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형제 가운데 그의 범죄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를 책망하거나 치리해야 옳은가? 무턱대고 허물을 덮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며, 그를 무턱대로 책망하거나 치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형제를 내가 알고 있을 경우 그 형제와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그리고 그 형제를 책망하고 치리해야 할 경우, 항상 자신의 마음 속에 염두해두고 있어야 할 핵심사항은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교회 안에서 범죄한 형제에 대해 어떻게 치리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교회 안에서 음행하는 자가 발견되어졌을 때에 어떻게 처리해야 옳은가? 그것도 그러한 사실이 외부에게까지 알려졌을 때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옳은가? 어찌하든지 좋지 않는 일이니만큼 그 일이 더 이상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면 되는가? 아니면 우리의 형제의 허물이니만큼 우선 덮어버리는 것이 좋은가? 다시 말해, 그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우선 아무런 일 없는 것처럼 간주해버리는 것이 좋은가? 그런데 오늘 고전5장에는 교회 안에서의 음행의 문제의 경우에는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준다.
2.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무슨 좋지 않은 소문이 다른 곳까지 전달되었는가?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는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써보낸 편지다.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는 아가야(오늘날 이탈리아)의 수도였고, 에베소는 소아시아(오늘날 터키)의 수도격인 도시였다. 그러므로 상당히 먼 거리로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귓가에도 고린도교회의 음행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듣고보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교회에서 발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일이 교회에서 발생한 후 다른 곳까지 소문이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지나가버리면 시간이 다 해결이 주는가? 그냥 덮어버리면 모든 문제가 다 원만히 해결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바로 고린도교회의 음행의 문제를 바로잡고 또 다른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린도전서라는 이 편지를 써보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교회에서 음행하는 형제에 대하여 2가지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였다. 첫째, 그 형제와는 누구도 사귀지 말라(교제하지 말라)고 하였다(고전5:9,11). 다시 말해, 그 형제와는 누구도 교제하지도 말고 음식도 같이 먹지 말라고 하였다. 둘째, 그 형제를 교회 가운데서 쫓아내라고 하였다(고전5:2,13).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그 형제를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으라고 권면하지 않고 엄중한 처리를 하라고 명령한 것일까?
3. 바울이 음행한 청년에게 내린 극단의 조치는 무엇이었는가?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거룩한 기관이자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분의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한 만큼 교회도 거룩해야 한다. 구약시대에 교회의 원형이었던 성막과 성전은 사실 이 세상에서 거룩한 장소였다. 그리고 인간 성전이었던 예수님의 몸도 가장 거룩한 몸이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뜻과 "구별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교회 자체를 부패하게 만드는 여러가지 죄악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다. 우상숭배는 영적인 간음이기 때문이며, 음행은 육적인 우상숭배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가운데 우상숭배를 허용하는 일과 음행에 대해 눈감아주는 일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고 있는 형제를 그냥 놔두고 있었던 것이다.
살펴보니, 그 내용은 이렇다. 고린도교회에 형제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그의 아버지의 아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고전5:1). 여기서 "그의 아버지의 아내"라는 말은 자신의 모친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의 여자로서 아버지의 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리고 아마도 아버지는 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가 첩을 둔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그의 아들이 그 첩과 음행을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일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는 음행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이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패하게 만들듯이, 이 젊은 남자의 음행이 온 교회를 더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면서 그 청년과는 절대 교제하지도 말 것이고 그를 당장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그에게 출교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 청년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 묵은 누룩을 교회 안에 용납해두어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왜 이 청년은 자신의 부친의 여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을까? 가정해 본다면, 첫째, 특히 아버지가 죽었을 것으로 가정해 본다면, 아버지가 죽었고, 성도들이 보기에도 그 여자가 아버지의 정식 부인이 아니었으니,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둘째, 그 형제가 이미 구원받은 자이니만큼 설령 육체로 범죄했을지라도 그는 구원받을 자이니, 그가 저지른 것이 정말 잘못된 범죄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언젠가는 회개시켜 구원하실 것인데, 그때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생각을 "묵은 누룩"이라고 표현한다(고전5:7). 그렇다. 잘못된 생각과 가르침이 교회 안에 슬며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성경에서 "누룩"이라는 말은 "가르침"을 뜻한다(마16:11~2).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들의 누룩도 다 그러한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었다(마16:6). 그러므로 묵은 누룩이란 고린도교회가 과거에서부터 이미 음란의 도시였던 지역에 위치한 만큼, 교회 안에서까지 음행 정도는 쉽게 생각하고 그냥 눈감아주는 일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첫째로, 십계명에서도 간음하지 말라고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9출(출20:14), 자기의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고 아예 율법규정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레18:8,29).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에서는 간음하고 있는 그 청년에 대해 그렇게 놔두어서는 아니되었던 것이다. 치리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미루고 있었고 또 미루어 놓고 있었다.
5. 왜 사도바울은 음행한 청년에게 힘든 조치명령을 내린 것일까?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그에게 교제금지와 더불어 출교조치하는 명령을 내린 것일까?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가 죄값을 단단히 치르고 멸망받으라고 그렇게 명령한 것인가? 아니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교회의 징계조치로 말미암아 그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회개 후에는 적어도 그의 영혼만큼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줌으로써, 그의 육체는 멸망당할 수 있게 해야 하지만 그의 영은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받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전5:5). 그렇다. 당장 범죄한 그를 책망하고 그에게 교제금지나 출교조치를 내리는 것은 그에게 아픔이 되겠지만 그것을 계기로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만 한다면 그는 적어도 죽을 때만큼은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 교제금지나 출교조치는 그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내리는 조치가 아니다. 적어도 그의 영혼만큼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최후의 조치인 것이다.
6. 나오며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교회에서는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고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을 때 어떤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가? 한 사람의 개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지 않는 것이 아주 많다. 또한 어떤 교회에서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 자신이 그러한 범죄를 하고 있는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상 상대방의 잘못을 책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이든지 그 결과 교회는 더럽혀질 수밖에 없고, 공동체 모두가 타락으로 치달게 될 위험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절대 그대로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 형제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갖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육체를 멸망받더라도 그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나 노회 혹은 총회에 가보면, 어떤 개인에 관하여 재판을 열어 그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고 성경에 근거했을 때에는 치리하는 제도가 있다. 그러나 그 제도에 따라 범죄한 사람을 치리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다. 어느 누군가가 고소하여 문제를 삼을 경우에만 재판이 열리게 되고 치리가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거룩한 교회가 몇몇 소수의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고 혹은 그러한 가르침에 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가 더럽혀지고 있고,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렇게 놔두었다가는 교회가 하루아침에 도매금으로 사탄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성도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러한 일이 공개적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반드시 고전 5장의 치리에 관한 원칙에 따라 치리해야 한다(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치리의 목적은 그의 영혼을 살리기 위함인 것이지, 그를 내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또한 치리는 나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도 결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랬을 때에 그 중에 몇몇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또한 그가 진정 회개한다면 그도 구원받을 수 있다. 왜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지 아는가? 그가 죄를 지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회개를 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1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