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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9. 16. (수)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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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WhqAlJuyIgM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92)]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3) 한 이레에 대한 세대주의의 해석과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단9:24~2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WhqAlJuyIgM

 

[이 설교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한국교회의 종말론은 왜 세대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는가?
2. 바른 종말론을 위해 성경 연구와 영적 실상이 왜 함께 필요한가?
3.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하는 세 가지 기준은 무엇인가?
4. 70이레는 BC 457년부터 AD 34년까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5. 세대주의는 왜 마지막 한 이레를 2천 년 뒤로 분리했는가?
6. 다니엘서 9장 26-27절의 ‘그’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7. 7년 평화조약과 제3성전 해석을 벗어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설교핵심]

이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오류를 비판하고 다니엘서의 ‘70이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정보배 목사는 한국 교계에 깊이 뿌리박힌 세대주의 신학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극단적으로 분리하고 마지막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의 평화 조약 기간으로 오해함으로써 성도들이 천국의 실상을 준비하는 데 혼란을 주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70이레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일어난 사건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대속적 죽음을 통해 구속사가 완성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신학적 전통이나 문자적 계산보다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라는 관점에서 종말론적 틀을 바로 잡아야 함을 역설하며, 성도들이 제3성전 건립과 같은 외적 징후에 매몰되지 말고 회개와 거룩함으로 내면의 성전을 세울 것을 촉구합니다.

 

기독론(192)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3)

한 이레에 대한 세대주의의 해석과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

(단 9:24-27)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신학적 사고의 틀은 성경을 보는 각도와 신앙의 목표를 결정한다. 성경에는 창조에서 종말까지 장엄하고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어느 부분을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신학적 사조가 만들어진다. 특히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결정하므로 그 영향이 매우 크다. 잘못된 종말론을 받아들이면 적그리스도와 날짜 계산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누리지 못한 채 엉뚱한 일을 준비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에 도착한 뒤 2026년까지 141년 동안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이루었다. 복음이 정복과 억압이 아니라 학교와 병원과 봉사의 모습으로 전해졌기에 우리 민족은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주신 큰 복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 준 미국과 캐나다의 선교사들은 당시 서구 교회를 휩쓸던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 배운 한국의 지도자들이 다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교회를 완전히 분리하고, 환난 전 휴거설(患難前携擧說, pretribulationism)과 7년 대환난과 제3성전(第三聖殿, Third Temple) 재건을 당연한 종말의 시간표처럼 받아들이는 교회가 많다.

  이러한 흐름을 바로잡으려면 다니엘서 9장의 마지막 한 이레를 다시 보아야 한다. 70이레의 중심은 미래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고 한 이레의 절반에 끊어짐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70×7이 품은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의 뜻을 보며, 7이레와 62이레와 1이레를 연속된 시간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의 종말론이 왜 세대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는지, 성경 연구와 영적 실상을 왜 함께 알아야 하는지, 70이레를 푸는 세 기준과 그 역사적 성취, 마지막 한 이레를 2천 년 뒤로 분리한 해석의 문제, 다니엘서 9장 26-27절의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7년 평화조약과 제3성전 해석에서 벗어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한국교회의 종말론은 왜 세대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는가?

  한국교회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은 한국에 복음을 전한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관계가 있다.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캐나다와 호주 등지에서 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한국의 젊은 인재들을 미국으로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했다. 당시 미국 교회에는 존 넬슨 다비(A.D.1800-1882)에게서 시작되어 스코필드 관주성경(A.D.1909)과 달라스신학교 및 밥 존스 신학교를 통하여 체계화된 세대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국의 지도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종말론을 받아들였다.

