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자체가 자신의 죄를 이미 다 용서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내 모든 삶의 문제 특히 질병과 가난과 저주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받아버렸다고 믿는 것이다. 믿는 것이야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한 절차라고 하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 자체가 내게 속죄함을 주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자체가 내게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내 것이 되게 하려면 거기에 한 가지가 더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이 우리의 속죄 자체요 구원 자체라고 한다면,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아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와 해방의 메카니즘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들여다보자.
1. 들어가며
춘천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에서 멈추지 말고 부활의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받으라고 가르치고 전파한다. 하나도 틀린 것은 없다. 하지만 부활의 복음을 전파한 지 수십년이 흘러간 지금, 여러가지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한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길래 부작용이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을 조명해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간과했던 영역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가 아무리 강조하고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왜 우리는 십자가 신앙을 견고하게 붙들어야 하는 것인가?
십자가는 말 그 자체로만 본다면 "저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로마에서 시행한 가혹한 페르시아의 사형도구 중의 하나였는데, 그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혹하여 로마인들에게는 전혀 시행하고 않고 오직 반역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러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악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속죄(구속)의 상징이 되었고 기독교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치를 떨거나 저주스러워 머리를 흔들어대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체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던 것일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가장 잔인한 사형법의 하나였으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심으로 십자가는 인류형벌을 대신하는 도구로 바뀌었다. 저주스러운 도구에서 고마운 도구로 바뀐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사실은 신명기서에 나오는 율법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셔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라(신21:23)"는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갈3:13). 그렇지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신 분이기에, 그분의 속죄제사는 단 한 번 드린 것이지만 그 속죄의 효력은 영원히 유효한 것이 되었다(히9:26,8,10:10,14, 9: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행위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으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는 자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자신이 지은 죄들을 사함받을 수가 있게 된다. 특별히 사람의 죄가 어떻게 사해지는지 관해서는 구약의 속죄제사법(레4~5장)과 속죄일제사법(레16장)을 읽어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그렇다면 인류의 죄는 그때 어떻게 처리될 수 있었을까? 그때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전가받기 위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이며(마11:11), 제사장이자 선지자로서 인류의 대표자역할을 감당했던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마3:13~17), 요간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셨다. 그리고 3년반 뒤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례받은 다음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외쳤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신 후 3년반의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처리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믿는 자에게 그분의 구속의 은총이 베풀어질 수 있게 되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희생(속죄)가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그러한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치른 그분의 죽음이야말로 인류의 위한 속죄제사였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내가 지은 모든 죄들이 용서가 되는 것인가? 비근한 예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믿기만 하면, 나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되는 것인가? 과거에는 그렇게 믿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갔던 단체가 바로 구원파라는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행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지은 모든 죄들 용서받는다고 가르친다. 즉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과거의 죄들과 현재 짓고 있는 죄들과 앞으로 지을 죄들까지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틀린 말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도 남을만한 효능은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행위가 자동적으로 나에게 적용되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내 죄가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누구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고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한다(요일1:9).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하고,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속죄 자체가 곧 우리의 구원(특히 죄사함)을 바로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행위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근거가 되는 것일 뿐 그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파 내지는 구원파적인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믿는 자체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니다. 그리스의 속죄는 완전하고 계속적으로 유효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를 시인하고 자백할 때에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들을 씻어주기 때문이다(요일1:7).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으려면, 예수께서 치르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 곧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속죄제사였음을 믿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고백할 때 즉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며,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으려면 반드시 우리는 지은 죄에 대한 자신의 자백이 있어야 하고, 회개해야 한다.
