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29)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1)(아가서3:6~11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3iT_tPBgq-o
1. 들어가며
구약 성경을 읽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구약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과 시와 예언을 모아 놓은 책인가, 아니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책인가?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이미 답하셨다. 주님은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러므로 구약의 기독론은 억지로 예수님을 끼워 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열어 주신 성경 읽기의 길이다. 창세기의 유다와 요셉, 출애굽 이후의 모세와 여호수아, 사무엘서와 시편의 다윗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유다는 왕권의 계보를, 요셉은 고난 후 영광을, 모세는 율법과 중보를, 여호수아는 전쟁과 안식을,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과 메시아 예언을 보여 준다.
이제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렀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요 지혜의 왕이며 성전을 건축한 왕이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장차 오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예표는 다윗의 예표와 결이 다르다. 다윗이 원수를 치는 전쟁의 왕을 보여 준다면, 솔로몬은 평화의 시대에 성전을 짓고, 지혜문학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노래한 왕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아가서는 솔로몬의 지혜문학 가운데 가장 깊은 책이다. 겉으로 보면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가 될 교회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아가서가 어려운 까닭은 신앙 용어가 거의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숨겨짐 때문에 지혜를 가진 자만이 그 안에 담긴 영적 실재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보여 주며, 특히 왕이신 그리스도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신부를 데려가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가?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 것은 성도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신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아들)”으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은 첫 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선포한다(마 1:1).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휘오스=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여기서 “자손”으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휘오스, huios”다. 기본 뜻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히 다윗의 먼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잇는 아들이시다. 구약에서 다윗의 아들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다윗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두 사실이 겹치는 지점에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신을 다윗의 뿌리와 자손이라고 말씀하신다(계 22:16). “자손”이 다윗에게서 나온 분이라는 의미라면, “뿌리”는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의미다. 이 한 구절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나 동시에 다윗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일은 인물의 도덕성을 본받는 수준을 넘어선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에게도 죄가 있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지만 말년에 우상숭배의 길로 기울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단순한 모범으로만 읽으면 성경의 깊이를 놓치게 된다. 구약 인물은 자신이 가진 빛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자신의 실패로 “더 크신 이”가 필요함을 증언한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는 “예표”와 “성취”의 구조가 있다. 예표는 실체가 오기 전에 먼저 보여 주신 그림자다. 그림자가 실체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실체가 어떤 모양으로 올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준다. 솔로몬도 그렇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과 성전 건축의 사명과 하나님께 받은 지혜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이방 여인들과 우상숭배로 무너졌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되, 솔로몬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은 표지판이고,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 원리를 붙들면 아가서가 열린다. 아가서의 솔로몬은 역사적 솔로몬이면서 동시에 장차 오실 신랑 왕의 그림자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 속에 머물지 않고, 장차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정결하게 될 교회의 그림자가 된다. 그래서 아가서를 그리스도 밖에서 읽으면 난해한 사랑 노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읽으면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신부의 여정이 된다.
아가서도 이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한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신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왕의 가마로 데려가는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시는 종말론적 그림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그리스도 없이 읽으면 겉만 보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읽으면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3. 왜 아가서는 그리스도를 가장 친밀하게 보여 주는가?
시편은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신분을 장엄하게 증언한다. 특히 시편 2편에서 다윗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로 보여 준다. 시편 22편은 '고난의 종'을 생생하게 예언한다. 시편 23편은 '목자'이신 주님을 노래한다. 시편 110편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왕'이자 철장권세를 가지신 왕이면서(시 2:8-9), 동시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심을 보여 준다(시 110:4).
그러나 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더 친밀한 자리에서 보여 준다. 곧 그분은 '신랑'이시다. 신랑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는 왕이 아니다. 신랑은 신부와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는 존재다. 그는 신부를 찾아오고, 그녀의 허물을 덮고, 그녀를 자신의 처소로 이끌며, 마침내 혼인 잔치의 기쁨으로 데려간다.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말하다가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큰 비밀이라고 밝혔다(엡 5:31-32).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말씀을 붙들고 보면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는 단순한 인간 사랑의 노래에 갇히지 않는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향하여 열린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고, 교회는 그 사랑으로 정결하게 되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된다.
아가서에서 사랑은 단지 감정의 언어가 아니다. 그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끄지 못하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는 사랑이다(아 8:6-7).
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가장 강한 불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여기서 사랑은 신랑이 신부를 얻기 위해 감당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피 흘림을 전제하는 사랑이다. 아가서 1장 14절의 '고벨화'가 '속전'을 가리키고, 아가서 전체가 신부를 새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여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사랑은 감상적 낭만이 아니라 구속사적 사랑이다.
신부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하나”를 말할 때 쓰는 “에하드”는 단순한 숫자 하나만이 아니라 연합된 하나를 말할 때 쓰인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도 에하드의 의미를 가진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에하드의 연합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노래한다. 신부는 자기 뜻만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신랑의 사랑을 받고 신랑의 뜻에 맞추어 변화되는 자다.
그래서 아가서는 성도의 신분을 새롭게 보게 한다. 우리는 단순히 죄 사함만 받은 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며, 이기는 자가 되어 왕노릇할 자로 부름받았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는 존재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붙들고 현재의 삶을 방치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를 빚어 가장 아름다운 신부, 가장 가까운 동역자, 장차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 세우기 원하신다.
아가서의 친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또한 신랑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읽는 성도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게 된다.
4. 시편과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어떻게 다르게 보여 주는가?
