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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7. 23. (목)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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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efEoBgwv5k4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52)] 이사야의 예언(12) 재림주요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의 8가지 특징(04) 상 주시려 오심(02)(이사야40:9~1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efEoBgwv5k4

 

기독론 152

이사야의 예언(12)

재림주요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의 8가지 특징(04)

- 상 주시려 오심(02) -

(이사야 40:9-11)

정보배 목사

원문 영상: https://youtu.be/efEoBgwv5k4

1. 들어가며

  이사야는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주 여호와를 바라보라고 외쳤다. 그분은 친히 팔로 다스리시며 상급을 가지고 오시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보응을 앞세워 오신다(사 40:9-10). 이 예언은 재림하시는 메시아가 악인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충성한 백성에게 상을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재림은 세상의 역사를 끝내는 무서운 사건인 동시에, 주님을 사랑하며 수고한 성도에게는 기다리던 보상의 날이다.

사 40:9-10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구약에서 심판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며,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말씀한다(요 5:22, 27). 이것은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 차례로 심판한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의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의 형편을 친히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자가 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도가 받을 하늘의 상을 한 종류로만 이해하면 성경이 말하는 보상의 여러 방면을 구별하기 어렵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한 하나하나의 일이 천국 집의 재료로 올라가는 보상이 있다. 일생의 경주를 마치고 믿음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과 면류관도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파송하실 종들을 위하여 미리 마련하신 보좌의 자리도 있다. 이 셋은 모두 하늘에서 받는 것이지만 주어지는 기준과 성격과 수여자가 같지 않다.

  이러한 구별은 성도를 경쟁심이나 공로주의로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터 위에서 행한 삶이 심판받고 보상받는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고전 3:11-15).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그릇으로 지으셨으며 내게 어떤 분량과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알고,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으면서 자기 위치에서 끝까지 충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심판자가 되시는지, 천국의 집과 면류관과 보좌는 어떻게 다르며 누가 받는지, 하나님의 종과 이기는 자가 누구이고 성도가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주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예수 그리스도만 완전한 최후 심판자가 되시는가?

  마지막 심판을 맡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신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분이 인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실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과 배신과 고난을 친히 겪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을 관념으로만 아시는 분이 아니라 몸소 체휼하신 분으로서 판단하신다(히 4:15).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의 형편을 전혀 겪지 않은 채 심판하신다면 인간은 자신의 제한된 육체와 고통을 변명으로 내세우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조건 안으로 들어오셨고, 죄는 없으시지만 모든 시험을 받으셨다(히 4:15).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십자가의 길을 완주하셨다(빌 2:6-8). 그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시는 재판장이 아니라, 먼저 순종의 길을 걸어 이기신 재판장이시다.

  예수님은 이기신 뒤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셨다. 주님은 자신이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처럼 이기는 자도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는 통치자의 심판이 아니다. 먼저 종의 형체를 입고 섬기셨고, 유혹과 핍박을 이겼으며,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의 심판이다. 그분 앞에서는 누구도 “당신은 인간이 되어 보지 않았다”라고 항변할 수 없다.

  요한은 마지막 날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 죽은 자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그 보좌 앞에 섰고, 생명책과 행위가 기록된 책들에 따라 심판받았다(계 20:11-12). 구약에서 여호와께 속했던 심판의 권세가 신약에서 인자이신 예수께 집행된다. 이는 여호와와 예수께서 경쟁하거나 서로 다른 심판 기준을 가지신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인간의 구원과 심판을 완성하신다는 뜻이다.

계 20:11-12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사실은 성도에게 두 가지 태도를 요구한다. 하나는 의로우신 재판장을 경외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대제사장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과 억울함과 제한을 모르고 기계적으로 판결하지 않으신다. 동시에 육체의 연약함을 핑계로 삼아 고의로 죄를 붙들고 산 사람을 무조건 두둔하지도 않으신다. 불꽃 같은 눈으로 동기와 행위를 살피되, 사람으로서 모든 길을 걸어 보신 완전한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계 2:18, 23).

  그러므로 재림의 주님을 바르게 알려면 여호와의 공의와 예수님의 체휼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분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회개한 자의 상한 마음도 놓치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은 충성과 은밀한 수고까지 정확히 기억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판결 앞에 엎드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심판하시는 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3. 천국의 세 상급인 집·면류관·보좌는 어떻게 다른가?

