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정제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35)] 다윗의 아들 솔로몬(13)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아가서 7:10~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TXu3cRPtb8c
1. 들어가며
아가서는 겉으로 보면 한 왕과 한 여인간의 사랑 노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로 읽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솔로몬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로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술람미 여인은 단순한 시골 처녀가 아니라 왕의 신부로 부름받을 교회의 예표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왕이 신부를 어떻게 찾아내시고,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마침내 왕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동역자로 세우시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가극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간에 함께 나누는 말씀은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솔로몬에게는 이미 왕비 육십 명과 후궁 팔십 명과 무수한 시녀들이 있었다(아 6:8). 그렇다면 그는 무엇이 부족해서 레바논에 있는 바알하몬의 포도원까지 내려갔던 것인가? 왜 왕궁 안의 여인들이 아니라 햇볕에 그을린 포도원지기 여인을 찾았던 것인가? 왜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온 뒤, 단지 편안히 쉬게 하지 않고 밤의 두려움을 이기는 자,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은 자, 포도원과 양떼를 돌보는 자로 빚어 가셨던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예표인 솔로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시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고, 물 위를 걸으셨다. 또한 둘째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왕이시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며,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 더 나아가 셋째로, 그분은 영계의 왕이시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보다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들을 제압하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모든 일을 단지 신성의 능력으로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신 사람으로서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성도도 사람으로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
마 8:26-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에게 보좌와 심판의 권세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천국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은 막연한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통치와 심판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회피하고, 귀신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은 채 천국에서 왕 노릇하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왕의 신부는 왕의 사랑을 받는 자일 뿐만 아니라 왕의 일을 아는 자이며, 왕의 뜻을 받들어 왕과 함께 움직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아가서가 보여 주는 신부의 여정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한다. 술람미는 처음부터 완전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연약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녀 안에서 장차 왕의 동산을 함께 돌볼 가능성을 보셨다. 그는 그녀를 찾아내고, 구출하고, 왕궁으로 데려오고, 밤의 두려움을 통과하게 하며, 마침내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은 신부로 세우셨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이 무엇이며, 그 신부가 어떻게 왕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동역자로 빚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예수님이 왕이심을 알아야 하는가?
왕이 바라는 신부를 알려면 먼저 왕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한다. 왕을 모르면 신부의 사명도 모른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러나 이 왕은 세상의 왕들과 다르다. 세상의 왕은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지배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신 왕이시다. 세상의 왕은 부하들을 앞세워 싸우지만, 예수님은 친히 전사가 되어 사탄 마귀와 싸우셨다. 세상의 왕은 보좌를 독점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기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러 방면에서 왕이심을 드러내셨다. 첫째, 그분은 자연 만물의 왕이시다. 바람과 바다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다. 둘째, 그분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왕이시다. 질병, 장애, 죽음, 가난, 고통, 절망 앞에서 사람은 한계를 보이지만, 주님은 그 모든 문제 위에 계셨다. 셋째, 그분은 영계의 왕이시다. 귀신들이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떨었고,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떠나갔다. 넷째, 그분은 사람으로서 이기신 왕이시다.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순종하셨고, 사람으로 시험을 이기셨으며, 사람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 주님이 단지 하나님으로서만 이기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으로 이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으로서 성령을 힘입고, 회개와 믿음과 순종으로 악한 영과 싸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왕이신 예수님이 이긴 자들에게 왕 노릇할 권세를 나누어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왕의 신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왕의 옆에 장식처럼 앉아 있는 사람만이어서는 안 된다. 왕이 전쟁하는 왕이라면 신부도 그 전쟁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왕이 사람을 살리는 왕이라면 신부도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왕이 포도원과 양떼를 돌보는 왕이라면 신부도 포도원과 양떼를 알아야 한다. 왕의 뜻과 전혀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왕궁의 안락함만 누리려 한다면, 그는 왕의 마음을 모르는 신부다.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왕궁 안에서 곱게 자란 여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포도원에서 일했고, 햇볕에 그을렸고, 여우를 막지 못해 애를 태웠고, 사자굴과 표범산이 있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았고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거칠었지만, 바로 그 거침 속에 왕이 찾는 신부의 가능성이 있었다. 왕은 편안한 여인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왕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을 찾으셨다.
3. 왜 왕궁의 여인들이 아니라 포도원지기였는가?
솔로몬에게는 이미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왕비가 육십 명, 후궁이 팔십 명, 시녀들은 무수했다(아 6:8). 그러나 왕은 그들 가운데서 “내 완전한 자”가 있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왕은 바알하몬의 포도원에서 일하던 한 여인을 찾아내서 그녀를 향하여 그렇게 말했다(아 6:9). 이것이 아가서의 충격이다. 왕궁 안에는 화려함이 있었고, 신분이 있었고, 궁중 예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찾은 것은 단순한 화려함이 아니었다. 왕이 찾은 것은 자기 마음을 알아 줄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짝이었다.
아 6:8-9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들이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를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왕비와 후궁들은 왕궁 안에 있었다. 그들은 보호받는 자리, 누리는 자리, 섬김받는 자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바알하몬의 술람미는 밖에 있었다. 그녀는 땀을 흘렸고, 태양에 그을렸으며, 오빠들의 분노 아래 포도원지기로 세워졌다. 그녀는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의 눈에는 그 실패 속에서도 귀한 것이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포도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포도원을 지키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여우가 포도원을 허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여기서 포도원은 단순한 농장이 아니다. 구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름진 산에 심은 포도원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그 포도원은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가서에서 말하고 있는 포도원은 이스라엘과 교회, 더 나아가 많은 생명의 열매를 산출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한다. 신랑이 포도원지기 신부를 찾으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신부가 장차 왕의 포도원을 함께 돌보기를 바라신다.
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오늘 성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즉시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서 곧바로 만들어 내지 않으시고, 귀신이 많고 고난이 많고 죄의 유혹이 많은 이 땅에서 태어나게 하셨는가? 그것은 이 땅이 포도원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포도원이 무엇인지 배운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무엇인지 배운다. 여우가 포도원을 허는 일이 무엇인지 배운다. 사자와 표범 같은 악한 영들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배운다. 이 모든 것을 배운 자라야 장차 왕의 동산에서도 왕의 일을 함께 감당할 수 있다.
4. 포도원지기의 고난은 왜 신부 훈련인가?