다윗의 시편은 그리스도의 공적 신분을 많이 보여 준다. 시편 2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기름부음 받은 왕이다. 그분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예언된다(시 2:7-9).
시 2: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110편에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원수들을 발판 삼으실 왕으로 나타난다. 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으로 나타난다(시 110:1, 4).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22편은 그분의 고난을, 시편 23편은 목자의 돌봄을 보여 준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왕, 제사장, 목자, 고난받는 종이라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풍성하게 알려 준다.
그런데 아가서는 이 모든 신분을 사랑의 관계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아가서에서 그리스도는 왕이시되 혼인의 왕이시다. 그분은 목자이시되 사랑하는 자를 찾아 양떼의 발자취로 이끄시는 목자이시다. 그분은 포도원의 주인이시되 신부를 산출하고 가꾸시는 주인이시다. 그분은 동산지기이시되 자신의 동산에 들어가 향품과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그분은 재림주이시되 신부가 “빨리 오라”고 사모하는 신랑이다.
또한 시편과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주는 방식도 다르다. 시편은 원수를 꺾고 의인을 건지며 고난 중에 부르짖는 왕을 보여 준다. 반면 아가서는 사랑하는 자를 찾아내고, 그녀를 포도원에서 불러내며, 왕의 가마를 보내어 혼인으로 이끄는 신랑을 보여 준다. 전자는 전쟁과 통치의 언어이고, 후자는 사랑과 단장의 언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원수를 이기시는 왕이기 때문에 신부를 안전하게 데려가실 수 있고, 신부를 사랑하시는 신랑이기 때문에 원수와 싸우신다.
이 점에서 아가서의 왕은 다윗의 전쟁 왕권을 이어받되, 그 결과를 혼인과 안식으로 완성하는 왕이다. 다윗이 원수를 쳐서 평화의 길을 열었다면, 솔로몬은 평화 가운데 성전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사랑은 전쟁 없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왕이 신부를 데려가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시편이 그리스도의 왕권과 고난과 제사장직을 비교적 공적으로 보여 준다면, 아가서는 그분의 사랑과 혼인과 신부 산출의 비밀을 내밀하게 보여 준다. 시편이 왕의 보좌를 보여 준다면, 아가서는 왕의 가마와 혼인 행렬을 보여 준다. 시편이 원수를 발판 삼는 왕을 보여 준다면, 아가서는 신부를 호위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시는 왕을 보여 준다.
이 차이를 알아야 아가서를 바르게 읽을 수 있다. 아가서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피 흘림과 속죄와 정결과 신부 준비를 포함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래서 아가서는 지혜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5. 아가서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여덟 신분은 무엇인가?
아가서는 예수님의 신분을 여덟 방면으로 보여 준다.
첫째, 그분은 '왕'이시다. 아가서에는 왕의 방, 왕의 식탁, 왕의 가마, 왕의 깔개, 왕관, 시온의 딸들, 예루살렘의 딸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솔로몬이 단순한 왕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뜻이다.
둘째,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아가서의 신랑은 술람미 여인의 “어머니의 아들들”과 같은 피조물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신부와 연합하기 위해 낮아져 오지만, 본질상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셋째, 그분은 '속전'이시다. 아가서 1장 14절의 고벨화는 히브리어 “고페르”와 관련되고, 이는 “카파르” 곧 속죄하다, 덮다, 값을 지불하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고벨화는 피 흘려 신부를 사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아가서 1장 7절은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단서를 준다. 신부는 사랑하는 자에게 양 떼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묻는다(아 1:7).
아 1: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이것은 신부가 신랑을 찾는 장면이지만 동시에 목자를 찾는 장면이다. 넷째, 그리스도는 신부의 신랑이실 뿐 아니라 '양들의 목자'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양들을 어디서 먹이고 어디서 쉬게 하시는지 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참 신부는 자기 방식으로 방황하지 않고, 목자이신 신랑이 인도하는 길을 찾는다.
다섯째, '포도원의 주인'이라는 신분도 중요하다. 아가서 8장 11절은 솔로몬에게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었다고 말한다(아 8:11).
아 8:11 솔로몬에게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포도원은 산출의 장소다. 신부는 포도원지기로 일했으나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맡기신 생명과 사명을 지켜야 했으나, 타락한 영들의 억압과 여우 같은 방해로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준다. 그러나 포도원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면, 잃어버린 포도원은 다시 회복되고, 신부는 주님의 산출에 동참하는 존재가 된다.
여섯째, 그분은 '동산지기'이시다. 신랑은 자신의 동산에 들어가 몰약과 향품을 거두고 꿀송이와 포도주와 젖을 먹는다고 말한다(아 5:1).
아 5: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여기서 동산은 신부의 내면이며 주님이 거하실 처소다. 성전이 밖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라면, 신부의 동산은 안으로 열리는 하나님의 처소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신부는 단순히 예배당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님이 거하실 동산과 성전으로 가꾸어져야 하는 사람이다.
일곱째, 그분은 '재림주'이시다. 아가서 마지막은 사랑하는 자에게 빨리 오라고 말하는 기다림으로 끝난다. 이는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갈망과 연결된다(아 8:14).
아 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여덟째, 그분은 '신랑'이시다. 아가서의 모든 신분은 결국 신랑이라는 신분 안에서 완성된다. 왕도 신랑으로 오고, 속전도 신랑의 사랑으로 지불되며, 목자와 포도원의 주인과 동산지기도 신부를 얻기 위한 사역 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그리스도는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의 짝으로 삼기 위해 찾아오신 신랑 하나님이시다.