  천국에서 성도가 받는 보상은 크게 세 방면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날마다 행한 일에 따라 쌓이는 천국 집과 그 재료다. 둘째는 일생의 경주를 마치고 특정 방면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과 면류관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사명을 맡긴 종들에게 예비하신 보좌의 자리다. 이 셋을 모두 막연히 ‘상급’이라고만 부르면 무엇이 매일 쌓이고, 무엇이 완주 뒤에 주어지며, 무엇이 하나님의 예정과 사명에 연결되는지를 놓치기 쉽다.

  천국 집의 재료는 구원받은 뒤 주님을 위하여 행한 구체적인 일과 연결된다.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복음을 전하고 구제하며, 교회와 성도를 섬긴 일이 하나하나 기록된다. 주님은 속히 오실 때 자신이 줄 상을 가지고 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겠다고 말씀하셨다(계 22:12). 여기서 행한 대로 주어지는 보상은 헬라어로 ‘미스도스’(μισθός, misthos)라고 한다. 일한 것에 대한 품삯이나 보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면류관은 한 번의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품삯과 다르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리고, 맡겨진 분야에서 절제하고 싸워 이긴 사람에게 수여되는 명예로운 보상이다.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브라베이온’(βραβεῖον, brabeion)이라고 하며, 승리자의 머리에 씌우는 관을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 stephanos)라고 한다(고전 9:24-25). 상장과 상품을 구별할 수 있듯, 승리했다는 판정과 그 승리를 드러내는 면류관을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보좌는 구체적인 봉사 하나에 대한 품삯도 아니고, 모든 성도가 같은 조건에서 얻는 일반적인 면류관과도 다르다. 보좌는 천국에서의 지위와 신분, 그리고 왕 노릇하며 심판에 참여하는 사명과 연결된다(계 3:21, 20:4).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특별한 일을 맡길 종을 정하여 보내시고 그들이 감당할 자리를 예비하신다는 것이 이 설교가 말하는 보좌의 예정이다. 다만 예정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충성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맡겨진 길을 버리면 그 자리를 잃을 수 있고, 뒤에 있던 충성된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세 상급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한 사람의 신앙생활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준다. 어떤 이는 작은 봉사를 많이 하여 천국 집의 재료를 풍성히 쌓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오랜 핍박 속에서도 사랑과 인내와 충성을 지켜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목숨 걸고 감당하여 보좌에 앉아 왕 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세 방면의 보상을 함께 받을 수도 있지만, 각각의 판단 기준은 같지 않다.

  상장과 상품의 관계로 이해하면 브라베이온과 스테파노스의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세상에서도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상장을 주고, 그 영예를 나타내는 트로피나 메달을 함께 수여한다. 브라베이온은 경주에서 이겼다는 판정과 상에 해당하고, 스테파노스는 그 승리를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관에 해당한다. 천국 집에 붙는 상장은 그 사람이 충성과 사랑과 인내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증언하며, 금빛 상 위에 놓인 면류관은 그 승리에 대한 영광스러운 상품처럼 주어진다.

  이 설교에서 천국 집의 1층에 붙어 있는 충성상과 사랑상과 인내상 같은 상장은 그 사람의 삶을 요약하여 보여 주는 표지로 설명된다. 천국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시는 것은 아니다. 아직 회개와 준비가 부족한 사람에게 상급을 미리 알려 주면 그것을 이미 자기 것으로 착각하거나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감당할 분량에 따라 조금씩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상급을 궁금해하기 전에 먼저 오늘 순종해야 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안전하다.

  이 구별을 알면 성도는 눈에 보이는 사역의 크기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 알려지지 않은 성도의 은밀한 봉사도 미스도스로 기록되며, 작은 교회를 끝까지 지킨 목회자의 충성도 면류관으로 인정될 수 있다. 반대로 큰 사역을 맡았더라도 사명을 버리고 자기 영광만 구했다면 보좌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행위의 양과 일생의 충성과 맡겨진 사명을 각각 정확한 저울로 달아 보신다.

4. 보상(미스도스)은 어떻게 천국 집의 재료가 되는가?