  물론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의 열매는 매우 귀하다. 한국은 오랜 기독교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니었지만 불과 몇 세대 만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약 1만 5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주님의 재림(再臨, second coming)이 임박했다는 긴박감을 주어 선교 열정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헌신과 세대주의가 낳은 모든 열매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들이 전한 종말 시간표까지 성경 자체와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학적인 틀은 이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도 형성되었다. 초대교회에 아리우스와 몬타누스 같은 이단적 가르침이 나타나자 교회는 공의회를 열어 믿음의 내용을 교리로 정리했다. 이 작업은 복음을 보호하는 데 필요했지만, 인간이 만든 설명 체계에는 실수가 더해질 수 있다. 처음에는 성경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였던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을 바라보는 안경이 되고, 마침내 그 안경에 맞추어 본문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적 틀의 영향은 정치와 사회에서도 드러난다. 공산주의 체제는 기독교를 적대해 왔는데도 일부 목회자는 그 사상을 등에 업고 성경적 기준을 흐린다. 모든 죄는 다 죄이지만, 오늘날 동성 간 성행위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이 그것을 죄라고 규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롬 1:26-27; 고전 6:9-10). 또한 악한 체제를 분별하지 않은 채 평화라는 말만 앞세운 결과 북한이 핵무기를 57개나 만들도록 허용한 셈이 되었다. 어떤 사상적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같은 단어와 현실을 전혀 다르게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평신도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모두 다 공부하기가 어렵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일반대학 4년과 3년의 신학대학원, 2년의 인턴십과 고시 및 안수 과정을 포함하여 약 10년을 준비한 뒤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긴 과정에서도 성경 전체를 직접 공부한 분량은 극히 적었다. 신학교는 성경 66권을 한 절씩 파고들기보다 신학의 틀과 여러 학자의 견해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목회자가 졸업 뒤 어떤 자세로 20년, 30년을 연구하느냐에 따라 성경 이해의 깊이는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와 순복음교회는 저마다 물려받은 전통이 있다. 그 전통은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지만, 성경보다 높은 최종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필자도 장로교의 건전한 훈련을 받아 목사가 된 것을 귀하게 여기며 교단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떤 사상을 가졌다고 자녀가 그 사상까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단의 틀이 본문과 어긋난다면 성경을 따라 바로잡아야 한다. 종말론을 결정하는 최종 권위는 특정 교단이나 달라스신학교나 유명한 주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3. 바른 종말론을 위해 성경 연구와 영적 실상이 왜 함께 필요한가?

  바른 종말론을 세우려면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일과 영적 실상을 분별하는 일이 함께 가야 한다. 성경만 연구하면서 실제 천국의 모습을 전혀 알지 못하면 본문에 기록된 것을 자기 체계에 맞추어 설명할 위험이 있다. 반대로 꿈과 환상과 예언만 좇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검증을 받지 않으면 악한 영이 보여 준 것을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로 착각할 수 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온전한 분별에 이르기 어렵다.

  성경 연구에 깊이 들어간 대표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한국복음서원과 워치만 니 계열을 들 수 있다. 그들이 펴낸 『회복역 성경』에는 존중할 만한 방대한 연구와 주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흐름도 존 넬슨 다비의 세대주의가 중국으로 들어가 꽃피운 한 갈래다. 성경 본문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천국의 실제 신분 체계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성도에게 주어질 신분의 차이를 왕국 시대에만 적용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면 모두 똑같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고 해석한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천국에서 성도의 신분은 모두 같지 않다.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섬기는 자의 위치처럼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준비한 분량에 따른 구별이 있다. 베드로전서 2장 5과 9절의 헬라어 표현도 왕 같은 제사장 한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체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천국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이런 차이를 읽어 내지 못하고, 장차 받을 신분과 상급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한편에는 요셉과 다니엘과 에스겔과 스가랴처럼 꿈과 환상과 예언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 오늘날에는 신사도운동과 빈야드운동, 예언과 기름부음과 축사를 강조하는 선교단체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영적 은사(恩賜, spiritual gift) 자체를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도 꿈과 환상과 예언이 분명히 나온다. 그러나 필자가 분별한 바에 따르면 이 흐름에는 많은 악한 영이 역사하고 있다. 성경의 기준과 신학적 분별이 약한 상태에서 보이는 것만 따라가면 귀신이 보여 준 천국을 참된 천국으로 믿고 전할 수 있다. 실제를 말하면서도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영적 실상은 서로를 배척하는 두 길이 아니다. 성경은 체험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실제는 성경의 말씀을 더 입체적으로 깨닫게 한다. 살아 계신 주님은 지금도 만날 수 있는 분이다. 다만 영적 체험을 받았다는 이유로 성경 위에 서려 해서는 안 되며, 성경 지식을 많이 쌓았다는 이유로 주님의 현재적인 인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양쪽을 함께 분별해야 한다.