6. 솔로몬 왕은 왜 새 예루살렘의 왕을 예표하는가?
아가서 3장은 솔로몬 왕의 가마를 보여 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궁중 행렬이 아니다. 왕이 신부를 데리러 보내는 혼인 행렬이다. 솔로몬의 가마는 레바논 나무로 만들어졌고, 기둥은 은이며, 바닥은 금이고, 자리는 자주색 깔개다.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여 있다(아 3:9-10).
아 3:9-10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주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었구나
아가서에는 '왕'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온다. 신부는 왕이 자신을 그의 깊은 처소로 이끌어 들였다고 말한다(아 1:4). 여기서 “방”은 단순한 침실의 의미로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 영적으로는 왕의 가장 은밀한 처소, 곧 지성소적 친밀함을 떠올리게 한다.
아 1: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또 아가서 1장 12절은 왕이 앉아 있을 때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은 “침상”이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은 식탁이나 잔치 자리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단순한 육체적 만남이 아니라, 왕의 식탁에서 신부가 향유로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아 1:12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신약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여 향유를 부은 사건을 생각하면, 아가서의 향유와 몰약과 나도 기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이 연결된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만 받는 자가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위해 죽으실 분임을 알아보고 그 죽음에 향유를 붓는 자다.
레바논 나무는 향기와 견고함을 나타낸다. 은은 속전과 구속을 떠올리게 한다. 금은 하나님의 본성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상징한다. 자주색은 왕권의 색이다. 그러므로 이 가마는 신부를 태우기 위한 단순한 탈것이 아니라, 왕의 사랑과 구속과 영광을 담은 도구다.
이어서 시온의 딸들은 솔로몬 왕을 보라고 부름받는다. 그가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아 3:11).
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있구나
여기서 솔로몬은 시온의 왕이며 예루살렘의 왕이다. 이는 장차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말하고,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보여 준다(계 19:7, 21:9).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그러므로 아가서의 솔로몬 왕은 역사 속의 이스라엘 왕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신부를 데려가시는 새 예루살렘의 왕을 예표한다. 성도는 그 왕을 단지 멀리서 경배하는 자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그 왕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왕의 가마에 태워진다는 것은 왕이 인정하는 신분으로 부름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신앙생활은 천국에서 어떤 신분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인가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7. 왕의 가마와 60용사는 신부의 신분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솔로몬의 가마 주변에는 이스라엘 용사 중 60명이 둘러서 있다. 그들은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며, 밤의 두려움 때문에 허리에 칼을 찬다(아 3:7-8).
아 3:7-8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이 말씀은 신부의 신분을 보여 준다. 왕이 아무에게나 이런 호위를 붙이지 않는다. 가마는 왕이 보내는 것이고, 60용사는 왕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붙인 호위다. 그러므로 신부는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동시에 어둠의 세력 가운데서 왕의 보호를 받아 이동하는 존재다.
여기서 숫자 60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아가서 6장에는 왕비 60명과 후궁 80명이 나온다. 그러나 신랑은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숫자가 많아도 신랑이 찾는 완전한 자는 하나다. 그러므로 60용사는 신부를 둘러싼 왕적 호위의 충만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신부가 왕의 특별한 선택 안에 있음을 증언한다.
또한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하다는 표현은 성도의 여정이 영적 전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신부는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전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랑에게 속했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는 신부를 방해한다. 그래서 왕은 자신의 용사들을 보내어 신부를 지키신다. 오늘의 성도도 말씀의 검과 예수 이름의 권세를 붙들고 악한 영들을 대적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 보호자는 성도 자신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다.
“밤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연적 어둠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밤과 어둠은 종종 악한 세력의 때와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도 유다가 밖으로 나가니 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요 13:30). 또한 주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2:53).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눅 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그러므로 신부의 길에는 영적 방해가 있다.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가장 높은 신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어둠의 권세와 싸워야 하고, 회개를 통해 자기 안의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며, 주님의 피와 이름의 권세로 정결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왕이 보내는 60용사는 주께서 자신의 신부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준다.
동탄명성교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천국의 실제도 이와 연결된다. 어떤 성도는 천사가 데려가지만, 어떤 성도는 왕의 마차와 같은 특별한 호위를 받는다. 이는 이 땅에서 어떤 믿음과 회개와 순종과 헌신으로 준비되었는가와 연결된다. 천국은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서는 공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며, 이기는 자에게 왕노릇의 권세를 주신다.
그래서 왕의 가마와 60용사는 성도에게 큰 소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준다. 소망은 주님께서 신부를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이고, 두려움은 신부의 신분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부는 왕의 사랑만 기대하는 자가 아니라, 왕에게 합당하게 단장되는 자다.
8. 술람미의 어머니와 오빠들은 창조주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아가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 표현들이 나온다. 술람미 여인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자신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한다(아 1:6).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런데 신랑은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라고 부른다(아 6:9).
아 6: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가 낳은 자 중에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또한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게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이라고 말한다(아 8:1).
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 구조를 더 깊이 보면 “아들”이라는 말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피조된 아들들이다. 반면 예수님은 피조된 아들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낳았다고 표현되지만, 그것은 피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아들로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혈과 육을 입고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신랑을 술람미의 오빠들과 같은 선상에 두면 안 된다. 오빠들은 피조 세계 안에서 여인을 억압하는 자들로 읽힌다. 반면 신랑은 왕의 권세와 창조주의 근원을 가진 분이다. 그는 같은 피조물의 형제처럼 오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조물의 모양을 입으신 창조주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다.
