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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6. 16. (화)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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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kFkuAEFbJfc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그는 메시야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왕상 4:20~3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kFkuAEFbJfc

 

1. 들어가며

  다윗의 이야기는 결코 다윗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요, 전쟁에 능한 왕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메시아를 단지 “다윗”으로만 증언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다윗을 살핀 사람은 반드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살펴야 한다. 다윗이 메시아의 왕권과 고난과 전쟁을 예표한다면, 솔로몬은 메시아의 지혜와 평강과 성전 건축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 왕위를 계승한 아들이다. 성경에는 다윗의 아들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도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다윗 언약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지 못했다. 왕위의 계승자는 솔로몬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에서 “아들”은 혈육으로 난 자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히브리어 “벤”은 아들, 후손, 자손, 계승자, 상속자의 의미를 함께 가질 수 있다. 헬라어 “휘오스”도 문맥에 따라 아들 혹은 자손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솔로몬이라는 이름도 중요하다. 솔로몬은 히브리어 “쉘로모”이며, 평강을 뜻하는 “샬롬”과 연결된다. 그는 이름부터 평강의 왕을 예표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평화를 누렸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의 전통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훗날 이방 여인들과 우상숭배의 문제로 무너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을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솔로몬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실체다. 솔로몬은 예표이고, 예수님은 성취다. 솔로몬은 부분적으로 보여 주었고, 예수님은 완전하게 이루셨다.

  이번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을 성공한 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왜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예표가 되는지, 그의 이름과 지혜와 평화와 성전 건축과 지혜 문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잠언은 참 지혜가 여호와 경외에 있음을 말하고, 전도서는 하나님 없는 세상 수고의 헛됨을 말하며,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의 지혜와 이름과 평화와 성전과 기록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솔로몬은 왜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예표인가?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다윗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메시아가 다윗의 씨로 오실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세우겠다고 하셨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에게 먼저 적용된다. 솔로몬은 다윗의 몸에서 난 아들이며, 성전을 건축한 왕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솔로몬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솔로몬 한 사람에게 다 담길 수 없다. 솔로몬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았고, 솔로몬 자신도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은 솔로몬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삼하 7:12-14).

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여기서 “씨”는 히브리어 “제라”다. 이 말은 씨앗, 후손, 약속의 계보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세우신다는 것은 단순히 다윗의 집안에서 왕이 계속 나온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장차 영원한 왕을 보내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원문 흐름을 살리면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바쳐질 희생의 아들을 예표했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지혜와 평강과 성전 건축의 왕을 예표했다. 이 두 줄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가 단지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는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상속자다.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이을 자는 솔로몬이었다. 이것은 천국의 왕직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왕 노릇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니다. 왕권은 준비된 자, 이기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에게 맡겨진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러므로 솔로몬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준다. 한편으로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다윗의 여러 아들 가운데 선택된 왕위 계승자로서,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원리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왕 노릇하는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그 자리에 앉는 자는 이기는 자다. 솔로몬은 이 점에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의 영적 무게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솔로몬처럼 다윗의 직계 아들이 아니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속사적으로 다윗의 아들이시다. 그는 다윗의 언약을 완성하시고,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볼 때 솔로몬에게 머물면 안 된다. 솔로몬을 지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을 공부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3.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왜 사랑받는 아들을 드러내는가?

  솔로몬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은 여디디야다.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을 때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솔로몬이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다(삼하 12:24-25).

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매우 깊다. 솔로몬은 밧세바 사건 이후에 태어난 아들이다. 다윗은 큰 죄를 지었고, 첫 아이는 죽었다. 그러나 다윗이 회개한 뒤 하나님은 다시 은혜를 베푸셨고,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주셨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출생은 단순한 왕자의 탄생이 아니다. 그것은 죄 이후에도 회개한 자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다윗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간음과 살인의 죄는 그의 집안에 큰 고통을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신다. 다윗이 철저히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 솔로몬이 태어났다. 그래서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 여디디야인 것이다. 그는 “여호와께 사랑받은 자”였다.

  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참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었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사랑받은 아들로 불렸다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참 아들이시다(마 3:16-17).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동탄명성교회의 한 분 하나님 신앙 안에서 이 말씀은 더 깊이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시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또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구원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구속의 경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사람의 아들 되심 안에서 심판권과 왕권을 행사하신다.

  솔로몬은 여호와께 사랑받은 자였지만, 그는 완전한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훗날 마음이 나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 사랑에 끝까지 온전히 응답하지 못했다. 반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사랑받는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우리를 솔로몬에게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 이름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

  성도 역시 이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는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사랑받은 자는 사랑하신 분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솔로몬은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말년에 그 이름의 무게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을 통해 은혜의 회복을 보되,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참 아들의 순종을 보아야 한다. 사랑받는 자의 길은 은혜에서 시작되지만 순종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4. 솔로몬의 지혜는 어떻게 심판주 예수님을 예표하는가?

