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68)] 에스겔 선지자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였는가?(겔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ZzcIuC5EjsI
기독론(168)
에스겔 선지자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였는가?
(겔 1:1-3)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장차 일어날 일을 말로 전하는 사람이다.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나고 베들레헴에서 나며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것을 선포한 예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사 7:14, 9:1-2, 미 5:2, 슥 9:9). 그런데 말로만 예언하지 않고 자기 몸과 생활을 통하여 장차 이루어질 일을 미리 보여 준 선지자도 있다. 이러한 사람을 '행동 예언자'라고 부를 수 있다.
에스겔은 환상을 많이 본 환상 선지자이면서 대표적인 행동 예언자다. 그는 네 생물과 하나님의 보좌, 성전의 죄악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장면, 마른 뼈가 살아나는 골짜기,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의 분배를 환상으로 보았다. 그 환상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과 회복,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과 영원한 천국의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에스겔의 독특함은 환상에만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몸과 결혼과 식사와 침묵과 여러 행동을 표징으로 사용하셨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한다는 뜻으로 삼백구십 일 동안 왼쪽으로 눕고 다시 사십 일 동안 오른쪽으로 누웠다. 서른 살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과 말씀을 받아 사역을 시작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아흔 번 이상 ‘인자’라고 불렸다. 그의 생애가 장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미리 비추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살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주변의 선지자들이 모두 백성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할 때 혼자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면 배척과 압박을 받는다. 실제 성취가 늦어지거나 백성의 불순종 때문에 예언한 모습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라는 비난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말씀하신 것을 가감 없이 전하고 몸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참된 선지자다.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있다. 다른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가족과 환경과 영적 짐이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이루실 뜻이 있음을 살펴야 한다. 그 길이 힘들어도 주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드러나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에스겔이 말과 환상과 행동을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를 예표했으며, ‘인자’라는 호칭과 그의 순종이 오늘 우리의 사명에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였는가?
에스겔은 먼저 말로 그리스도를 예언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을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한 목자를 세우실 것인데 그가 하나님의 종 다윗이라고 하였다(겔 34:23). 역사적인 다윗이 다시 환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고 좋은 꼴을 먹이며 목숨을 버리는 참목자로 오셨다(요 10:11).
그러나 에스겔은 말로만 예언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 시작부터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닮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에스겔은 서른 살에 하늘의 열리면서 성령이 그에게 임하면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으며,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그 위에 있었다(겔 1:1-3). 예수님도 약 서른 살에 세례받으신 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며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눅 3:21-23).
둘째로, 에스겔은 자신의 몸으로 장차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언하였다. 에스겔의 몸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여 주는 표징이 되었다. 그는 토판에 예루살렘을 그리고 포위 공격의 모형을 만들었으며, 왼쪽과 오른쪽으로 오랫동안 누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였다. 먹을 음식과 물의 양도 제한받았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나누어 불사르고 칼로 치고 바람에 흩었다(겔 4-5장). 장차 예루살렘에 임할 기근과 칼과 흩어짐을 자신의 몸으로 먼저 보여 준 것이다.
그에게 환상과 행동은 서로 떨어진 두 사역이 아니었다. 환상은 하나님께서 보고 알게 하신 뜻이고, 행동은 그 뜻을 선지자의 삶 안에 새겨 백성이 눈으로 보게 한 계시였다. 에스겔은 하늘의 보좌를 본 뒤 땅에서 제멋대로 살 수 없었다. 그가 본 하나님의 거룩함과 심판을 자기 몸의 순종으로 증언해야 했다. 그러므로 참된 환상은 호기심을 채우는 신비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회개와 순종과 사명으로 이어진다.
이 행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예표는 죄악을 담당한 일이다. 에스겔은 자기가 짓지 않은 민족의 죄를 짊어지는 자세로 오랜 시간 누워 있어야 했다. 이는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인류의 죄와 저주를 자기 몸에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미리 보여 준다(사 53:5-6, 벧전 2:24). 에스겔이 제한된 기간 동안 상징적으로 담당한 것을 예수님은 실제 속죄 사역으로 완성하셨다.
또한 셋째로,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받고 백성에게 전달하는 중보자의 위치에 섰다. 패역한 백성이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전해야 했고, 악인과 의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 피 값을 자기 손에서 찾겠다는 파수꾼의 책임을 받았다(겔 3:17-21). 예수님도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다(요 8:26-28).