술람미 여인이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이라고 말한 것은, 신랑과 자신이 같은 피조물의 근원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만약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라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입맞춤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랑은 그 수준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다른 근원에서 오신 분이다. 그런데도 그분은 피조물인 신부를 외면하지 않고 가까이 오셨다.
이 세 표현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내 어머니의 아들들”은 그녀와 관계가 있지만, 신랑과 같은 근원은 아니다. 아가서의 흐름에서 이들은 의붓오빠들, 곧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지기로 삼고 억압한다. 이것은 타락한 영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수고하게 만들며,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현실을 보여 준다.
반면 신랑은 그녀와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는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한다(요 1:1-3).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동탄명성교회가 전하는 한 분 하나님 신앙이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나타나신 분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인간은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리스도는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고 신부로 삼으시려고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입고 오셨다.
히브리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한 근원에서 난지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히 2:11).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보여 준다. 본질상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더 나아가 신부로 맞아 주신다. 이것이 아가서가 보여 주는 놀라운 비밀이다. 신랑과 신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분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런데 그분은 피조물인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의붓오빠들 같은 악한 영들의 억압에서 건져 내어 왕의 가마에 태우고 새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신다.
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아가서가 들려주는 기독론의 깊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사랑하여 자신의 짝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가치를 세상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우리를 가시나무 가운데 버려진 존재로만 보지 않으시고, 자신의 피와 사랑으로 단장될 신부로 보신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아가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보여 주며, 특히 왕이신 그리스도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신부를 데려가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 지혜문학의 최고봉으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감추어 보여 주는 책이다.
성도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 없이 읽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 친히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솔로몬도 단순한 이스라엘 왕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그는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또한 술람미 여인도 단순한 시골 처녀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정결하게 되어 신부로 준비될 교회를 예표한다.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아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도 귀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신분으로 설 것인가도 중요하다. 왕이 보낸 가마에 태워질 신부로 준비되려면,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고, 주님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하며,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뜻에 자신을 맞추어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로 맞아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존재를 천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귀히 여기신 존재가 바로 성도다. 그 가치를 알고 살아야 한다.
또한 성도는 왕의 혼인날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가서의 가마와 60용사는 신부를 데리러 오시는 왕의 영광을 보여 준다.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그날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악한 영과 싸우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정결하게 단장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마에 태워질 신부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22일(월)
===========================================
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29) 다윗의 아들 솔로몬(07)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1)(아가서3:6~11 )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구약 성경을 창세기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한 분을 향하여 수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 사실을 선언하셨다. 성경이 곧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라고 하셨고(요 5:39), 부활 이후에는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자신에 관한 것임을 열어 주셨다(눅 24:44).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즉 시가서의 모든 기록 속에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는 선언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지금 나누고 있는 구약의 기독론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 성경 전체에서 찾아 배우는 여정이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제사,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 양, 광야의 성막, 다윗의 왕국과 시편, 솔로몬의 성전과 아가서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모든 사건과 인물과 제도는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이다. 지금 우리는 그 긴 여정 가운데 아가서에 도달하였다. 기독론 129번째 시간이며,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시간이다.
아가서는 구약 성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친밀하게 묘사하는 책이다.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내밀하고 더 가깝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들려준다. 그분의 신분, 그분의 사역, 그분이 신부를 향하여 품으신 마음이 아가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가서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고 구원받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멈춰 버린다. 그러나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면, 우리가 어떤 존재로 빚어져 가야 하는지, 그분과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이 무엇이며, 그 신분들이 우리 구원과 소망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가서 3장 6절부터 11절을 중심으로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살피고, 나아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아가서 1장과 6장과 8장의 본문을 통해 들여다볼 것이다.
2. 왜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는가?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작업은 기독론 연구의 핵심이다. 그 가운데 아가서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율법서나 예언서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속의 역사를 다룬다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분과 그분이 신부를 향하여 품으신 마음, 그리고 그분과 신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문학의 형식으로 담아낸다. 한 마디로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신부의 사랑 이야기이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사실까지는 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다. 구원받은 내가 어떤 존재로 변해 가야 하는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로 자라 가야 하는지, 천국에서 어떤 신분으로 서게 될지를 모른다. 그러니 신앙 생활이 의무처럼 느껴지고, 헌금이 아깝게 느껴지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귀찮게 느껴진다. 내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가서는 바로 그 이유를 알려 준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단지 죄 사함을 받은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존재이다. 에베소서 5장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예표한다고 선언한다(엡 5:32).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장 풍부하게 드러내는 구약의 책이 바로 아가서이다.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가서가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막연히 믿는 데서 멈추게 된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귀찮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고, 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된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장차 어떤 신분으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신앙은 막연한 의무에서 구체적인 소망으로 바뀐다.