  솔로몬의 대표적인 특징은 지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적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는 능력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초기에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라고 물으셨다. 솔로몬은 장수도, 원수의 생명도, 부귀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 곧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고, 그에게 지혜와 함께 부와 영광도 주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특히 재판에서 드러났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했을 때,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명했다. 그러자 참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포기하려 했고, 거짓 어머니는 나누라고 했다. 솔로몬은 그 말에서 참 어머니를 분별했다.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판단과 심판의 지혜였음을 보여 준다. 왕은 판단하는 자다. 왕은 선악을 분별하고, 억울한 자를 건지고, 악한 자를 드러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솔로몬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주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심판권을 받으셨다는 뜻이다(요 5:22, 27).

요 5:22, 27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과 구속 경륜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시지만,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 그 아들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셨고,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심판하실 자격을 가지신다.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고, 죄 없으신 아들로 사셨기 때문에 의롭게 심판하신다. 솔로몬의 재판 지혜는 바로 이 심판주 예수님의 그림자다.

  예수님께서도 솔로몬과 자신을 비교하셨다. 남방 여왕, 곧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크신 분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은 자였지만, 예수님은 지혜 자체이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었지만,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2:42).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그렇다면 참 지혜는 무엇인가. 참 지혜는 마지막 심판주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 지식을 많이 배우면 지혜로운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 성경적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단하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삶이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이 지혜를 구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그 지혜의 길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솔로몬은 우리에게 예표이면서 동시에 경고가 된다.

  성도는 지혜를 단순한 처세술로 이해하면 안 된다. 참 지혜는 예수님을 아는 지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심판주이심을 알고, 그분 앞에서 행위대로 갚으심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다. 솔로몬의 지혜가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말은, 성도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의 유익만 보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지막 보좌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설 것인지를 생각하며 산다.

 

 

5. 솔로몬의 평화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여 주는가?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었다. 그의 이름 자체가 샬롬과 연결된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화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다윗이 사방의 원수들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솔로몬 시대에 평화가 있었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이었다. 그는 블레셋,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아람과 싸웠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 결과 솔로몬은 원수가 없는 시대를 누렸다.

  열왕기상은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매우 아름답게 묘사한다. 솔로몬은 그 강 건너편 딥사에서 가사까지 다스렸고,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왕상 4:24-25).

왕상 4:24-25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이 장면은 단순한 정치적 안정이 아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과 안전을 표현한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백성이 자기 땅에서 자기 열매를 누리는 상태다. 그러나 이 평화는 다윗의 전쟁 이후에 왔다. 이것은 영적 원리를 보여 준다. 참된 평화는 원수를 방치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참된 평화는 대적이 제압된 뒤에 온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9:6).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분 하나님 신앙을 보게 된다. 한 아기로 오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며, 평강의 왕이라 불린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심을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르다.

  솔로몬의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나라가 풍요로웠고 백성이 평안을 누렸지만, 그의 말년 타락 이후 왕국은 분열의 길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강은 영원하다. 예수님은 사탄 마귀와 귀신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마지막에는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신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키는 그림자다. 다윗의 전쟁 이후 솔로몬의 평화가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승리 이후 새 예루살렘의 평강이 있다. 이 땅의 성도도 마찬가지다. 회개하지 않고 귀신을 내보내지 않은 상태에서 참 평안을 누리기는 어렵다. 죄의 영이 그대로 있고, 조상의 죄로 들어온 악한 영들이 역사하고, 마음과 몸과 가정에 공격이 계속되는데 어떻게 참된 평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도는 평화를 말하기 전에 영적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참 평화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고 악한 영이 쫓겨난 곳에 임한다.

 

 

6.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어떻게 교회를 예표하는가?

  솔로몬의 세 번째 중요한 예표는 성전 건축이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다윗은 전쟁을 많이 했고 피를 많이 흘린 왕이었다. 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윗의 전쟁과 솔로몬의 평화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다윗은 재료를 준비했고,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그 집은 솔로몬 성전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우실 교회까지 바라본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헐라 하면 어떻게 삼 일 만에 일으키겠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요 2:19-21).

