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97)]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을까?(호1:1~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7IXgmpXjxro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는가?
2. 북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따랐는가?
3. 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과 호세아의 활동 시기는 어떠했는가?
4. 하나님은 왜 여로보암 2세 때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셨는가?
5. 호세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6.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을 예표하는가?
7. 호세아의 외침을 듣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가?
[설교핵심]
이 설교는 호세아서를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조명합니다.정보배 목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가혹한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단순히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배반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값 주고 사오시는 구속자의 마음을 직접 체험하고 전하게 하기 위함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호세아의 이름이 여호수아를 거쳐 예수라는 이름으로 연결되는 구속사적 의미를 분석하며, 가장 풍요롭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이 메시지가 선포된 배경에는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결국이 설교는 호세아의 외침을 회개와 천국 복음으로 재해석하여, 오늘날 성도들이 심판주가 아닌 구원자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철저한 회개와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론(197)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을까
(호 1:1-9)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구약의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가운데, 호세아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예표를 살펴보고 있다. 그렇다면 호세아서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떤 예표들이 등장하는가?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는 다섯 가지 중요한 그리스도의 예표가 있음을 본다. 첫째는 음란한 신부를 다시 값을 주고 사 오시는 남편이신 그리스도이고, 둘째는 참된 왕 다윗의 자손이며, 셋째는 다시 살려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넷째는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섯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랑이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신랑이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자신의 신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결혼하여 끝까지 함께 하자고 했던 신부가 그만 바람이 나서 자신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직접 체험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호세아서의 충격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바람난 아내처럼 다른 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호세아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그녀를 통하여 자식을 낳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이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지만 다시 그녀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일까? 이것은 한 선지자를 괴롭히기 위한 명령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의 몸과 가정에 새겨 놓아서 북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가 왜 그 무거운 사명을 짊어져야 했는지, 호세아의 이름과 시대적 배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그리고 회개의 외침을 듣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는가?
호세아 1장 2절을 보라. 여기에는 선지자인 호세아에게 주어진 소명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취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녀까지 낳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호세아로 하여금 북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을 따라간 영적 간음의 상태를 직접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호세아더러 결혼하라고 한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주석가가 이야기하듯이 그녀는 처음부터 바울 신전의 신전 창기였을까? 필자는 아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녀를 디블라임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호 1:3). '디블라임'이라는 말은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인데, 어찌 되었든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아버지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녀가 그래도 이스라엘의 정식 가문에 속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그녀 안에는 영적으로 음란한 영, 밖으로 돌아다니게 하는 영, 자신을 꾸미고 사치하려는 영이 더 크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워낙 얼굴이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호감을 받을 만한 모습을 지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는 집 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과연 그 여인을 사랑했을까? 성경에 보면 호세아가 그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고멜과의 사이에서 자녀 셋을 낳았다. 아들이 '이스르엘', 그리고 이어 딸이 '로루하마', 또 다른 아들이 '로암미'였다(호 1:4-9). 결론적으로 보면, 호세아의 자녀의 이름 하나하나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이고,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며,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세아가 이때 경험한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또 한 번의 무거운 명령이 더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또 다른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워야 했는가? 그것은 그녀가 자식을 셋이나 낳았으면 남편과 가정의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 고멜은 자녀 셋과 남편을 뒤로하고 다른 남자의 사랑을 따라가버리고 말았다(호 3:1). 그러자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녀의 배신을 몸으로 직접 겪게 하셨다. 그것은 남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다시 데려와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호세아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를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적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말씀만 들려주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로새기신다.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나라의 멸망을 보여 주기 위한 표적이었다(렘 16:1-4).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백성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겔 24:15-24). 호세아의 결혼 역시 북이스라엘의 음행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 가정 안에 나타내는 표적이었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왜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거절하지 않았는가? 선지자는 자기 행복만을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은 때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살리기 위해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결국 호세아의 고통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가정은 북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들을 붙드시는지 보여 주는 설교가 되었다.