술람미가 겪은 고난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빠들에 의해 포도원지기가 되었다. 햇볕에 그을렸고,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 고난은 그녀를 왕의 마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 훈련이었다. 왕궁 안의 여인들은 그런 일을 몰랐다. 그들은 포도원에 꽃이 피면 여우가 들어온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밤의 두려움과 사자굴과 표범산의 위험을 몸으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람미는 알았다.
신앙생활에서도 고난은 늘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고난 자체가 선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사람을 단련하신다. 땀 흘려 본 사람은 땀 흘리는 사람을 이해한다. 상처를 통과한 사람은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할 수 있다. 영적 전쟁을 겪어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영적 전쟁에서 무너질 때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난이 반드시 저주만은 아니다.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해석될 때, 그것은 장차 왕의 일을 감당할 신부를 빚는 훈련이 된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술람미가 있던 곳에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이 있었다. 여우는 사자나 표범처럼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을 때 들어오면 열매를 망친다. 이것은 성도와 교회 안에 들어와 열매를 망치는 작은 악한 영들의 역사와 같다. 큰 죄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작은 분열, 작은 시기, 작은 원망, 작은 게으름, 작은 음란, 작은 교만도 포도원을 허문다. 왕이 바라는 신부는 이런 작은 여우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그러나 술람미 혼자서는 여우를 잡지 못했다. 이것도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악한 영을 이길 수 없다. 신부는 자기 연약함을 알아야 한다.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라는 고백은 실패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문이다.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신랑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왕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녀를 찾아오신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식도 이와 같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귀신을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으며, 죄를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고, 포도원을 지키고 싶어도 여우를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랑이 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피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원수를 이길 권세를 주셔야 한다. 고난 속에서 자기 한계를 아는 자가 진짜 신부 훈련을 시작한다.
5. 왜 왕은 가마와 60용사를 보내셨는가?
솔로몬은 술람미를 혼자 왕궁으로 오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가마를 보냈다. 그리고 이스라엘 용사 육십 명을 붙였다. 그들은 모두 칼을 잡고 전쟁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 이유는 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것은 신부가 왕에게로 오는 길이 단순한 산책길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 길에는 밤의 세력이 있고, 공격하는 영들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왕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용사들을 붙이신다.
아 3:7-8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그를 둘러쌌는데 그들은 다 칼을 잡고 전쟁에 능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그의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여기서 가마는 왕의 특별한 배려다. 신부는 아직 약하다. 그녀는 여우도 온전히 잡지 못하던 자였다. 그런 그녀가 사자굴과 표범산을 지나 왕궁으로 오려면 보호가 필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 내실 때 천사들과 영적 보호를 붙여 주시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히브리서는 천사들이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라고 말한다.
히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그러나 왕의 가마와 60용사는 보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부가 장차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준다. 왕궁은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라 왕의 훈련장이다. 가마 주위의 용사들은 신부에게 왕의 나라가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녀는 처음에는 보호받는 자로 왕궁에 들어오지만,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자가 된다.
오늘 성도도 처음에는 보호받는 자다. 우리는 연약하여 주님의 피와 말씀과 천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보호만 받는 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기도로 지켜졌고, 누군가의 말씀으로 살았고, 누군가의 사역으로 귀신에게서 벗어났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칼을 잡아야 한다. 자신도 영적 전쟁에 익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도 밤의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는 가마 안에만 머무는 신부가 아니다.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는 가마를 타고 왕궁에 들어온 후, 그 왕의 권세와 군대의 원리를 배우고 마침내 전사가 되는 신부다. 구원은 은혜로 시작하지만, 왕 노릇은 훈련과 승리를 통해 준비된다.
6. 밤에 신랑을 찾은 사건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왕궁에 들어온 술람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신랑이 밤늦게 찾아온 것이다. 신랑은 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아 5:2) 그런데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그의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했다. 신혼의 때라면 신랑이 신부 곁에만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밖에서 밤이슬을 맞고 돌아왔다. 술람미는 처음에 그 마음을 알지 못했다.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그녀는 핑계를 댔다.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느냐고,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겠느냐고 했다. 이것은 왕궁 생활에 익숙해진 신부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포도원에서 고생하던 여인이었지만, 왕궁에 들어오자 편안함에 젖었다. 왕궁 생활의 초기에 그녀는 왕이 왜 늦게 돌아왔는지, 왕이 밤새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넣었을 때, 그 손에서 몰약이 떨어졌다. 몰약은 죽음과 희생의 향품이다. 술람미는 그 손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신랑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이제 그녀는 신랑을 찾아 나선다. 밤이다. 성 안을 돌고, 순찰자들을 만나고, 파수꾼들에게 상처를 입고, 겉옷까지 빼앗긴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건이 그녀를 바꾸었다. 이전에는 밤을 두려워하던 여인이었으나, 이제는 신랑을 찾기 위해 밤길을 나서는 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자기 편안함을 우선하던 신부였으나, 이제는 신랑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끝까지 신랑을 찾고 싶어 하는 신부가 되었다.
그 결과 신랑은 그녀를 새롭게 평가한다.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구나.” 여기서 당당함은 단순한 미모가 아니다. 이것은 원수에게 두려움을 주는 위엄이다. 신부는 신랑을 찾는 밤의 여정을 통해 전사로 변했다. 신랑을 잃어버린 아픔이 그녀를 깨웠고, 신랑의 몰약 묻은 손이 그녀를 깨웠으며, 밤의 시련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아 6: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이 여자가 누구인가
성도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주님이 늘 내 곁에서 나만 위로해 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밤이슬을 보여 주신다. 주님은 지금도 양떼를 먹이고, 순교자들을 맞이하고, 포도원을 돌보고, 다른 신부들을 세우고 계신다. 그 사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왕궁 안에서 자기 편안함만 구하는 신부가 된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묻은 몰약을 보면 달라진다. 신랑의 희생과 사역을 알게 되면, 우리도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바뀐다.
7. 왜 왕이 바라는 신부는 동산의 동역자인가?
술람미가 밤에 신랑을 찾아 나선 뒤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신랑은 단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늦게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동산에 내려가서 무엇인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는 향나무의 화단에 이르러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치고,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여기서 백합화는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난 신부의 예표이며, 더 나아가 피 흘림과 순결과 순교의 신부들을 생각하게 한다. 신랑은 지금 이 시간도 양떼를 돌보시고, 꺾어진 백합화를 거두시며, 자기 동산을 돌보신다.