  필자는 이런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성경 원문을 연구하고 천국의 실상을 함께 살펴왔다. 그러나 필자는 세계적인 석학들처럼 라틴어와 아람어와 고대 근동의 모든 자료를 평생 연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배 학자들이 남긴 방대한 주석과 원어 자료를 활용하고, 헬라어 연구와 영적 체험을 통하여 신학의 잘못된 틀을 분별할 수는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논문과 원어 자료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공지능도 사실이 아닌 답을 만들어 내는 환각 현상이 있으므로 반드시 본문과 자료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필자의 사명은 선배들의 모든 연구를 대신하는 데 있지 않다. 구원론과 삼위일체론과 교회론과 성령론과 은사론과 종말론에 스며든 잘못된 틀을 바로잡고, 성경과 천국의 실제가 함께 증언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유명한 학자와 큰 기관의 이름만 보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지, 성경의 문맥과 일치하는지, 실제 하늘의 경륜과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

4.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하는 세 가지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필자는 3가지로 정해보았다.

  첫째 기준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연구하지만 그 성경이 바로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구약의 예언은 적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데 중심이 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다니엘서 9장 24절은 70이레 동안 여섯 가지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반역을 끝내고, 죄를 마감하며, 죄악을 속죄(贖罪, atonement)하고, 영원한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예언을 성취하고, 지극히 거룩한 것에 기름을 붓는 일이다(단 9:24). 고레스와 아닥사스다와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포로 귀환과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수행한 귀한 도구였지만, 인류의 죄를 영원히 속죄할 수는 없었다. 이 여섯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둘째 기준은 70×7이라는 숫자를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의 구조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7년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安息年, sabbatical year)을 주셨고, 일곱째 해에는 동족의 빚과 종살이를 풀어 주는 면제년(免除年, year of release)을 명하셨다(레 25:2-7; 신 15:1-18).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49년 다음 해에는 희년(禧年, jubilee)의 나팔을 불어 종을 놓아주고, 팔린 기업을 돌려주며, 각 사람이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셨다(레 25:8-13).

  이스라엘은 이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안식과 면제와 희년의 성취자로 오셨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쉼을 주셨고, 죄의 빚을 탕감하셨으며, 마귀의 종 된 사람을 풀어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과 하늘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셨다(마 11:28; 눅 4:18-21). 그러므로 70이레의 숫자는 단순한 날짜 계산표가 아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희년의 시간표다.

  셋째 기준은 7이레와 62이레와 마지막 1이레를 끊지 않고 연속된 490년으로 읽는 것이다. 본문은 앞의 69이레 뒤에 2천 년의 교회 시대를 삽입한 다음 마지막 한 이레를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을 돌이키고 건축하라는 말씀이 나간 뒤 7이레와 62이레가 지나며, 이어진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다(단 9:25-27). 세 구간은 한 예언 안에서 연속하여 진행된다.

