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6)]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22) 그는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04)(시51:1~1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R3lkAyHzK88
1. 들어가며
기독론 연속 강해 116번째 시간이자,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 스물두 번째 시간이다. 지금까지의 강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다윗의 특징이 얼마나 독보적인가를 살펴왔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는 그가 '진정 회개하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이번 시간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회개를 하려면 다윗처럼 하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깊이 파고든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시작이자 끝이다. 회개 없이 구원도 없고, 회개 없이 성화도 없으며, 회개 없이 천국의 상급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회개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만연해 있다. 칼빈주의 계통에서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를 앞세워 회개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미 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속죄와 자백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다. 속죄는 죄를 덮어 주는 것이고, 자백은 악한 영을 씻어내는 것이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이를 뭉뚱그려서 "회개하면 예수의 속죄를 안 믿는 것이냐"고 매도하는 것은 성경을 정확히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류다.
또 다른 편에서는 회개와 자백, 후회와 회개를 구별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기도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가르친다. 회개 기도를 입술로 읽는다고 해서 악한 영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시편 안에 다윗의 회개시를 보존해 두셨다. 그것은 참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은혜를 알고자 하는 자, 그리고 진정한 회개자로서 구원을 받고 저주를 몰아내고자 하는 자를 위한 영적 교과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의 회개가 성경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진정한 회개란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왜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가?
회개의 필요성을 논하려면 먼저 인간의 실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 세상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분은 죄를 짓지 아니하셨고, 따라서 회개할 것이 없으셨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다 회개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구원과 심판의 문제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죄된 본성이 흘러들어왔고, 성경은 그것을 '뱀'의 침입으로 표현한다. 이 뱀, 곧 죄된 본성은 모든 인간의 속에 들어와 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흠 없고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내면에 이 죄된 본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의로운 행실로 복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욥이 보호받는 환경이 걷히자마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죄성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원망, 불평, 하나님께 대한 거역,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께 대드는 모습이 쏟아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더러운 것, 곧 죄된 본성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들 하나하나에 영을 붙이면 다 악한 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를 통해 이 죄성을 날마다 덜어내지 않는다면, 악한 영은 점점 더 쌓여 가고 결국 우리의 영적 생명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인생의 고난과 저주가 없다면 누구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방 땅에서 마음대로 살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죄를 몰랐다. 이방 땅에 기근이 들어 굶주리게 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을 때 비로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를 움직여 호적 명령을 내리시고,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저주를 통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저주가 찾아올 때 원망할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한다. 그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으로 데려오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의 출발점이지, 회개의 종착점이 아니다. 예수를 믿은 그 순간부터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고후 5:10).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라는 단어에는 사도 바울 자신이 포함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행위 심판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첫 번째 심판, 곧 영벌의 심판은 면제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합당치 않게 생활한다면 죽는 날에 행위 심판이 다시 걸리게 된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를 믿을 때 시작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죽는 날에 결정된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서 나온 열매, 곧 행위를 보고 심판하신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회개가 필요하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이고, 둘째는 그 이후 일평생 지속해야 하는 '자백과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회개'다. 이 두 번째 회개를 통해 우리는 점점 깨끗한 자가 되어 가고, 죄는 삭감되며, 충성도는 올라가고, 하늘나라에서 누릴 신분과 상급이 준비된다.
회개를 빼고는 악한 영이 나가지 않는다. 회개 없이 질병이 치유되거나 마음의 상처가 온전히 회복될 수 없다. 아무리 안수를 많이 받아도, 축사 명령을 많이 해도, 회개 없이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회개 없이 안수를 받다 보면 성령의 역사는 희미해지고 악한 영은 더 축적되어 결국 완악한 자로 변해 가는 것이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선택 과목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악한 영을 덜어내고, 날마다 충성도를 더해 가는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첫 마디를 이렇게 여셨다 (마 4:17).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회개하라"는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현재 명령형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과거 명령형은 단호하게 한 번 하라는 것이고,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꾸준히 하라는 의미다. 따라서 정확히 번역하면 "회개하고 있어라", 곧 "지속적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선포가 바로 이 말씀이었다. 회개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출발한 다음, 일평생 회개 생활을 통해 죄를 점차 없애 가고, 그 자리에 충성이 채워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방정식은 이것이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은 덜어내고, 충성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더해 가는 것이다. 회개가 줄면 충성도가 올라갈 수 없고, 충성이 올라가지 않으면 죄는 점점 더 쌓인다. 그러니 회개와 충성은 서로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질 때 신앙생활은 성공한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서도,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겠다고 결단한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충성의 시작이다.
