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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7. 02. (목)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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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ksvG_UDIzPQ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38)] 다윗의 아들 솔로몬(16) 여자가 성숙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아가5:2~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ksvG_UDIzPQ

 

술람미 여인이 성숙한 신부가 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인가?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는 시작도 있고 성장도 있으며 성숙도 있다. 사람이 태어났다고 곧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곧바로 장성한 신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는 늘 자기 필요를 먼저 말한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투정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한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다르다. 장성한 자는 자기만 먹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다. 자기만 보호받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 자기만 사랑받으려 하지 않고 신랑의 마음을 품고 다른 신부를 낳고 양육할 수 있다.

  아가서는 바로 이 성숙의 과정을 보여 주는 책이다. 술람미 여인은 처음부터 완성된 신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알하몬 포도원에서 일하던 시골 처녀였고, 자기 포도원조차 온전히 지키지 못하던 포도원지기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녀를 찾아와 사랑했고, 그녀를 자기 왕궁으로 데려가 신부로 삼았다. 그럼에도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을 받은 뒤에도 두 번이나 신랑을 잃어버리는 사건을 겪었다. 첫 번째는 결혼 전 신랑을 찾다가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간 사건이고, 두 번째는 결혼 후 신랑의 문 두드림에 즉각 반응하지 못해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린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신부의 성숙을 이해하는 열쇠다. 첫 번째 사건은 죄인 됨을 깨닫고 신랑에게 돌아가는 속죄적 회개를 보여 준다. 두 번째 사건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을 수 있으며, 그때 즉시 돌이켜 주님의 임재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정결의 회개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성숙한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회개였다. 회개가 그녀를 시골 처녀에서 왕비로, 왕비에서 전투하는 신부로, 전투하는 신부에서 다른 신부를 낳고 양육하는 동산의 동역자로 이끌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술람미 여인이 어떻게 어린 신부에서 성숙한 신부로 자라났으며, 그 길에서 회개가 왜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도는 왜 어린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되는가?

  성도는 반드시 자라야 한다.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여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무르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목표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단지 성경 지식이 많아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품과 사역의 분량이 우리 안에서 자라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장성한 자는 신랑 중심적이다. 어린아이는 받는 데 머물지만 장성한 자는 먹이고 돌본다. 어린아이는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지만 장성한 자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아가서 8장에는 아직 유방이 없는 작은 누이가 나온다. 유방은 생명을 먹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유방이 없다는 것은 아직 양육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신부라 할지라도 다른 신부를 낳고 먹이고 세울 수 없다면 아직 어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목적은 단지 성 안에 들어오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성 안에 들어온 자가 왕의 뜻을 알고 왕의 동산에서 왕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바람이다.

아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서 멈춘다. 그러나 아가서는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술람미 여인은 왕의 사랑을 받았지만, 사랑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신랑을 찾았고, 신랑을 잃어버렸고, 신랑을 다시 찾았으며, 그 과정에서 자기 죄와 자기 무지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신랑의 마음을 알아 가는 자가 되었다. 성숙이란 바로 이것이다. 성숙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시작하고, 주님의 임재가 멀어졌을 때 그것을 가장 큰 위기로 느끼는 데서 깊어진다.
  영의 나이가 자란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 교회에 다녀도 영적 어린아이로 머물 수 있다. 반대로 깊은 회개와 말씀의 빛을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도 있다. 성장은 주님을 추구할 때 일어난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생명이 안에 들어오며, 회개를 통하여 악한 영들의 합법적 권한이 제거될 때 성도는 실제로 자란다. 그러므로 성숙의 핵심은 외적 연수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의 깊이요, 회개의 실제요, 영적 전쟁의 승리다.

 

 

3. 아가서 3장의 첫 잃어버림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술람미 여인에게는 첫 번째 잃어버림이 있었다. 그녀는 밤에 침상에서 자기 혼이 사랑하는 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한 연애 감정의 장면으로만 볼 수 없다.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이 장면은 예비 신부가 신랑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자신이 정말 신랑에게 속한 자인지를 두려움 가운데 찾는 영적 장면이다. 본문은 그녀가 성 안을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자를 찾았고, 순찰자들을 만났으며,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아3:1~4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적으로 보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혼 전체의 갈망을 담는다. 사람의 깊은 내면, 곧 네페쉬가 신랑을 찾는 것이다. 신부는 신랑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신랑을 잃어버린 상태가 자기에게 가장 큰 두려움임을 알았다. 이것이 신부의 첫 성숙이다. 주님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신부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다. 주님의 임재가 멀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아직 어린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이 장면은 꿈속의 장면처럼 보인다. 장소가 현실적으로 엄밀하게 설명되지 않고, 성 안에서 찾다가 곧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표적으로 보면 이 흐름은 매우 선명하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찾은 뒤 그를 자기 어머니의 집, 자신을 잉태한 이의 방으로 데려간다. 왜 하필 그곳인가? 그녀는 단지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간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 존재의 시작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신부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에서 신랑을 떠났으며, 어디에서 다시 신랑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성도가 성숙하려면 먼저 자기의 시작을 보아야 한다. 나는 본래 주님께 속한 자였으나 죄로 말미암아 주님을 떠난 자였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스스로 잘난 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였고, 찾아오신 신랑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바알하몬 포도원에서 고통받을 자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고백이 없으면 성장은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뼈저리게 깨닫는 자에게 성숙의 문이 열린다.

