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어느 목사님께서 노우호목사님의 글을 퍼 나르고 있어서, 제가 그 목사님에게 방언에 대한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려드리자, 제게 방언과 방언기도 및 방언통역에 대해 질문해 온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4. 방언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1)방언기도의 성서적인 해석이 있다면 무엇인가?
2)고전에서 바울은 소위 방언기도(unknown tongue)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3)신약의 방언기도를 지지하는 구약의 내용이 있는가? 구약 사람들은 왜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4)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I thank my God, I speak with tongues more than ye all )
여기서 왜 바울은 방언들(글로싸이스)를 받았다고 했을까요?
이제는 방언기도란 무엇인가 아니 방언이라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방언기도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서(막16:17),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새로운 말이자 언어입니다(행2:1~4). 정확히 말하자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받은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 일종의 소리(글로싸=tongue)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에 대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는 일종의 기도로서(고전14:14),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4:2).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에는 기도하고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전14장에서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고 이성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으며, 방언으로 드리는 찬송이 있고 이성으로 드리는 찬송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4:14~15).
이처럼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성(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고전14:15). 이성(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자기자신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로서,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방언기도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가 됩니다(고전14:2,28). 저는 개인적으로 귀신들도 이 기도를 알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알아듣는 기도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의 내용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 혹은 방언기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방언기도가 개인을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여러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14:18).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모두가 다 방언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14:5). 왜냐하면 방언 혹은 방언기도는 분명 성령께서 나눠주시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10,28, 14:1). 이처럼 방언기도란 성령의 신령한 은사들은 성령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으로써, 고린도전서를 보면, 9가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고전12:8~11).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역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더 할애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자신이 외국어들을 더 잘 말하는 것을 쓰려고 고전 13장과 14장을 할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령한 은사라 할지라도 제일 위대한 것은 역시 사랑의 은사인 것 같습니다(고전13장). 왜냐하면 사랑이 빠진 신령한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3:1~3).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받았던지 사랑의 은사도 동시에 구해야 됩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것은 죽었던 자신의 영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은 새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단 한 사람도 영이 살아난 사람이 없으므로 즉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하여 거하신 일이 없으므로 한 사람도 방언을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12:30).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에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고 그때에 말을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은사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의 은사가 빠지게 되면, 방언은 소리나는 구리(청동)과 울리는 꽹과리(굉음나는 심벌즈)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고전13:1).
그리고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사용하기 유익한 은사는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은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다 미쳤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14:22~23). 다시 말해 방언의 은사는 신령한 은사이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은사로서,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라고 했습니다(고전14:1~5). 왜냐하면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고전14:31), 사람들을 회개하라고 책망하거나(고전14:24~25,31), 위로하는(고전14:2)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예언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위로받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아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로 모일 때에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기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고전14:1,29). 그래도 방언의 은사를 공예배 중에 사용하고 싶다고 하면, 그때에는 방언통역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고전14:13,27). 방언통역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차례를 따라 방언을 하게 하되, 2명 많으면 세 명 정도가 좋다고 하였습니다(고전14:28). 너무 많은 사람이 너도나도 할 것이 방언으로 말하게 되면 교회가 어지럽게 되고, 시간이 많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방언기도에 대해 교회 공예배중에는 통역을 시켜보라고 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영적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기도가 개인이 드리는 기도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교회와 복음전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기도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도바울이 방언기도를 공예배시에 통역을 하여 모든 성도들로 듣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큼 방언기도가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언기도는 개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건강하게 하려면, 교회가 공동체로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가급적 예언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이때의 예언은 결코 구약적인 의미로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일을 예측하여 미리 말하는 예언은 과거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것을 예언하였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보낸 분은 어떤 사람으로서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보내줄 것인가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 메시야를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언해오던 메시야가 2천년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30세가 되어서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시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42달이 지나자, 예수께서는 속죄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유월절날에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19:30). 구약에 예언된 모든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한 것은, 이미 부활승천하신 예수 즉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라는 것이요(고전14:31), 예수님을 믿고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자나 불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책망하라는 것이요(고전14:24~25,31), 이미 회개한 자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고전14:2). 그러므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깨달을 수 있는 자신의 언어로 성도들에게 예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언’은 일종의 설교와 비슷한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기도를 쉬어서는 아니 됩니다. 방언기도는 개인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통역을 해보면 알겠지만 그 내용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간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글므로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가급적 이성(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듣는 자가 아멘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예언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너희가 가 방언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방언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으며(고전14:8), 방언들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방언의 통역입니다. 수많은 종류의 방언들을 제대로 통역해 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방언을 통역해온 사람들 중에서 사회와 교회를 소란스럽게 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92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다미선교회나 작년 12월 한국전쟁설을 이야기했던 홍혜선전도사의 경우는 아주 심각한 것들이었습니다. 방언통역을 제대로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거짓으로 통역해도 그런 줄 알고 믿고 따라간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까지 방언이나 방언통역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제대로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성령의 활동을 제한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결국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기기에 제한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령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게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한국을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한편,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탄의 속셈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에 기도의 불을 꺼버리겠다는 사탄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이성(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방언기도를 동시에 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기도는 2~3시간이면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성으로 기도하다가도 방언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충분히 기도에 몰입할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이성(마음)으로도 기도해야겠지만, 특히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봅니다. 방언기도는 기도를 충분히 그리고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통역을 할수만 있다면 교회를 세워주는 내용의 기도이기에 방언기도는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글로싸이스)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그렇다면 언제 방언이 그쳐지는 것입니까? 그 다음 구절들을 보면, 믿는 자들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3:9~12).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방언기도를 쉬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해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질서하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지혜롭게 방언기도를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언기도를 맹신하여 그것만을 좇아가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은 성령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나눠준 신령한 은사인만큼(고전12:7) 잘 활용하여 개인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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