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전 가운데 임재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전의 의미가 더 깊어졌다.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시며,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들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다(고전 3:16).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드리시고, 부활 후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실 것을 예표한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듯이, 다윗의 아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이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여기서 귀신론도 함께 보아야 한다.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 될 수도 있고, 귀신의 집이 될 수도 있다. 성령께서 거하시면 그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만, 죄를 회개하지 않고 악한 영을 그대로 두면 그 몸은 귀신들이 합법적으로 자리 잡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론은 회개론과 분리되지 않는다. 교회가 참 성전으로 세워지려면, 먼저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하고, 회개를 통해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한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지만, 훗날 우상숭배의 산당도 허용했다. 이것이 인간 예표의 한계다. 솔로몬은 참 성전을 예표했지만, 자신이 끝까지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다르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고, 자신의 몸을 참 성전으로 드리셨고, 부활 후 교회를 성령의 전으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은 예수님의 교회 건축을 가리키는 그림자이며, 교회는 마지막 새 예루살렘의 예고편이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배당에 다니는 것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야 한다. 죄와 귀신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에서 성전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읽을 때, 우리는 건물의 화려함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의 거룩함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뜻이다.

 

 

7. 잠언과 전도서는 왜 참 지혜가 여호와 경외임을 말하는가?

  솔로몬을 알려면 열왕기상과 역대하만 보아서는 안 된다. 다윗을 알려면 사무엘상·하와 역대상만 볼 것이 아니라 시편을 함께 보아야 하듯이, 솔로몬을 알려면 역사서와 함께 그가 남긴 지혜 문헌을 보아야 한다. 솔로몬과 연결되는 기록은 잠언, 전도서, 아가서이며, 시편 72편과 127편도 솔로몬과 관련된다. 이 기록들은 솔로몬의 내면과 지혜의 결론을 보여 준다.

  잠언의 핵심은 여호와 경외다. 잠언은 지혜를 말하지만, 그 지혜는 세상 처세술에 머물지 않는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한다. 히브리어 지혜는 “호크마”다. 이 지혜는 단순한 정보나 학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하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실제적 분별력이다(잠 1:7).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부터 9장까지는 지혜를 거의 인격화하여 말한다. 지혜가 부르고, 지혜가 길에서 외치고, 지혜가 사람을 생명으로 초청한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지혜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잠언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나 잠언에는 생활상의 지혜도 많이 나온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 된다는 식의 격언들이 이어진다. 이런 표현들은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적 형식과 닮아 있다. 하지만 성경의 잠언은 단순한 인간 지혜 모음집이 아니다. 그 중심에 여호와 경외가 있기 때문에 성경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혜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만이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한다.

  전도서는 또 다른 방향에서 같은 결론에 이른다. 전도자는 세상 지식, 수고, 쾌락, 부귀, 업적을 다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모든 수고는 헛되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모든 지식과 모든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없이 붙든 지식과 수고와 영광이 궁극적 생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전도서는 마지막에 결론을 분명히 말한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14).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를 심판과 연결한다. 지혜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마지막 심판을 알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다. 그러므로 잠언과 전도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론을 말한다. 잠언은 지혜의 출발이 여호와 경외라고 말하고, 전도서는 인생의 결론이 여호와 경외라고 말한다.

  시편 72편과 127편도 이 흐름과 연결된다. 시편 72편은 왕에게 판단력과 공의를 달라고 구한다. 이것은 잠언의 지혜와 연결된다. 지혜로운 왕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해야 한다. 반면 시편 127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도서의 헛됨과 연결된다. 하나님 없이 쌓는 수고는 결국 헛되다(시 127:1-2).

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기록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세상 지식은 필요할 수 있지만, 구원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학문과 경험과 부귀와 업적은 유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완성된다. 성도는 지식 자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회개를 통해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솔로몬이 남긴 지혜의 핵심이다.

 

 

8. 아가서는 어떻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보여 주는가?

  솔로몬이 남긴 기록 가운데 아가서는 매우 특별하다. 아가서는 표면적으로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노래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 주는 깊은 예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왕이라면, 아가서는 그 성전의 실체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한 신부 공동체임을 보여 준다.

  술람미라는 이름도 의미가 깊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솔로몬이 평강의 왕이라면, 술람미는 그 평강의 왕에게 속한 신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 준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 교회는 그분께 속한 신부다. 교회는 단지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분과 연합한 신부 공동체다.

  신약성경도 이 비밀을 말한다. 바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는 비밀을 말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엡 5:31-32).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가서를 단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만 읽으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된다. 물론 아가서에는 사랑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책을 성경 안에 두신 이유는 더 깊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교회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순결하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셨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며,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고자 하신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솔로몬은 건물 성전을 세웠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성령으로 사람을 성전 되게 하신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노래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신부 된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아가서는 성전론과 교회론과 신부론이 만나는 자리다.