  이 세 기준 가운데 하나라도 놓치면 해석이 비틀어진다. 만약 그리스도 중심을 잃으면 마지막 한 이레의 주인공을 적그리스도로 바꾸게 된다. 또한 희년의 구조를 놓치면 70×7이 가리키는 죄 사함과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날짜만 계산하게 된다. 그리고 연속성을 버리면 본문에 없는 2천 년의 공백을 끼워 넣게 된다. 그리스도 중심, 안식년·면제년·희년 중심, 그리고 연속된 시간이라는 세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필자가 제안하는 해석 역시 인간의 해석이므로 틀릴 가능성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또 하나의 절대 교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한 성도에게 성경 전체와 역사적 성취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면 가장 타당한 틀을 제시해야 한다. 여러 해석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이 세 기준을 적용하면 70이레의 문맥과 연대가 함께 풀리고, 무엇보다 예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선명히 드러난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5. 70이레는 BC 457년부터 AD 34년까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그렇다면 70이레의 기산점은 언제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A.D.27년) 한 이레의 절반(A.D.30년)에 돌아가신 날짜를 기준으로 역추적하면 된다. 그러니까 A.D.27년을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마지막 한 이레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뒤로 62이레(434년)을 계산하면 B.C. 408년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7이레(49년)을 뒤로 가면, 기원전 457년, 아닥사스다 왕 제7년이 70이레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바사 아닥사스다 왕 7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조서를 받은 때가 70이레의 기산점이 되는 것이다(스 7:7-10, 25-26). 그리고 이어서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느헤미야가 통치자(나기드)가 되어 예루살렘에 와서 허물어진 성전을 다시 짓는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9장 25절에도 역시 그 기산점인 예루살렘을 ‘돌이키고’ 그리고 ‘건축하라’는 두 가지 내용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앞의 단어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로서, 돌아오다 또는 돌이키다라는 뜻이고, 뒤의 단어 ‘바나’(בָּנָה)는 건축하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은 ‘슈브’를 ‘다시’라는 부사처럼 처리하였고, 거기에다가 ‘건축하라’는 뜻을 합하여 ‘중건하라’고 번역했지만, 백성을 돌이키는 일과 성읍을 건축하는 일을 함께 보아야 한다. 즉 백성을 돌이킨 일은 에스라고 한 것이고, 성읍을 건축한 것은 느헤미야가 한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유다인들의 포로 귀환은 세 차례의 흐름을 가진다. 먼저 고레스 왕 통치 원년(B.C.538)에 그의 명령으로 스룹바벨이 백성을 이끌고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스 1:1-4; 2:1-2). 다음으로 아닥사스다 왕 제7년(B.C.457)에 에스라가 돌아와 율법을 가르치고 이방 여인과 결혼한 문제를 다루며 백성 전체의 회개(悔改, repentance)를 이끌었다(스 7:10; 9:1-10:17). 마지막으로 아닥사스다 왕 제20년(B.C.445/444)에 느헤미야가 파송되어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했다(느 2:1-8; 6:15). 그러니까 남유다 백성을 돌이킨 사람은 에스라이고. 성벽을 세운 사람은 느헤미야이므로, 두 사역의 시작을 품은 아닥사스다 제7년을 기산점으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했던 기간이 7이레(49년) 안에 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산점에 등장하는 바, 다니엘서 9장 25절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은 ‘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멜레크’(왕)가 아니라 ‘나기드’(נָגִיד)(통치자)이기 때문이다. '나기드'는 한글로 '지도자' 또는 '통치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인 고레스나 아닥사스다와 그 명령을 수행한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구별해야 한다. 마소라 본문의 구두점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7이레 뒤에 기름 부음을 받은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읽을 수도 있고, 7이레와 62이레 전체 뒤에 나타난다고 읽을 수도 있다. 어느 독법을 취하든 포로 귀환과 회개와 성읍 건축은 이 기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70이레의 기간은 어떻게 산정할 수 있는가? 기원전 457년에서 7이레인 49년이 지나면 기원전 408년이 된다. 거기서 다시 62이레인 434년이 지나면 주후 27년경에 이른다. 이때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 3:13-17; 행 10:38). 이 날짜를 기준으로 마지막 한 이레가 시작된다. 그리고 한 이레의 절반인 약 3년 반 뒤, 주후 30년경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끊어짐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 9장 26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그리고 이어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 구약의 희생제사와 곡식제사를 그치게 하셨다. 이러한 제사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하신 것이다(히 9:11-15; 10:10-14). 그러므로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 분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 고로 주후 27년에 시작된 마지막 한 이레는 주후 34년경에 마무리되고, 그 안에서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역이 완성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한 이레의 중심에 십자가가 놓이면서 이스라엘의 봄 절기도 성취된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날에 유월절 양으로 죽으셨고, 무교절과 초실절의 뜻을 이루어 부활하셨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어 주시어 교회가 탄생하게 하였다(고전 5:7; 15:20; 행 2:1-4).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과 칠칠절이라는 전반기 절기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 9장 24절에 나오는 바, 지극히 거룩한 것에 기름 부음 위함이라는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 26절에 나오는 바, 62이레 뒤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표현은 번역에 오해를 불러온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표현은 그가 끊어질 것이며 ‘그에게 속한 것이 없다’는 뜻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없어질 것’이라고 번역하면 메시아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듯한 오해를 줄 수 있다. 정동수 목사의 킹제임스 흠정역은 ‘그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고 옮기지만, 히브리어의 부정 표현을 그렇게 확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타인에 의해 끊어지지만 부활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기산점을 고레스나 느헤미야에게 먼저 맞춘 뒤 예수께 도달하려 하면 연대가 어긋나기 쉽다. 반대로 주후 27년의 기름부음과 주후 30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거꾸로 계산하면 기원전 457년의 에스라 귀환과 일치한다. 70이레는 기원전 457년부터 주후 34년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구속사의 시간이며, 그 한가운데에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6. 세대주의는 왜 마지막 한 이레를 2천 년 뒤로 분리했는가?