 

 

4. 왜 신부는 신랑을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갔는가?
  아가서 3장의 핵심은 신랑을 찾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찾은 뒤 그를 붙잡고 어머니의 집으로, 자기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데려갔다. 이 장면은 아가서 8장의 사과나무 아래 장면과 연결된다. 남자는 “너를 낳은 자가 산고한 그곳, 곧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집은 단지 혈육의 집이 아니라, 예표적으로 생명나무 아래의 자리요, 처음 호흡이 시작된 자리요, 또한 죄로 인하여 신랑과 분리되었던 자리를 가리킨다.
아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를 낳은 자가 산고한 그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아가서에서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의 예표로 읽을 수 있다. 사과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타푸아흐는 숨, 호흡, 생명과 연결되는 어감을 가진다. 생명나무 아래에서 신부는 처음 깨워졌고, 그곳에서 신랑에게 속한 자로 존재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녀는 신랑을 떠났다. 창세기의 언어로 말하면, 하와는 아담의 말보다 뱀의 말을 들었다. 신랑의 음성보다 다른 남자의 음성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간 것은, “내가 바로 당신을 떠난 자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이 아니라 뱀의 말을 들은 자입니다. 이제 다시는 다른 음성을 따르지 않고 당신의 말만 듣겠습니다”라는 회개의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신부의 첫 회개는 속죄적 회개다. 이것은 구원을 향한 회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신랑을 떠난 자라는 것을 시인하고, 신랑의 피값 없이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회개다. 이 회개가 없으면 신부의 여정은 시작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신랑의 피가 왜 필요한지를 모른다.

막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신앙의 출발점에서 자기를 속이면 안 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주님이 나를 조금 더 좋게 해 주셨다고 생각하면 성숙하지 못한다. 나는 죄로 인하여 신랑을 떠난 자였고,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진 자였으며,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바로 그때 신랑의 사랑이 내 안에 깊이 들어온다. 신랑의 사랑이 들어올 때 영혼은 자란다. 회개가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회개를 통해 들어온 말씀은 사람을 살린다.

 

 

5. 아가서 5장의 두 번째 잃어버림은 무엇이 달랐는가?

  첫 번째 잃어버림이 예비 신부의 상태에서 신랑을 찾는 일이었다면, 두 번째 잃어버림은 결혼 후에 일어난다. 이것이 더 무겁다. 술람미 여인은 이미 신부가 되었다. 신랑은 그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그녀는 신랑의 문 두드림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이미 옷을 벗었고 발을 씻었다는 이유로 지체했다. 그러다 문틈으로 내민 신랑의 손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지만, 문을 열었을 때 신랑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아5:2~6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이 사건은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의 임재를 잃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신부가 되었으니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생각은 아가서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 결혼 후에도 신부는 실패할 수 있다. 주님의 부르심을 오해할 수 있고, 즉각 순종하지 못할 수 있으며, 신랑의 마음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술람미 여인은 밤이슬을 맞고 온 신랑을 보고도 처음에는 그가 왜 늦게 왔는지를 알지 못했다. 신랑이 다른 여인에게 있다가 온 것처럼 오해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틈으로 들어온 그의 손에는 몰약이 가득했다. 몰약은 죽음과 희생과 고난을 상징한다. 신랑은 쾌락의 자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 동산에서 양 떼와 신부들을 돌보다가 밤이슬을 맞고 온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두 번째 회개를 요구한다. 첫 번째 회개가 죄인 됨을 고백하는 회개라면, 두 번째 회개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회개다. 이것은 정결의 회개다. 성도는 구원받은 뒤에도 주님을 오해할 수 있다. 주님의 부르심에 늦게 반응할 수 있다. 주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고, 주님의 늦어짐을 사랑의 부족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는 여전히 몰약이 있다. 그분은 오늘도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며, 자기 동산에서 양 떼를 먹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부는 주님의 임재가 멀어진 순간을 방치하지 않는다. 친밀함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은 위험하다. 기도가 식고, 말씀이 멀어지고, 회개의 감각이 둔해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었는데도 그대로 두면 그 간격은 점점 벌어진다. 술람미 여인은 늦었지만 그대로 앉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신랑을 찾으러 나갔다. 이것이 성숙의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6. 신부는 임재를 잃었을 때 어떻게 다시 찾아야 하는가?

  술람미 여인은 신랑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그녀를 쳐서 상하게 했고, 성벽 파수꾼들은 그녀의 겉옷을 빼앗았다. 그녀는 왕비였지만 밤의 영역에서는 능욕을 당했다. 이것은 영적 세계의 실제를 보여 준다. 성도가 주님의 임재를 잃고 밤의 영역으로 나가면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 전쟁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아5:7~8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빼앗았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신부가 신랑을 다시 찾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부탁했다. 이것은 영적으로 기도의 자리다. 자기 힘으로 안 될 때 성도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둘째,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그녀는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신랑을 놓쳤고 그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고백이다. 셋째, 신랑의 어떠하심을 선포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이 “네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술람미 여인은 신랑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움과 위엄을 선포했다.

아5:9~10 여자들 가운데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네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악한 영을 이기는 데에도 이 원리는 중요하다. 먼저 기도해야 한다. 다음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해야 한다. 귀신과 싸울 때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피와 말씀으로 대적해야 한다. 신부가 밤의 영역에서 상처를 받았으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신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능욕당했다고 주저앉지 않았다. 겉옷을 빼앗겼다고 신랑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신랑이 누구인지를 더 선명하게 선포했다.

  그러자 어두운 무대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의 딸들도 함께 신랑을 찾게 된다. 신랑은 어디에 있었는가? 자기 동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있었다. 신부가 오해했던 신랑의 밤늦은 방문은 방탕이 아니었다. 신랑은 자기 동산에서 양 떼를 먹이고 백합화 가운데서 사역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신부는 신랑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단지 사랑받는 자에서 신랑의 사역을 이해하는 자로 성장한다.

아6:2~3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7. 참된 회개는 왜 지식과 애통과 돌이킴을 포함하는가?