아 6:2-3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나무의 화단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치고 백합화를 줍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들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치는구나
이 장면이 술람미를 완전히 바꾼다. 그녀는 왕이 자신을 왕궁에 데려온 목적을 깨닫는다. 왕은 그녀를 단지 놀고 먹게 하려고 데려오신 것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를 자기 동역자로 삼기 원하셨다. 왕이 밖에서 하시는 일을 그녀도 알기 원하셨다. 왕이 돌보는 양떼를 그녀도 돌보기 원하셨다. 왕이 찾는 백합화를 그녀도 귀히 여기기 원하셨다. 왕의 동산에 있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의 열매를 그녀도 살피기 원하셨다.
그래서 아가서 7장을 보면, 술람미는 이제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이제 그녀는 왕에게 “우리가 함께 들로 가자”고 한다(아 7:11).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고 한다(아 7:12). 이것은 신부의 성숙한 고백이다. 처음에는 신랑이 나를 사랑해 주기만을 바랐지만, 이제는 신랑과 함께 자기가 만들어놓은 들로 그리고 그녀의 포도원으로 가자고 한다. 처음에는 바알하몬에 있는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탄식했지만, 이제는 왕과 함께 자기가 만들어 놓은 포도원으로 가자고 말한다.
아 7:10-1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여기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는 많은 생명의 열매를 상징한다. 포도는 피와 생명과 교회의 산출을 생각나게 하고, 석류는 많은 알맹이가 한 열매 안에 들어 있는 풍성한 생명을 보여 준다. 왕이 바라는 신부는 자기만 천국에 들어가는 신부가 아니다. 왕이 바라는 신부는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다른 양떼를 먹이고, 다른 사람을 주님의 동산으로 이끌 수 있는 신부여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부의 성숙은 사역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다. 처음에는 “주님, 나를 사랑해 주세요”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성숙하면 “주님,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나도 돌보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처음에는 “나를 고쳐 주세요, 나를 지켜 주세요, 나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성숙하면 “주님, 나를 통해 다른 사람도 고치시고, 다른 사람도 살리시고, 다른 사람도 왕의 신부로 세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된다. 이것이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이다.
8. 오늘 성도는 어떤 신부로 준비되어야 하는가?
아가서의 신부 여정은 오늘 성도의 신앙 여정을 그대로 비춘다. 우리는 처음부터 강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처럼 연약하다. 세상은 가시나무밭이고, 죄와 귀신과 저주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백합화로 보신다. 피로 씻겨 깨끗해질 존재, 주님의 사랑을 받을 존재, 왕의 동산에 들어갈 존재로 보신다.
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그러므로 첫째, 성도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은 신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결의 문제다. 신부는 예수의 피로 씻겨야 한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고,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한다. 신부가 더러우면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더러운 상태 그대로 왕의 깊은 동산에 들이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부는 반드시 정결해야 한다.
둘째, 성도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술람미는 처음에는 여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왕의 사랑과 훈련을 통해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신부는 단지 울면서 보호만 요청하는 자로 끝나서는 안 된다. 회개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악한 영과 싸워야 한다. 가정 안에 역사하는 영, 교회 안에 역사하는 여우들, 사람의 마음과 몸을 묶는 귀신들을 대적해야 한다. 이것이 왕의 신부다운 모습이다.
셋째, 성도는 또 다른 신부를 양육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왕이 하시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양떼를 먹이고, 포도원을 돌보고, 백합화를 돌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왕을 사랑하는 신부도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사람을 세워야 한다.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회개하도록 도와야 한다. 영적 전쟁에서 해방된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악한 영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부상도 이것이다. 단지 예배당 안에서 은혜받고 끝나는 신앙이 아니라, 왕의 동산을 아는 신앙이어야 한다. 단지 “나는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신앙이 아니라, “나는 왕의 일을 함께 해야 한다”고 깨닫는 신앙이어야 한다. 단지 성 안에서 보호받는 신앙이 아니라, 성 밖과 포도원과 양떼와 여우와 밤의 두려움을 아는 신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게 하신 데에는 뜻이 있다. 이 땅은 피곤하고, 가난하고, 아프고, 귀신과 싸워야 하고, 땀 흘려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신부가 훈련된다. 천국에서 곧장 만들어진 존재라면 야전의 아픔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포도원지기로 살아 본 신부는 양떼의 고통을 알고, 포도원의 열매를 알고, 여우의 위험을 알고, 신랑의 밤이슬을 이해한다. 그 사람이 왕의 동산에서도 왕의 마음을 아는 신부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고난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 가난을 통과했다면 가난한 자를 이해해야 한다. 질병을 통과했다면 병든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귀신의 공격을 통과했다면 귀신에게 묶인 자를 도와야 한다. 상처를 통과했다면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해야 한다. 이 모든 훈련이 왕의 동산에서 쓸모 있게 된다. 왕은 야전에 능한 신부를 찾으신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찾으신 목적은 단지 그녀를 왕궁에 데려와 편히 쉬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왕은 바알하몬 포도원에서 고생하던 신부를 찾아내어 보호하시고 사랑하시지만, 마침내 그녀가 왕의 마음을 알고 왕의 동산에서 왕이 하시는 일을 함께 감당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는 사랑만 받는 신부가 아니라, 왕의 뜻을 알고 왕의 길을 따르는 신부다.
술람미는 처음에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녀를 버리지 않으셨다. 왕은 그녀를 찾아오셨고, 그녀를 가마에 태우셨고, 60용사를 붙여 주셨고, 왕궁으로 데려오셨다. 그리고 밤의 두려움을 통과하게 하셨다. 신랑의 몰약 묻은 손을 보게 하셨고, 신랑이 자기 동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줍고 있음을 알게 하셨다. 그 과정을 통해 그녀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신부로 변화되었다.
오늘 성도도 이 길을 걸어야 한다. 먼저 예수의 피로 깨끗해진 백합화 같은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양육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신부가 되었다고 해서 왕궁 안에서만 편히 쉬면 되는 것이 아니다. 왕이 지금도 포도원과 양떼와 백합화를 돌보고 계신다면, 신부도 그 마음을 알아야 한다. 왕이 사람을 살리기 원하신다면, 신부도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난도 새롭게 보아야 한다. 고난은 신부를 망가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의 일을 이해하게 하는 훈련이 될 수 있다. 땀 흘린 사람은 포도원을 이해하고, 밤을 지나 본 사람은 밤의 두려움을 이기며, 악한 영과 싸워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의 고난을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고난이 원망으로 끝나지 않고 사명으로 바뀐다.