3. 북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따랐는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버린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도 역시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여호와께 예배하지 않고, 벧엘과 단에 세운 송아지 앞에서 예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북이스엘을 창설한 여로보암 1세가 만든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겼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을 섬기는 혼합주의였다.
그렇다면 왜 북이스라엘 사람은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자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목축하는 사람로서 물이 없으면 양 떼를 물 있는 곳으로 데려가면 되었다. 하지만 땅을 경작하는 사람에게는 땅을 이동시킬 수가 없으므로 비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므로 가나안 본토인들은 비와 농작물들에게 비를 바알과 아세라가 내려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시 바알 신전에는 음란한 행위를 통해 비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 성전 의식이 있었다. 그것이 곧 음행이다. 그러자 북이스라엘도 역시 이 이러한 가나안 신앙에 물들어, 하나님이 주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바알에게 바치며 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바알이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은과 금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는데, 오히려 백성들은 그것으로 바알의 제단을 꾸몄다.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주시는 분이 분명 하나님이셨는데, 그들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 곧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농경신이 주었다고 말했다(호 2:5).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다른 신의 공로로 돌린 것은 북이스라엘의 커다란 죄악이었다.
이처럼 북이스라엘은 혼합주의 신앙이었다. 안식일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듯했지만 사실은 송아지 우상을 섬겼으며, 평일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아니었다.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생업과 재물과 풍년을 위해서는 다른 신을 찾았던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찍이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다. 당시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은 애굽의 신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열 가지 재앙으로 드러내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셨다. 그리고 “너는 나만 따르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일종의 결혼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원래부터가 배타적인 관계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만 바라보고 살기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역시 여호와만 섬겨야만 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신을 따라가고 말았다.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도, 가나안에서 다시 우상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냈는데, 너희는 나를 부를수록 점점 멀리한다”고 탄식하셨다(호 11:1-2). 이 탄식이 호세아서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다.
4. 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과 호세아의 활동 시기는 어떠했는가?
그렇다면 호세아는 언제 활동한 선지자인가? 호세아 1장 1절은 그의 활동 시기가 언제였는지를 말해준다. 왜냐하면 그가 활동했던 당시의 남유다 왕들과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을 기록해두었기 때문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에, 남유다는 웃시야(B.C.792-740), 요담(B.C.750-732), 아하스(B.C.735-716), 히스기야(B.C.716-687)가 왕으로 있었고, 북이스라엘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B.C.793-753)가 왕으로 있었다. 이때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의 13대 왕으로서, 약 40년 동안 통치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까지 활동했으므로, 실제는 북이스라엘의 13대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B.C.793-753) 통치 말기 때부터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호세아 왕(B.C.732-722)때까지 활동한 선지자였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으로 활동한 시기가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이었는데, 그 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에 북이스라엘의 앗수르의 살만에셀(B.C.727-722) 왕에게 패배하여 멸망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가장 넓었고 물질적으로 가장 번성하던 시기였다. 당시는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앗수르라는 나라도 쉽게 북이스라엘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북이스라엘은 정치·군사적으로 강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한편 북이스라엘의 여호보암 2세 당시, 남유다의 웃시야 왕도 같은 시대에 살면서 국력이 향상되었다. 고로 두 나라는 서로 전쟁하기보다 서로 타협하며 안정된 시기를 누렸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깊이 타락했다. 겉으로는 부유하고 강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고 송아지 우상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세아는 바로 그 여로보암 2세 때 말기부터 활동하여,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9대 호세아(B.C.732-722) 때까지 활동했던 선지자다. 고로 그 기간은 짧게 보면 약 30년이고, 길게 보면 60년 가까운 기간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이름과 마지막 왕의 이름이 같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마지막 왕 호세아는 그 구원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다.