  술람미 여인의 두 사건은 회개의 본질을 보여 준다. 회개는 단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만이 아니다. 참된 회개에는 세 요소가 있다. 첫째는 지적인 회개다.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가 신랑을 떠났고, 신랑을 오해했고, 신랑의 부르심에 늦게 반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는 감정적인 회개다. 죄를 알았는데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으면 아직 깊은 회개가 아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고, 주님의 임재를 잃은 것이 병이 될 만큼 아파해야 한다. 셋째는 의지적인 회개다. 실제로 돌이켜야 한다. 신랑을 찾아 나서야 한다.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아가서 3장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기 죄인 됨을 알았다. 아가서 5장에서 그녀는 신랑을 늦게 맞이한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깨닫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애통했고, 일어났고, 찾아 나섰다. 이것이 회개다. 성경에서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마음과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단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반면 가룟 유다의 반응을 설명하는 말은 뉘우침의 차원에 머문다. 그는 죄를 알았고 마음도 아팠지만, 주님께 돌아가지 않았다.
  성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죄를 모르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죄를 알고도 애통하지 않는 것이고, 또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애통하면서도 주님께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잘못 때문에 마음이 아파야 하며, 실제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회개가 후회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길이 된다.
  회개는 성숙의 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내 삶에 잠시 들어와 주시는 분으로 생각할 뿐,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회개가 깊어지면 주님이 내 생명이 되신다. 회개가 깊어지면 세상과 마귀의 음성이 얼마나 나를 속였는지를 알게 된다. 회개가 깊어지면 악한 영들의 합법적 권한이 제거되고, 영혼은 더 자유로워진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천국 문 앞에서 한 번 하는 절차가 아니라, 신부가 날마다 정결해지고 성숙해지는 길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자백은 구원받은 이후의 정결과 깊이 연결된다. 예수의 피는 속죄의 피이면서 정결의 피다. 믿을 때 죄가 덮이고, 자백할 때 더러움이 씻긴다. 신부가 왕궁에 들어온 뒤에도 씻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부라 할지라도 문 두드리는 신랑에게 즉각 반응하지 못할 수 있고, 자기 판단으로 신랑을 오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백하고 돌이켜야 한다. 이것이 어린 신부를 성숙한 신부로 만드는 하나님의 길이다.

  여기서 회개는 단지 마음의 짐을 덜어 내는 심리적 행위가 아니다. 회개는 하늘의 법정에서 죄의 기록을 처리하는 일이며, 동시에 사람 속에 합법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악한 영들의 권한을 끊는 일이다. 죄가 자백되지 않으면 그 죄를 빌미로 들어온 영들이 계속 사람을 묶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백하는 회개는 정결의 길이며, 신부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길이다. 요한계시록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성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말한다. 신부가 왕궁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산에 들어가려면, 피로 씻기고 말씀으로 씻기며 회개로 더러움을 제거해야 한다.

계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그러므로 아가서 3장의 회개와 아가서 5장의 회개는 서로 다른 단계의 회개다. 전자는 신랑을 떠난 죄인임을 깨닫는 회개요, 후자는 신부가 되었음에도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다시 친밀함으로 돌아가는 회개다. 이 두 회개가 연결될 때 신부는 단지 용서받은 자에 머물지 않고 깨끗한 자가 되며, 깨끗한 자에서 더 나아가 신랑의 동산에서 함께 일하는 거룩한 동역자가 된다.

 

 

 

8.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성숙의 길을 어떻게 갈라놓는가?

  회개와 후회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다. 두 사람 모두 실패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둘 다 큰 죄를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지막은 완전히 달랐다. 그 차이는 죄의 크기보다 회개의 방향에 있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죄를 알았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뉘우쳤고 은 삼십을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성전에 돈을 던져 놓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후회에 머문 것이다. 후회는 자기 죄를 보지만 주님께 가지 않는다. 후회는 마음이 아프지만 생명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후회는 자기를 정죄하다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
마27:3~5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베드로도 실패했다. 그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돌아갈 길을 버리지 않았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그에게 세 번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은 회개가 단순히 죄책감을 씻는 데서 끝나지 않고, 양육의 사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요21:15~17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술람미 여인의 길과 베드로의 길이 만난다.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잃고 다시 찾은 뒤, 신랑이 자기 동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뒤 다시 주님을 만나 양 떼를 먹이라는 사명을 받았다. 이것이 성숙한 신부의 길이다. 회개한 자는 결국 양 떼를 먹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죄만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먹이고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회개는 성숙의 문이고, 양육은 성숙의 열매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악한 영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겠는가? 그러나 회개한 자는 다르다. 회개한 자는 신랑의 피가 얼마나 귀한지 안다. 회개한 자는 주님의 임재를 잃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회개한 자는 양 떼가 사자와 곰에게 물려 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회개한 신부는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되고, 포도원의 여우를 잡으며, 다른 신부를 낳고 양육하는 동역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미래는 오늘의 회개와 연결된다.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도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양 떼를 먹인 사람은 천국에서 그 열매를 보게 된다. 그러나 회개를 거절하고 어린아이로 머문 사람은 성 안에 들어가더라도 낮은 신분에 머물 수 있다. 신부의 성숙은 이 땅에서 준비된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9. 나오며