아가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그분의 신분이고, 둘째는 그분의 사역이다. 신분을 알아야 사역이 의미 있게 들린다. 왕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왕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만왕의 왕이신 분이 우리에게 가마를 보내신다는 것, 신랑이신 분이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신다는 것, 이 모든 사실들이 그분의 신분을 알 때 비로소 그 무게가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신분이신지를 알아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가서는 바로 그 신분을 여덟 가지로 압축하여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 준다. 신분은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이고, 사역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하시고 계시고 하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그리스도의 사역(Work)이라고 부른다. 아가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으며, 특히 신분에 관하여 다른 어떤 성경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가서는 우리 존재의 미래를 알려 준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장차 어떤 존재로 빚어져야 하는지를 술람미 여인의 성장 과정을 통해 보여 준다. 처음에는 시골의 포도원지기 처녀로 등장하지만, 결국에는 왕의 신부로 세워지는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여정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어디에 쓸 것인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인생을 어디를 향해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아가서를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사역, 곧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다. 왕이 시골 처녀를 찾아와서 가마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종살이 가운데 있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이야기이다. 이것을 알면 십자가가 다르게 보인다. 부활이 다르게 들린다. 성령의 역사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스도 말씀이 날마다 축적되어야 신앙이 자란다. 지난 주에 들은 말씀, 그 전 주에 들은 말씀이 차곡차곡 쌓여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매주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말씀이 쌓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알면 말씀 하나하나가 내 안에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된다. 아가서는 그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가장 따뜻하게 보여 주는 책이다.
3.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은 무엇인가?
시편에서 우리는 다윗이 증언하고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여섯 가지 신분을 이미 배웠다. 시편 2편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이셨다. 시편 2편 8절과 9절에서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시편 110편 1절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원수를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왕으로, 시편 110편 4절에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시편 23편에서는 '목'자로, 시편 22편에서는 구체적인 고난을 미리 예고하신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었다. 이렇게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왕, 제사장, 목자, 고난받는 종, 여섯 가지를 배웠다.
시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도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제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여덟 가지 신분으로 나타난다. 첫째,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시편의 왕이 철장 권세로 만국을 다스리는 전사의 이미지라면, 아가서의 왕은 새 예루살렘 성의 영원한 주인이요 왕으로 묘사된다. 왕관, 왕복, 왕의 깔개, 왕의 가마가 구체적으로 등장하며 그분의 왕 되심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둘째,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어머니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근원이 다른 창조주임을 드러내는 복선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가서 8장 1절과 6장 9절 등의 본문을 통해 더 상세히 다루게 된다.
셋째, 속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속전은 몸값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엘(גָּאַל)의 개념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값을 치르고 사신 구속주이심을 가리킨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종살이하던 자였다. 그녀를 그 종살이에서 값을 치르고 자유케 하신 분이 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속전을 치르신 사실을 예표한다(막 10:45).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넷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가서에서 신랑은 백합화 사이에서 양 떼를 먹이는 목자로 묘사된다(아 2:16). 시편 23편의 목자가 아가서에서 신랑 목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양을 돌보는 그분의 세심한 사랑이 아가서 전체에 흐른다.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다섯째, 포도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에게 붙들려 일하던 바알하몬의 포도원은 결국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아가서 8장 11절에서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고 명시된다. 타락한 천사들이 우리를 억압하며 일시적으로 지배했지만, 그 포도원의 진정한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여섯째, 동산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가서의 잠긴 동산(아 4:12)은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며, 그 동산을 가꾸고 돌보시는 분으로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 동산지기로 착각한 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다. 그분은 진정한 동산지기, 에덴을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일곱째, 재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가서 8장의 끝에서 신부는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외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마라나타 신앙과 동일한 맥락이다. 아가서는 이미 구약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신부의 고백으로 끝맺는다.
여덟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가서 전체의 결론이자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이다. 가장 친밀하고 가장 내밀한 이 관계가 아가서가 선포하는 복음의 절정이다.
이 여덟 가지 신분을 이 시간부터 차례로 공부해 나가게 된다. 시편에서 배운 여섯 가지와 아가서에서 배울 여덟 가지를 합치면, 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얼마나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증언하는지가 드러난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단편적 힌트가 아니라, 그분의 전체 신분과 사역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구약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눈으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가운데 왕으로서의 신분과, 창조주로서의 신분의 서론을 다루게 된다.
아가서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1장에서 2장까지는 왕이 처음 술람미 여인을 만나고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3장에서 4장까지는 왕이 가마를 보내어 신부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 결혼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4장 8절부터 신부라는 호칭이 등장하면서 그녀가 왕의 신부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5장부터 8장까지는 신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처럼 아가서 전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처음 만남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보여 준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본문은 그 여정의 한 중간에 있는 3장 6절부터 11절이다. 왕이 가마를 보내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이 장면은, 마치 천국에서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그날을 미리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이 장면을 이해하는 자는 이 땅의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4.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아가서에서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아가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신분은 왕이다. 그러나 이 왕은 단순히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다. 아가서가 묘사하는 왕은 새 예루살렘 곧 시온 성의 왕이시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원한 성, 진리의 성읍의 영원한 통치자이시다.
아가서 1장 4절에서 신부는 왕이 자신을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였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왕의 방은 단순한 침실이 아니라 지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가장 깊숙한 은밀한 곳,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지성소로 신부를 이끌어 들이시는 왕의 모습이다. 왕이 신부를 왕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은 그 관계의 친밀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준다.
아 1: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우리가 너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네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하리니 그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가서 1장 12절에서는 왕이 식탁에 앉았을 때 신부의 나드 기름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식탁을 함께 나누는 장면은 왕이 신부와 교제하는 친밀함을 나타낸다. 이 나드 기름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헌신과 연결된다. 신약의 마리아가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하여 향유를 부었듯이,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도 나드 기름과 몰약 향 주머니를 품에 차고서 그 죽음을 미리 예비한다. 이것은 왕이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실 메시아이심을 알고 드리는 예배이다.