3. 후회(메타멜로마이)와 회개(메타노에오)는 어떻게 다른가?
회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와 후회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이 두 개념은 성경 원어에서 전혀 다른 단어로 표현된다.
구약 히브리어에서 회개에 해당하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나함(נָחַם)'이고, 다른 하나는 '슈브(שׁוּב)'다. '나함'은 '뉘우치다', '후회하다'는 의미다. 욥기에서 욥이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나함이다. 욥의 회개는 나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온전한 슈브에 이르지 못한 회개였다. 반면 '슈브'는 '돌이키다', '돌아가다', '유턴하다'는 의미로, 완전한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 죄를 짓다가 죄를 끊어 버리고 하나님께로 실제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슈브다.
따라서 회개한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동일한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슈브가 아니다. 혈기와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역시 슈브가 아니다. 천 번을 회개해도 죄성이 없어지지 않고 죄의 유혹이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회개했다는 것은 죄의 유혹이 사라지고, 죄의 습성이 끊어지고, 실제로 방향이 바뀌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슈브다.
신약 헬라어에서도 이 구별이 그대로 이어진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진정한 회개, 곧 슈브에 해당하는 단어다. 그러나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는 뉘우침, 후회, 양심의 가책을 의미하는 단어다. 나함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바로 이 메타멜로마이가 된다.
마태복음 27장 3절에서 5절은 이 차이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 준다 (마 27:3-5).
마 27:3-5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 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져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여기서 "스스로 뉘우쳐"라는 표현이 바로 '메타멜로마이'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뉘우쳤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시인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았고,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은 삼십 개를 돌려주려 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가 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 주님께 직접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처분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뉘우침은 있었으나 돌이킴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옥으로 갔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은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대조한다 (고후 7:10).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는 표현에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곧 메타노에오의 명사형이다. 그리고 "후회할 것이 없는"은 바로 '메타멜로마이'를 부정하는 표현이다. 즉, 나중에 다시 돌아보아도 후회하거나 뒤집을 것이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돌이킴을 의미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다.
후회는 회개의 필요한 부분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주님의 처우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메타노에오가 되고, 슈브가 된다. 뉘우침에서 멈추는 것은 회개의 반쪽에 불과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수없이 회개를 반복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이유는, 그 회개가 메타멜로마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슈브는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습성이 바뀌고, 삶의 패턴이 바뀌고, 죄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내면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슈브다.
그래서 신약의 '메타노에오'라는 회개는 구약의 '슈브'로 번역하는 것이 그 뜻을 가장 잘 전달한다. 두 단어 모두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메타노에오를 직역하면 "생각(νοέω)을 바꾸다(μετά)"이지만, 그 '생각을 바꿈'이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전한 회개가 된다. 생각만 바뀌고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메타멜로마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4.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할 때, 우리는 종종 베드로가 더 나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베드로도 결코 가룟 유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앙고백을 한 직후에 "주여, 십자가에서 죽지 마옵소서"라며 예수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었으며,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에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고 세 번씩이나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베드로와 가룟 유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뉘우침 이후의 행동이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통곡했다. 그 뉘우침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뉘우침을 행동으로 이어갔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보자"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붙들고 갈릴리로 갔다.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으셨다 (요 21:15-17).
요 21:15-17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고백으로 씻어 주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 이것이 주님의 처우였다. 베드로는 그 처우를 받아들였다. 그는 주님의 용서를 수납하고, 주님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었다. 이것이 슈브, 곧 참된 회개다.
반면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책감 앞에서 주님께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죄값을 치르려 했다. 대제사장들에게 은을 돌려주고, 성소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주님의 속죄를 거부하는 행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였다. 주님께서 그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는데, 유다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자기의 죄값을 자기가 치르겠다고 한 것인데, 죄의 값은 사망이다 (롬 6:23). 그 사망의 값을 자기가 치렀으니, 심판 뒤에 남는 것은 영원한 형벌뿐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회개의 세 단계가 모두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지적 회개, 곧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둘째는 감정적 회개, 곧 그 죄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통탄하는 것이다. 셋째는 의지적 회개, 곧 주님께로 돌아가서 주님의 처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룟 유다에게는 지적 회개와 감정적 회개는 있었으나 의지적 회개가 없었다. 베드로에게는 세 가지가 모두 있었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였다.