  미스도스는 일을 한 사람에게 지급되는 품삯과 보상을 뜻한다. 예수님은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가 선지자의 상을 받고,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가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0:41-42). 행동이 작아 보여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 드린 예배 한 번, 누군가를 위한 중보기도 한 번,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한 한마디도 믿음과 사랑으로 행했다면 하늘에 기록된다.

  천국 집의 유일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누구도 이미 닦아 둔 터 외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으며, 각 사람은 그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운다(고전 3:11-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뒤 그분을 위하여 행한 일이 천국 집의 재료가 된다.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그 터 위에 어떤 삶을 건축했는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고전 3:11-13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하나님은 행위의 외형만 보지 않고 그 동기와 진실함을 함께 계산하신다. 같은 헌금을 드려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은밀히 드린 것과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드러낸 것은 같지 않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6:1). 이미 사람의 박수와 명예를 보상으로 받아 버린 행위는 하늘의 재료로 온전히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도 몰라주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행한 것은 불을 견디는 금과 은과 보석 같은 재료가 된다.

  천사는 성도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그 행위는 책에 기록된다(계 20:12). 이 설교에서는 그 기록에 따라 천국의 건축 재료가 올라가 집을 이루는 영적 실제를 설명한다. 몸이 피곤한데도 주님을 사모하여 예배에 참여하고, 형편이 어려운데도 복음을 위하여 드리며, 원망하지 않고 맡은 일을 감당한 수고는 헛되지 않다. 다만 몸만 자리에 있고 마음과 믿음이 전혀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 차이도 정확히 계산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시간만 세는 분이 아니라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렘 17:10).

  행위가 보고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같은 양과 품질의 재료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한 시간 예배를 드렸더라도 온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회개한 사람과 억지로 자리만 지킨 사람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 같은 음식을 만들고 같은 액수의 헌금을 드려도 감사와 사랑으로 행했는지, 생색과 경쟁심으로 행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횟수에 속지 않으시고 각 행위 안에 담긴 믿음과 사랑과 희생을 정확히 달아 보신다(고전 4:5).

  천국의 건축 재료는 죽은 뒤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서 계속 준비된다. 성도는 매일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집을 짓는 건축자와 같다. 원망과 불평으로 섬기면 많은 일을 했어도 남는 재료가 적을 수 있고, 작은 일을 하더라도 주님께 감사하며 정성을 다하면 귀한 보석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상급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한 시간과 한마디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에 관한 실제적인 교훈이다.

  각 사람의 건축은 마지막 날 불로 시험받는다. 불을 견딘 공적은 남아서 상을 받지만, 불타 버린 공적은 손해를 받는다. 그 사람 자신은 구원을 받더라도 불 가운데서 겨우 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고전 3:14-15). 이것은 구원과 상급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선 사람도 세상과 사람을 의식하여 헛된 재료만 쌓았다면 천국에서 풍성한 집을 얻지 못할 수 있다.

고전 3:14-15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러므로 미스도스를 준비하는 길은 거창한 일을 찾는 데 있지 않다. 오늘 맡겨진 작은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충성스럽게 행하면 된다. 음식 한 끼를 만들고 안내하고 청소하며, 아픈 이를 방문하고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하여 회개하고 중보하는 일도 하늘의 재료가 된다. 일의 크기보다 누구를 위하여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가 중요하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은밀히 섬기고, 사람의 칭찬보다 불꽃 같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마 6:3-4).

  이 보상은 하나님께 무엇을 사거나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공로가 아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생명과 시간과 물질도 먼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다만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그 은혜에 어떻게 응답했는지가 집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미스도스의 교훈은 성도를 탐욕스럽게 만들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까지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매일의 작은 순종을 소중히 여기게 한다.

5. 상(브라베이온)과 면류관(스테파노스)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브라베이온은 경기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으므로 성도도 상을 받도록 달려야 한다고 말했다(고전 9: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주에 잠시 참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끝까지 달려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뜨겁게 봉사했거나 잠시 많은 일을 했다는 기억만으로는 이 상을 받을 수 없다.