이제 우리는 왕이 바라는 신부의 자리까지 자라가야 한다.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보호받는 것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왕의 동산에 들어가 왕이 하시는 일을 함께 보아야 한다.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살피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양떼와 백합화를 함께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왕의 사랑을 받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왕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성숙한 신부로 준비되어 천국에서 왕과 함께 다스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설교핵심]
이 설교는 아가서의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신부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주님이 단순히 안락함을 누리는 신부가 아니라, 영적 전쟁의 현장인 야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당한 군대 같은 신부를 찾으신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성도가 이 땅의 고난과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는 이유는 천국이라는 포도원을 경작하고 양육할 실력을 갖추기 위한 훈련 과정이며, 이를 통해 원수의 공격을 이겨내는 자만이 보좌에서 왕 노릇 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우리가 회개와 영적 성숙을 통해 악한 영을 제압하고 다른 영혼을 살리는, 주님과 마음이 합해진 유일하고 완전한 신부로 거듭날 것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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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글).
제목: [기독론(135)] 다윗의 아들 솔로몬(13)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아가서 7:10~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솔로몬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세번째 왕이었다. 그는 다윗 왕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았는데, 솔로몬도 다윗 왕에 이어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곧 다윗의 더 크신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사랑한 술람미 여인과 나눈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는 단순한 남녀의 연애시가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 사이의 영적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단순한 문학 작품으로만 읽어서는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본문 아가서 7장 10절부터 13절은 그 신부가 마침내 신랑이 진정으로 찾던 모습으로 변화된 장면을 보여 준다. 신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원수의 영토에서 싸울 수 있는 강인한 동역자였다. 이러한 기대는 단지 한 시대, 한 인물에게만 국한된 특별한 요구가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의 신부 된 성도에게 동일하게 품으신 마음이다. 왕에게는 이미 왕비 육십 명과 후궁 팔십 명, 그리고 수많은 시녀들이 있었으나(아 6:8), 그들 중 누구도 왕이 진정으로 찾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왕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편안히 보호받는 것과, 왕의 마음을 알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술람미 여인은 본래 부모의 명에 따라 포도원을 지키던 평범한 여인이었으나, 왕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다. 그 변화의 과정에는 오해와 갈등, 밤길의 두려움과 수모가 있었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한 끝에야 비로소 왕이 인정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심하게 되는 어두운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둠의 시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했기에, 신부는 마침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 변화의 과정을 단순히 한 여인의 성장담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본문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가 거쳐야 할 영적 성장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그저 평안과 위로를 얻기 위해 교회를 찾는다. 그것은 결코 잘못된 출발이 아니다. 그러나 그 평안과 위로에만 머물러 있다면, 결국 왕궁에서 안락함만 누리던 다른 왕비와 후궁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그 평안을 넘어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훈련의 자리로 나아갈 때 비로소 시작된다. 왕이 과연 신부에게 무엇을 기대하셨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우리 또한 이 땅에서 무엇을 향해 자라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솔로몬에게는 육십 명의 왕비와 팔십 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그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완전한 자라는 칭함을 받았다(아 6:9)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이는 단지 숫자가 적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왕의 사람이라 불리는 것과 실제로 왕의 마음을 알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이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 가운데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자는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랑이 신부를 통해 진정 바라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신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왕이 인정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이긴 자로서 예수께서는 보좌에 앉으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 그분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풍성히 누릴 수도 없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도 없다.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은 결국 이긴 자, 곧 왕의 자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바람과 물결을 향하여 잔잔하라 말씀하신 자연 만물의 왕이셨다. 풍랑이 일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주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다. 또한 고치지 못할 질병이 없었고 죽은 자까지 살리신 것을 보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인간의 왕이 되실 분이었다. 단지 왕이라 칭함을 받았을 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한 왕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왕이셨다. 그뿐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사로잡고 모든 더러운 영들을 제압하신 영계의 왕이시다. 자연의 왕, 인간의 왕, 영계의 왕이라는 이 세 가지 통치권은 따로 떨어진 세 분의 다른 존재가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가지고 계신 통치권이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능력과 병든 자를 고치신 능력과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능력은 모두 같은 한 분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자연의 영역에서만, 혹은 인간의 도덕적 가르침으로만, 혹은 영적 능력의 차원으로만 따로 떼어 이해하려 한다면 그분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세 가지 통치권을 모두 가진 분으로 알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승리는 주님이 본래 가지고 계신 신적 능력으로 단번에 이루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싸워 이기신 승리이다. 만일 주님이 처음부터 신적 능력만으로 단번에 모든 싸움을 끝내셨다면, 그 승리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직접 싸워 이기셨기에, 그 승리의 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으로서 악한 영과 싸워 이길 수 있고, 또한 그 싸움에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이긴 자가 된 이들에게 주님은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함께 하도록 허락하신다. 본래 통치와 심판의 보좌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었다. 구약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보좌는 오직 한 개뿐이다.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가 본 것도 단 하나의 보좌였고, 그 보좌 곁에서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양할 뿐이었다. 보좌가 두 개라거나 세 개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광경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도 본래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단수로 표현된다.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그러나 같은 요한계시록 안에서도 그 한 개의 보좌 앞에 이십사 보좌가 나오고, 더 나아가 십사만 사천 명이 차지할 보좌까지 등장한다. 이는 본래 하나님께만 속해야 마땅한 통치와 심판의 권세를, 이긴 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신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는 예수의 증인으로 죽기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에게 주님이 친히 통치의 자리를 나누어 주신다는 뜻이다. 원래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 하나님만이 홀로 통치하셔야 마땅한데, 그 통치와 심판의 권세를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무덤에서 잠자듯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영과 혼이 그대로 소멸하여, 마지막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 이는 영적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이미 사도 시대에도 고린도 교회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고전 15:12). 죽으면 그대로 끝난다고 믿는 자는 영혼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라가면 설령 천국에 들어간다 해도 가장 낮은 자리, 곧 성 밖의 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므로 정확한 영적 지식을 가지고 분별해야 한다. 영적 세계에 대한 무지는 단지 지식의 부족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자리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누구의 가르침을 듣든지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증언과 일치하는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안에서만 왕 노릇 한 것이 아니라 동산을 만들고 포도원을 가꾸며 목장에서 양을 치는 것처럼 성 밖에서도 왕 노릇을 한 것은, 바로 이 모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 2:4-6 내가 나를 위하여 가옥을 건축하고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을 만들었으며
솔로몬은 예루살렘 안에만 머문 왕이 아니라, 그 성 밖에 동산과 포도원과 못을 만들고 거기서도 왕 노릇 한 자였다. 주님이 찾으시는 자는 성안에서 보호만 받고 자유와 기쁨만 누리는 자가 아니라, 성 밖 들판에서 함께 싸우며 다스릴 수 있는 자이다. 본래 보좌는 예루살렘, 곧 시온산 위에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십사 보좌와 십사만 사천의 보좌는 그 하나의 보좌를 둘러서서 점점 바깥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침내 십사만 사천의 보좌는 성 바깥, 곧 우주의 영역까지 나아가 통치하는 자리에 이른다. 이는 왕이 단지 안전한 성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바깥의 영역까지 다스리는 자들에게 더 넓은 통치의 자리를 맡기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안에서만 왕 노릇 하지 않고 동산과 목장과 포도원으로 나가서 왕 노릇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확장된 통치의 모형이다. 또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통치는 먼 미래, 곧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계시록 이십 장은 이미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과 혼이 잠들어 아무것도 모른 채 마지막 날까지 기다린다는 가르침은 성경의 분명한 증언과 어긋난다. 영혼이 잠잔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결국 통치와 보상이라는 영적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주님은 이긴 자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통치의 자리를 허락하시며, 그 통치는 예루살렘이라는 본거지에서 시작하여 점점 바깥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동산과 포도원과 목장이 예루살렘 성 밖에 자리하고 있었던 이유에 담긴 영적 의미이다.