왕의 신분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본문은 아가서 3장 6절부터 11절이다. 여기에는 왕의 가마와 왕관과 왕의 화려한 행렬이 등장한다. 9절은 솔로몬 왕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가마를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그 가마는 기둥을 은으로, 바닥을 금으로, 깔개는 자주색으로 꾸몄다.
아 3:9-10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주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었구나
자주색 깔개는 왕의 상징이다. 기둥의 은은 속죄, 바닥의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한다. 왕의 가마 안에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다는 것은, 이 가마가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영적 실재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금과 은으로 지어진 외적 화려함이 아니라,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직조되는 나라이다.
11절은 클라이맥스이다. 시온의 딸들이 나와서 솔로몬 왕을 바라보라고 외친다. 그 왕의 머리에는 혼인날 어머니가 씌워 준 왕관이 있다.
아 3: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즐거울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있구나
여기서 등장하는 시온의 딸들은 새 예루살렘 성, 시온 성에 거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다윗이 처음으로 하늘의 성을 시온이라 이름 짓고 예루살렘이라 불렀으며, 그 왕직을 솔로몬이 이어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새 예루살렘 성의 왕으로서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신다. 왕관을 쓰고 신부를 맞이하는 혼인날의 왕, 이것이 아가서가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신분이다.
왕의 신분은 아가서 1장 3절에서도 드러난다. 신부는 왕의 기름이 향기롭다고 고백한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자는 왕, 제사장, 선지자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히브리어로 마쉬아흐(מָשִׁיחַ), 곧 메시아라고 한다. 아가서의 신랑은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이시다.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신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시다.
아 1:3 내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다윗이 천국의 성을 시온이라 이름 짓고 예루살렘이라 불렀으며, 솔로몬이 그 왕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나중에 우상 숭배와 많은 처첩으로 인해 왕직을 잃어버리게 된다(왕상 11:1-4). 솔로몬은 예표였을 뿐이다. 그 예표가 가리키는 진정한 예루살렘의 영원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왕권은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눅 1:33).
눅 1:33 야곱의 집을 영원히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하니라
또한 아가서 7장 5절에서 신랑은 신부의 드리운 머리카락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한다. 왕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메이었다는 표현은, 그분이 신부를 향하여 품으신 사랑의 깊이를 보여 준다. 만왕의 왕이 그 신부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아 7: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줏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요한계시록은 이 왕이 마지막 날에 백마를 타고 재림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계 19:16). 아가서가 선포하는 새 예루살렘의 왕은 곧 요한계시록이 선포하는 재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5. 왕의 가마와 60명의 용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가서 3장 7절과 8절은 왕의 가마를 호위하는 60명의 이스라엘 용사를 소개한다. 이 본문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천상의 실재를 계시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 본문은 아가서 3장 6절부터 시작하는 왕의 행렬 이야기와 연결된다. 6절은 몰약과 유향 연기 기둥 같은 것이 광야에서 올라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이 신부를 데리러 친히 광야를 지나 오시는 것이다. 그 오심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향기로운 연기 기둥처럼 피어오른다고 표현했다.
아 3:6 연기 기둥 같이 황야에서 올라오는 것이 누구냐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 하고 오는구나
아 3:7-8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60명이 그 주위에 있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왕의 가마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보내시는 천사들의 가마이다. 가마는 그 신부를 모시기 위해 왕이 특별히 보내는 것이다.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던 시골 처녀를 예루살렘 성으로 데려오기 위해 왕이 직접 자신의 가마를 보낸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명을 마칠 때 친히 천사의 가마를 보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 가마에는 60명의 용사가 호위한다. 이 60명은 선별된 천사들이다. 이들이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하다고 한 것은, 이들이 단순한 의전 천사가 아니라 전투 천사임을 가리킨다. 왜 호위 천사들이 필요한가? 8절은 밤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답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과 그 수하 귀신들이 성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방해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서 가룟 유다가 나갈 때 요한은 그때가 밤이었다고 기록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그 무렵은 어둠의 세력이 역사하는 밤이었다. 영적으로 성도가 이 땅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도 어둠의 방해가 있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그러나 주님은 그 어둠에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선별된 60명의 천사를 보내신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영적 실재이다.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순간에 빛의 천사들이 가마와 함께 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천사의 수가 신분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아가서에는 네 종류의 신분이 등장한다. 왕비, 후궁, 빈, 시녀이다. 이 신분의 차이가 천국에서의 위치와 영광의 차이를 반영한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영접이 달라진다. 이것이 아가서가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핵심이다. 어떤 신분으로 왕 앞에 서게 될지는 이 땅에서의 선택들이 결정한다. 그 선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쌓는 일이다. 아가서를 공부하고, 기독론을 배우며,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그분 앞에 준비된 신부로 서는 길이다.
아 6:8-9 왕비가 60명이요 후궁이 80명이요 시녀들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가 낳은 자 중에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주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어떤 가마를 보내실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왕비처럼 모셔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간신히 들어가는 자도 있다. 신부를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하기 위해 왕이 보내는 가마와 60명의 용사는, 그리스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로 살아가야 할 도전을 우리에게 던진다.