  그렇다면 세대주의가 마지막 한 이레를 분리하고 떼어서 중간에 교회시대를 집어넣고, 그 시기를 2천 년 뒤로 분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완전히 별개의 경륜으로 나누고, 마지막 7년을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세대주의는 69이레까지 진행된 뒤, 메시아가 출현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거절되자 이스라엘을 위한 시간표가 멈추게 되었고, 그 사이에 성경이 예고하지 않은 교회 시대가 삽입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가 7년 대환난 전에 휴거된 뒤에야, 멈추었던 마지막 한 이레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 시간표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7년 평화조약을 맺고, 3년 반이 지나면 조약을 깨뜨려 성전 제사를 금지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유대인은 그때에 제사를 다시 드리고 있어야 하므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이 먼저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교회의 완전한 분리, 환난 전 휴거설, 7년 대환난, 적그리스도의 평화조약, 제3성전 재건이 하나의 체계로 묶이게 되었다. 이 모든 구조를 떠받치는 핵심 본문이 바로 다니엘서 9장 27절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인 로버트 앤더슨과 해럴드 호너는 70이레의 기산점을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곧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러 간 기원전 445년 또는 444년으로 잡았다. 그러나 거기서 69이레인 483년을 지난 때를 A.D.32년이나 33년으로 본다. 그러나 1년을 365일로 계산하면 필자의 계산으로는 주후 38년 또는 39년 무렵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한 해를 360일로 계산하여, 예수께서 끊어지신 연도를 주후 32년 또는 33년이라고 산출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A.D.32년이나 33년이 아니라, 30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의 계산법은 억측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들은 문자주의(文字主義, literalism)를 표방하면서도 날짜가 맞지 않게 되자, 한 해의 길이를 달리 계산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이레는 본문에 없는 긴 공백을 집어넣는 일을 시도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으로 세대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를 보자. 그분이 제시한 도표를 보면 기원전 445년을 70이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69이레 뒤를 주후 30년으로 그림에 표시해 놓았다. 하지만 단순히 483년을 B.C.445이나 444년에 맞추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해는 A.D.38년이 되고 만다. 