  술람미 여인이 성숙한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완성된 신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신랑을 잃어버린 경험을 두 번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잃어버림을 통해 자기가 신랑을 떠난 죄인임을 알았고, 두 번째 잃어버림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잃었을 때 즉시 돌이켜야 함을 배웠다. 그러므로 그녀의 성숙은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도도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한다. 주님의 피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구원받은 이후에도 주님의 임재가 멀어질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기도가 식고 말씀이 멀어지고 사랑이 식어 갈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잃는 것이 가장 큰 손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참된 회개는 지식과 애통과 돌이킴을 포함해야 한다. 죄를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고,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실제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가룟 유다처럼 후회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처우를 기다리며 다시 양 떼를 먹이는 사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개한 신부는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신부를 살려야 한다. 회개한 신부는 신랑의 동산을 보아야 하고, 신랑의 양 떼를 돌보아야 하며, 포도원의 여우를 잡는 영적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도는 날마다 회개로 정결해져야 한다. 회개를 통해 악한 영들의 권한을 끊어야 하고, 회개를 통해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해야 하며, 회개를 통해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성숙한 신부로 자라가야 한다. 그리하여 신랑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즉시 돌이켜 다시 주님을 찾고, 마침내 주님의 양 떼를 먹이며 또 다른 신부를 세우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01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신자가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회개의 단계적 실천을 강조하며 성경의 아가서를 신부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영적 성장이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고백하고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특히 주님의 임재를 상실했을 때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정결의 회개가 신앙의 품격을 높이는 결정적 이유임을 설명하며, 이를 통해 천국에서의 신분과 보상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결국 본질적인 성숙이란 지성, 감성, 의지가 통합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와 온전한 동역자 관계를 형성하는 것임을 제시하며 마무리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성숙한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두 번의 ‘잃어버림’ 앞에서 회개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잃어버림은 결혼 전 혹은 예비 신부의 상태에서 신랑을 찾다가 어머니의 집, 곧 사과나무 아래로 돌아가 자신이 신랑을 떠났던 죄를 깨닫는 속죄적 회개였다. 두 번째 잃어버림은 결혼 후 신랑의 문 두드림에 즉각 반응하지 못하여 임재를 잃어버린 사건이었고, 그때 그녀는 자신의 오해와 시기와 미움을 깨닫고 신랑을 찾아 나서는 정결의 회개를 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부가 되는 길은 회개 없는 열심이 아니라, 죄인 됨을 깨닫고, 임재를 잃은 즉시 돌이키며, 마침내 주님의 양 떼를 먹이는 사명으로 나아가는 회개에 있다.

 

 

1. 들어가며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라가야 하는 존재다. 육신도 그러하거니와 영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는 늘 반찬을 투정하고 입이 나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말씀한다(엡 4:13).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은 기독론 강해 가운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다루는 연속 강해의 한 대목으로서, 아가서 전체를 그리스도와 신부 된 성도의 관계를 보여 주는 예표로 풀어가는 자리에 놓여 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의 연애담으로만 읽는다면 그 깊은 뜻을 놓치고 만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한 영혼을 부르시고, 그 영혼이 시련과 실수와 회개를 거쳐 참된 동역자로 세워져 가는 전 과정을 보여 주는 예언적 문학으로 읽어야 한다.

  아가서는 얼핏 보면 한 남녀의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실은 시골에서 자란 술람미 여인이 왕의 신부로 부름을 받아 참된 동역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아낸 문학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완전한 신부가 아니었다. 왕의 눈에 들어 예루살렘으로 이끌려 왔지만, 결혼식을 올리기 전과 신혼 초에 각각 한 번씩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번의 실수야말로 그녀를 참된 신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뿐인 동역자로 세워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수 자체가 아니라 그 실수 앞에서 그녀가 보인 태도, 곧 회개가 그녀를 성숙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하는 핵심 주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아가서에 나타난 술람미 여인의 두 번의 실수와 회개를 통해 여자가, 곧 신부 된 성도가 어떻게 성숙한 자로 세워질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는 왜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가?

  사람의 영에는 나이가 있다.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영의 나이가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평신도는 영의 아이로 태어난다. 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하여 보내신 십사만 사천과 같은 이들은 처음부터 영의 나이가 높게 태어난다. 그러나 처음 영의 나이가 낮다고 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나이가 얼마나 자라가느냐가 중요하다.

  보편적으로 사람이 이 땅에 내려와서 영의 나이 한 살을 먹는 데는 약 십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단 일 년을 배우고도 한 살이 오를 수 있다. 그 차이는 다른 데 있지 않고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아가서는 바로 이 지점을 보여 주는 책이다. 시골에서 자란 처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동역자가 되기까지 성장해 가는 과정을 마치 대본처럼 기록해 놓은 것이 아가서다.

  아가서는 성숙하지 못한 자, 곧 아직 양육받지 못한 자를 유방이 없는 어린 누이로 비유한다(아 8:8).

아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유방이 없다는 것은 아직 누군가를 양육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린아이는 남을 먹일 수 없다. 자기조차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자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도 낮은 신분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져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공주가 아무 고생도 하지 아니하고 그저 시집와서 왕비의 자리에만 앉아 있다면 그는 왕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왕의 하나뿐인 짝으로서 참된 동역자라 불릴 수는 없다. 성장과 성숙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관심을 가지고 좇아가야 하는 것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도 이와 같은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젖만 먹는 자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를 구별하며, 장성한 자라야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한다(히 5:12-14).

히 5:12-14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무릇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임을 지적하며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증거라고 책망한 바 있다(고전 3:1-3).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중에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시기와 분쟁, 다툼과 미움이 있는 자리는 아직 어린아이의 자리다. 이러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할지라도 참된 성숙에 이른 것이 아니다.

  또한 주님은 열 처녀 비유를 통하여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마 25:1-13).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되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결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는 재림의 그날까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곧 끊임없이 자라가야 함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필자는 지금도 자신의 삶에 만족한 적이 없다. 날마다 주님을 더 알기를 추구할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을 추구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이 성품으로 내 속에 들어오시고, 그 성품이 들어와야 비로소 영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것, 마귀가 주는 것은 배우면 배울수록 사람을 타락시킨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사람을 성장시킨다.