북이스라엘의 왕조는 여로보암 왕조, 바아사 왕조, 오므리 왕조, 예후 왕조로 계속 바뀌었다. 여로보암 2세 이후에는 스가랴(B.C.753-752)가 살룸(B.C.752)에게 죽고, 살룸은 므나헴(B.C.752-742)에게 죽고,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B.C.742-740)는 베가(B.C.752-732)에게 죽고, 베가는 호세아(B.C.732-722)에게 죽었다. 반역과 쿠데타가 이어졌다. 왕들은 앗수르와 애굽 사이를 오가며 사람의 힘을 의지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호 7:11; 8:9; 12:1).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셨다. 나라가 가장 넓고 풍요로울 때, 백성이 가장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였다. 하나님은 멸망 직전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너희가 나를 버렸지만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돌아오라. 내가 너희를 다시 품겠다.” 호세아의 가정과 예언은 이 마지막 부르심의 표적이었다.
호세아서가 소선지서 가운데 앞부분에 놓인 것도 이 책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모스도 북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지만, 호세아는 자신의 가정과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죄를 지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배신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5. 하나님은 왜 여로보암 2세 때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 때 왜 호세아를 불러 선지자의 직분을 맡기셨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창 13:14-16; 15:5-7). 북이스라엘도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열 지파로 이루어진 백성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역시 가나안 땅을 주셨고,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여로보암 2세 때는 북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누리는 외적 조건이 가장 좋았다. 영토가 가장 넓었고 경제적으로는 매우 풍요로웠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만 치면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가장 많이 차지한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좋은 때를 영원히 이어 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백성은 풍요를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풍요를 준다고 믿는 바알에게 갔다. 하나님은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호세아라는 이름 자체가 사명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구원” 혹은 “구원자”는 뜻이다. 히브리어 '야샤'에서 나온 이름이다.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꾼 것도 같은 구원의 의미를 확장해서이다(민 13:8, 16). 왜냐하면 '여호수아'라는 말은 '여호와'에다가 '야샤'를 합친 것으로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히브리어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예슈아'이다. 그런데 '예슈아'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축약형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예슈아'를 헬라어로 옮길 때에 남성이니까 '예수스'가 되었고, 어근만 따로 떼어서 현재까지 '예수'라고 부른다. 어느날 천사는 예수님의 양부가 될 요셉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칭]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했다(마 1:21).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시 히브리어로 옮기면, '예수아'가 되고 '예수아'는 '여호수아(예호수아)'의 축약형이다. 고로 호세아라는 이름 자체는 장차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호세아가 브에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호 1:1). 여기서 '브에리'라는 말은 '솟구쳐 나오는 샘'이라는 단어에서 온 이름이다. 생명수가 솟아나는 샘처럼,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생명수처럼 북이스라엘에 흘러가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호세아를 불러내어 구원자의 예표로 사용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그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하나님이 호세아를 찾아서 불러내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어느 시대에, 어느 가정에, 어떤 이름으로 태어나게 하실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회개의 복음을 듣고 거룩한 신부와 주님의 전사로 준비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6. 호세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호세아'와 '여호수아'와 '예수'는 서로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원이라는 알파벳의 단어의 의미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호세아'는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며, '예수'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천국을 예표하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하늘의 기업으로 이끌어 주신다(마 1:21).
그리고 눈의 아들이었던 여호수아의 본명이 원래 호세아였는데(민 13:8),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자가 되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모세가 여호수아로 바꾸어 준 것이다. 고로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여 땅을 나누어 준 장본인이다.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율법만으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고, 여호수아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악한 영을 이기며 기업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히 4:8).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약 이름인 '호세아'는 놀라운 이름이다. 그분의 이름에는 그분의 사명과 인류를 향한 끝없는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세상의 어려움에서 건져 내실 뿐만 아니라, 실은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건져내시는 분이다. 우리가 바람난 신부처럼 세상을 좇아 떠나갔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 목숨을 속전으로 지불하여 우리를 다시 사셨다(막 10:45). 호세아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고멜을 사 온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신 일을 그대로 예표하고 있다(호 3:2; 엡 5:25).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선택하셨는가? 이는 그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게 “너희를 구원할 자는 바로 나 뿐이다”고 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그러한 구원의 이름을 듣고도 계속 딴 길로 갔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라는 이름을 입술로 부르면서, 실제로는 재물과 사람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며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한 번 빋었다면 우리는 평생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 다른 신과 다른 힘을 함께 붙들어서는 아니 된다.
