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신약성경의 원전인 헬라어성경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방언에 대한 경험이 없으신 분 그리고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이 따위 방언을 왜 하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노우호목사님께서 전하는 영상만을 계속해서 지켜본다면, 십중팔구는 방언을 그치게 될 것이다. 그만큼 확고하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분이 주장이 어디서 어떻게 틀렸는지 살펴보고 바른 방언관을 갖기를 바란다.
첫째, 정말 방언의 역사가 초대교회를 끝으로 그쳐버린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방언의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고전13:8).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첫째는 성경적인 고찰이 필요하고, 둘째는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먼저 성경적인 고찰부터 해 보자.
무엇보다도 사도바울은 방언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자,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보라.
[고전13:8-12]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8을 보면, 사도바울은 예언들도 폐할 날이 있을 것이고 방언들과 지식들도 폐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12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날이다. 그때는 바로 주님의 재림의 때이다. 혹 지금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방언도 그치지 아니할 것이고, 예언도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방언에 대해 역사적인 고찰을 해 보자. 노우호목사님께서는 A.D.55년 이후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쳤다고 주장하시는데, 그 명확한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방언으로 기도 안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노우호목사님께서는 A.D.55년경 고린도에 와서 기록한 로마서를 보면, 거기에는 방언의 은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헛소리 방언은 고린도교회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언급을 안 했다고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로마서 12장을 보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은사들 대부분이 빠져 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들, 능력들 행함들, 영들 분별함들, 방언들, 방언들 통역함이 빠져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9가지 은사들 중에서 오직 예언의 은사만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이런 은사들을 거기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러한 은사는 다 중지되었고 없어진 것인가?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역사상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아 그것을 숨긴채 개인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없는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때가 있지 않았는가? 한 때 장로교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지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교회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혼자서 방언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그러니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방언이 없었다고 단정하거나 방언이 그쳐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처럼 말세에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줄 터인데, 그때에는 사람의 신분이나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성령의 은사들을 부어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말세지말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더욱 더 방언의 은사를 강하게 많이 부어주신 것은 아닐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탄진영에서 거짓방언을 들고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진짜 방언의 은사를 더 많이 부어주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둘째,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들(글로싸이스=혀들)이라는 단어는 전부다 외국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데 그게 정말 맞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방언이 단수(글로싸)로 쓰이거나 복수(글로싸이스)로 쓰인 것은 그 방언을 말하는 주체가 단수일 때에는 단수로 쓰였고, 복수일 때에는 복수로 쓰인 것인 것 뿐이다. 방언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온다고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외국어라고 결코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방언(글로싸)이라는 단어의 뜻은 그냥 '혀'라는 뜻으로서, 혀가 행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방언(글로싸)가 꼭 어떤 언어이어야 할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혀로 말하는 것이면 된다. 물론 천국에 가면 그것도 일종의 언어로서 작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방언들(글로싸이스)'는 단어는 전부 외국어들로 번역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 오히려 방언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거지를 쓰려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오후목사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에 나타난 방언들과 고넬료가정과 에베소교회에 나타난 방언들이 전부 복수로 쓰였기에, 그것이 전부 외국어 방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주어가 복수였기 때문에 방언들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 뿐이다. 어찌 그것을 가지고 방언들이 전부 외국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 성경에 나온 용례를 살펴보자.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방언은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루살렘교회의 방언은 외국어방언을 포함하고 있는 방언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15개 국가의 외국어 방언이 그날 함께 터졌기 때문이다(행2:5~11). 그래서인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때 터진 방언을 일반적으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으로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 '글로싸(GLOSSA)'의 복수형(글로싸이스)으로 썼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냥 언어나 말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즉 '디아레크토(DIALEKTW=speech)'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예루살렘교회에 성령께서 표적으로 주신 방언의 은사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어방언도 같이 터져나왔거나, 아니면 전부 외국어로 된 방언이 터져나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행11장에 나오는 고넬료가정에 모인 사람들이 행한 방언이나 19장의 에베소교회가 행한 방언 그리고 고전12,13,14장에 나오는 방언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디아레크토'라는 단어가 쓰인 적이 없다. 여기를 보면, 전부 다 '글로싸(=tongue, 혀)'로써 단수형태이든지 혹은 '글로싸이스(=tongues, 혀들)'의 복수형태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예루살렘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에서는 전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여기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은사나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등장하는 본문을 살펴보자.