3. 왜 신랑인 솔로몬은 굳이 신부인 술람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와야 했는가?
왕에게는 이미 왕비 육십 명과 후궁 팔십 명, 셀 수 없는 시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존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략결혼으로 왕궁에 들어온 여인들로서, 한 번도 들판에서 싸워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곱게 자라난 그들에게는 야전을 감당할 만한 거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포도원을 지키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귀한 딸로 곱게 자라다가 정략결혼으로 왕궁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고생을 시킬 수 있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여인들에게 들판에 나가 여우를 잡고 양 떼를 치라고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삶을 살도록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찾고 있던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왕은 야전에서 밤의 무서움을 이기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왕궁의 울타리 안에서만 보호받는 자들은 결코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없다. 그래서 신랑은 신부를 왕궁이라는 안전한 자리에 데려다 놓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들로, 밤으로, 위험한 곳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술람미 여인이 머물던 곳은 사자굴과 표범산이 가득한 위험한 곳이었다.
아 4: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자
사자와 표범이 가득한 산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작은 여우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연약한 여인이, 언제 큰 짐승이 달려들지 모르는 위험한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만일 큰 짐승이 달려든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왕이 자기 동산과 포도원을 오가는 길에는 두려움이 따랐고, 그래서 용사 육십 명이 칼을 차고 호위하며 왕의 가마를 지켰다.
아 3:7-8 솔로몬의 침상이라 그 주위에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섰는데 다 칼을 잡고 전쟁에 익숙한 자라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밤의 두려움을 막으려 함이라
이는 단지 왕의 호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들어가야 할 그 들판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보여 준다. 만일 그 들판이 안전한 곳이었다면 굳이 칼을 잡은 용사 육십 명이 밤새 둘러서서 지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언제 사자나 표범이 뛰쳐나올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자리였기에, 왕은 자신이 머무는 동산과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해야 했다. 칼을 차고 전쟁에 익숙한 용사들조차 밤의 두려움을 막기 위해 무장하였다면, 아직 훈련받지 못한 신부에게 그 들판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신부를 왕궁으로 데려온 것은 안락한 삶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위험한 들판에서 함께 다스리고 함께 싸울 자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왕궁의 곱고 안전한 자리는 도리어 신부에게 잠시 머무는 처소였을 뿐, 신부가 마지막으로 서야 할 자리는 언제나 들판이었다. 솔로몬이 가꾼 동산과 포도원과 목장이라는 세 가지 일은 각각 가르치는 바가 다르다. 동산은 백합화를 가꾸는 곳으로 순교자를 돌보는 자리이고, 포도원은 열매를 맺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자리이며, 목장은 양 떼를 먹이는 목회의 자리이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르면서도 결국 하나의 통치 안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왕은 신부가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신부가 왕궁에 머문 것은 결코 종착지가 아니었다. 오늘날의 성도 또한 교회당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신앙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것은 출발점일 뿐이며, 마침내는 들판으로, 곧 사자와 표범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신랑이 신부에게 함께 내려오자고 청한 곳의 이름들, 곧 레바논과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은 모두 이스라엘 땅의 북쪽 경계, 곧 이방 민족과 맞닿은 변경 지역이다. 이는 신부가 머물러야 할 자리가 안전한 본토 안쪽이 아니라, 위험이 도사리는 변경, 곧 아직 복음이 이르지 못한 영적 변방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사자와 표범이 가득한 그 변경으로 함께 내려가자는 초청은, 신부에게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의 경계선까지 나아가자는 부르심이다. 그러한 위험한 변경까지 함께 가기를 자청하는 자만이, 마침내 왕과 함께 통치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4. 왜 신랑은 여러 왕비와 후궁들이 있었음에도 술람미 여인에게 "내 완전한 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말했는가?
신랑은 마침내 술람미 여인을 향해 분명하게 선언한다.