고전 9:24-25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경주에서 이기려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 달리고 싶을 때만 달리고 힘들면 곧 포기하는 사람은 결승선에 이를 수 없다. 성도도 죄와 육신과 세상의 유혹을 끊고,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 브라베이온은 일생을 다 달아 보신 뒤 “너는 이 분야에서 끝까지 이겼다”라고 인정하시는 영예로운 판정이다. 미스도스가 개별 행위마다 쌓이는 보상이라면 브라베이온은 삶의 한 경주를 완주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스테파노스는 승리자의 머리에 씌우는 관이다. 고대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관을 씌워 그 승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듯, 하늘의 면류관은 그 사람이 어떤 싸움을 싸우고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를 증언한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킨 뒤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위하여 예비되었다고 고백했다(딤후 4:7-8). 면류관은 시작할 때 받은 것이 아니라 달려갈 길을 마친 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성경은 여러 방면의 면류관을 말한다.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고(약 1:12),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도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계 2:10). 양 떼의 본이 되어 맡은 일을 감당한 목자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받는다(벧전 5:2-4). 바울은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성도들을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불렀다(살전 2:19). 이 모든 말씀은 면류관이 막연한 장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싸움과 충성과 열매에 대한 주님의 인정임을 보여 준다.

  충성의 면류관은 맡겨진 일을 변함없이 감당한 사람에게, 사랑의 면류관은 미워할 만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사랑한 사람에게, 인내의 면류관은 오랜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일생의 삼분의 이를 잘 달렸더라도 마지막에 사명을 포기하면 완주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면류관은 한때의 열심보다 끝까지 이어진 지조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많은 일을 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다(딤후 4:7).

  이 설교는 천국에 준비된 면류관의 모양과 빛과 보석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증언한다. 어떤 것은 왕관과 같고 어떤 것은 월계관이나 티아라와 같으며, 그 위에 박힌 보석은 일생의 수고와 충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만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면류관의 아름다움은 외형에 있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감당한 고난과 사랑의 깊이에 있다. 면류관을 보고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되는 까닭은 그 관이 그의 승리한 삶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면류관을 받는 데에는 직분의 유명세나 교회의 규모가 결정적이지 않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몇 사람을 돌보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전하며 아픈 성도를 찾아간 목회자는 충성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을 맡고도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미루고 명예만 누렸다면 주님의 인정을 받기 어렵다. 평신도도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사랑과 인내와 전도와 봉사를 끝까지 감당하면 여러 방면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

  면류관은 예수님께서 친히 씌워 주시는 상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같은 길을 걸으셨기에, 주님은 승리한 인간에게 “나도 그 길을 걸었는데 너도 끝까지 왔구나”라고 인정하실 수 있다. 면류관에 담긴 영광은 보석이나 모양의 화려함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의 눈물과 희생과 충성과 사랑이 그 관을 통하여 드러난다는 데에 있다. 천국에서 면류관을 쓴 사람을 존경하는 까닭은 장식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의 삶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이랬다저랬다 하며 믿음의 경주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은 오늘도 결승선을 바라보고 달린다. 세상이 너무 좋아 주님께 늦게 오시라고 말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럽지 않도록 믿음을 지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의 성과가 작고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사명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마지막까지 지조를 지킨 사람을 잊지 않으신다.

6. 보좌의 자리는 누가 예비하며 예정과 충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보좌는 천국 집이나 면류관과 달리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는 지위와 신분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단지 좋은 의자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심판에 참여할 권한을 받는다는 뜻이다(계 20:4). 그러므로 보좌의 자리는 사명과 통치와 책임을 함께 포함한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 이십사 보좌가 있고, 그 위에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가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계 4:4). 구약에서는 한 분 하나님의 보좌가 중심이었지만 신약의 계시는 이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리를 더 분명히 보여 준다. 이십사 보좌와 더불어 이 설교는 14만 4천 명에게 마련된 보좌의 배열도 설명한다. 보좌는 모두 같은 의미 없는 좌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과 충성의 정도에 따른 질서를 가진다.