  여기서 동탄명성교회의 구원론과 종말론도 함께 연결된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단지 죄 사함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악한 영을 내보내야 하며, 성령의 전으로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신부는 더러운 옷을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정결의 부르심이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신랑을 모른 채 신부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분이 왜 피 흘리셨는지, 왜 성령을 보내셨는지, 왜 교회를 세우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분량만큼 교회는 신부로 준비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신앙은 종교 생활로 흐르기 쉽다.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은 사랑과 순종과 정결로 나아간다.

  아가서는 또한 성도가 단지 자기만 구원받는 데 머물지 말아야 함을 보여 준다. 신부는 성숙해야 한다. 사랑받는 자는 다시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양육받은 자는 또 다른 영혼을 양육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공동체이므로, 다른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을 지은 솔로몬과 아가서를 남긴 솔로몬이 함께 보여 주는 영적 흐름이다. 성전은 신부 공동체를 향하고, 신부 공동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향한다.

 

 

9. 나오며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와 이름과 평화와 성전과 기록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예표였고, 여디디야라는 이름으로 여호와께 사랑받은 아들을 보여 주었으며, 지혜로운 심판자로서 마지막 심판주 예수님을 바라보게 했다. 또한 그는 평화의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예표했고,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서 예수님께서 세우실 교회를 미리 보여 주었다.

  그러나 솔로몬을 볼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솔로몬은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큰 영광을 누렸지만, 말년에 마음이 나뉘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만이 완전한 지혜이시고, 완전한 평강이시며, 완전한 성전이시고, 완전한 신랑이시다.

  성도는 잠언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전도서를 통해 하나님 없는 수고의 헛됨을 깨달아야 한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과 연합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한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지식 자랑이 아니어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므로, 모든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

  또한 성도는 성전 된 자기 몸과 교회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회개 없이 성전의 영광을 말할 수 없고, 악한 영을 내보내지 않고 참 평강을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의 피로 씻김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을 통해 보아야 할 영적 결론이다.

  마지막 시대의 성도는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부러워하는 데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가 가리키는 예수님, 솔로몬의 평화가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나라, 솔로몬의 성전이 가리키는 교회, 솔로몬의 아가서가 가리키는 신부의 비밀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로 준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구하되 세상 지식의 자랑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평강을 구하되 악한 영과 타협하는 평안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성전을 말하되 건물의 영광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신부를 말하되 정결 없는 사랑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리되어야 하고, 모든 삶이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지혜와 평강과 거룩한 성전의 영광 안에서 어린양의 신부로 준비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15일(월)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약 성경의 솔로몬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조명하며 그 영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다윗의 아들이자 상속자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넘어, 솔로몬이 보여준 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 건축가로서의 세 가지 핵심 면모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품을 미리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정보배 목사는 솔로몬이 저술한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각각 하나님 경외의 지혜, 세상 지식의 허무함,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며,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완전한 지혜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솔로몬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는 참된 신부로 준비될 것을 권면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또 다른 요약입니다.]

기독론(124) 다윗의 아들 솔로몬(02): 그는 메시아에 대한 어떤 예표자인가?(02)

본문: 왕상 4:20-34

 

1. 들어가며

  솔로몬은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자로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예표자이다. 다윗이 전쟁으로 주변의 모든 대적을 평정함으로써 아들 솔로몬에게 평화의 기반을 넘겨주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권과 통치권을 위임하셨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데 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다윗 강해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자료를 나란히 공부했다. 하나는 사무엘상하와 역대상처럼 제3자의 관점에서 다윗을 기록한 역사서요, 다른 하나는 다윗이 직접 남긴 시편이었다. 제3자의 기록과 당사자의 직접 기록은 관점이 다르다. 역사서는 다윗의 행적을 서술하고, 시편은 다윗의 내면과 영성과 기도를 보여 준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볼 때 비로소 다윗이라는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에 관한 제3자의 기록열왕기상 1장부터 11장, 그리고 역대하 1장부터 9장에 나온다. 그러나 솔로몬이 직접 쓴 성경책이 세 권 플러스 알파나 된다. 잠언 31장, 전도서 12장, 아가서 8장, 그리고 시편에도 72편과 127편 두 편이 있다. 이 직접 기록들이 솔로몬을 통해 예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풍성하게 드러내는지, 이 시간에는 그 핵심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기독론 강해는 구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읽는 작업이다. 구약의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자였고, 그 가운데 솔로몬은 특별히 풍성한 예표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솔로몬 강해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솔로몬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지혜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성전을 지은 왕인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지혜 자체이시고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솔로몬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지혜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요 성전을 지은 왕인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지혜 자체이시고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2. 솔로몬이 다윗의 열 번째 아들임에도 메시아의 예표로 선택된 근거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다윗의 몇 번째 아들인가? 성경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추정하면,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쯤 되는 것으로 본다. 다윗에게는 총 19명 내외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역대상의 기록과 사무엘하를 통해 확인된다(대상 3:1-4, 삼하 3:2-5). 그런데 그 가운데 솔로몬은 결코 장자가 아니었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다. 밧세바는 다윗의 여러 아내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녀에게서 아들이 네 명 태어났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의 징계로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하나님은 슬픔에 잠긴 다윗과 밧세바를 위로하시고 새 아들을 주셨다. 그가 바로 '솔로몬'이요 딴 이름으로 '여디디야'이다. 