  이러한 원리는 일상의 작은 결정에서부터 나타난다. 말씀을 들을 때 곧바로 순종하려는 태도를 갖는 사람과, 듣고도 자신의 생각과 습관을 고집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영의 나이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순종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혼은 신랑과 신부의 수준이 비슷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어린아이와 평생을 함께 살 신랑은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와 실제로 혼인하는 때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림의 그날까지 부지런히 자라가야 한다. 문제는 그 성장의 기회가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이제 그 성장의 기회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영적 성장의 기회가 육신을 가진 이 땅에서만 주어지는 이유는?

  영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있는 동안에만 주어진다. 천국에 올라가서는 설령 영의 나이가 조금 자란다 할지라도 그 신분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땅에 있을 때 자라가면 천국에 들어갈 때의 신분이 실제로 올라간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결정과 행함에 달린 문제다.

  흔히 한 번 구원받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스스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구원의 자격을 값없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신분과 상급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계 22:12).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결혼의 완성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성취된다(계 19:7-9).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부가 입는 세마포 옷이 다름 아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장차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의 옷차림, 곧 신분과 영광을 결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또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도 말씀하셨다(갈 6:7).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물론 봉사나 헌금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헌금 한번 드려 보지 않고, 봉사 한번 해 보지 않고,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만 일삼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성장하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면 어린아이의 신분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된다.

  이 회개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필자는 최근 회개 기도문을 새롭게 정리하는 작업을 해 왔다. 그동안 우상숭배 회개 기도문, 쓴 뿌리 회개 기도문, 십계명 회개 기도문,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회개 기도문 등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어 왔으나, 그것들 하나하나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특별히 억압과 폭력과 살인과 권력 남용의 죄를 다루는 부분이 빠져 있었는데, 바로 그 죄로 말미암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아 왔다. 그래서 이번에 이 모든 부분을 다섯 개의 영역으로 정리하여 하나로 묶은 평생 회개 기도문을 완성하였다. 이 기도문 하나로 평생 회개해 나갈 수 있도록 정제된 언어로 촘촘하게 엮어 낸 것이다. 이렇게 회개의 자리를 늘 준비해 두는 것 자체가 영의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도문을 완성하기까지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칠월 말에 예정된 집중 기도회를 앞두고 사모가 원고의 진행 상황을 재촉하였고, 필자는 그 말을 듣고 그날 밤늦게까지 원고를 다듬어 마침내 완성하였다. 설교를 전하고, 새벽 기도를 인도하고, 축사 사역을 감당하고, 외부 심방까지 다녀오는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이 작업을 미룰 수 없었다. 영의 나이가 높아질수록 감당해야 할 일은 오히려 더 많아지고 고되어진다. 그럼에도 이러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 자체가 영적으로 자라가고자 하는 자의 태도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빌 1:6).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돌아보면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께 피곤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고, 말씀 전하는 일이 싫다고 말한 적도 없다. 말씀을 증언하는 일은 언제나 기쁨이었고 기대함이었다. 다만 말씀 증언 외에 감당해야 할 다른 사역들, 곧 축사와 심방과 여러 행정적인 일들은 몸을 지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영의 나이가 높아질수록 감당할 일이 오히려 늘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더 많은 사명을 맡기시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 영적 세계로 부름을 받았을 때 한 스승에게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받은 일이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진단이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진단이라는 것은 어느 시점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하늘에서 보낼 때의 상태를 보는 것과, 현재의 상태를 보는 것과, 장차 궁극적으로 완성될 때의 상태를 보는 것이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사람은 흔히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줄 착각한다. 서로 보는 시점이 다르면 다르게 보이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이 아니다.

  필자가 초창기에 자신의 천국 집을 보려고 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적이 있다. 나쁜 것이 보인 것이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때 주님께서 주신 뜻은 분명했다.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회개의 분량이 아직 채워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상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축사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같은 원리를 확인하게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마땅히 나가야 하는데도 나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를 갈라디아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함을 받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고 하였다(갈 3:13-14).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럼에도 삶 속에서 여전히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면, 그 현실과 말씀을 어떻게 맞추어 나가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이것을 바르게 풀어내는 것이 곧 해석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천국 집을 살펴보았을 때, 처음에는 자신의 집이 보이지 않다가 회개를 거듭할수록 그 집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국에서의 신분과 처소는 늘 유동적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뒤로 회개를 부지런히 힘써 왔다. 그 과정에서 악한 영을 몰아내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축사 사역자로 세워지게 되었다. 결국 영이 성장하기 위한 기회는 오직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순간에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4. 결혼 전 꿈에서 신랑을 잃어버린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성숙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신부의 두 번의 실수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차례다. 첫 번째 실수는 아직 결혼식을 올리기 전, 예루살렘 성으로 이끌려 온 직후에 일어난다(아 3:1-4).

아 3:1-4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 본문에서 여인은 밤에 침상에 누워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내 그를 붙잡고 어머니의 집으로 갔다는 대목에서 이 사건이 실제 상황이라기보다 꿈속의 일임을 짐작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있던 여인이 순식간에 어머니의 집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러한 전개는 이 장면이 꿈, 또는 몽중의 사건임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이자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 그려지는 도시다(계 21:2).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인이 예루살렘으로 이끌려 왔다는 것은 단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영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때는 아직 결혼식을 올리기 전, 왕이 신부로 데려가겠다고 약조만 한 시점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정혼은 실제 혼례에 앞서 맺어지는 언약으로서, 아직 함께 살지는 아니하나 이미 서로에게 매인 관계였다. 정식으로 왕궁에서 신부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데려가겠다는 언약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 상태였기에 여인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 진짜 왕비가 되어 가는 것이 맞는가, 이 모든 것이 혹시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꿈속에서조차 신랑을 붙잡았다가 놓치고, 다시 찾아 헤매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 가운데도 이와 같은 불안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구원의 확신이 아직 온전하지 못하여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내가 받은 은혜가 진짜인가 하는 의심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불안 자체가 아니라, 그 불안 앞에서 신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 나서는 태도다.