아 6:8-9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부러워하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다른 왕비와 후궁들은 성안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아무 고생 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오직 술람미 여인만이 왕이 머물던 그 밤의 들판까지 찾아왔다. 왕은 늦도록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주는 자가 그녀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단지 외모나 행실의 완벽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에하드, 곧 하나 됨을 뜻한다. 같은 단어가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선언할 때도 쓰였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는 단순한 숫자의 하나가 아니라, 나뉠 수 없는 본질적인 하나 됨을 가리킨다. 만일 단순히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굳이 그러한 강조의 표현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거듭 강조하여 그 하나 됨이 결코 나뉘거나 쪼개질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임을 선언한다. 술람미 여인을 향한 완전한 자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몸이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과 뜻이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창세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다고 할 때도 같은 표현이 쓰였는데, 이는 단지 육체적인 결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 존재가 한 뜻 안에서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술람미 여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뜻이 곧 왕의 뜻이 되었기에, 왕은 그녀를 자신의 마음을 아는 유일한 자로 인정한 것이다. 외형적으로 왕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러한 연합을 보장받을 수 없다. 마음과 뜻이 함께 움직여야만 비로소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진다. 다른 왕비와 후궁들은 왕의 마음을 알 필요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왕궁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는 데 만족하였다. 왕이 늦은 밤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굳이 알아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왕이 무엇 때문에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지, 무엇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고, 끝내 그 마음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왕궁에 머물러 있었으나 왕의 마음을 알고 그 길을 따라 나선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더불어 왕은 그녀를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부러워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단지 가족 안에서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여인들 가운데서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유일하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다른 여자들조차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 칭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 사람의 신앙과 헌신이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도 증거가 되어, 모두가 그 삶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왕비와 후궁들조차 그녀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보여 준 헌신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누가 진짜 주의 종이며 누가 진짜 주의 마음을 아는 자인지는, 결국 그 삶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또한 에하드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하나 됨은, 단지 부부 사이의 연합에만 머무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위격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 한 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자연의 왕이요 인간의 왕이요 영계의 왕으로서 세 가지 통치권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술람미 여인이 왕과 하나가 된 것처럼, 성도 또한 이 한 분 하나님과 뜻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교리적 동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왕의 마음을 알고 그 길을 함께 걷는 실제적 연합이어야 한다.
5. 왕궁에 들어왔던 술람미 여인이 거기서 훈련받아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술람미 여인은 본래 포도원을 지키는 자였다.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흑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내게 노하여 나로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내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녀는 자기 포도원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그 안을 헤집고 다니는 작은 여우들을 잡아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작은 여우는 자칼의 새끼처럼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이 도리어 더 위험한 이유는, 큰 짐승처럼 한눈에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경계를 풀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보면 이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신앙을 갉아먹는 작은 악한 영들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여호와의 포도원이라고 노래한다.
사 5:1 나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그런데 그 포도원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셨던 여호와께서 도리어 들포도를 발견하셨다.
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스라엘이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여 들포도만 맺었던 것처럼, 술람미 여인도 처음에는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왕궁에 들어온 그녀는 더 이상 안락함이 아니라 들판에서 살아남고 싸워 이길 수 있는 야전의 능력을 훈련받아야 했다. 이것은 마치 포도원을 일구는 자가 김매고 농약을 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것과 같다. 한 알의 벼가 곳간에 들어오기까지 적어도 다섯 번의 손길이 필요하듯, 한 사람의 신앙이 성숙하기까지는 숱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단번에 완성되는 신앙은 없으며, 시간과 인내와 반복된 연습이 함께 따라야 한다. 보리를 타작하던 자리에서는 까끄라기가 살갗에 박혀 들어와 견딜 수 없이 가렵고 따가웠으며, 탈곡기에서 날아오는 먼지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면 살갗이 새까매질 정도였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면 동네 어귀의 강으로 달려가 몸을 씻어 내야 했고, 그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새기곤 하였다. 모내기를 할 때는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계속 허리를 굽혀야 했고, 벼를 베는 철에는 낫에 손을 베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한 노동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동정을 구할 수 없었고, 다만 묵묵히 견뎌 내야 하는 자기만의 싸움이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홀로 견뎌 내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 훈련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고생을 불평하지 않고 감당해 낸 자만이 마침내 들에서 강한 자로 세워진다. 그러한 훈련은 누가 말로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겪어 내야만 비로소 새겨지는 것이다. 왕궁이 신부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이러한 고난을 통과하는 훈련이었으니, 안락함이 아니라 들판에서 살아남고 싸워 이길 수 있는 야전의 능력이었다. 또한 벼농사를 짓다 보면 병충해를 막기 위해 적어도 다섯 번 이상 농약을 쳐야 하는데, 그 약 기운에 취해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바람의 방향을 살펴 가며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직접 손발로 겪어 낸 고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도리어 그러한 고생을 미리 겪어 본 자만이, 훗날 같은 고생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 한 알의 쌀이 곳간에 들어오기까지 거치는 그 모든 손길을 직접 겪어 본 사람만이, 밥 한 그릇에 담긴 수고를 진심으로 헤아릴 수 있다. 보리타작과 모내기와 벼베기의 고생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농부의 수고를 그저 막연한 말로만 이해할 뿐, 그 땀과 고단함이 몸에 새겨지지 않는다. 한 번도 들판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왕비와 후궁들은 다른 사람의 수고를 헤아릴 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그 고생을 통과해 본 자는, 비로소 다른 영혼의 아픔과 수고를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자가 된다. 그래서 왕궁은 신부에게 안락함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고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준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가리켜 야전 훈련이라 부를 수 있다. 군대에서 신병이 처음 입대하면 화려한 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일보다 먼저, 땀에 젖은 군복을 입고 흙바닥을 기어야 하는 훈련을 받는다. 그 훈련을 통과하지 못한 병사는 실제 전장에서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동료를 지켜 줄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야전 훈련을 통과하지 못한 성도는, 실제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자기 신앙조차 지켜 내지 못하고 쉽게 무너진다. 그러므로 지금 겪는 고생과 수고를 원망과 불평의 이유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장차 더 큰 영적 싸움을 감당하기 위한 훈련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6. 잃어버린 왕을 찾기 위해 밤중에 길을 나선 왕비가 발견한 왕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는가?
신랑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신부는 한때 문을 열어 주지 않을 정도로 그를 오해하였다.
아 5:2-3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내 사랑하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문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 내가 이르기를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하였노라
그녀는 왕이 다른 왕비나 후궁의 품에 머물러 있다가 늦게 찾아온 것이라 의심하였다. 그러나 신부는 결국 순찰자와 파수꾼에게 매를 맞고 옷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성 밖까지 나가 신랑을 찾아 나섰다.