삼하 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솔로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시몬(시므온)에게 게바(이는 아람어인데, 헬라어로는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다. 원래 이름과 함께 특별한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솔로몬이 왜 다른 형들을 제치고 메시아의 예표가 되었는가?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이 그 답을 준다.

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 여기서 씨(히, 제라)는 단수다.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단 하나의 씨가 선택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직접 그 씨를 지목하셨고, 그것이 솔로몬이었다. 맏아들 암논은 이복 누이를 욕보인 죄로 인해 스스로 그 자리를 잃었다. 셋째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넷째 아도니야는 다윗이 노쇠하자 요압과 아비아달과 손을 잡고 독단적으로 왕을 자처했다. 그러자 선지자 나단과 밧세바의 중재로 다윗은 마지막 힘을 내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다윗의 씨로 오실 메시아는 오직 한 분이었다. 수많은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언약의 최종 성취자이시다. 솔로몬이 다윗의 보좌에 오른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나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것은 솔로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다윗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밧세바가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가운데 솔로몬이 마지막이었다. 죄로 인해 죽은 첫 번째 아이의 자리를 하나님이 솔로몬으로 채워 주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사람의 실수나 죄를 뛰어넘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윗과 밧세바의 죄에서 나온 관계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메시아의 예표자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패를 초월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대나 서열을 뛰어넘는다. 맏아들도, 능력 있는 자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고 선택하신 자가 그 보좌를 이어받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다. 이삭이 이스마엘 대신, 야곱이 에서 대신, 다윗이 맏형들 대신 선택되었듯이, 솔로몬이 형들 대신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나 있었지만 왕위를 이은 것은 솔로몬 한 명이었던 것처럼, 다윗의 많은 후손들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기대나 서열을 뛰어넘는다. 맏아들도, 능력 있는 자도 아닌,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고 선택하신 자가 그 보좌를 이어받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선택 원리다. 이삭이 이스마엘 대신, 야곱이 에서 대신, 다윗이 맏형들 대신 선택되었듯이, 솔로몬이 형들 대신 선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권세자들 대신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3. '여디디야'라는 이름은 솔로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여디디야(יְדִידְיָה)"는 히브리어로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이 이름을 주셨다고 사무엘하 12장 25절은 명시한다. 이 이름은 단순한 별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솔로몬 사이의 특별한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해 주는 이름이었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거나 두 개의 이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 시몬이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은 것, 이 모든 개명(改名)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사명을 담고 있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받은 것도 그러하다.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이 이름은 솔로몬이 단순히 왕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임을 선포한다.

  이제 이 여디디야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 궁극적인 예표인지를 생각해 보면, 답은 자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아들" 이것이 바로 여디디야의 신약적 선언이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불렸을 때,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오실 것을 예표하는 이름이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그 아들이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실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변화산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라는 이것이 여디디야가 담고 있는 권위의 선언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서 이스라엘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완전하고 영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어떤 학자나 교사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변화산에서도 동일한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이것이 여디디야가 담고 있는 권위의 선언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서 이스라엘에 지혜의 말씀을 선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완전하고 영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어떤 학자나 교사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의 말은 얼마든지 실수가 있고 불완전하다. 사도 바울도 틀릴 수 있고, 세상의 어떤 학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말씀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예수님 말씀의 권위는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와 문화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다.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불릴 때 그 이름 안에 담긴 신뢰와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의 기준을 예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말씀—그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기준이요 권위다.

 

4. 솔로몬이 쓴 성경 세 권과 두 편의 시편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가?

  솔로몬 강해를 제대로 하려면 열왕기상(1-11장)과 역대하(1-9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직접 남긴 기록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직접 기록들이 솔로몬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드러낸다.

  솔로몬이 직접 쓴 성경은 세 권이다. 잠언(31장), 전도서(12장), 아가서(8장)다. 여기에 시편 72편과 127편이 플러스 알파로 더해진다. 이 다섯 가지 기록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솔로몬 강해의 열쇠다.