  이 첫 번째 실수는 신랑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림 앞에서 여인이 보인 태도에 있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찾았고, 순찰하는 자들에게 물으면서까지 신랑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 붙잡고 놓지 않은 자리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집이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의 핵심을 이룬다.

  이 사건에 앞서 여인은 이미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한 바 있다. 뙤약볕에 그을려 검게 되었다는 고백과 함께, 어머니의 아들들이 노하여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세웠으나 정작 자기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하였다고 토로한다(아 1:6).

아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나로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이것은 그녀가 왕의 신부로 부름 받기 전, 이미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살아온 자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 그녀가 왕의 부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이끌려 왔으니, 그 마음속에 자신이 정말 이 자리에 합당한가 하는 불안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불안이 꿈속에서 신랑을 잃어버리는 장면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꿈이라는 문학적 장치는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한 두려움과 소망을 동시에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아가서의 저자는 이 장치를 통해 신부 됨의 자격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5. 사과나무 아래에서 그녀가 깨달은 회개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인이 신랑을 붙잡고 데려간 곳은 자기 어머니의 집, 자기를 잉태한 자의 방이었다(아 3:4). 이 어머니의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가서 뒷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아 8:1-2).

아 8:1-2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이 구절에서 여인은 신랑을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모셔 들여 그에게서 교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곧 어머니의 집은 자신을 가르쳐 줄 스승의 자리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집이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밝혀진다(아 8:5).

아 8: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내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어머니의 집은 다름 아닌 사과나무 아래였다. 사과나무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로 볼 때 생명 호흡, 곧 생명나무를 가리킨다. 고페르나무가 속죄나무를 상징한다면, 사과나무는 생명나무를 상징한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본래 이 생명나무가 있었다(창 2:9).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런데 사람은 본래 아담으로부터 났으나 죄를 지음으로 그 생명나무로부터, 곧 아담으로부터 끊어지고 갈라진 존재가 되었다(창 3:22-24). 하나님은 사람을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과 화염검으로 막으셨다(창 3:23-24).

창 3:23-24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하였다(롬 6:23).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생명나무로부터 끊어진 인생은 사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

  왕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 끊어짐, 이 갈라짐 가운데 있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신 사건이었다. 사자와 표범이 우글거리는 산, 곧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던 그녀를 신랑이 친히 찾아 나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마귀를 우는 사자에 비유하며 성도들에게 깨어 근신하라고 경고한 바 있다(벧전 5:8).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인이 처했던 사자와 표범의 산은 바로 이러한 영적 실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신랑은 이 위험한 자리에까지 내려와 그녀를 찾아내셨다.

  그렇다면 신랑을 데리고 생명나무 아래로 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회개의 고백을 드리기 위함이다. 내가 마땅히 당신만을 사랑해야 했는데 뱀의 말을 듣고 당신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찾아와 다시 하나 되자 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때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뱀의 말을 들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죄짓고 떠나갔던 자, 버려진 자리에 있던 자를 신랑이 친히 찾아와 입혀 주셨으니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회개의 고백이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은혜를 담아 죄짓고 떠나간 자, 버려진 나를 찾아오신 신랑을 노래하는 찬양을 지은 바 있는데, 그 가사 한 줄 한 줄이 바로 이 생명나무 아래에서의 고백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에 신부가 성숙한 자로 자라가게 되는 첫 번째 결정적 조건이 있다.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일이다. 내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의 속에는 교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반대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 나는 우상숭배자였던 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사람이라야 진짜 변화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설령 자신이 직접 짓지 않은 죄라 할지라도 부모와 조상이 지은 죄까지 자신의 죄처럼 아프게 느껴져야 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일수록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수록 전해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으로 들려온다. 이것이 바로 여인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곧 생명나무 아래에서 배운 회개의 첫 번째 본질이다. 이 속죄의 회개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성장이 시작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한다(약 4:6).

약 4:6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아지는 겸손의 자리이며, 그 겸손한 자에게 비로소 성장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이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교만이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자는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속에 스며들지 못한다. 오히려 전하는 이의 말투나 표현 방식에만 트집을 잡으며 정작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은 놓쳐 버리고 만다. 반면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같은 말씀도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6. 신혼 때 신랑이 문을 두드렸을 때 그녀는 왜 문을 열지 않았는가?

  결혼식은 아가서 삼 장 육 절부터 십일 절까지의 장면에서 마무리된다. 이때부터 호칭이 바뀌어 사 장에 들어서면 왕은 그녀를 내 신부라 부르기 시작한다(아 4:1).

아 4: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고대 이스라엘의 혼례는 보통 이레 동안 성대한 잔치로 이어졌다(창 29:27).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레아와 혼인한 뒤 이레의 잔치를 마쳐야 라헬을 마저 아내로 맞을 수 있었던 것처럼, 혼례는 단순한 하루의 예식이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하나 됨을 공동체 앞에 선포하는 긴 축제의 시간이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왕은 그녀를 쌍태를 낳은 양 떼 같다고 하며, 석류 한쪽 같은 뺨과 쌍태 어린 사슴 같은 유방을 지녔다고 노래한다(아 4:2-5). 이는 그녀가 이제 다른 신부를 낳을 수 있는 성숙한 상태, 곧 다른 영혼을 양육하여 또 다른 신부로 세울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성숙해서 또 다른 신부를 낳을 수 있는 상태인가 하는 것이다.