<예루살렘교회의 방언>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글로싸'의 복수형, tongues)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디아레크토', speech)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디아레크토)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글로싸'의 복수형)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고넬료집안사람들의 방언>
[행10:46] 이는(그들이)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고넬료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가리킨다(행11:24)
<에베소교회의 방언>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이) 방언('글로싸'의 복수형)도 하고 (그들이) 예언도 하니
<---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12명의 에베소성도들을 가리킨다(행19:7)
<고린도교회의 방언>
[고전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글로싸'의 복수형)과 천사의 말( '글로싸'의 복수형)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글로싸'의 복수형)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4:2]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14:4]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글로싸, 단수)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원문은 '방언' 안에서, 단수구문)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고전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글로싸, 단수)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글로싸, 단수)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만약, 여기서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서 복수형태의 방언(글로싸이스)이라는 단어를 전부 '외국어들'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번역해보자. 얼마나 우스운 번역이 되는지 몇 가지 예만 보자
[고전14:22] 그러므로 외국어들('글로싸'의 복수형) 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이 문장을 보라. 외국어들을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은 무조건 성령의 표적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 세상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아도 외국어 2개 3개쯤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외국어들을 말하면, 그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또 한 문장을 보자.
[고전14:5]나는 너희가 다 외국어('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외국어('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지금, 고전13장과 14장은 고전12장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예언과 방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장들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외국어를 말하기를 원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가서 외국어들을 공부하라는 말인가? 지금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논하고 있다(고전14:6). 여기에 어디 외국어가 끼어들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부분도 다만 주어가 복수이기 때문에, 바울은 '글로싸'의 복수형태인 방언들(글로싸이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우리말 성경본문이 오역이 있어서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진정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글성경에 다소 미흡한 번역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번역하고 있다. 오히려 노우호목사님께서 새롭게 번역하는 성경본문이 더 성경의 뜻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노우호 목사님께서 오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여기고 있는 2군데의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고전14:2의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의 번역은 이렇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목사님께서는 고전14:2은 부정적인 본문으로 번역했어야 했는데 그만 번역하는 사람들이 긍정문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방언에 대한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역접접속사(그러나)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야 번역해야 할 본문에 그것을 빼버려서 오역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우선 노우호목사님께서 당신이 바르게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전14:2을 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다.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은 원어로 이렇게 직역하면서, 문제는 개역개정한글성경에 나오는 "하나니"가 오역이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니"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한다고 하지만"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럼 노우호목사님의 해설을 따라서 다시 직역해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다.
아니다. 직역은 그런대로 잘 하셨지만, 이것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오히려 혼란케 만들고 속이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역접접속사인 '한다고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거기에 넣어서 번역해서는 아니 된다. 사실 고전14:2의 본문은 세 문장이 합해진 문장이다. 꼼마가 어디에 찍혀있는지는 잘 보라. 자, 고전14:2의 원문을 그대로 직역해 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혹은 오직)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역접접속사(헬라어 '데')는 두번째 문장에 들어있지 않다. 맨 나중 문장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말은 부정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노우호목사님은 일부러 이 문장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역접접속사를 중간으로 끌어다가 사용하여, 부정적인 문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이라고 말이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린 것이 없을 뿐더라 틀리게 해석해도 아니된다. 어떻게 맨 나중문장에 나오는 역접접속사를 중간문장에 끼워넣어서 오역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고전14:14도 오역이라고 주장한다. 노우호목사님은 고전14:14은 가정법의 문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가정이므로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것이다.