아 5: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치고 상하게 하고 내 겉옷을 벗겨 갔노라
그녀는 그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신랑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 나섰다. 그렇게 찾아낸 왕의 모습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 6:2-3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향기로운 꽃밭으로 내려가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고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왕은 어떤 왕비나 후궁의 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벽까지 자신의 동산에서 양 떼를 먹이고 꺾어진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백합화는 신앙을 지키다가 꺾인 자, 곧 순교자를 상징한다. 왕이 그토록 늦은 것은 정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직접 돌보고 거두는 수고 때문이었다. 신부가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자신이 그동안 가졌던 오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흔히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하고,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함부로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신부 또한 왕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장 나쁜 쪽으로 결론을 내려 버렸다. 그러나 직접 그 자리에 가서 보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 없는 법이다. 의심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직접 확인한 진실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신뢰와 사랑이 채워지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신부를 향하여 왕은 말한다.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이 말씀은 더 이상 연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여인이 아니라, 역경을 이기고 강인한 야전의 군사로 변화된 신부의 모습을 가리킨다. 왕을 찾아 나선 그 밤의 여정이야말로 신부를 진정으로 빚어낸 훈련장이었다. 오해와 의심에서 시작되었던 길이 마침내 신뢰와 연합의 자리로 이어진 것이다. 신부가 그 밤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던 힘은,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다는 진리를 몸으로 붙잡았기 때문이다.
아 8: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하리라
순찰자에게 매를 맞고 겉옷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음에도 신부는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많은 물도 끄지 못하는 사랑이란, 어떠한 환난과 수모도 신부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만일 신부가 그 순간에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왕궁으로 되돌아갔더라면, 끝내 왕의 참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려움이 닥쳐올 때 돌아서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신부를 완전한 자의 자리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신부가 발견한 왕의 모습, 곧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 모습은 결코 한가로운 풍경이 아니었다. 백합화가 순교자를 상징한다면, 왕이 그 꽃 가운데서 양 떼를 먹였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생명을 바친 자들을 직접 돌보고 위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왕은 그 누구의 시선도 없는 새벽 시간에 홀로 그 일을 감당하고 계셨다. 신부가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까지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진실이었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님이 행하시는 많은 일은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새벽과 같은 시간에 조용히 이루어진다. 그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신부가 그러했듯, 두려움을 무릅쓰고 직접 찾아 나서는 수고가 필요하다.
7. 왕비가 비로소 깨달았던 것으로, 자신이 왕궁에 들어온 목적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왕을 발견한 신부는 비로소 자신이 왜 왕궁에 불려 왔는지를 깨닫는다. 처음에는 그저 고생을 면하고 왕궁에서 편히 먹고 쉬려고 불려 온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 땅에서 본래 감당하던 일이 포도원지기였던 것처럼, 천국에서도 그 일을 계속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이 세상은 천국에서 감당할 그 일을 미리 연습시키는 예행연습의 자리이다. 교회는 천국 포도원의 모형이며, 그 안에서 영혼을 살리고 양육하는 자로 준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맡겨진 작은 직분과 섬김의 자리 하나하나도 결코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다. 지금 감당하는 작은 섬김이 장차 천국에서 맡게 될 더 큰 사명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곧바로 천국에서 천사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굳이 이 땅의 흙으로 지어 피곤하고 지치는 육신을 입혀 고생과 훈련을 거치게 하시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천사는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으로 지어진 존재이지만, 사람은 흙으로 지어져 시간 속에서 자라가고 성숙해 가는 존재이다. 그 차이 안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 있다. 만일 사람을 처음부터 천국에서 만들어 낸다면 밥을 먹을 걱정도, 옷을 빨아야 할 수고도,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에게는 들판에서 싸우고 사람을 돌볼 야전의 능력이 자라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이라는 훈련장을 통하여 사람을 빚으시는 것이다. 포도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예수의 피를 많이 전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잃은 선교사와 순교자들을 천국에서 특별히 귀히 여기시며, 그들을 치료하는 병원과 그들을 위한 처소까지 따로 예비해 두셨다고 한다. 천국에도 아픈 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있고, 각 과별로 그 사역을 감당하는 천사들이 있으며, 평신도와 목사와 선교사가 머무는 층이 다르다고 할 만큼, 주님은 자신의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자들을 특별히 귀히 여기신다. 단지 선교사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자들에게 그러한 영광이 주어진다. 이는 이름과 직함이 아니라 실제로 흘린 땀과 헌신의 무게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 마침내 신부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왕궁에 불려 온 목적이 안락한 삶이 아니라 바로 이 포도원직을 온전히 감당하는 자로 세워지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오늘은 무엇을 먹을지, 내일은 또 무슨 반찬을 마련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미역국을 끓일 날과 김치찌개를 끓일 날을 헤아리고, 옷이 해지면 다시 기워 입어야 하며, 살림이 넉넉지 않으면 그 걱정이 하루도 끊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상의 의식주 걱정을 그저 피곤한 짐으로만 여기지만, 실상 이것 또한 하나님이 마련하신 훈련의 한 부분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며 그 가운데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장차 더 큰 영적 책임을 맡았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자라난다. 반대로 한 번도 그러한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낙심하고 쉽게 불평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겪는 의식주의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맡게 될 더 큰 사명을 위한 예행연습이다. 오늘 식탁 위에 올라온 밥 한 그릇과 옷장에 걸려 있는 옷 한 벌에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훈련 계획이 담겨 있는 셈이다. 천국에 병원이 있고 그 안에 각 과별로 사역을 감당하는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천국 역시 무위도식하는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섬김과 봉사가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나라임을 보여 준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영혼을 돌보고 치료하고 위로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 일을 누구보다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이 땅에서 이미 그러한 섬김을 훈련받은 자일 것이다. 이 땅에서 누군가는 평생 한 번도 남을 위해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없이 살다가 인생을 마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부족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며 살아간다. 그 두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돌보아 본 적이 없는 자가 천국에 가서 갑자기 그 일을 능숙하게 감당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병든 자를 돌보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슬픈 자를 위로하는 모든 수고는,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더 큰 책임을 미리 연습하는 시간이다. 작은 섬김 하나도 결코 사소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8. 비로소 왕비가 왕을 위해 준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마침내 신부는 자신이 거할 동산에 직접 포도원을 일구고 석류 정원을 가꾸어 왕께 자랑할 만한 결실을 맺는다. 이전에 신부는 자신을 가리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불렀다.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고벨화는 한 송이 안에 작은 꽃들이 빽빽하게 모여 핀다. 그것이 익으면 포도송이처럼 송이송이 알맹이가 가득해진다.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가 모여 풍성한 한 송이를 이루는 모습은, 한 사람의 헌신이 모여 마침내 풍성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신부는 직접 자신의 동산에서 포도순과 꽃과 석류꽃이 돋는지를 살피며 왕을 기다린다.