아가서의 가마를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영접과 직결됨을 알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롬 14:10). 어떤 이는 금, 은, 보석으로 세운 삶이 되어 상을 받고, 어떤 이는 나무, 풀, 짚으로 세운 삶이 되어 손해를 볼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3장은 말한다(고전 3:12-15). 이것이 아가서에서 왕비, 후궁, 시녀의 신분 차이로 표현되는 영적 실재이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천국에서의 영접을 결정한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6. 수많은 왕비와 후궁 중에 술람미 여인 한 사람을 택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아가서 6장 8절과 9절은 충격적인 대비를 제시한다. 왕에게는 왕비 60명, 후궁 80명, 무수한 시녀들이 있다. 그러나 왕은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 어머니가 낳은 자 중에 귀중히 여기는 자이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배타적인가를 보여 준다. 교회는 수많은 성도로 이루어진 집합체이지만, 그리스도의 눈에는 우리 각자가 일대일의 관계로 존재한다. 그분은 우리를 군중의 한 명으로 보시지 않는다. 수천 명 수만 명 가운데 있어도, 그분은 나 한 사람을 유일한 사랑으로 보신다.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건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비둘기라고 부르신다. 비둘기는 평생 단 한 짝과만 함께한다. 짝을 잃으면 다시 다른 짝을 찾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신부의 사랑을 상징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직 한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유일한 존재이다. 이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아가서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아가서 2장 16절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 이 상호 소속의 선언이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요약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다. 이 고백이 신앙의 핵심이다. 아가서는 이 고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
또한 왕비와 후궁들까지도 술람미 여인을 칭찬했다고 본문은 말한다. 이것은 왕이 오직 그녀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왕의 마음을 얻은 자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복된 자로 인정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다. 천사들도, 다른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된 영혼 앞에서 복된 자라 할 것이다. 여자들이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 했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모의 칭찬이 아니다. 그녀가 왕의 마음을 얻은 자이기에, 다른 모든 이들도 그녀의 복된 신분을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 자는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 앞에서 복된 자라는 인정을 받는다. 이것이 신부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영광이다. 왕의 눈에 든 자, 왕의 마음을 얻은 자가 가장 복된 자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목표이다.
동시에 이 본문은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다. 왕비, 후궁, 시녀의 신분이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이 천국에서도 신분의 차이가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 말한다(고전 15:41). 부활의 영광도, 천국에서의 신분도 동일하지 않다.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섬겼는지가 천국에서의 영원한 신분을 결정한다.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어떤 이는 왕비로, 어떤 이는 후궁으로, 어떤 이는 시녀로 들어간다. 이 차이는 이 땅에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에 우리가 얼마나 응답했느냐가 천국에서의 신분을 결정한다. 수많은 왕비와 후궁 중에 한 사람을 내 완전한 자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선언은, 그분이 우리 각자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를 알려 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분의 마음에 합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할 이유를 가르쳐 준다.
술람미라는 이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 명사이다. 솔로몬(שְׁלֹמֹה)과 술람미(שׁוּלַמִּית)는 어근이 같으며, 둘 다 평화, 샬롬(שָׁלוֹם)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신랑과 신부가 같은 이름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에하드(אֶחָד), 곧 하나를 뜻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함께 나눌 때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신부가 신랑의 이름을 받는 것의 의미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7. 술람미 여인 및 그녀의 오빠들의 어머니와 솔로몬의 어머니는 어떻게 다른가?
아가서를 깊이 연구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어머니'이다. '솔로몬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술람미 여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얼핏 보면 단순한 문학적 배경 인물 같지만, 이 어머니들의 차이가 아가서의 가장 심오한 신학적 비밀을 열어 준다.
아가서 1장 6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이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오빠를 왜 내 오빠라 하지 않고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했을까? 이것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났지만 아버지가 다른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 1:6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런데 아가서 6장 9절에서 신랑은 술람미 여인을 그녀의 어머니의 외동딸이라고 부른다. 오빠들이 있는데 어떻게 외동딸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술람미 여인과 그 오빠들의 아버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빠들에게는 그들의 아버지가 따로 있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가 다른 아버지를 통해 낳은 외동딸이다. 그래서 오빠들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고, 술람미 여인은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 된다.
천사들도 피조물이다. 구약 성경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은(욥 1:6),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들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히브리서 1장은 천사들은 섬기는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라고 선언한다(히 1:3). 천사들은 창조된 존재이고, 그리스도는 창조하신 분이시다.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아가서 1장 6절에서 오빠들은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들이 인류를 억압하고 착취한 영적 역사를 보여 준다. 창세기 3장에서 뱀, 곧 사탄이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것처럼, 타락한 천사들은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통 속에 종살이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알하몬 포도원에서 일하는 술람미 여인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나아가 아가서 8장 1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 입을 맞추어도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아 8: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 말은 신랑이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빠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은 같은 피조물이지만, 신랑은 그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은 존재, 즉 근원이 다른 존재임을 드러낸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이고, 술람미 여인의 어머니는 따로 있다. 그리고 오빠들의 아버지는 인간이지만, 신랑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이다. 밧세바는 이 땅에서 난 여인이다. 그러나 솔로몬을 상징으로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한다(요 1:1). 그분은 창조 이전, 시간 이전에 이미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이것이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근본적 차이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선언한다(골 1:15). 여기서 먼저 나신 이는 첫 번째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시는 분, 창조의 주인이심을 뜻한다. 그분은 창조된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술람미 여인과 그 오빠들은 같은 피조물로서 어머니의 젖을 먹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오빠들은 타락한 존재, 즉 타락한 천사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술람미 여인을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며 괴롭히는 자들이다. 술람미 여인은 그 타락한 천사들의 종살이에서 고통받는 인류를 상징한다. 그리고 신랑 솔로몬은 창조주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히브리서 2장은 이 구별을 이렇게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녀들과 한 근원에서 나셨지만(히 2:11),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심과 다르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독생자이시고, 우리는 그 창조주가 만드신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 근원이 다른 분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히 2:11). 창조주가 피조물을 형제라 부르시고, 신랑이 신부를 취하시는 이 놀라운 사랑이 아가서의 신학이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받는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8.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인간은 구원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가?