나아가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다는 신호였다. 베드로는 그 소망을 붙들고 갈릴리로 갔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주님께로 나아간 것, 그것이 의지적 회개였다. 유다는 자신이 회복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자기의 죄값을 자기가 치르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주님의 속죄와 용서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떠한 죄도 씻을 수 있다. 간음죄도, 살인죄도, 배반의 죄도, 저주의 죄도 — 그 어떤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남아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죄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죄값을 치르려 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속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교만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다.
결국 회개와 후회를 가르는 마지막 선은,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다.
5. 형식적 회개와 진정성 있는 회개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회개의 핵심은 형식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다윗은 시편 51편 16절과 17절에서 이것을 분명히 노래했다 (시 51:16-17).
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구약 시대에 죄를 용서받는 공식적인 방법은 제사였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더 원하시는 것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다. 형식을 갖춘 제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다윗이 어마어마한 살인죄와 간음죄를 용서받게 된 비밀이다.
다윗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레위기 20장 10절에 의하면 간음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레 20:10).
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또한 레위기 24장 17절에 의하면 사람을 죽인 살인죄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레 24:17).
레 24:17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다윗은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저질렀다. 다른 사람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간음죄와,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한 살인죄다. 여기에 탐심죄와 도둑질죄까지 더하면 다윗의 죄목은 레위기의 기준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죄들을 용서하셨다. 왜인가? 다윗의 회개에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되는 인물이 사울 왕이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그것은 직접적인 살인죄나 간음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용서해 주셨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랬을까? 사울의 회개가 형식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서 26절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상 15:24-26).
삼상 15:24-26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시인했다. 표면적으로는 회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그는 "백성을 두려워하여"라고 했다. 회개의 이유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무엘에게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장로들 앞에서 왕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사를 드려야 공식 행사가 마무리되는데, 사무엘이 자리를 떠나 버리면 왕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것은 진정성 없는 형식적 회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윗이 처해 있던 상황은 정반대였다. 시편 51편 3절과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시 51:3-4).
시 51:3-4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는 고백은 요셉의 고백을 연상시킨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했다. 다윗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눈앞에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모든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백성의 시선, 신하들의 눈치, 왕으로서의 체면 — 이런 것들이 다윗의 회개에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성이 있었다.
이 진정성의 차이가 왜 이토록 중요한가?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아무리 화려한 회개의 언어를 구사해도, 아무리 성대한 제사를 드려도, 그 마음의 중심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지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를 하나님은 즉시 아신다. 그래서 형식적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진정한 회개는 오직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완전히 쏟아질 때 이루어진다.
6. 사울 왕의 회개가 용납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앞 장에서 사울의 형식적 회개를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사울의 회개를 용납하지 않으셨는지를 더 깊이 파고들어 보자.
사울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고백이자 동시에 변명이었다. 진정한 회개에는 변명이 없다. 진정한 회개는 오직 "내가 잘못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울은 "백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회개 안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는 행위다.
더 나아가 사울은 회개한 이후에도 체면을 앞세웠다. 사무엘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사울이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자신을 높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옷자락이라도 잡으려 했다. 체면 때문에 회개를 흥정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만약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장로들과 백성이 있는 그 앞에서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했어야 했다. 왕으로서 더 무거운 책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백성보다 천 배는 더 깊이 회개해야 했다. 지도자는 많이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반복된다. 형식적으로는 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면을 지키려 하고,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회개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그런 회개를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울은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다윗의 살인죄, 간음죄보다 가볍게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더 무거운 죄는 용서하시고 사울의 불순종은 용서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무게보다 회개의 진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기록된 말씀이 그것을 선명하게 표현한다 (삼상 15:22).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형식적인 제사보다 진정한 순종이 낫고, 외적인 의식보다 내면의 진실이 낫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회개의 형식을 갖추어도, 마음이 진정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 51편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기 위해서다. 사울의 비극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보다 백성의 시선 앞에 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그의 모든 실패의 근원이었다. 반면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했다. 모든 시선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었다. 이 차이가 용서받은 왕과 버림받은 왕을 갈랐다. 우리가 받아야 할 도전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회개는 사울의 회개인가, 아니면 다윗의 회개인가?
신약에서 회개의 모범 사례들은 대부분 누가복음에 집중되어 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 회개,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회개,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의 회개,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회개, 누가복음 23장의 오른편 강도의 회개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 회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하나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눅 18:13)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그 즉시 자신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결단했다. 오른편 강도는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눅 23:41)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돌아갔다. 이들 모두에게 형식은 달랐지만 진정성은 동일했다.