위의 문장을 직역한다면 이렇다.
[고전14:14] 왜냐하면 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정법에도 실현가능한 가정법이 있고 실현불가능한 가정법이 있다. 특별히 실현불가능한 가정법의 문장은 가정법 과거이면서, 가정법을 달고 오는 접속사가가 "에이(ei)"라는 단어를 쓴다. 하지만 본문은 둘 다 아니다.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구문이다.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의 문장으로서,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도 에안(EA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이 문장이 부정문이라고 하신다. 아니다. 이 문장은 가정법 현재 긍정문이지 부정문이 아니다. 그리고 가정법 현재 문장은 어떤 동작이 계속되거나 반복되거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다시 말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영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목사님은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의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가정법 과거의 에이(EI) 부정구문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우를 범하고 있다.
노우호목사님의 주장대로,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 부정문으로서 실현불가능한 것이라고 십분 양보해보자. 그러면, 아래의 가정법 현재의 문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접속사 '에안'이 이끄는 가정법 현재 문장으로서, 고전14:14과 같은 종류의 문장).
이것을 부정문으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다. 사람의 손은 언제든지 범죄할 수 있다. 긍정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손이 범죄하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고전14:14을 가정법 현재 부정문으로써, 실현불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전14:14은 바울이 방언(글로싸)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자신의 영이 계속해서도 기도하는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그러한 방언기도는 마음(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성)의 열매를 맺을 수 는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해서 방언이 진짜 공허한 헛소리라고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사도바울은 방언이 비록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성령의 신령한 은사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방언의 은사를 혹 소리값만 가지고 따진다면 아무 의미없는 공허한 소리일지는 몰라도, 사도바울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가 신령한 은사임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9가지를 쭉 말하고 있다(고전12:8~10). 그중에 바울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시작으로 하여 예언, 영들분별함들, 방언들, 방언들의 통역 그리고 예언 등의 은사들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고전12:10). 그런데 바울은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은사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곧 방언과 예언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만큼은 고전13장과 14장, 두 장에 걸쳐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문제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웠었던 것 같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만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금방 다른 은사들과 구별할 수 있고, 화려하게 보이며, 뭔가 있어 보였기에 너도나도 할 것없이 방언하는 일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교회 구성원의 축에도 못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의 은사야말로 가장 신령하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방언을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갓 들어온 초신자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들이 모여서 방언으로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는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거나 등지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전14:24).그것도 공예배 시간에 그렇게 방언으로 떠들어댔으니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신령한(영적인) 은사임에 틀림없지만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기에,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할 경우에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도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사실 당시 공적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때에 그들은 '찬송시'를 사용했으며,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쳤고, 또 어떤 사람은 계시를 말했으며, 또 어떤 이는 방언을 했고 또한 통역도 했던 것이다(고전14:26). 그러나 예배시간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난무했고, 질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을 하지 않으려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오직 하나님에게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예배시에 굳이 방언을 하려고 한다면 통역을 세울 것이며, 그것도 무작정 누구든지 방언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차례를 정해서 2명이나 많으면 3명이 하고 곧바로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던 것이다(고전14:27~28).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며(고전12:10,28,30), 신령한(영적인) 것이며(고전14:1), 아주 특이하면서도 특별한 은사라는 점이다(고전13:1~2,14:1~5). 특히 방언의 은사는 일종의 혀로 말하는 소리(글로싸=혀)이지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없다. 하지만 방언은 하나님께 자신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일종이라는 것이다(고전14:2, 14).
그런데 노우호목사님은 방언이 100%가짜라고 하신다. 그리고 방언을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조차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딱 2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송하는 것도 있고, 마음(이성)으로 기도하고 마음(이성)으로 에 찬송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고전14:14~15).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곧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인 것이 맞다(고전14:14). 분명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한 종류인 것이다(고전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