  석류는 성경에서 풍성한 생명력과 결실을 상징하는 과실이며, 쌍태를 낳은 어린 사슴은 다산과 생명 번성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외모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이제 영적으로 다른 생명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성숙한 자리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왕은 그녀의 눈빛 하나에도 마음을 빼앗겼다고 고백하며, 그녀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노래한다(아 4:9-10).

아 4:9-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이처럼 신랑에게 온전히 사랑받는 신부가 된 뒤에도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나태해지고 안일해질 수 있다. 결혼했다는 사실,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혼 이후가 더 큰 시험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의 뜨거움과 감격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식어 가는 경우가 많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는 눈물로 감사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은혜에 무뎌지고 신앙이 습관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나태함과 안일함이야말로 신랑과의 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다.

  그런데 신부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다. 오 장 이 절부터 시작되는 이 사건은 신혼 때, 이미 결혼을 마친 뒤에 일어난 일이다(아 5:2-6).

아 5:2-6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려고 하는데 내 손에서는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내 손가락에서는 몰약이 손잡이에 흐르는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내 사랑하는 자는 뒤로 돌이켜 가 버렸구나

  이 장면에서 신랑은 새벽 이슬을 맞으며 문 앞에서 그녀를 부른다. 머리에 이슬이 가득할 만큼 오래도록 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것은, 신랑이 그녀를 향해 얼마나 인내하며 신실하게 다가왔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미 잠자리에 든 그녀는 옷을 벗었으니 다시 입기 귀찮고, 발을 씻었으니 다시 더럽히기 싫다는 이유로 얼른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신랑의 진심 어린 방문 앞에서 자신의 편안함을 먼저 생각한 태도였다. 그런데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었을 때, 그 손에서 몰약이 뚝뚝 떨어져 흐르는 것을 보게 된다. 몰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향품이다. 문고리에서까지 몰약이 뚝뚝 떨어질 만큼, 신랑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내어 주는 삶을 살아 내고 그 자리에 찾아온 것이었다.

  이 몰약을 보고서야 여인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신랑은 돌이켜 떠나간 뒤였다. 신랑을 통해 흘러나오는 십자가의 희생을 그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놓치고 만 것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그저 편안하게 왕궁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 임재를 잃은 뒤 신랑을 다시 찾아 나선 회개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른다. 흥미로운 것은 두 번의 실수가 모두 밤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밤은 성경에서 흔히 영적으로 어둡고 분별이 흐려지는 때를 상징한다. 신랑을 놓치기 쉬운 때가 바로 이 밤이라는 사실은, 우리 역시 영적으로 방심하기 쉬운 순간을 늘 경계해야 함을 일깨워 준다. 임재를 잃어버렸다면 다시 그 임재를 되찾기 위하여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첫 번째 실수에서 받은 것이 죄인임을 깨닫는 속죄의 회개였다면, 이 두 번째 실수에서 요구되는 것은 정결하게 되는 회개다. 첫 번째가 구원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회개였다면, 두 번째는 이미 맺어진 신랑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회개다.

  여인은 신랑을 놓친 것을 깨닫자마자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아 5:6-7).

아 5:6-7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내 사랑하는 자는 뒤로 돌이켜 가 버렸구나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었노라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지키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구나

  신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지체하지 않는다. 밤중임에도 즉시 일어나 성 안을 두루 다니며 신랑을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순찰하는 자들에게 매를 맞고 겉옷까지 벗기는 수모를 당한다. 여기서 순찰하는 자들에게 매를 맞고 겉옷을 빼앗기는 장면은 뜻밖의 고난과 오해와 수치까지도 감수해야 함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사건에서는 순찰하는 자들이 단지 길을 알려 주는 자로 등장했지만, 두 번째 사건에서는 오히려 그녀를 치는 자로 등장한다. 신랑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기 위해 나서는 길에는 때로 사람들의 몰이해와 상처까지 동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결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데가 없자 예루살렘 딸들에게 부탁한다(아 5:8).

아 5:8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예루살렘의 많은 시녀들에게까지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알리며 신랑을 찾아 달라 부탁하는 것이다. 이에 예루살렘 딸들이 그녀의 신랑이 다른 사람의 신랑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되묻자, 그녀는 신랑의 아름다움을 낱낱이 묘사하기 시작한다(아 5:10-16). 희고도 붉어 사람 가운데 뛰어나며, 머리는 순금 같고,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으며, 입술에서는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그 입은 심히 달콤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짓는다(아 5:16).

아 5:16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예루살렘 딸들아

  여인은 신랑을 단지 사랑하는 자로만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기를 원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알아서 그 뜻을 함께 펼쳐 가는 참된 동역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주님도 제자들을 향하여 친구라 부르시며 그 조건을 말씀하신 바 있다(요 15:14-15).

요 15:14-15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명령만 따르는 자이지만, 친구는 주인의 마음과 경륜을 함께 나누는 자이다.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친구라 부르기 원했던 것은 바로 이 자리, 곧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그 뜻을 함께 이루어 가는 자리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딸들은 단지 구경꾼이 아니라, 여인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 함께 신랑을 찾아 나서는 동역자로 등장한다. 이는 한 영혼이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여정에 신앙 공동체의 도움과 동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회개와 회복의 자리에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찾아 나서 줄 지체가 있다는 것은 큰 은혜다.

  이 간절한 고백을 들은 예루살렘 딸들은 마침내 그녀와 함께 신랑을 찾아 나서고,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아 6:2-3).