4. 춘천에 있는 어느교회의 부활의 복음은 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춘천에 있는 어느교회의 목사님의 주장이 아니었다면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메시야)이시자,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춘천에 있는 어느교회의 목사님은 언젠부턴가 예수님을 하나님이자 전능자라고 믿으라고 말씀하셨다(요20:28, 계1:8). 전능자가 오셨다가 가셨는데 흔적을 남기고 않고 가셨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 속에 들어오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자 전능자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된 자들은 자신의 열등감에서 해방되기 시작하였고 우울증이나 갖가지 정신적인 문제들로부터 해방받기 시작했다. 부활의 복음이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그 교회는 오직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온 힘과 정성을 다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부활의 복음을 책자로 만들어서 전파하고 또 전파했다. 또한 기독교TV에도 부활의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을 출현시켜 자신이 겪은 변화된 삶을 간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교회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여 지금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말이 있다. 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전능자요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이니만큼, 그분의 부활이 확실하다면 누구든지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나, 부활의 복음을 듣고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부활의 복음을 듣고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점차 소외되거나 믿음이 작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을 깨우치도록 날마다 반복적으로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말이 있으며, 예배때마다 수련회 때까지, 세미나 때까지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다보니, 자신의 삶은 실제로는 변화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변화된 것이라는 착각하는 사람이 생겨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새벽기도를 강요하고 모든 예배에 붙잡아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것은 부작용을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부활의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거나 가르치는 행위들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간주되기 시작하였고, 오직 부활의 복음만을 말하고 전해야 하는 이상한 교리(?)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간증을 중요시하다보니, 모든 성도의 존재목적이 간증을 위해 변화되어야 하고, 간증을 위해서 부활의 복음도 필요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간증은 좋은 것이지만 잘못되면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자신을 높일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삼층천에 갔다온 사실만을 언급할 뿐 그 내용을 숨겼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런데 주일낮예배에도 간증이 들어가는 예배를 드리고 있어 우려섞인 말들이 나오는 것 같다.
5.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란 대체 어떤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크게 2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대속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된 제사였음을 증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표적이자, 모든 사람들이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것이다(고전15:14,17~19).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과연 인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한 속죄제사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께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날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자기의 죄로 죽은 것인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최소한 그분은 자기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며, 그분이 죽음은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대신 죽은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 그분의 부활하심은 그분의 승천과 보혜사성령의 오심과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요16;7,14:18~19).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은 그분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 계속해서 머무시려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신이 부활의 첫열매로서 다른 모든 믿는 자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예표였으며(고전15:20), 또 하나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 보혜사를 보내주시려고 부활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요16:7). 왜냐하면 또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으로서(요14:18~19, 계5:6), 이미 자신을 처음과 마지막, 알파오 오메가, 처음나 나중, 시작과 마침으로 소개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하심은 승천을 위한 전단계이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기 위한 전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6.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구속제사)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것과 동일하다. 십자가의 희생이 내 것이 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했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자신의 지은 자범죄들을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실제적인 사건 말고도 인간이 감당해야 할 책임의 측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죄에 대한 자백이요 회개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행위 자체가 모든 인류에게 자동적으로 속죄 혹은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회개와 자백을 통하여서만이 우리의 죄들이 다 용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자신이 지은 죄가 여전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죽을 때까지 지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죄 때문에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가 우리에게 사망과 저주와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자체는 우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사망과 저주와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도구일 뿐 그러한 사실 자체가 우리로부터 사망과 저주와 질병 자체를 없애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내 것이 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그분이 올라가셔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받은 후에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롬8:14, 갈5:16,18,25).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주된 일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해주시는 일을 하며(요15:26),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요14:26)이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는 일(요16:13)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이 누군지를 공부하여 확실히 믿는 일이 필요하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내 삶 속에 실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진리를 따라가려는 몸부림이 정말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일에 게을리하고,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고, 진리를 따라가려는 몸부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부활신앙으로 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회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이 내 것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면,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능이 내 것이 되게 하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부활신앙은 사실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7. 나오며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속죄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회개하는 자이며 그리것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 있는 자다. 회개하지 않으며,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대로 살고 있지 않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원수로 살아갈 수도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머리 속에 잘 암송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정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면서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내 속에 성령으로 들어와 말씀하시는대로 진정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허울뿐인 신앙 속에서 자기만족에 취해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곧 내 신앙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분이 하신 일이 내 것이 되게 하려면 나의 책임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내가 감당하고 있는 책임이 없는 자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죽기 직전에 회개하는 신앙을 빼고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회개하는 삶과 순종하는 삶인 것이다.
2018년 8월 10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