  설교자가 천국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14만 4천 명의 보좌는 약 칠십 줄로 배열되어 있고, 앞줄은 인원이 적으며 뒤로 갈수록 부채꼴처럼 수가 많아진다. 이것은 성경 본문에 도면처럼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영적 체험을 통하여 설명한 천국의 질서다. 그러므로 숫자와 배열만을 교리의 전부로 고정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에도 사명과 책임에 따른 지위의 차이가 있으며 그 자리가 충성과 연결된다는 핵심을 붙들어야 한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나라에서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는지를 물으신 뒤,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자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0:20-23). 이는 보좌의 자리를 아버지께서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아들은 면류관을 수여하시지만, 보좌의 예정은 만세 전에 계획하시는 아버지의 주권과 연결된다.

마 20: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예정은 기계적인 고정과 같지 않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특정한 시대와 나라와 가정에 보내 사명을 맡기셨더라도, 그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순종하거나 거역할 수 있다. 사울왕은 왕으로 세움받았지만 불순종하여 버림받았고(삼상 15:22-23, 26), 가룟 유다는 사도로 부름받았지만 자기 길을 선택하여 탈락했다(행 1:16-20, 25). 데마도 바울의 동역자였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딤후 4:10). 준비된 자리가 있다고 해서 충성하지 않은 사람까지 자동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설교는 보좌의 예정이 약 95퍼센트 정해져 있지만 약 5퍼센트의 이동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성경에 숫자로 제시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천국의 질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목회적 표현이다. 핵심은 예정이 있으나 고정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앞자리를 예정받은 사람이 사명을 버리면 탈락할 수 있고, 뒤에 있던 사람도 목숨을 걸고 충성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의 배정만 보지 않고 실제로 그 길을 완주했는지를 판단하신다.

  뒤쪽 자리에서 몇 줄 앞으로 가는 것보다 앞쪽 자리에서 더 앞으로 가는 일이 훨씬 어렵다고 설명하는 까닭도 책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까운 보좌일수록 맡겨진 시대적 사명과 희생이 크고, 작은 불순종도 더 엄중하게 다루어진다. 높은 자리를 바라기 전에 그 자리에 따르는 잔과 세례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앞자리는 명예만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많은 영혼을 책임지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자리다.

  보좌를 얻는 자에게는 주님의 잔과 세례가 요구된다. 그 잔은 고난의 잔이며, 그 세례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는 죽음의 길과 연결된다(막 10:38-40). 높은 지위를 탐하는 마음만으로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는 더 많이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더 무거운 책임을 지고 더 깊이 희생한 자의 자리다. 모세도 큰 사명을 맡았기에 한 번의 불순종을 엄중하게 판단받았다(민 20:10-12).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다(눅 12:48).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자신을 왕의 그릇으로 만들어 달라고 명령할 수 없듯, 사람도 자기 욕망으로 보좌의 사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사 64:8).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의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의 그릇으로 지으신다(마 25:14-15). 중요한 것은 남의 분량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분량을 남기는 것이다. 한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남긴 종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다(마 25:20-23).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보좌에 관한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자신이 특별한 왕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분량을 겸손히 인정하게 한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은 더 두렵고 떨림으로 충성해야 하며, 평신도는 자신의 자리가 작다고 낙심하지 않고 맡겨진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리를 탐한 사람보다 자신의 잔을 마시고 끝까지 책임을 감당한 사람에게 보좌를 허락하신다.

7. 하나님의 종 14만 4천과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7장은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바람이 잠시 붙들린 가운데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인침받은 자의 수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나온 14만 4천 명이다(계 7:1-4). 본문은 이들을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부른다. 종은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수행하도록 보냄받은 사람이다.

계 7:3-4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이 설교는 여기의 이스라엘을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이기는 자’라는 영적 의미로 해석한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창 32:24-28).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혈통의 명칭인 동시에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의 표상이 된다. 요한계시록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1만 2천 명이 똑같이 나온다는 점도 단순한 인구 통계보다 영적인 충만수로 이해하게 한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열둘은 하늘의 수 삼과 땅의 수 사가 결합한 수이며, 일천은 충만하고 많은 수를 나타낸다. 열둘에 일천을 곱한 1만 2천이 열두 지파에 충만하게 배정되어 14만 4천을 이룬다. 이 숫자는 하나님께서 각 족속과 시대 가운데 이기는 종들을 충분히 준비하여 보내신다는 질서를 보여 준다. 단 지파가 목록에 없고 다른 지파가 포함된 사실도 육적인 지파 명단만으로는 모든 의미를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계 7:5-8).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기 길로 그릇 행하는 세상에 시대를 깨울 종을 보내신다(사 53:6). 구약에서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신약에서는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을 보내셨다.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았다(갈 2:7-8).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듯 사명을 골라 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그 시대에 필요한 일을 감당했다.