앞 챕터에서 살펴본 어머니의 차이는 단순한 족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차이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움을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요 1:3).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가서의 오빠들이 타락한 천사를 상징한다는 사실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천사도 피조물이다. 인간도 피조물이다. 천사와 인간은 같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근원을 가진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 곧 귀신들은 그 피조물의 지위를 벗어나 인간을 노예로 삼고 억압한다.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에게 붙들려 포도원지기로 일해야 했던 것처럼, 인류는 사탄과 귀신들의 억압 아래 종살이를 해 왔다.
이 억압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피조물의 세계로 내려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언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으시고, 피조물의 세계로 직접 들어오신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타락한 천사들의 억압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갈 4:4).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몸을 입으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기적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포도원에서 고통받는 신부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왕이 친히 내려오신 것이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속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고베르, 곧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바로 그 속전이다. 그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귀신들의 종이 아니다. 창조주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놀라움은 단지 종살이에서의 해방에 있지 않다. 구원은 피조물인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요 1:12).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의 변화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할 것이라고 선언한다(계 3:21). 피조물이 창조주와 함께 보좌에 앉는다는 것,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약속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거리가 아무리 무한하더라도, 그 거리를 넘어서 우리를 신부로, 자녀로, 공동 통치자로 만드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것이 바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우리 사이의 구원의 차이이자 기적이다. 같은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들은 우리를 억압했지만,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라 부르시며, 공동 통치자로 삼으신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알 때 우리는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피조물의 낮은 신분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로마서 8장 17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라고 선언한다(롬 8:17). 창조주의 독생자와 동급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 이것은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신분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구원 안에서 어떻게 역전되는지를 아는 자는 이 신분을 헛되이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세전부터 작정하신 이 놀라운 경륜 앞에서, 우리는 경외와 감사와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9. 나오며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을 살펴보았다. 왕, 창조주, 속전, 목자, 포도원의 주인, 동산지기, 재림주, 신랑이라는 여덟 가지 신분은 각각 그리스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 준다. 이 시간에는 특별히 새 예루살렘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왕관을 쓰고 왕의 가마를 보내시며 시온의 딸들이 보는 가운데 신부를 맞이하시는 왕, 그리고 근원이 다른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로 취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왕의 가마에 딸린 60명의 용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보내시는 천사의 호위임을 알았다. 이 가마의 화려함과 호위의 규모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이는 왕비로, 어떤 이는 후궁으로, 어떤 이는 시녀로 들어간다. 이 차이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과 솔로몬의 어머니가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을 배웠다. 타락한 천사들도, 우리 인간도 모두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독생자이시다. 그 무한한 거리를 넘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 신부라 부르시는 것이 구원의 놀라움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신부가 되며, 보좌에 함께 앉는 공동 통치자가 되는 것, 이것이 아가서가 선포하는 복음의 깊이이다.
이 진리를 아는 자는 신앙이 막연한 의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구원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그분의 마음을 알아 가며, 그분과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걷는다. 그분을 알아 가는 만큼 우리 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술람미 여인이 처음에는 자신을 검다고 했지만, 왕의 사랑 안에서 점점 아름다워져 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 때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며 아름다워진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목적지는 그분의 신부, 그분과 하나 된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성장이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처럼, 처음에는 포도원에서 햇빛에 그을려 일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왕의 사랑을 받고 왕의 가마를 타고, 왕의 신부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 여정을 알고 걷는 자와 모르고 걷는 자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의 차이가 있다. 아는 자는 은사와 달란트를 어디에 쏟을지 안다. 물질을 어떻게 쓸지 안다. 시간을 어떻게 투자할지 안다. 모르는 자는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더 위대한 부르심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친히 가마를 보내어 모셔 갈 귀한 신부이다. 그 신부의 가치는 창조주께서 스스로 몸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실 만큼 귀하다. 동일한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들이 억압하던 우리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속전을 치르고 사셨다. 이 사실을 깊이 새기면 우리는 스스로를 함부로 여길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그만큼 귀한 존재이다. 그 신부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날마다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쌓일수록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분의 오심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 가장 위대한 준비이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투자이다. 아가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며, 그분의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아가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부는 이렇게 외친다. 내 사랑하는 자야, 빨리 오라(아 8:14). 이것이 신부의 최종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분이 그리워지고, 그분이 오시기를 사모하게 된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우리를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신부로, 자녀로, 공동 통치자로 대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을 깊이 알아 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사랑이 신앙 생활의 원동력이 되고, 그 사랑이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아름답게 준비시킨다.
아 8:14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2026년 6월 22일(월)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아가서를 통해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신분을 탐구하며, 성도가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지위를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솔로몬을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정의하며, 그가 시골 처녀인 술람미 여인을 위해 왕의 가마와 호위 천사를 보내는 모습이 구원받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예표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가서에 등장하는 복잡한 가족 관계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타락한 천사를 의붓오빠에, 창조주이자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참된 생명의 근원에 비유하며 그 독보적인 친밀함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가 단순한 피조물을 넘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고귀한 정체성을 깨닫고, 주님과 영적인 일치를 이루어 미래의 소망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