  잠언 1장 1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라고 시작한다. 전도서 1장 1절도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라고 서두를 연다.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두 책 모두 "다윗의 아들"로 시작한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임을 자신의 저술 서두에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저자 서명이 아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로 온다는 언약(삼하 7:12-14)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시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크게 보면 이렇다. 잠언의 주제는 시편 72편과 연결된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공의로운 심판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 잠언이 말하는 지혜다. 전도서의 주제는 시편 127편과 연결된다. 세상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선언이 전도서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 시편 127편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세 번째 대명사, 곧 '성전을 지은 왕'과 연결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교회를 상징하듯,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으로 예표한다.

  이 구조를 한눈에 정리하면 이렇다. 잠언(시편 72편)은 지혜의 왕으로서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전도서(시편 127편)는 세상의 헛됨을 선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고, 아가서는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사랑을 노래한다. 솔로몬이 남긴 다섯 가지 직접 기록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단순히 열왕기상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제3자의 기록은 솔로몬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 그가 경험한 하나님, 그가 노래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직접 기록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의 저술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다음 강해들을 통해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하나하나 더 깊이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진리의 보고(寶庫)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 강해에서 우리가 단순히 열왕기상의 역사 기록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제3자의 기록은 솔로몬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 그가 경험한 하나님, 그가 노래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직접 기록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솔로몬의 저술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다음 강해들을 통해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하나하나 더 깊이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진리의 보고(寶庫)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

 

5. 잠언이 말하는 참된 지혜의 근본은 무엇이며, 왜 세상 학문과 다른가?

  잠언은 솔로몬의 저술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31장에 걸쳐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런데 잠언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신학적 지혜를 다루고, 10장부터 29장까지는 생활 속의 지혜를 다룬다. 그리고 30장은 아굴의 잠언, 31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훈계한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잠언의 구조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1장부터 9장은 '신학적 지혜'를 다룬다. 지혜가 무엇인지, 왜 지혜를 구해야 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가르쳐 준다. 특히 이 부분에서 지혜가 인격화되어 등장하는 8장이 핵심이다. 반면 10장부터 29장은 '생활 지혜'를 담고 있다. 부지런함과 게으름, 말의 절제, 부모와 자녀 관계, 정직과 거짓, 교만과 겸손 등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의 지혜를 격언 형식으로 가르친다. 이 부분은 애굽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 형식을 많이 따른다. 솔로몬이 당대 모든 나라의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이다.

  잠언 1장부터 9장의 신학적 지혜는 핵심 주제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이 잠언 1장 7절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이것이 잠언 전체의 주제 선언이다. 이 주제는 잠언 9장 10절에서 다시 한 번 더 강조된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두 본문이 나란히 선언하는 것은 동일하다. 지혜의 근본, 지식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지식과 지혜가 있다. 철학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다. 이 모든 지식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들은 참된 지혜의 근본이 아니다. 지혜의 근본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

  특히 잠언 10장 이후에 나오는 생활 상의 지혜들—"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게 하느니라"(잠 15:1)와 같은 격언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세상의 지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을 비롯한 당대 모든 나라의 학문을 섭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 지혜들조차도 1장 7절의 대원칙 아래에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지혜를 삶에 적용할 때 참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잠언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있다면 8장이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1인칭으로 등장하여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지혜가 의인화(擬人化)된 것이다. "나는 명철이라 내가 근신과 함께 있고"(잠 8:12), "나는 여호와께서 그 일을 시작하시기 전 그 옛날 태초에 창조를 받았으며"(잠 8:22)—이 지혜의 인격적 서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말씀)가 바로 이 잠언 8장의 지혜의 신약적 계시다.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있었고,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 곁에 있었으며, 사람들을 기뻐하였다는 잠언 8장의 묘사는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의 선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이처럼 잠언은 세상의 생활 지혜를 담으면서도, 그 모든 지혜의 근원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임을 선포하고, 궁극적으로는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이 잠언이 성경에 포함된 이유다.