  사명자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악한 영들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가능성과 분량을 보고 그 길을 가로막으려 할 수 있다. 어떤 사람 안에 악한 영이 많이 들어 있는 까닭이 그가 지은 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장차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을 것을 막으려는 공격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공격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죄가 남보다 많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사명자라고 자랑해서도 안 된다. 더욱 철저히 회개하여 방해하는 영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감추어 두신 보화를 드러내야 한다.

  설교자는 어린 시절 시주를 받으러 온 승려들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았던 경험을 떠올린다. 훗날 영적인 세계를 알게 된 뒤에는 악한 영들이 자신을 불교의 설법자로 사용하려고 많은 영을 집어넣어 준비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 쓰실 사람을 원수가 미리 알아보고 다른 길로 끌고 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 체험은 모든 영적 방해를 사명자의 표지로 단정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죄 때문에 들어온 영과 사명을 방해하려고 들어온 영을 함께 분별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사명자는 자신 안의 악한 영을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회개를 통하여 그 영들을 제거할수록 하나님께서 심어 두신 말씀의 은사와 영적 권세가 드러난다. 땅속의 유물을 조심스럽게 발굴하듯 하나씩 죄를 회개하고 방해물을 걷어 내야 한다. 그러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계획이 방언 통역과 환상과 말씀과 주의 종의 인도를 통하여 점차 확인될 수 있다. 발견된 사명이 클수록 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그 사명에 합당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모든 계획을 알려 주지 않으시고 감당할 분량에 따라 조금씩 열어 주신다. 고대 유적을 발굴할 때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며 시대와 가치를 확인하듯, 성도도 회개와 순종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을 점차 발견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보좌와 면류관을 먼저 보여 주면 교만하거나, 이미 얻은 것처럼 착각하여 충성을 멈출 수 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종은 더 많이 맞는다는 경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로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사람을 보호하신다(눅 12:47-48).

  14만 4천과 이기는 자에 관한 말씀의 목적은 숫자를 가지고 자신이 특별한 무리에 속했다고 자랑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각 나라와 족속 가운데 시대를 이끌 종을 보내시며, 그들이 영적 싸움에서 이기고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대한민국도 마지막 때 복음과 선교를 위하여 경제적·기술적 자원과 영적 사명을 받은 나라로 쓰임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받은 복을 자기만 누리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에 내어준다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과거 대한민국은 쌀밥조차 마음껏 먹기 어려웠고 외국의 자전거와 전기밥솥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산업과 기술이 발전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전자제품과 반도체를 공급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와 기술은 우연히 자랑하고 소비하라고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의 선교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맡겨진 자원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가 이 목적을 잊으면 풍요는 사명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영혼을 잠들게 하는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큰 은사와 권세를 자랑하기 전에 그에 따르는 책임을 두려워해야 한다. 악한 영의 공격과 종교적인 반대와 세상의 압력을 견디며 끝까지 바른 길을 가야 한다. 동시에 성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종의 음성을 무조건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분별하고,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음성이라면 귀를 기울여 함께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행 17:11). 이기는 종과 협력하는 성도도 각자의 충성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아름다운 열매를 남긴다.

8. 성도는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어떻게 발견하고 완주해야 하는가?

  사명을 완주하려면 먼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 한다. 지하철 노선도에서 현 위치를 알아야 목적지로 갈 수 있듯, 성도도 자신의 믿음과 은사와 분량을 정직하게 살펴야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큰 직분과 보좌만 꿈꾸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회개하고, 작은 일에서 충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그릇으로 지으셨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달란트를 맡기신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찬양과 섬김과 구제에 뛰어나다. 여러 은사를 함께 받은 사람도 있고 눈에 띄는 재능이 적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작은 친절과 중보와 전도도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의 책임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의 책임을 감당하면 된다(마 25:15-23).