아 7: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순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석류와 포도는 둘 다 한 송이 안에 송이송이 알맹이가 가득하고, 그 붉은 빛깔로 보혈을 상징하는 열매이다. 한 알 한 알이 모여 풍성한 송이를 이루듯, 한 영혼 한 영혼이 모여 마침내 풍성한 교회를 이루게 된다. 신부가 이 열매를 풍성히 맺은 것은, 자신만 구원받는 것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도 구원받아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포도송이를 만들어 가는 사역을 감당했다는 뜻이다. 구원은 결코 혼자만 누리고 끝나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한마음으로 모인 회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배 중에 서로 네 편 내 편을 가르며 다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목소리로 내가 죄인입니다 회개하며 함께 찬송하는 모습이야말로 신부가 가꾼 포도원의 열매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회중의 찬송과 기도가 뜨겁게 모여드는 자리에는, 사람의 화려한 솜씨가 아니어도 천사들이 함께 기뻐하며 임재한다. 화려한 음향 장비나 정교한 연출이 없어도, 진심으로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함께 찬송하는 그 자리에 하늘의 영광이 머무는 것이다. 그러한 신부를 향하여 왕은 다시 한번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아 6:10 이 여자가 누구인가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이는 더 이상 보호받기만 하는 왕비나 후궁이 아니라,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을 수 있는 군대처럼 당당히 일어선 여인의 모습이다. 처음 등장할 때 사자굴과 표범산을 두려워하던 연약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당당하고 담대한 군대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다. 왕이 진정으로 찾고 기다리셨던 신부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랜 세월의 훈련과 연단을 거쳐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자리이다. 신부가 가꾼 동산에는 더 이상 다툼과 분열의 모습이 없었다. 예배의 자리에 모인 회중이 서로 잘잘못을 따지며 니 편 내 편으로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한목소리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함께 찬송하는 모습으로 모여들었다. 그러한 회중이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할 때는 한여름 냉방기를 틀어도 그 열기가 식지 않을 만큼 뜨거운 은혜가 흘렀다고 한다.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 자체가 사실 신부가 성밖에 있는 솔로몬의 동산에 새로 가꾼 포도원의 살아 있는 열매인 것이다. 포도와 석류가 붉은 빛깔로 보혈을 상징하듯, 그렇게 모인 회중의 헌신과 찬양 역시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생명이 다시 열매로 맺히는 증거이다. 포도원이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한 해의 모든 절기를 통과해야 한다. 봄에는 가지를 정리하고 순을 다듬어야 하고, 여름에는 병충해와 가뭄을 견뎌야 하며,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붉은 송이를 거둘 수 있다. 신부가 가꾼 동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잡초가 무성하던 포도원이었으나, 오랜 세월의 수고를 거쳐 마침내 포도순과 석류꽃이 만발한 동산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교회의 부흥 역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도와 헌신과 인내의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맺히는 열매임을 보여 준다. 포도원이 곧 교회의 모형이라면, 그 포도원에서 맺히는 열매는 결국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와 전도의 사역이다.
9. 나오며
이긴 자에게 보좌가 주어지는 것, 신랑이 신부를 왕궁으로 데려와 훈련시킨 이유, 신랑이 여러 왕비와 후궁들 가운데서도 오직 한 사람을 완전한 자로 부르신 까닭, 왕궁에서 받아야 했던 훈련의 내용, 밤길을 헤매며 찾아낸 왕의 참모습, 그녀가 비로소 깨달은 왕궁에 들어온 목적,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왕을 위해 준비한 결실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과정을 살펴보았다.
신랑이 진정으로 바라셨던 것은 외모가 아름답고 왕궁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여인이 아니라, 원수의 영토 한가운데서 밤의 두려움을 이기고 함께 싸울 수 있는 강인한 동역자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의 고난과 훈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고난을 만날 때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원망하기보다, 그 고난이 자신을 어떠한 자로 빚어 가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들판에서 일하느라 검게 탄 살갗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흔적을 통해 자신이 진실로 왕의 부르심을 따라 훈련받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보리를 타작하고 모를 심고 벼를 베던 고된 노동이 그 자체로 무익한 고생이 아니라, 장차 영적 들판에서 싸울 수 있는 자로 빚어 가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작은 여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연약한 신부가 마침내 깃발을 세운 군대처럼 당당한 여인으로 변화되었듯이, 성도 또한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다른 영혼을 도울 수 있는 자로 자라가야 한다. 왕궁의 안락함에 머물러 안주하였던 왕비와 후궁들은 끝내 왕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칭찬하는 자리에만 머물렀지만, 들판으로 나아가 수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술람미 여인만이 왕과 하나 된 자로 인정받았다.
이는 오늘날의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신앙생활을 단지 교회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위로로만 여기는 자는 결코 주님과 하나 된 자리에 이를 수 없다. 도리어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포도원, 곧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부터 작은 여우를 잡는 일에 충성하고, 나아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내어 드리는 자만이 마침내 왕이 찾던 그 완전한 자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술람미 여인이 처음부터 완전한 자였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 역시 자기 포도원조차 지키지 못하였다고 고백할 만큼 부족한 자였고, 왕을 오해하여 문을 열어 주지 않을 만큼 연약한 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일어나 왕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강인한 자로 변화되어 갔다. 이는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을 갖춘 자만이 왕께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깨닫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자가 마침내 그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니 이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으리라
주님은 이 약속을 따라 오늘도 성도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는 단지 먼 미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이긴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받는 고난과 수고에는 헛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영혼을 살리고 양육할 수 있는 성숙한 일꾼으로 세워진다. 술람미 여인이 거쳐 온 그 길고도 험한 여정을 다시 돌이켜 보면, 그 길의 마디마디마다 결코 헛된 시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포도원지기로서의 부족함을 자각한 순간, 사자와 표범이 가득한 위험한 들판에서의 두려움, 왕을 오해하고 의심했던 어두운 밤, 순찰자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 발걸음, 그 모든 순간이 합력하여 마침내 완전한 자라는 칭함을 받는 자리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땅의 고난을 훈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영혼을 살리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 드림으로써 마침내 주님께 "내 완전한 자는 너 하나뿐이로구나"라는 인정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29일(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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