아 6:2-3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향기로운 꽃밭으로 내려가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회개의 성격은 세 겹으로 되어 있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지적인 회개, 신랑을 잃어버린 것을 애통해하는 감정적인 회개, 그리고 몸을 일으켜 신랑을 향해 달려가는 의지적인 회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다. 임재가 멀어진 순간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아니하고, 지적으로 깨닫고 감정으로 애통해하며 의지로 돌이켜 달려가는 이 총체적인 회개야말로 여인을 참된 신부로 성숙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사도 요한도 이와 같은 정결하게 하는 회개의 원리를 분명히 가르친 바 있다(요일 1:9).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를 자백하는 순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여인이 신랑을 다시 찾아 나섰던 것은 바로 이 자백과 정결의 자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8.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회개는 어떻게 다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회개가 성숙의 결정적 조건이라면, 회개하지 않는 자와 온전히 회개하지 못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이를 보여 주는 극명한 예가 가룟 유다다(마 27:3-5).

마 27:3-5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가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이것은 지적인 회개다. 또한 마음이 아파 뉘우쳤다. 원어로 메타멜로마이라 하는데, 이는 참된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와는 결이 다른 단어로, 단순히 마음이 아파 후회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메타노에오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뜻하는 누스와 이후를 뜻하는 메타가 결합된 단어로, 생각의 방향을 완전히 돌이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곧 참된 회개란 단지 마음이 아픈 데서 그치지 않고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는 스승을 팔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애통해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감정적인 회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았다.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잃어버렸을 때 신랑을 다시 찾아 나섰던 것처럼 주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처분을 구했어야 했는데, 유다는 오히려 주님에게서 멀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근심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가르친다(고후 7:10).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가룟 유다가 보인 뉘우침은 바로 이 세상 근심이었다. 죄를 인정하고 마음이 아팠으나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한 근심은 결국 사망에 이르는 근심일 뿐이다. 세상 근심은 자책과 자기연민으로 끝나 버리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반드시 주님께로 향하는 발걸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결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후회의 결말이다. 지적으로 알고 감정적으로 아파해도 의지적으로 주님께 돌아가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참된 회개라 할 수 없다. 더욱이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이므로 살인하지 말라 하신 계명을 범한 죄가 된다. 그런데 이미 죽어 버렸으니 그 죄를 회개할 기회마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자살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가룟 유다는 지적 회개와 감정적 회개까지는 나아갔으나 의지적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와 대조되는 인물이 베드로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유다처럼 스스로를 처단하지 않았다. 대신 주님이 미리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서 주님의 처우를 기다렸다. 베드로가 실패 앞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미리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눅 22:31-32).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은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이미 아셨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세우는 자로 쓰임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실패를 겪고도 돌이켜 주님께로 나아갔고,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물음과 명령을 받는다(요 21:15-17).

요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잘못을 추궁하기보다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 사랑의 증거로 어린 양을 먹이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참된 회개란 결국 또 다른 양 떼를 돌보고 먹이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술람미 여인이 결혼을 통해 또 다른 신부를 낳는 자로 인정받았던 것과 같은 원리다(아 4:2). 회개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지적 깨달음과 감정적 애통함을 거쳐 반드시 의지적으로 주님께 돌아가 다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교만한 자요, 그런 자의 영혼은 결코 자라가지 못한다.

  결국 구원의 문제와 상급의 문제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유다도 베드로도 본래 주님이 부르신 제자였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회개의 완성 여부에 따라 그 결말은 완전히 갈리고 말았다.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 우리가 받을 상급과 신분이 우리의 행함을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결국 회개의 기회 역시 육신을 입고 있는 이 땅에서만 주어진다. 가룟 유다가 그 기회를 스스로 끊어 버렸다면, 베드로는 끝까지 그 기회를 붙들었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갈라놓았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아가서에 나타난 술람미 여인의 두 번의 실수와 그 실수 앞에서 그녀가 보인 회개의 자세를 통해 성도가 어떻게 성숙한 자로 자라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사람은 어린아이의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하며, 그 성장의 기회는 오직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있는 지금 이 순간에만 주어진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면 훗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을 것이다. 결혼 전 꿈속에서 신랑을 잃어버렸던 첫 번째 실수는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래 사과나무, 곧 생명나무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간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게 하였고, 그 깨달음이 속죄의 회개로 이어졌다. 신혼 때 신랑이 문을 두드렸음에도 얼른 일어나지 못했던 두 번째 실수는 여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하였고, 그녀는 매를 맞고 겉옷을 빼앗기면서까지 지적, 감정적, 의지적으로 신랑을 찾아 나섬으로 정결하게 되는 회개를 완성하였다. 이 두 번의 실수와 회개는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장성한 신앙으로 옮겨가는 구체적인 통로였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회개가 있었다. 지적으로 깨닫고 감정으로 애통해하며 의지로 돌이키는 온전한 회개만이 사람을 참된 성숙으로 이끈다. 이는 비단 술람미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가룟 유다는 지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감정적으로 뉘우쳤으나 의지적으로 주님께 돌아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생을 끊었기에 결국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반면 베드로는 실패 앞에서도 주님의 처우를 기다리며 돌아섰고, 그 결과 다시 양 떼를 먹이는 사명자로 세움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대조는 회개에 지적, 감정적, 의지적 요소가 함께 있어야 함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는 데서 멈추지 말고, 주님의 임재가 멀어지는 순간을 감지할 때마다 즉시 돌이켜 그분께로 달려가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고, 회개 없이는 더 깨끗해지는 것도 없다. 날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살피며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기를 힘써야 하고, 그 친밀함 위에서 또 다른 영혼을 양육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부로 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날마다 자라가고 성숙해져서 마침내 천국에서 아름다운 신랑을 만나 참된 동역자로 인정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7월 2일(목)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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