  주의 종이 되는 일도 나이가 들었다고 갑자기 선택할 수 있는 명예직이 아니다.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 영적인 전쟁을 배우지 않으며 평신도로서 기본적인 충성도 감당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만으로 시대적 사명자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종이라면 오래전부터 환경과 훈련과 고난을 통하여 준비시키신다. 부르심을 느낀 사람은 직함부터 구할 것이 아니라 성경과 원어를 배우고, 회개와 기도와 섬김으로 자신이 정말 그 길을 감당할 그릇인지를 검증받아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날마다 회개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하면 내면을 덮고 있던 악한 영의 방해가 제거되고 하나님이 심어 두신 은사와 사명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보좌의 순서나 면류관의 종류를 알려 달라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지금 알아야 할 만큼만 알려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행해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는 것이 주님의 원칙이다(눅 16:10).

  사명자는 고난이 닥칠 때 자신의 부르심을 쉽게 버리지 않아야 한다. 진리를 전하면 종교 지도자와 세상의 반대를 받을 수 있고, 오해와 비난과 외로움도 겪을 수 있다. 예수님도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고발을 받으셨고,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받았다(요 15:18-20). 그렇다고 모든 비판을 핍박이라고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성경 앞에 점검하며 잘못은 회개하되,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사람의 위협 때문에 사명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종과 아름답게 연합하되 자신의 책임을 목회자에게 떠넘기지 않아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고 방향을 제시하지만, 각 사람의 회개와 순종과 영적 싸움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성도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맡은 자리가 있다. 말씀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천하여야 하며,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고 부족함을 보완해야 한다. 형제가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복을 명하신다(시 133:1-3).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우상화하거나 모든 말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성령의 조명 안에서 말씀을 분별하되, 시대를 깨우기 위하여 주신 참된 말씀이라면 완고한 마음으로 밀어내지 않아야 한다. 종은 혼자 하나님의 일을 완성할 수 없고 성도도 혼자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기도하고 봉사하며 물질로 돕는 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연합할 때 한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름부음이 나타난다.

  자신의 위치에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지 않는다. 손이 눈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눈이 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듯, 그리스도의 몸에는 서로 다른 지체가 필요하다(고전 12:14-21).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만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중보하고 안내하며 음식을 만들고 차량을 운행하는 사람도 행한 대로 보상받는다. 각 지체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교회는 한 몸으로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한 사명도 신앙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경제적 부와 기술과 선교의 문을 주셨다면 그것을 복음과 세계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자유롭게 예배하고 전도할 수 있는 질서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입법·행정·사법이 서로 견제하는 자유민주적 질서가 지켜지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분노만 쏟아내는 것으로 나라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교회가 우상숭배와 음란과 탐욕을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려야 한다(대하 7:14).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사명을 완주하는 사람은 남의 보좌를 빼앗으려 하지 않고 자기 길을 끝까지 간다. 오늘의 작은 순종은 미스도스로 쌓이고, 일생의 충성은 브라베이온과 스테파노스로 인정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완수한 자는 준비된 보좌에 앉게 된다. 결국 세 상급을 준비하는 길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회개하며, 맡겨진 자리에서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량이 작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큰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할 이유도 없다. 많은 것을 맡은 자는 더 큰 심판과 책임을 지며, 작은 것을 맡은 자도 충성하면 같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아시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아신다. 성도는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자리보다 오늘 순종해야 할 말씀에 집중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자신에게 예비된 길을 완주해야 한다.

9. 나오며

  재림주이자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받을 천국의 세 상급을 살펴보았다. 구약에서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신약에서 아들로 오셨고, 인자가 되어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고난을 체휼하신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을 맡으셨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조건에서 순종하여 이기신 분이므로 누구보다 의롭고 완전하게 판단하신다.

  천국의 보상에는 서로 다른 세 방면이 있다. 보상인 미스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날마다 행한 기도와 예배와 전도와 구제와 섬김을 천국 집의 재료로 쌓이게 한다. 상인 브라베이온과 면류관인 스테파노스는 일생의 경주를 마치고 특정 방면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인정이다. 보좌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나라와 시대적 사명을 위하여 예비하신 지위이며,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심판에 참여하는 책임의 자리다.

