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데교회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왜냐하면 그대로 있으면 죽는 날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서 지워질 심각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무슨 심각한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저주에 가까운 경고를 그들에게 해야만 했던 것인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은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들은 믿는 자로서 성령을 받아 이미 거듭난 자들이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자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버림받을 위험성에 처해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데교회의 지도자의 잘못인가? 아니면 사데교회의 성도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라서 그런 것인가? 알고도 그것에 반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버림받을 위험성이 있었던 사데교회를 통해서 무엇이 우리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A.D.96년경 이미 하늘에 올라가셨던 예수께서는 사도요한을 시켜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써보내라고 명령하신다. 편지의 내용들을 보니, 발신자로서 예수님을 소개되어 있고, 이어 각 해당교회에 대한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과 경고 그리고 권면적인 선포 및 이기는 자들에 대한 상의 약속이 속속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럼, 수신자는 누구인가? 수신자는 해당교회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편지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베소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단지 에베소교회만을 위한 편지가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주신 편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아시아 일곱교회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상테 놓여있는 교회는 과연 어느 교회일까?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사적으로 말세의 교회를 표방하고 있는 일곱번째 교회 곧 라오디게아교회가 가장 타락하고 안 좋은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에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경고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만일 당시의 상태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교회가 하나 있다. 그 교회는 바로 다섯번째 교회로 소개되고 있는 사데교회라는 교회다. 대체 사데교회는 무엇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살아있다고 하는 평판이 좋은 교회였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곧 생명책에서 지워질 상황에 처해버린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사데교회가 지옥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 이유들을 살펴보고, 오늘 내가 속해있는 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점검하여 사데교회와 같은 사태에 처하지 않기를 바란다.
2.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사데교회는 A.D.96년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두아디라와 빌라델비아 사이에 사데(사르디스)라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던 교회였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달리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지도 않았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함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또한 사데교회는 버가모교회나 두아디라교회의 경우처럼 발람이나 이세벨같이 성경을 보면 뚜렷히 거짓선지자임이 판명나는 선지자들을 둔 것도 아니었다. 이 교회는 자기 나름대로 정통이라는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 그런데 주님은 이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진단하셨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살아있다고 하는 명성은 가지고 있지만, 영적으로(실제는) 죽어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사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 가운데 이 교회처럼 안 좋은 상황에 처해있는 교회는 없다. 그대로 있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교회는 딱 이 교회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교회가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과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영들과 일곱별들을 가지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이 교회를 속속들이 그때 당시 감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땅에 보내어진 예수님의 일곱 눈들이이기 때문이요, 주님께서는 그 눈들을 통해서 불꽃같이 모든 사람들의 뜻과 마음을 감찰하고 계셨기 때문이다(계4:5, 5:6, 2:18,23). 또한 예수께서는 둘째로,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별들인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시는 이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장 신경쓰고 관심 갖고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메세지 전달자)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쭉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지옥갈 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거듭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교회성도들은 이미 거듭나서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의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들이 죽을 때에(이 세상을 떠날 때에)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질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계3:5). 그리고 심판대 앞에 나아간다면 주님으로부터 부인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계3:5). 그것은 이들이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였던 것이다(계3:5, 21:27, 20:15).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고 하셨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고 말씀하셨으며,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 사데교회는 무엇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는가?