마지막으로 넷째로, 에스겔 자신이 계시의 표징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반복하여 ‘인자’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에스겔도 사람의 아들로서 연약함과 고난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장차 오실 인자의 삶을 미리 나타냈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 예언자와 환상 선지자에 머물지 않고 자기 존재와 생활로 그리스도를 예표한 행동 예언자였다.
3. 행동 예언은 무엇이며 말씀 예언과 어떻게 다른가?
말씀 예언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내용을 입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메시야의 탄생 장소와 사역과 고난과 재림을 말로 알려 주는 예언이 그 예다. 행동 예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행동을 선지자가 실제로 수행하여, 장차 일어날 사건과 하나님의 뜻을 눈에 보이게 전달하는 것이다. 말이 귀에 들리는 계시라면 행동은 몸으로 보여 주는 계시다.
행동 예언은 연극이나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과장이 아니다. 선지자 자신의 편안함과 명예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몸을 복종시키는 순종이다. 에스겔은 한쪽으로 장기간 누워 있어야 했고, 허리를 줄로 묶은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두고 팔을 걷어 올린 채 예언해야 했다(겔 4:7-8). 몸의 고통과 불편함 자체가 백성의 죄와 임박한 심판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다.
행동 예언자는 말한 내용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자기 생각으로 꾸며 내거나, 환난이 두려워 받은 말씀을 숨기면 표징의 기능을 잃는다. 당시에는 적은 보상과 먹을 것을 위하여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에스겔은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했다(겔 13:1-10). 참된 선지자는 인기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진실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환상이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먼저 그 열매를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자신을 높이는 대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지,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는 대신 회개로 이끄는지를 살펴야 한다. 악한 영도 놀라운 장면을 보여 주고 사람의 생각을 속일 수 있으므로, 충분히 회개하지 않은 채 환상만 의지하면 받은 것을 잘못 해석할 위험이 크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분별하고 자기 삶이 거룩해지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사명에는 큰 압박이 따른다. 기존의 교리와 신학 체계를 흔드는 말씀을 전하면 주변의 지도자들이 불러 경고하고 직분과 명예를 막을 수 있다. 예레미야도 다른 선지자들이 평안을 외칠 때 심판을 선포하다가 박해와 감금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을 부탁하셨다면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앞세워야 한다.
필자에게 맡겨진 회개와 천국복음 사역도 이와 같은 책임이 있다. 필자는 평범하고 우상숭배에 찌든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회개하여 몸 안의 악한 영들을 내보내고 그들이 만든 집까지 파괴하였다. 악한 영의 집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그곳에서 후임자의 다른 영이 올라올 수 있으므로, 회개의 분량을 채우고 진실한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 진실성과 믿음과 간절함을 보시고 허락하실 때 악한 영의 집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내용은 에스겔의 행동 예언과 같은 성경 사건은 아니지만, 맡겨진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갈 사람을 찾으신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난과 오해를 견디며 진리를 삶으로 증언할 때 그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는 표징이 된다.
4. 서른 살의 소명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어떻게 닮았는가?
에스겔은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그발 강가의 포로들 가운데 있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이어 여호와의 말씀이 제사장 부시의 아들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그 위에 있었다. 제사장이 본격적으로 직무를 시작할 나이에 성전이 아닌 바벨론 포로지에서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도 약 서른 살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때 곧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임했으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마 3:16-17, 눅 3:21-23). 이처럼 에스겔과 예수님 모두 서른 살 무렵, 하늘이 열리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공통점은 단순히 나이가 같다는 데 있지 않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힌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예수님은 죄와 사탄에게 붙잡힌 인류에게 천국복음을 전하고 자유를 주기 위하여 오셨다. 에스겔이 하늘의 환상을 보고 말씀을 받은 뒤 백성에게 나아갔듯, 예수님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광야의 시험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마 4:1, 17).
에스겔에게 임한 환상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보여 주었다. 그는 바벨론 포로 상황과 예루살렘 성전의 죄악을 보았고, 앞으로 임할 멸망과 포로 귀환과 마른 뼈의 회복과 새 성전을 보았다. 참된 환상의 은사는 현재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경륜도 보게 하신다.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의 새 성전과 생명수 환상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회와 영원한 천국까지 바라보게 한다.