  특히 잠언 8장의 지혜의 인격화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했다. 골로새서 2장 3절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지혜 왕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갖추었지만,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고 선언하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의 그림자였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최후의 날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구하는 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잠언 8장의 지혜의 인격화는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을 때 그 의미가 환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했다. 골로새서 2장 3절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지혜 왕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혜를 갖추었지만,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고 선언하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지혜의 그림자였다. 솔로몬이 두 여인의 재판에서 생명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아시며 최후의 날 완전한 지혜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구하는 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

 

6.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다"고 선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전도서는 솔로몬의 저술 가운데 가장 독특하다. 솔로몬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3,000가지 잠언을 말하였고, 1,005편의 노래를 지었으며(왕상 4:32), 식물과 동물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였다. 세상의 어떤 학자도 따라가기 어려운 방대한 지식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쾌락과 풍요도 경험했다. 그는 포도원도 만들고, 동산과 과수원도 만들고, 못도 파고, 남녀 종도 두고, 소와 양도 수없이 많이 가지고, 은금과 나라들의 보배를 쌓기도 하였다. 노래하는 남녀도 두었고 사람의 아들들이 기뻐하는 처첩도 많이 두었다(전 2:4-8).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다 누려 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고백하는 "헛되도다"는 무게가 다르다.

  그런데 그 모든 공부와 탐구 끝에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전 1:2-3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이것이 세상 최고의 지식인이 모든 세상 학문을 섭렵한 뒤에 내린 최종 결론이다. 더 나아가 전도서 12장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전 12:12 내 아들아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세상의 학문은 끝이 없다. 아무리 공부해도 다음날 또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몸만 피곤하고 마음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한다(전 1:8). 이것이 세상 지식의 한계다.

  그렇다면 전도서의 결론은 무엇인가? 솔로몬은 공부를 포기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지식의 탐구 끝에 가장 본질적인 지혜에 도달했다.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이것이 전도서의 최종 결론이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다.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심판 앞에 설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지혜다. 이것이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공부한 끝에 얻은 최고의 지혜였다.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출발점을 선언한다면,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됨을 입증한 후에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잠언이 신학적 원리에서 출발하는 귀납이라면, 전도서는 세상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귀납이다. 그러나 두 책이 도달하는 종착점은 하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것이 참된 지혜다.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지혜자의 역설적 고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왕이 결론으로 내놓은 것이 "헛되도다"였다. 이 고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역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최고가 헛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참되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예수 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은 참 생명이요 참 진리시다.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는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외침이다.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지혜자의 역설적 고백이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왕이 결론으로 내놓은 것이 "헛되도다"였다. 이 고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역으로 증언한다. 세상의 최고가 헛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참되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예수 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은 참 생명이요 참 진리시다.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는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외침이다.

 

7. 시편 72편과 127편은 각각 잠언·전도서의 어떤 주제를 예표하는가?

  솔로몬이 시편에 남긴 두 편의 시, 72편과 127편은 각각 잠언과 전도서의 핵심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두 시편은 솔로몬의 저술 세계를 관통하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시편 72편을 살펴보면, 이 시는 왕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시 72:1-2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왕이 공의로 재판하고,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한다—이것이 시편 72편의 핵심이다. 왜 이것이 잠언과 연결되는가? 잠언 1장 7절과 9장 10절이 말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은 결국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전도서 12장 14절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결론 맺듯이, 심판주 앞에 설 것을 알기에 지금 경외하며 산다는 것이 잠언과 전도서가 공유하는 핵심 메시지다. 시편 72편은 바로 그 심판주—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위임하신 메시아 왕—를 노래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시편 72편이 잠언에게 주는 예표적 의미다.

  다음으로 시편 127편을 살펴보면, 이 시는 세상의 모든 수고가 하나님 없이는 헛됨을 선포한다.

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이것이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와 정확히 대응한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며 수고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전도서가 세상의 모든 공부와 경험이 헛되다고 결론 맺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시편 127편은 헛됨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이 있다. 이것이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그리고 그 복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시편 127편이 약속하는 참된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시편 72편은 잠언의 주제인 '심판주 앞에서의 지혜'를 예표하고, 시편 127편은 전도서의 주제인 '세상 수고의 헛됨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예표한다. 솔로몬의 두 시편이 그의 두 지혜서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솔로몬의 저술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고(시 72편의 메시지),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시 127편의 메시지). 이 두 메시지가 합쳐질 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완전해진다. 미래의 심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시편 72편의 심판주와 시편 127편의 은혜로운 공급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결국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고(시 72편의 메시지),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시 127편의 메시지). 이 두 메시지가 합쳐질 때,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완전해진다. 미래의 심판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시편 72편의 심판주와 시편 127편의 은혜로운 공급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8.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증언하는가?