  한편, 세대주의는 영국의 존 넬슨 다비에게서 두 방향으로 전파되었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세대주의의 한 갈래는 미국으로 가서 스코필드와 달라스신학교를 거쳐 미국의 근본주의와 한국의 사랑침례교회 같은 흐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 갈래는 중국으로 가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거쳐 지방교회와 한국복음서원으로 이어졌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교회의 분리,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의 공백, 환난 전 휴거라는 핵심 틀은 똑같다.

  『회복역 성경』은 다니엘서 9장 27절의 번역 자체는 비교적 잘했지만, 각주에서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길이를 알 수 없는 간격이 있다고 주석하고 있으며, 마지막 7년 초에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견고한 평화언약을 맺는다고 주석하고 있다(회복역 성경 참조). 또한 로마의 티투스(디도)로 예표된 적그리스도가 재건될 성전을 황폐하게 할 것이므로 제3성전의 건축이 필수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한국복음서원은 본문 번역은 비록 바르게 했다고 하지만, 주석의 신학적 틀이 독자의 결론을 세대주의로 이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대주의 안에도 성경을 사랑하고 선교와 연구에 헌신한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모든 가르침을 나쁘다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가 바르게 설명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이레를 분리함으로써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언약과 십자가를 적그리스도의 조약과 박해로 바꾸어 놓은 부분은 바로잡아야 한다. 사람과 단체를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을 다시 그리스도께 돌려놓는 것이 목적이다.

7. 다니엘서 9장 26-27절의 ‘그’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다니엘서 9장 26-27절에 나오는 첫 번째 ‘그’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70이레의 예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한다면, 그분은 A.D.27년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먼저 26절을 보자. 여기에는 두 명의 다른 존재가 대조된다. 먼저 69이레 뒤에 끊어짐을 당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있고, 그다음에는 '장차 올 한 통치자의 백성'이 있어 그가 성읍과 성소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앞에 등장하는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후자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로마의 티투스(디도) 장군과 그의 군대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때 티투스(디도) 장군은 장차 마지막 시대에 활동하게 될 적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6절의 본문은 그리스도와 그를 대적하는 통치자를 나란히 대조해서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7절도 똑같은 대조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그’는 한 이레 동안 많은 사람에게 언약을 굳게 하고, 이레의 절반에 희생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려 새 언약(新約, new covenant)을 세우고 단번의 제사로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께 정확히 해당한다(마 26:28; 히 10:12-14). 이어지는 뒷부분에는 가증한 것들의 날개 위에 서서 철저히 황폐하게 하는 자가 나오고, 정해진 끝에 진노가 그 황폐하게 하는 자 위에 쏟아진다. 그가 바로 장차 적그리스도가 될 자이다. 그러므로 앞에 나오는 그분인 그리스도와 뒤에 나오는 황폐하게 하는 자는 서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만일 27절 앞부분의 ‘그’를 26절의 장차 올 통치자 곧 적그리스도로 본다면, 27절 뒷부분도 같은 대명사 ‘그’로 계속 받아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장은 뒤에서 ‘황폐하게 하는 자’를 별도의 주체로 다시 제시한다. 그러므로 한 절 안에서도 많은 사람과 언약을 굳게 하는 그리스도와 가증한 것을 의지하여 황폐하게 하는 대적자가 대조된다고 보아야 문맥이 맞다.

  또한 70이레의 본문에는 어디에도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말이 없다. 단지 많은 사람에게 언약을 강하게 하거나 굳게 한다고 되어 있다. ‘언약’을 정치적 평화조약으로 바꾸는 순간 예수께서 피로 세우신 언약이 사라진다. 또한 히브리어 동사는 희생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기보다 ‘그치게 한다’는 뜻이 맞다. 적그리스도가 가능한 제사를 폭력으로 금지하는 장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 때문에 반복 제사가 효력을 다하고 그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르게 번역한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면, 신학의 틀이 번역에 얼마나 성경 해석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허성갑 목사의 『직역성경』은 많은 부분을 원문에 가깝게 옮겨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니엘서 9장 24절의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을 ‘지성소’로 한정해 놓았고, 25절의 ‘슈브’를 ‘다시’로 처리하였으며, 26절을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옮긴 부분은 70이레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7절에서 제사와 곡식제사가 그친다고 번역한 점은 바르게 번역한 것이다.