소명을 받는 순간부터 에스겔의 삶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삶이 되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을 보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명령하신 행동을 해야 했다. 예수님도 자기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요 4:34, 6:38). 참된 소명은 은사와 권세를 얻는 영광만이 아니라 자기 뜻을 내려놓고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순종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어떤 계기로 부르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병과 고난과 가족 문제 때문에 주님께 나왔더라도,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이 임했으면 작은 순종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른 살의 에스겔과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어서서 자기에게 맡겨진 공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5. 390일과 40일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무엇을 예표하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범죄한 햇수대로 삼백구십 일을 정하셨고, 그 기간이 끝나면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사십 일 동안 담당하게 하셨다.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한 행동 예언이었다(겔 4:4-6).
한 방향으로 오랫동안 누워 몸을 돌리지 못하는 일은 큰 고통이다.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면 몸에 욕창이 생길 수 있으므로 누운 환자도 자세를 바꾸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자기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표징을 앞세워야 했다. 허리를 줄로 동인 것처럼 정한 날이 차기까지 자세를 바꾸지 못하고 민족의 죄악을 몸으로 짊어졌다(겔 4:8).
삼백구십 일과 사십 일을 합하면 사백삼십 일이 된다. 필자는 이 수를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와 연결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뒤 출애굽에 이르기까지 사백삼십 년이 언급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성전 시대를 지나 바벨론 포로에 이르는 역사도 죄악을 담당하는 사백삼십 년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출 12:40-41, 갈 3:17). 에스겔은 하루를 일 년으로 삼아 그 민족의 긴 죄악을 압축하여 몸으로 보여 주었다.
이 행동은 죄가 없는 사람이 다른 이들의 죄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으셨으며,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5-6). 에스겔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담당했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온 인류의 죗값과 저주를 담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담당하려면 사람의 아들로 오셔야 했다. 피곤함과 배고픔과 아픔을 실제로 겪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며 피 흘려 죽을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하나님으로서 속죄할 자격을 가지셨고, 사람으로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에스겔이 인간의 몸으로 민족의 죄악을 담당한 표징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죄를 짊어지실 성육신과 십자가를 미리 보여 준다.
요한복음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도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다.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살핀 뒤 불신앙으로 광야를 방황한 실제 기간 가운데 서른여덟 해가 언급된다(신 2:14).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일으키신 것은 오랜 광야의 고난을 지나 이제 메시야가 백성을 자유롭게 하고 약속의 기업으로 인도하러 오셨음을 보여 주는 표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요 5:5-9).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오롯이 담당해야 할 몫이 있다. 물론 죄를 속량하는 구주는 오직 예수님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대속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과 공동체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며, 다른 사람이 피하려는 수고와 고난을 감당하는 책임은 각자에게 주어진다.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삶에 나타난다.
6. ‘인자’라는 호칭에 담긴 네 가지 의미는 무엇인가?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90번 이상 ‘인자’라고 부르신다. 정확히는 93번이다. 이러한 호칭은 구약의 다른 선지자에게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다니엘에게 한 번 사용된 사례가 있을 뿐이다(단 8:17).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반복하여 '인자'라고 하셨다. 머리 둘 곳 없는 인자,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인자, 안식일의 주인인 인자, 땅속에 사흘 동안 있을 인자,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올 인자라고 말씀하셨다(마 8:20, 9:6, 12:8, 40, 16:27).
‘인자’는 히브리어 표현으로 ‘아담의 아들’ 곧 사람의 아들을 뜻한다. ‘벤’은 아들이고 ‘아담’은 사람이다. 에스겔이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의 아들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지만 구원 사역을 위하여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에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렇다면 왜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자라고 불렀고, 그의 예언 사역 내내 그를 인자라고 불렀을까?
겔 02:03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노라
겔 0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겔 33:0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
겔 37:0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겔 40:04 인자야, 너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첫째 의미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 에스겔은 신이 아니라 피곤하고 배고프며 몸에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장기간 한쪽으로 눕고 제한된 음식을 먹으며 백성의 반역을 견뎌야 했다. 예수님도 인자로 오셔서 배고픔과 피곤함과 슬픔과 육체의 고통을 실제로 겪으셨다. 인자라는 호칭은 구원 사역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신의 흉내가 아니라 참사람의 순종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둘째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순종함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 에스겔이 패역하고 얼굴이 뻔뻔하며 마음이 굳은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려면 하나님의 영과 권능을 의지해야 했다(겔 2:2-4).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연약함을 인정할수록 자기 지혜보다 하나님을 붙들고 받은 말씀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셋째 의미는 하늘 계시의 전달자라는 위치 때문이다. 에스겔은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중보적 사명을 가졌다.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에스겔은 실제로 하늘의 보좌와 영적 실상을 보고 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내용을 바꾸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것을 정확히 전해야 했다.