7. 다윗은 지·정·의(知情意) 입각한 슈브(שׁוּב)를 어떻게 실행했는가?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슈브, 곧 완전한 돌이킴이었다는 사실은 지·정·의 세 차원 모두에서 확인된다. 진정한 회개는 지적 차원, 감정적 차원, 의지적 차원이 모두 통합되어야 한다.
첫째, 지적 회개다. 다윗은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시편 51편 3절은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시 51:3).
시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는 열 달 동안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 죄를 자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죄가 무엇인지는 매 순간 의식하고 있었다. 십계명으로 보면 그는 6계명(살인하지 말라), 7계명(간음하지 말라), 8계명(도둑질하지 말라), 10계명(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을 어겼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죄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회개하려면 먼저 무엇이 죄인지를 알아야 한다. 십계명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회개를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오늘날 일부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율법에서 자유하니 십계명을 알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마지막 날 천국에서는 모세가 행위 책을 들고 와서 십계명에 따라 죄를 판단한다. 십계명을 몰라서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면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안 지켰어도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십계명이 지켜지는 삶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율법의 도덕법은 하나도 폐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이 죄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지적 회개의 토대가 되었다.
둘째, 감정적 회개다. 다윗의 감정적 회개는 시편 6편 6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 6:6).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고 했다. 이것은 열 달에 걸친 기간의 고통이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다윗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 영적 공허함과 죄책감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겠는가. 사울 왕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그렇게 아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신 열 달은 죽음보다 더한 시간이었다. 다윗은 그 10개월 내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신뢰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뼈아프게 통회하며 보냈다. 사울왕이 잘못해서 패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셨는데, 자기도 똑같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다.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다윗이 그토록 감사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편 32편 3절에서 5절은 그 고통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시 32:3-5).
시 32:3-5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뼈가 쇠하였다, 진액이 빠져 마름같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죄의 무게 아래 육체까지 피폐해질 정도로 회개의 고통이 극심했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자복했더니 하나님께서 죄악을 사하셨다고 했다. 나단 선지자가 오던 날,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삼하 12:13) 그 열 달의 내면적 통회가 이미 무르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신 것은 다윗의 마음이 준비되었다는 신호였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도 왕의 죄를 사하셨나니 왕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감정적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신구약을 통틀어 강조된다.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가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라"고 한 것이나, 다윗이 10개월 동안 침상을 눈물로 적신 것이나, 누가복음에서 베드로가 닭 울 소리를 듣고 통곡한 것이 모두 감정적 회개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죄의 인식은 반드시 가슴을 찢는 아픔을 동반한다. 눈물 없는 회개, 통회 없는 자백, 아픔 없는 반성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회개라 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정적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아픔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슈브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셋째, 의지적 회개다. 지적으로 죄를 알고 감정적으로 통회한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윗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처우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슈브다. 요엘서 2장 12절과 13절은 이 세 차원을 모두 담은 회개를 이렇게 표현한다 (욜 2:12-13).
욜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 이것은 감정적 회개다. "마음을 찢고" — 이것은 진정성이다.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 이것은 의지적 회개, 슈브다. 옷을 찢는 것은 외적 형식이고, 마음을 찢는 것은 내적 진실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옷이 아니라 마음이다.
다윗은 의지적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처우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시편 51편 14절과 15절은 그 의지적 헌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시 51:14-15).
시 51:14-15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여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겠다고 결단했다. 시편 143편 10절에서도 이 의지적 헌신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시 143:10).
시 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 그것이 의지적 회개의 완성이다. 이처럼 지·정·의 삼중 구조가 통합될 때 비로소 슈브가 완성된다. 지적으로만 회개하면 관념에 머물고, 감정적으로만 회개하면 감상주의가 되며, 의지적으로만 회개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세 가지가 하나로 통합될 때 참된 돌이킴이 일어나고, 악한 영은 물러가며, 하나님의 영이 그 자리를 채우신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죄값을 치르려 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다. 이것이 지·정·의 입각한 슈브다.
8. 다윗이 바세바 사건 이후 보여 준 진정한 돌이킴의 증거는 무엇인가?
진정한 회개의 증거는 삶이 실제로 바뀌는 것이다. 말로만 뉘우치고 또다시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놀라운 일을 보여 주었다. 그는 두 번 다시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았다.
열왕기상 1장 1절에서 4절은 다윗의 노년을 이렇게 묘사한다 (왕상 1:1-4).
왕상 1:1-4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왕을 받들어 모셨으나 왕이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신하들이 젊고 아름다운 처녀 아비삭을 데려왔다. 노년에 체온을 따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노쇠함이 아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의 다윗이라면 상상도 못 할 절제였다. 그는 회개 이후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었다. 그 절제가 죽는 날까지 유지되었다. 이것이 슈브의 증거다.