  한편 백석대 총장을 역임했던 고영민 박사의 『원문번역직역성경』도 방대한 원어 연구의 결실이지만, 27절의 ‘그’를 ‘그 왕’이라고 바꾸어 번역했다. 원문에는 ‘왕’이라는 명사가 없는데 세대주의적 선이해가 번역문에 들어간 것이라 추정된다. 왜냐하면 각주에서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현 교회 시대가 놓인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에서 발해한『회복역 성경』은 앞부분을 비교적 정확히 옮기면서도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한다’고 표현하는 측면이나, 각주에서 그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아쉬움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킹제임스 흠정역을 번역한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는 ‘언약을 확정하고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한다’는 앞부분을 잘 살렸지만, 황폐하게 하는 자의 주체는 다소 모호하게 번역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리 원어에 능통하고 방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라도 이미 가진 신학적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려운가 보다. 그러므로 번역자의 명성과 학위만 볼 것이 아니라 원문에 실제로 어떤 단어가 있고, 문장의 주체가 어떻게 바뀌며, 앞뒤 문맥이 누구를 대조하는지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26절과 27절을 함께 읽으면 언약을 굳게 하고 제사를 그치게 하는 이는 그리스도이며, 성읍과 성소를 황폐하게 하는 이는 그를 대적하는 통치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8. 7년 평화조약과 제3성전 해석을 벗어나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7년 평화조약과 제3성전 재건은 또 어떠한가? 다니엘서 9장 27절에서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은 정말 종말의 필수 조건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없는 평화조약을 만들어서 집어넣고, 그 조약이 깨어지려면 성전 제사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고 추론한 결과, 제3성전이 종말론의 중심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제3성전은 끝까지 세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제3의 성전이 건축되느냐를 지켜보며 날짜를 계산하는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이다(요 2:19-21; 고전 3:16; 6:1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성전은 예루살렘에 돌로 지어지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예루살렘에 제3성전을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가 회개하여 깨끗해지고 주님이 쓰실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세대주의적 시간표를 따르면, 성도의 눈은 언제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가 조약을 맺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의 70이레를 따르면, 예수께서 무엇을 이루셨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 축복을 누릴 것인가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분은 안식년의 쉼을 주셨고 면제년의 빚을 탕감하셨으며 희년의 자유와 기업 회복을 가져오신 분이시다. 십자가의 목적은 미래의 공포를 계산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죄와 마귀에게 매인 사람을 해방하는 데 있는 것이다.

  종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날짜와 인물을 맞히는 일이 아니다. 먼저 회개하여 우리 안의 악한 영을 제거하고,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깨끗한 성전이 되어야 한다. 주께서 장차 나팔절에 나팔을 불어 하늘의 군대를 소집하실 때에 적진과 내통하는 그를 데려가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누가 적그리스도인지 추측하는 때가 아니라, 죄를 자백하고 내 안에 간첩으로 숨어있는 악한 영을 내보내며 주님의 뜻에 충성할 때다.

  또한 지금은 천국에서 받을 신분과 상급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성도가 천국에서 똑같은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충성하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한 분량에 따라 왕과 제사장의 신분과 기업이 달라질 것이다. 세대주의적 틀이 이 차이를 왕국 시대의 일로만 돌려버리면 성도는 영원한 천국을 준비할 동력을 잃는다. 종말론은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시간표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진리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대주의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되고, 유명한 학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해석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옳은 것은 감사히 배우고 잘못된 것은 성경으로 분별해야 한다. 필자도 선배들이 쌓아 놓은 연구를 존중하고 활용한다. 다만 어떤 교단과 기관과 번역본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보다 앞설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킨다.