이처럼 끝없는 사랑과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도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롬 5:8). 이 사랑을 깨달으면 회개가 억지 의무가 아니라 내가 돌아갈 생명의 길이 된다.
7.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을 예표하는가?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신랑 되심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도 다른 신에게 그들의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떠난 북이스라엘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도록 호세아에게 그 배신을 체험하게 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고멜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배신했는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끝까지 사랑하시는지 동시에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멜은 어떠했는가? 호세아로부터 세 자녀를 낳고도 집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이제는 네가 내 아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호세아 2장 2절에 하나님은 “그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본다. 이것은 언약이 깨진 현재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를 끝내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고멜이 다른 남자의 품에 있을 때에도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 더 나아가 그 여자가 노예 시장에 팔려 있을 때,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다시 사 와야 했다.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한 여종의 몸값에 해당하는 값이다. 고멜은 남편에게 그냥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 값을 주고 사 와야 할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장면은 죄인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이 값을 치러 구원하셔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속량물로 내어 주셨다(엡 5:25). 그분은 우리의 죄를 그냥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으로 팔려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신 것이다. 이것이 속전의 사랑이며, 호세아의 무거운 결혼 생활이 예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다.
하나님은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호세아에게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고 말하게 하셨다(호 3:3).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다른 신을 따르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살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주님만 사랑하는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제 그 사랑은 더이상 죄를 허용하는 사랑이 아니다. 고멜을 다시 데려온 뒤에도 호세아는 더이상 그녀가 음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것은 우리가 다시 죄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다른 신을 따르지 말고 오직 주님과 함께 살라는 언약의 요구다. 은혜를 받았으면 거룩함으로 응답해야 한다.
8. 호세아의 외침을 듣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가?
호세아가 외친 핵심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고, 하나님이 주신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까지 우상에게 바쳤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마지막 왕 호세아 때까지 송아지 우상을 버리지 않았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보내 구원받으라고 외치셨지만,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는 그 외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다가 애굽을 의지했고, 하나님 위에 다른 것을 의지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구원받으라는 외침을 들었지만, 마지막 왕 호세아의 시대에는 심판이 임했다. 구원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름을 믿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한다.
호세아 1장 11절은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울 날을 말한다. 호세아 3장 5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다윗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한 통치자 아래 모이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 됨을 보여 준다.
이번 시간에 우리가 듣는 외침도 이와 같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는 주님의 외침을 우리는 이제 뼈아프게 새기고 실천해야 한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계 22:14). 주님은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와 거룩한 신부로 준비되기를 원하신다.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악한 영을 내보내며, 주님이 맡기신 마지막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호세아의 외침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난다. 그러나 그 외침을 거부하고 세상과 우상을 계속 따라가는 사람은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와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듣게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거룩한 신부와 마지막 시대의 전사로 준비되어야 한다.
9.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셨는지, 북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따랐는지, 호세아가 활동한 시대와 여로보암 2세 때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또한 호세아라는 이름이 여호수아와 예수의 이름으로 이어지며,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죄인을 찾아 값 주고 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무리한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사명을 맡기셨다. 고멜을 사랑한 호세아의 고통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나타냈다. 예수님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셨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신부이며, 다른 신을 따르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호세아의 외침을 듣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지만,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붙들고 회개와 거룩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2일(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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