또한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장수들을 함부로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압살롬의 반란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져도, 아비새가 "저 죽은 개를 죽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다윗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밧세바 사건 이후의 다윗이다. 회개한 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난과 수치를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
그러나 회개한 다윗이라도 죄의 결과는 지불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 선언하셨다 (삼하 12:10).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다윗은 넷의 배로 죄값을 치렀다. 첫째, 밧세바에게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이 죽었다. 둘째,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다. 셋째,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다. 넷째, 아도니야가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네 명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장수들도 연이어 죽임을 당했다. 우리아 한 명을 죽인 것이 여러 명의 장수를 잃게 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에게 더 엄중한 죄값을 물으신다. 이 땅에서 징계를 받아야 천국에서의 징계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하신다 (눅 12:48).
눅 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받을 것이니라
다윗은 그 모든 징계를 받아들이며 끝까지 하나님 앞에 섰다. 이것이 다윗의 회개의 증거다. 회개 이후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징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진리를 시편으로 남겨 후대에 가르치는 것 — 이 모든 것이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슈브였음을 증거한다.
회개는 또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죄를 자백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그 죄에 속한 악한 영이 우리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악한 영이 있는 한 치유는 온전하지 못하고, 회복은 불완전하며, 충성의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명하신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죄를 비워 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와 충성이 채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것을 평생 실천했고, 그 결과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의 시편은 온 세계 성도들의 영적 양식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의 시편을 단순한 찬송시로 읽어서는 안 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일지이고, 시편 32편은 회개 전 고통의 기록이며, 시편 6편은 회개하지 못하던 10개월의 울부짖음이다. 그리고 시편 143편은 회개 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결단의 시다. 이 시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전 과정을 가르쳐 주신다. 죄의 인식에서 시작하여 통회하는 가슴을 거쳐, 의지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다시는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는 것까지가 온전한 회개다. 다윗은 그 모든 과정을 살아냈고, 그것을 시편에 남겼다.
다윗의 시편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존하신 것은 장차 오실 참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회개의 원형(原型)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윗의 아름다움과 멋짐은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음에 두 번 다시 동일한 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회개를 배우고 싶은가? 다윗을 보라. 다윗처럼 회개하라."
9. 나오며
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이 어떻게 회개했으며, 그 회개가 왜 진정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제외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일평생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후회(메타멜로마이)는 회개(메타노에오)의 시작일 수 있으나, 거기서 멈추면 가룟 유다의 길이 된다. 지적으로 죄를 알고, 감정적으로 통회하며,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슈브(שׁוּב)의 삼중 구조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완성된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사울 왕처럼 체면과 위신을 앞세워 형식만 갖추는 회개는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다윗처럼 열 달 동안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진심으로 통회하는 자에게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용서를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죄를 지은 이후에 하는 의식이 아니라, 죄된 본성과 맞서 싸우며 날마다 악한 영을 덜어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남의 아내를 두 번 다시 탐하지 않았듯이,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회개 없이는 악한 영이 나가지 않고, 악한 영이 나가지 않으면 질병의 치유도, 마음의 상처의 회복도, 참된 성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의 신앙생활은 곧 회개와 충성의 삶이다. 죄는 삭감되어 가고 충성도는 올라가며, 날마다 하늘에서 누릴 신분과 상급이 준비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약의 회개는 구약의 슈브를 그 뿌리로 삼는다.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있어라"고 현재 명령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이 슈브가 일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베드로, 삭개오, 오른편 강도, 세리, 돌아온 탕자 — 이 모든 신약의 회개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진정한 회개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회개가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이유가 있다.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개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어떻게 받으시는지를 다윗의 삶을 통해 배우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안주하여 회개를 소홀히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회개하면 예수의 속죄를 안 믿는 것이냐는 공격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속죄와 자백은 다르고, 구원의 칭의와 성화의 과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다윗의 회개를 배우고, 다윗처럼 지·정·의 입각한 슈브를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 날마다 진정으로 돌이키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08일 |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진정한 회개의 본질을 다윗과 가룟 유다, 사울 왕의 사례를 대조하며 심도 있게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구원이 단회적 사건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죄성을 씻어내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슈브(Shuv)'의 과정이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다윗이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후회를 넘어 지정의(知情意)가 포함된 전인격적 회개와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삶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신앙생활의 성패가 입술의 고백이 아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악한 영을 털어내고 하나님의 처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회개의 진정성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