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침체는 언제나 끝이 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 옛날보다도 말씀은 더 풍성해졌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는데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왜 사람들은 전도하려 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구원론에서 흔들리고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초기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던 시기에 선포되었던 구원론과 지금 교회에서 선포되는 구원론이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1960-70년대만해도 구원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회개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교육(세뇌)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머리로만 믿고 입술로만 고백하는 지적인 신앙고백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총제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사실 구원의 과정은 이미 믿음의 고백을 통해 시작된 것이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끝까지 이뤄가야 한다. 생각해보라. 지금 당신의 고백이 당신이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고백이 될 수 있을까? 정말 엄청난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당신은 과연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한국교회 구원관이 이렇게 잘못 삐뚫어진 것일까? 그것은 1980년대부터 한국교회에서 불어닥친 제자훈련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지적인 동의의 영역이 상당히 비중있는 훈련이 제자훈련이었다. 혹 그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것은 선교단체의 영향이요, 더 올라가면 칼빈의 성도의 견인교리와 어거스틴부터 주장해왔던 예정론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단체와 제자훈련하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론과 칼빈의 성도의 견인교리가 문제가 되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 때문에 오늘날 그 열매가 한국교회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복음서를 주의깊게 읽어보라. 주 예수님께서는 결단코 지적인 동의 정도로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축소판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영적 지식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심판대 앞에 섰을 때의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를 함께 똑같은 잣대로 말하거나, 야고보서를 폄하하면 아니 된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 주장했던 칼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에게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구원론은 그래서 틀린 부분이 많다. 한 번 구원이 어찌 영원한 구원일 수가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뀔 수가 있는데 말이다. 칼빈의 성도의 견인 교리는 결단코 모든 것에 통용하는 교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 대부분은 칼빈의 영원한 구원론 내지는 예정론에 너무 치우쳐 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 무슨 희생과 봉사가 필요하겠는가? 무슨 주일성수가 필요하며, 무슨 헌신이 필요하겠는가? 무슨 회개가 필요하겠는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무언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왜 이렇게 변질되어버렸는가? 믿음은 구원의 시작일 뿐 구원의 끝이 아닌데 그것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서 어찌 강단에서 회개를 외칠 수 있겠는가? 헌신을 말할 수 있겠는가? 없다. 성도들 눈치 살피기에 바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누가 목숨걸고 전도하려 하며, 누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 하겠는가?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은 자기가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믿음에 따른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자신의 구원이 온전한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데도 교회에서는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주님께서는 그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믿는 즉시 그에게 예수님의 보혈의 옷인 의의 옷이 입혀진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다. 그때부터 믿는 자는 이제 죄와 싸워야 한다. 아니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히12:4).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죄된 본성으로부터 스스로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죄를 이기어 나가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중요하다. 성령께 물어보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밖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들이 마치 성령의 전부인양 외쳐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졌다. 특히 1990년 이후에 들어와서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빈야드와 신사도운동 쪽에서는 예언을 하지 못하고 환상을 보지 못하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리더는 아무런 조명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가짜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그것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사탄에게 열어준 그 문으로 얼마나 귀신들이 치고 들어가 버렸는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칭찬해주셨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라. 어디 그 교회가 능력이 많이 나타나서 칭찬받았던던 교회였는가? 아니다.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배반치 아니하고 참고 인내하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로 그들을 '이기는 자' 곧 천국을 기업으로 성속받을 구원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믿는 자라면 이제는 죄짓기를 좋아하던 과거의 자기 자신(옛사람)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 옛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그래도 아니 된다면 날마다 통회자복하며 회개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문에 이를 수가 있다. 이제는 당신 차례다. 당신의 믿음은 온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