그렇다면 대체 사데교회의 지도자는 무엇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당시 사데교회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성도들까지 다 지옥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2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행위들 가운데 온전한 것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계3:2).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들은 거듭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 뒤로 그들은 거의 무장해제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만 있으면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며 안전하다고 배웠고 들었기 때문이다. 즉 믿음만 있으면 자신의 삶에 신앙인의 온전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아도 그것은 구원은 별개의 문제라고 배웠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데도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의 행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행위의 겉옷을 빨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계3:4). 이 교회에는 사실 자신이 지은 죄들을 마음아파하고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서 속한 자가 아니라 이 동네에 속한 자들 중에 소수가 자기의 겉옷을 더럽혀진 옷을 빨아 희게 입고 다니고 있음을 말씀해주셨다. 그렇다. 이 교회는 두아디라교회의 경우처럼 지도자들가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아디라교회는 성경만 보면 금방 주의 종이 거짓된 것임을 들통날 수 있는 교회였지만, 사데교회는 아니었다. 왠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신앙은 성경이 아니라 어떤 개인이 만들어낸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정통이라고 통용되고 있으니 왠만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한 번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것이며, 내가 얻은 구원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이므로 절대 불변할 일이며, 내가 어떠한 죄를 짓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내용들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더럽혀진 겉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미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흘리신 피로 다 용서가 되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흘리신 피가 자동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사도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게 된다면,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들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우리의 잘못된 행위들은 우리가 자백할 때에 예수의 피로써 씻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자신의 죄를 씻어낸 자만이 흰 옷을 입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계7:14). 죄사함은 자동이 아니라, 믿고 회개할 때에서 일어나는 활동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데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만 믿고 있으면 어떤 죄든지 이미 다 용서받은 것이며 앞으로도 용서받게 될 것이니, 성도들이 받은 구원은 안전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사데교회의 사자들이 가르쳤던 내용은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성도의 견인교리와 꼭 일치하는 것들이다.
4. 사데교회의 심각성은 그시절 그때로 끝나버렸으며 지금에는 없는 것인가?
심각한 것은 이러한 사데교회의 가르침은 대외적으로는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기에 그것이 설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사실을 사데교회의 지도자도 모르고 있었고 성도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선한 행실이 없다는 것이나 회개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두아디라교회의 경우처럼 그러한 것이 우상숭배의 죄처럼 확실하다면 자기와 자기의 동료들과 자기의 자녀들에게서 저주가 나타나으로 금방 깨달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으니 그것을 알아내기도 쉽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책망은 엄청 심각했다. 그렇게 있으면 그들이 죽을 때에 반드시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데교회의 상황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는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지금 열매없는 신앙은 가짜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믿음을 가진 지 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들이 안 보인다면 내게 지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세상에 살다가 옷이 더럽혀졌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들을 씻어내고 있는가? 전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도 오직 믿음만 있다면 자신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아도 우리가 온전히 믿었다면, 이미 다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칼빈의 교리에 미혹된 것이다. 만약 그렇게 알고 계속 그렇게 신앙생활하게 된다면 죽을 때 그는 틀림없이 지옥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비록 라오디게아교회가 타락하고 뜨뜻미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지옥의 형벌에 대해서 경고하지 않았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열심이 사라진 사람은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 왕노릇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데교회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되면, 그들은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5. 나오며
오늘날 요한계시록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 학자들은 사데교회의 상황을 두고 종교개혁시대(A.D.1517~1700)의 신앙유형이라고 언급한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종교개혁의 양대 기둥인 루터와 칼빈은 "오직 믿음"과 "만세전 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교리를 따라가다 보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변한 것이며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그만 인간의 책임을 완전히 빼버린 것이다.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는 이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라 분명하게 말씀하셨고(막1:15), 사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6:12, 행2:38, 행20:21). 그러므로 사도들도 나가서 회개할 것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믿음지상주의와 예정론의 다섯번째인 성도의 견인교리가 그만 성도들의 무사안일주의를 낳아버린 것이다. 선한 행실이 나타나지 않아도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은 안전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니다.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자연적인 열매들이다. 그리고 회개는 구원을 향해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속죄의 방편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의 회개와 고백도 죄용서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지, 예수님의 속죄가 없었다면 우리의 회개도 아무 쓸모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요 그분이 주시는 은혜다. 오직 예수님에게 감사드린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셨는데도 우리 죄들을 씻어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셨고 피흘려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그분이 하신 일을 믿어야 하고, 또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구원은 에스켈레이터가 아니다. 한 번 믿었다도 해서 그냥 골대까지 곧장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중도에 탈락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빨리 무릎을 꿇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발견하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 그리고 잘못한 것이 발견되어지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죽을 때에 흰 옷이 주어지게 된다. 그래야 죽을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의 이름을 지우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래야 죽을 때에 주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제자들 중에 아무도 몰랐어도 자신에게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아셨던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함으로 씻겨진 것을 다 아시고 계실 것이다. 불꽃같은 눈으로 다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7월 13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