넷째 의미는 계시의 표징 자체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계시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몸으로 살아 냈다. 그의 서른 살 소명과 열린 하늘, 죄악 담당과 고난, 인자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삶을 미리 비추었다. 예수님도 단지 아버지의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가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다(요 1:14). 인자는 계시의 전달자이면서 동시에 그 계시를 자기 삶으로 드러내는 표징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은 신성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담의 후손과 같은 참사람의 자리로 낮아져 인간이 담당해야 할 순종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인류를 구원할 자격과 생명을 가지셨고, 사람이시기에 우리 대신 시험과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실 수 있었다. 인자라는 이름에는 성육신의 낮아짐과 십자가의 고난, 부활과 재림의 영광이 함께 들어 있다.
이 네 가지 의미는 오늘의 사명자에게도 적용된다. 자신이 연약한 사람임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며, 받은 계시를 가감 없이 전하고, 말한 진리를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지식과 말만 앞서고 삶이 따르지 않으면 행동 예언자의 길을 갈 수 없다. 사람의 아들로서 고난을 감당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인자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7. 사람에 대한 예언은 왜 순종에 따라 성취가 달라지는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므로 반드시 성취된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셨고 고난받고 죽고 부활하셨으며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특정 사람과 공동체를 향한 예언은 그들이 믿고 순종하느냐에 따라 성취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길과 사명을 보여 주셔도 사람이 거부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실 수 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의 분배가 역사 속에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이 원리에 적용된다. 에스겔이 환상을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예언을 받을 만큼 회개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성취하시고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하신다. 불순종한 담당자에게서 촛대가 옮겨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경륜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성취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의 종으로 쓰임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받았다면 성경을 배우고 회개하며 맡겨질 일을 준비해야 한다. 작은 일은 무시하면서 큰 사명만 기다리는 사람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과 같다(마 25:24-30).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신 뒤 더 큰 것을 맡기신다.
필자도 특별히 뛰어난 머리나 학벌 때문에 회개와 천국복음의 사명을 맡은 것이 아니다. 한 번 읽고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성경을 반복하여 읽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할 수 없으므로 날마다 주님께 묻고 성령의 깨우침을 구하였다. 그렇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읽자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했던 영적 진리들이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상숭배의 영이 많이 내려온 가정에서 필자를 태어나게 하셨고 그 영들을 실제로 처리하는 길을 걷게 하셨다. 악한 영을 하나 내보내도 그 집이 파괴되지 않으면 다른 영이 다시 올라오는 체험을 통하여 충분하고 진실한 회개의 필요성을 배웠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삶 자체가 다른 영혼들에게 회개의 길을 보여 주는 표징이 되었다.
사람을 향한 예언은 운명표가 아니라 순종으로 들어가야 할 초청이다. 하나님이 하시지만 사람을 통하여 하시며, 그 사람에게 상을 주기 위하여 수고에 참여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즉시 직접 처리하실 수 있지만 연약한 사람에게 말씀과 은사와 책임을 맡기신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수고가 천국의 상급으로 남는다.
8. 우리는 맡겨진 고난과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에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첫째, 자신에게만 주어진 몫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가족이 감당하지 못할 완고한 배우자나 자녀가 곁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영혼을 붙들고 천국으로 이끌려는 뜻이 있을 수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짐을 주셨느냐고 원망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으므로 내게 맡기셨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의 길과 자기 길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늙어서는 남이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될지를 묻자,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요 21:18-22).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고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으며, 우리 각자에게도 고유한 길이 있다.
셋째, 연약함 때문이라도 사명을 포기하지 말고 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자신이 똑똑하지 않으면 더 많이 읽고 확인하면 된다. 사람의 평가와 기존 체계의 압박이 두려워도 하나님께 받은 진리를 전해야 한다. 에스겔은 패역한 백성이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전했다.