  솔로몬의 세 번째 책, 아가서는 그 성격이 잠언이나 전도서와 전혀 다르다.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8장에 걸쳐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를 단순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읽거나, 혹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기독론의 관점에서 아가서를 읽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지혜의 왕이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요 2:21),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상징한다(고전 3:16). 성전을 지은 왕 솔로몬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렇다면 솔로몬과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랑하시는 교회의 관계를 예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가서의 여주인공은 "술람미 여인"이다. "술람미(שׁוּלַמִּית)"는 솔로몬의 여성형 이름이다. 솔로몬이 히브리어로 '샬롬'에서 온 이름이듯, 술람미도 같은 어근에서 온 이름이다. 솔로몬(שְׁלֹמֹה)의 여성형이 술람미(שׁוּלַמִּית)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지닌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짝이요 그의 신부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서로 이름을 나누어 가진 한 몸이다. 그리스도가 왕이시면 교회는 왕의 신부다.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 솔로몬이라면, 교회는 술람미—평강 안에 거하는 신부다.

  아가서 전체의 구조도 이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아가서에는 크게 세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신부), 그리고 더 넓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관계를 보여 준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고, 술람미가 솔로몬을 찾고, 함께 동산에서 기쁨을 누리는 이야기—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 이야기다.

  아가서가 증언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는 신랑이시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아가서는 가장 풍성한 언어로 노래한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아 2:16)—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다. 성전을 지은 왕 솔로몬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듯, 솔로몬의 사랑하는 신부 술람미는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신부 교회를 예표한다.

  나아가 솔로몬의 평화의 왕국과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천국의 풍경을 미리 보여 준다. 솔로몬의 치세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열왕기상은 기록한다(왕상 4:25). 솔로몬의 궁전에서는 하루에 가는 밀가루 30고르(약 7,000리터), 굵은 밀가루 60고르, 살진 소 열 마리, 초장의 소 스물 마리, 양 백 마리,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 식탁에 올랐다(왕상 4:22-23). 14,000명이 먹고도 남을 분량이 매일 궁전에 넘쳤다. 이 풍요로운 식탁과 평안한 삶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풍성함을 예표한다. 천국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새 열매가 열리고, 생명수가 흐르며, 마귀가 없으므로 저주도 없고 눈물도 없다. 솔로몬 왕국의 풍요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원히 완성되는 것이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이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한다. 신랑 솔로몬이 신부를 왕궁 연회 자리에 이끌어 들이듯(아 2:4),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로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이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솔로몬의 태평성대와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그 영원한 잔치의 예표다.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아버지 다윗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준비해 놓았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실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 놓으셨다. 창세 전부터 택하신 백성, 십자가의 구속, 성령의 강림—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드린 성전 건축 재료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드려 교회라는 새 성전을 세우셨고,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성전이 되었다(마 16:18).

아 2: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도다

  신약에서 에베소서 5장 25-27절은 이 아가서의 신학을 명확하게 해설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그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 세우셨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남녀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를 가르쳐 주는 기독론의 보고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신다.

  신약에서 에베소서 5장 25-27절은 이 아가서의 신학을 명확하게 해설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그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로 세우셨다.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의 예표였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읽을 때는 단순히 인간의 남녀 관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지를 가르쳐 주는 기독론의 보고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신부로 삼아 영원한 사랑 안에 거하신다.

 

9. 나오며

  기독론(124)에서는 솔로몬이 직접 남긴 기록들—잠언, 전도서, 아가서, 시편 72편과 127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이 다윗의 열 번째 아들로 추정됨에도 메시아의 예표로 선택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고, 그에게 주어진 이름 여디디야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를 뜻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도 확인하였다. 또한 솔로몬의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시편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잠언은 심판주 앞에서의 참된 지혜를, 전도서는 세상 학문의 한계와 하나님 경외의 결론을,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각각 예표함을 보았다.

  솔로몬이 남긴 두 편의 시편, 곧 시편 72편과 127편이 각각 잠언과 전도서의 핵심 주제를 압축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시편 72편이 공의로 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노래한다면, 시편 127편은 여호와 없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됨을 선포한다. 이 두 주제가 합쳐질 때,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마지막 날 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그분을 경외해야 하고, 그분 없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솔로몬을 통해 배우는 핵심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을 다 섭렵한 최고의 지식인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헛되고 헛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었다. 이것이 참된 지혜다.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된 지혜다. 앞으로 솔로몬의 지혜의 왕, 평화의 왕, 성전을 지은 왕으로서의 사역을 하나하나 더 깊이 공부해 가면서, 그 모든 예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풍성하게 알아 가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이야기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삶의 양식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잠언이 말하는 여호와 경외, 전도서가 선포하는 세상의 헛됨, 아가서가 노래하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 세 주제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끝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삶의 어떤 자리에서든 그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것을 제공해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요,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다. 우리는 재판하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의 것들이 헛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알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이 세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보는 것이 솔로몬 강해의 실천적 열매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탁월한 지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 지혜를 삶으로 실천해 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16일(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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