  그리스도께서 한 이레의 절반에 끊어지심으로 죄를 속죄하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그분이 안식과 면제와 희년을 이미 가져오셨으므로 그 은혜를 누리고, 아직 죄와 마귀에게 묶인 사람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종말론이 낳는 실제 열매이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의 올바른 자세다.

9. 나오며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에 대한 세대주의 해석과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을 살펴보았다. 한국 교회는 복음과 함께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전해 받았고, 그 틀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분리와 환난 전 휴거, 7년 평화조약과 제3성전 재건이라는 시간표를 만들었다. 선교와 성경 연구에 끼친 유익은 존중해야 하지만, 본문에서 벗어난 해석은 성경 앞에서 바로잡아야 한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성경 연구와 영적 실상이 함께 가야 한다. 성경 없는 체험은 미혹에 빠질 수 있고, 영적 실상을 알지 못하는 연구는 자기 신학의 틀 안에서 본문을 제한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 안식년·면제년·희년 중심, 7이레와 62이레와 1이레의 연속성이라는 세 기준으로 70이레를 읽어야 한다.

  기원전 457년의 에스라 귀환에서 시작된 70이레는 주후 27년의 예수님의 기름부음과 주후 30년의 십자가를 거쳐 주후 34년경까지 이어진다. 한 이레의 절반에 많은 사람과 언약을 굳게 하고 희생제사를 그치게 한 ‘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황폐하게 하는 통치자는 그와 대조되는 별개의 존재다.

  그러므로 성도는 2천 년의 공백과 미래의 평화조약을 계산하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속죄와 해방을 붙들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돌 성전이 재건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 자신과 교회가 회개로 정결해져 거룩한 성전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천국의 신분과 기업을 바라보며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고, 죄와 마귀에게 묶인 이들에게 희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어야 하고, 날짜가 아니라 십자가의 성취에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 안에서 진리를 분별하고 주님의 재림을 온전히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15일(화)
정보배 목사

 

 

 

[설교에 사용한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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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칠십이레_사랑침례교회 정동수목사(칼라)_성경바로알기.jpg.webp

다니엘의 칠십이레_사랑침례교회 정동수목사(흑백)_성경바로알기.png.webp

천국과 하나님의 왕국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도표.png.webp

칠십이레와 그리스도께서 오심 및 성도의 휴거에 관한 도표 - 한국복음서원.png.we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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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3 [기독론(175)] 신약 성도는 속죄와 내주하는 성령을 받았는데도 왜 여전히 죄를 지을까?(렘31:31~34)_2026-08-26(수) file 갈렙 2026.08.26 202 https://youtu.be/nYt4IOTVfG4
2382 [기독론(174)] 배역한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하나님께서 내놓은 처방전, 새 언약의 비밀(렘31:31~34)_2026-08-25(화) file 갈렙 2026.08.25 185 https://youtu.be/VsnBzpUMMXQ
2381 [기독론(173)] 예레미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어떤 중요한 예언을 쏟아냈는가?(렘23:1~8)_2026-08-24(월) file 갈렙 2026.08.24 258 https://youtu.be/E8xcYOHRXMA
2380 [기독론(171)] 거짓말하는 가짜 예언자들 사이에서 참 선지자의 삶을 보여준 에스겔(겔13:1~23)_2026-08-21(금) file 갈렙 2026.08.21 203 https://youtu.be/zOgKTc8SqbM
2379 [기독론(170)]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되어 미리 예수님처럼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겔3:16~21)_2026-08-20(목) file 갈렙 2026.08.20 328 https://youtu.be/Ywd5YlisLIk
2378 [기독론(169)] 패역한 족속 가운데 보냄을 받아 미리 예수님처럼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겔2:1~7)_2026-08-19(수) file 갈렙 2026.08.19 607 https://youtu.be/Jsel06jla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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