이다.
5. 사도요한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사도요한은 이들이 기독교를 가장한 영지주의자들임을 간파하고서는 이들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므로 요한일서는 "진리의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으며, 성령을 통해 깨우침을 받고 영생을 소유한 사도요한은 기독교내에 침투한 영지주의가 바로 거짓선지자이며, 적그리스도요, 미혹의 영이라는 것을 정확히 꼬집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그토록 보존하고 지켜야 할 복음은 무엇이며, 그것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피흘림을 통한 속죄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다. 그에게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다. 그리고 30세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공적인 생애를 사셨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며 무슨 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는지를 3년반동안 드러내셨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셨다. 그리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셨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다. 피흘림이 없은 즉 죄사함이 없으며 죄사함이 없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며, 빛의 나라인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았으니 영지를 깨달은 자로서 이미 구원받은 자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물질이나 육체가 구원받은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웃의 아내를 욕보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은 삶은 문란해졌고, 더러웠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 형제에와 이웃에게 해를 입히고 있는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이며, 어둠에 속한 자라고 통렬히 지적했다.
6. 오늘날 교회 가운데 영지주의는 어떻게 숨겨져 있으며 드러나 있는가?
오늘날에 교회 안에서도 여전이 영지주의 사상이 남겨져 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자이며, 한 번 구원받은 자신은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그 죄가 자신의 영혼을 건드릴 수는 없으며, 자신의 구원에도 결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죽으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주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는 책망을 듣게 되며,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말로는 자신이 "빛의 자녀"이며,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는 다 마귀에게 속한 자다(요일3:8).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에게 해를 입히고 있는 자는 다 마귀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7.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사도들이 전해준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오늘날에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순수한 신앙을 지키면서 영지주의자들의 간교한 속임수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영지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속죄 그리고 부활신앙을 철저히 붙들어야 한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들 자신의 사상전파를 위해 세워놓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사실 그러한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이것이 진정 엄청난 일들을 수행할 것임을 알아차린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자기들의 주장과도 맞아 떨어지는 말씀들을 가져와서 포장한 것이 바로 기독교 영지주의다. 이러한 기독교 영지주의는 희생이 없어도 된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없어도 상관없으며, 예수님의 속죄사역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으며, 예쉼의 속죄를 통하지 않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8. 나오며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빛과 어둠의 스토리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주는 선각자가 있으면 되었다. 그것을 그들은 예수님이라고 정했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가현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예수님의 육체를 이용했다가 버렸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며,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결코 예수가 아니라 그때 붙잡혀 대신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사람 시몬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속죄사역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는데(요일4:8,16), 이는 말로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지를 깨달았다고 말은 하나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다 거짓말하는 자다(요일2:9~11). 속죄는 결코 깨달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이"이이며, 영생이시며, 참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린다.
2019년 8월 9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