넷째, 회개와 정결을 계속해야 한다. 축사에서 악한 영 하나가 나갔다고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죄가 쌓인 만큼 악한 영이 들어오고 집을 이루었으므로 회개의 분량을 채워야 하며, 입술만 움직이는 형식이 아니라 진실함과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음과 간절함을 보시고 허락하실 때 남아 있던 영과 집까지 처리될 수 있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하늘의 계시를 왜곡하지 않고 전할 수 있다.
다섯째,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큰 사명을 부러워하면서 눈앞의 작은 봉사와 훈련을 무겁다고 피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맡기실 수 없다. 말씀 한 편을 준비하고 한 영혼을 돌보고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는 작은 순종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모두 보고 계시며, 충성을 확인하신 뒤 더 넓은 사명을 맡기신다.
여섯째, 삶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해야 한다. 하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입술만 있고 고난을 감당하는 생활이 없으면 온전한 증인이 될 수 없다. 에스겔이 자기 몸으로 메시야의 죄악 담당과 순종을 미리 보여 주었고, 예수님이 인자로서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이루셨듯, 우리도 맡겨진 자리에서 희생과 순종을 살아 내야 한다. 그때 가족과 공동체는 우리의 말을 넘어 삶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이 시대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게 된 것도 우연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먼저 자신과 가정이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도록 회개하고, 천국에서 받을 신분과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직접 말로 전하기 어렵다면 책과 영상으로 알려 주고, 선교 현장에 나가지 못하면 기도와 물질로 동역할 수 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진리를 전하되 결과를 억지로 만들려 하지 말고, 각자 받은 은사와 자리에서 충실히 씨를 뿌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는 힘들지만 하늘에 준비되는 상이 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에는 특별한 상이 크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피하는 짐을 주님을 의지하여 감당한 수고는 하나님께서 그 상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힘으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저는 부족하오니 도와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끝에 가서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셨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찾아올 때 사명이 잘못되었다고 성급히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에 비추어 바른 길인지 확인하고, 바른 길이라면 견딜 힘과 지혜를 구해야 한다. 에스겔과 예수님 앞에도 순종을 포기하게 만들 만한 고난이 있었지만,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붙든 순종이 생명과 회복의 길을 열었다. 오늘의 인내가 훗날 한 영혼과 한 가정을 살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
9. 나오며
에스겔이 말씀만 전한 선지자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생애로 그리스도를 예표한 행동 예언자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는 환상을 보고 미래를 말했을 뿐 아니라, 서른 살에 열린 하늘과 성령의 권능 가운데 사역을 시작하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몸으로 담당하며, ‘인자’로 불리는 삶을 살아 냈다.
에스겔의 삼백구십 일과 사십 일은 죄 없는 사람이 민족의 죄악을 짊어지는 표징이었다. 예수님은 그 표징의 실체로 오셔서 인류의 죄와 저주를 실제로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에스겔이 제한된 기간 동안 몸으로 보여 준 일을 예수님은 참사람이자 참하나님으로서 온전히 완성하셨다.
‘인자’라는 호칭에는 인간의 연약함,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종, 하늘 계시의 전달자, 계시의 표징이라는 네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고난을 겪고 아버지께 순종하며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 자체를 육신으로 살아 내셨다. 에스겔은 이 인자의 길을 미리 걸어감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냈다.
사람을 향한 예언은 순종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보여 주셨더라도 회개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 담당자가 바뀌고 촛대가 옮겨질 수 있다. 각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과 공동체와 민족의 짐을 감당해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충분하고 진실하게 회개하며, 사람들의 반대 속에서도 받은 진리를 전해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은 사명을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을 더 의지할 이유다. 하늘의 뜻을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삶으로 살아 내며,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삶으로 인자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8월 18일(화)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선지자 에스겔이 단순한 말의 전달자를 넘어 자신의 삶과 몸으로 메시아를 예표한 '행동 예언가'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서른 살에 사역을 시작하며 하늘이 열리는 환상을 경험했으며, 구약에서 유일하게 '인자'라는 칭호로 불림으로써 인류의 고난을 짊어질 그리스도의 인간적 면모를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 수백 일간 옆으로 누워 지낸 고통스러운 행보는 인류의 죄를 홀로 지신 예수님의 순종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에게 에스겔처럼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며 삶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