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르고 있는 칭의 곧 종교개혁자 루터마저 간과해버렸던 진짜 칭의란 무엇인가?(롬5:9)_2019-06-25(화)
1. 오늘날에 개혁교회에서 "칭의"란 개념은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까?
오늘날 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교회들이 말하는 "칭의"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법정적인 선언을 가리킵니다.
2. 그렇다면 칭의는 언제 주어지는 것입니까?
로마서에 보게 되면 "칭의"는 믿을 때에 주어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미래에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신앙의 여정의 첫출발 선상에 들어섰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지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의 있는 칭의를 "현재적 칭의"(롬3:24,26,28, 4:2, 5:1,9, 8:30,33)라고 일컬는다면, 뒤에 나오는 칭의를 "미래적 칭의"(롬2:13, 3:20,30) 혹은 "종말적 칭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루터는 중세시대의 공로사상에 대한 반작용이 매우 강했기에, 칭의를 말할 때에 현재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의 의가 내게 전가되는 현재적인 칭의만을 강조했습니다. 즉 비록 지금 내가 의롭지 않아도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 전가됨으로, 나는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칭의에 대한 축소된 정의는 결국 미래에 있는 종말론적인 칭의 곧 행위의 심판 때에 주어질 "미래적 칭의"를 약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3. 로마서 5장 9절은 칭의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롬5:9에 나와있는 "칭의"에 관한 말씀은 칭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칭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단회적인 칭의만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진행될 과정적인 칭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 번 얻은 칭의라도 죽어서 구원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일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말성경(개역개정이나 표준새번역)은 본래의 의미를 살리지 못했으며, 오히려 한 번 칭의를 얻은 자는 구원이 확실히 보장된다는 쪽으로 성경을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잘못 해석했던 칭의관을 벗어나지 못한 잘못된 번역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 우리말성경과 헬라어원문(직역)은 어떻게 다릅니까?
롬5:9[개역개정]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5:9[표준새번역]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e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e. 그, 진노)
롬5:9[직역]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피 안에서 더욱 더 많이(많은 것에서) 의롭게 된 후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 진노로부터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혹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롬5:9에 의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더욱 더 많은 것에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더욱 더 많은 것에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받은 자라도 계속해서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서 의롭게 된 후에야 비로소 마지막 심판의 날에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표준새번역을 비롯한 대부분의 우리말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미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 너무나 확실하다고 번역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롬5:9의 말씀은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계속해서 더 많은 것에서 칭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구원받기가 어렵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말성경이나 영어성경 등은 롬5:9을 어떻게 잘못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까?
몇몇 번역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똑같이 다 2가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롬5:9의 앞문장에서 "많이(많은 것에서)"라는 단어를 빼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칭의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더욱 더 많이(많은 것에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의미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둘째는 "더욱"이라는 단어를 뒷문장에 집어넣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는 구원이 너무도 확실하다는 식으로 번역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이는 앞문장(계속되는 칭의)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뒷문장(구원)이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인데, "더욱"이라는 단어를 뒷문장에 집어넣음으로 뜻을 완전히 왜곡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롬5:9의 앞문장은 "과거분사 수동태"구문(종속절)이고, 뒷문장은 "현재 직설법 수동태" 구문(주절)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과거분사"구문은 주절보다 먼저 일어난 시제를 말하려는데 촛점이 있지 않고, 과거분사구문이 주절과 상관없이 먼저 일어난 동작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뒷문장의 시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뒷문장보다 항상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어에서 "과거분사"구문은 일종의 조건이나 자격을 말하는 문장으로 많이 쓰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더욱 더 많이 의롭게 되지 못한다면, 장차 있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뜻이 본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이와 반대로 번역해버리고 말았으니, 누가 칭의를 계속적이고도 반복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5. 그럼 성경에 나온 대로 칭의 곧 진짜 칭의를 정의하자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진짜 "칭의"는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출발 하지만 죽을 때에 가서는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를 다 깨끗히 씻음을 받음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시작으로서의 칭의는 믿음으로 단 번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뒤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야 칭의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단 번의 칭의와 반복의 칭의를 언급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감사한 일은 최근 들어와 신약학자들 중에 칭의를 2가지로 구분하여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는 칭의를 "현재 칭의"와 "미래 칭의" 혹은 "종말 칭의"로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칭의는 시작이 있고 완성이 있는 좀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자 루터는 시작의 칭의를 완성의 칭의와 구별하지 않음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한 번의 칭의가 곧 영원한 칭의이며, 그러한 칭의만 있으면 구원이 확실한 것처럼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이제는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믿어서, 칭의를 온전하게 완성해 가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19년 6월 25일(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