  보좌의 자리는 예정되어 있지만 충성과 무관하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사울과 가룟 유다와 데마처럼 부르심을 받고도 자기 길을 선택하여 탈락할 수 있으며, 뒤에 있던 사람도 목숨을 걸고 충성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각 사람의 그릇과 분량을 정하시지만, 사람은 자유의지로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 14만 4천은 각 시대와 족속 가운데 인침받고 이기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사명자들을 보여 준다. 특별한 사명은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더 무거운 책임이다. 악한 영의 방해와 세상의 핍박을 이기고 회개와 순종으로 자신에게 감추어진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성도도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종의 음성을 성경으로 분별하여 듣고, 자신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맡은 몫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남의 보좌를 탐하거나 자신의 분량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작은 순종 하나도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으며,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오랜 충성도 주 예수께서 기억하신다. 오늘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쌓고, 선한 싸움을 싸워 믿음을 지키며, 아버지께서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운 심판주로만 만나지 않고 천국 집과 면류관과 보좌의 상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으로 기쁘게 맞이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23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재림과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분이 베푸시는 세 가지 차원의 하늘 보상을 심도 있게 다룹니다. 정보배 목사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고난을 겪으셨기에 인류를 공정하게 심판할 완전한 자격을 갖추셨음을 강조하며, 성도가 천국에서 받는 상급을 행위에 따른 천국 집의 재료, 일평생의 승리를 기념하는 영광의 면류관, 그리고 예정된 사명자들에게 부여되는 보좌의 자리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통치 행정 안에서 각 사람의 분량에 따른 직무와 신분이 존재하지만, 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와 끝까지 완주하는 충성심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각자에게 맡겨진 위치를 자각하고 마지막 시대의 영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최고의 영예를 얻도록 독려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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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0 [사역자론(0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자로 쓸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는가?(행7:20~29)_2026-07-10(금) file 갈렙 2026.07.09 198 https://youtu.be/2LFwz7hUi4o
2349 [사역자론(05)] 나도 영적인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딤후1:3~6)_2026-07-08(목) file 갈렙 2026.07.08 185 https://youtu.be/Y73JlnNsM7A
2348 [사역자론(03)]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으로서 첫번째 조건은?(딤전4:11~16)_2026-07-08(수) file 갈렙 2026.07.08 141 https://youtu.be/d2eA95ls78Q
2347 [사역자론(02)]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사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딤후2:20~21)_2026-07-07(화) file 갈렙 2026.07.07 169 https://youtu.be/tbaiOFZ7aCo
2346 [온라인새벽기도회(26.07.06)] [사역자론(01)] 하나님의 부르심의 2가지 종류와 그 사명은 무엇인가?(벧후1:10~11)_2026-07-06(월) file 갈렙 2026.07.04 232 https://youtu.be/7pnbq6R3bT4
2345 [기독론(139)] 다윗의 아들 솔로몬(17) 본받지 말아야 할 솔로몬의 다른 모습은 무엇이었나?(열왕기상10:21-11:13)_2026-07-03(금) file 갈렙 2026.07.03 206 https://youtu.be/eoUn1kt1QxA
2344 [기독론(138)] 다윗의 아들 솔로몬(16) 여자가 성숙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아가5:2~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file 갈렙 2026.07.02 226 https://youtu.be/ksvG_UDIzPQ
2343 [기독론(137)] 다윗의 아들 솔로몬(15) 신부들 곧 천국의 성도들의 4가지 신분의 차이(아가 6:8-9)_2026-07-01(수) file 갈렙 2026.07.01 271 https://youtu.be/WvLIXLho9vE
2342 [기독론(136)] 다윗의 아들 솔로몬(14) 여자의 호칭에 나타난 왕의 바람은 무엇이었는가?(아가6:4~10)_2026-06-30(화) file 갈렙 2026.06.30 261 https://youtu.be/7nbEAMAuoUk
2341 [기독론(135)] 다윗의 아들 솔로몬(13) 왕이 진정 바라는 신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아가서 7:10~13)_2026-06-29(월) file 갈렙 2026.06.29 199 https://youtu.be/TXu3cRPtb8c
2340 [기독론(133)] 다윗의 아들 솔로몬(11) 아가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8가지 신분(05) 창조주와 재림주(아가서 8:14)_2026-06-26(금) file 갈렙 2026.06.26 266 https://youtu.be/UqEtW3mcZ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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