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70)]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되어 미리 예수님처럼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겔3:16~2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Ywd5YlisLIk
기독론(170)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되어 미리 예수님처럼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
(겔 3:16-21)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에스겔은 말로만 예언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 행동 예언자였다. 패역한 백성에게 보냄을 받고,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했으며, 자기 몸과 생활을 말씀의 표징으로 내어 드렸다. 그의 사역을 깊이 살펴보면 예수님의 삶과 겹치는 부분이 많고, 오늘날 진리를 전하는 주의 종이 감당해야 할 길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번 말씀에서 두드러지는 에스겔의 사명은 파수꾼이다. 파수꾼은 성벽 위에서 밤낮으로 깨어 성 밖을 살피는 사람이다. 멀리서 적군이 다가오고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면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알려야 한다. 백성이 미처 알지 못하는 위험을 먼저 보고, 전쟁과 죽음이 닥치기 전에 준비하게 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다. 파수꾼이 졸거나 두려워 침묵하면 성 전체가 기습을 당한다.
에스겔이 지켜야 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백성이 아니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자신을 언약 백성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 바벨론 포로가 된 이유를 조상들의 잘못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자기 안에 이어진 완고함과 우상숭배는 보지 못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만 멸망으로 가는 사람을 깨우는 일이 에스겔에게 맡겨졌다.
하나님은 악인만 경고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의인이라도 죄의 길로 돌이키면 살지 못할 수 있으므로 깨우쳐야 한다고 하셨다. 반대로 경고를 받고 범죄하지 않으면 그도 살고 파수꾼도 자기 영혼을 보전한다(겔 3:20-21). 그러므로 파수꾼의 사명은 불신자를 처음 믿게 하는 전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미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끝까지 생명의 길을 걷도록 회개시키고 바로 세우는 데까지 나아간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받은 말씀을 전하시며 회개하라고 외치셨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대부분은 영접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제자들과 여인들과 남은 자들은 들었다. 마침내 백이십 명이 성령을 기다렸고, 그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어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전해졌다(행 1:8, 15, 2:1-4). 에스겔의 파수꾼 사명은 예수님의 경고와 구원 사역을 미리 비추었다.
오늘도 모든 사람이 잠들 때 깨어 있어야 할 파수꾼이 필요하다. 믿기만 하면 이후의 삶과 무관하게 안전하다는 말로 영혼을 재울 것이 아니라, 속죄받은 사람이 정결과 성결의 길을 걸어야 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야 한다. 사람들의 반대와 오해가 두려워 입을 닫으면 위험을 알면서도 나팔을 불지 않은 파수꾼이 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는지, 누구의 말씀을 누구에게 전하게 하셨는지, 악인과 의인을 어떻게 깨우치며 피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명이 예수님과 오늘의 파수꾼에게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왜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는가?
파수꾼은 위험이 닥친 뒤에 원인을 분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험이 오기 전에 경고하는 사람이다. 성벽 위의 파수꾼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본다. 적군의 움직임을 먼저 발견하면 즉시 나팔을 불어 군사들이 무장을 갖추고 백성이 피할 길을 찾게 해야 한다. 위험을 보았는데도 침묵하는 파수꾼은 자기 직무를 버린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위험을 에스겔에게 먼저 보여 주셨다. 백성은 포로가 된 현실을 억울하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죄와 우상숭배를 보지 못했다. 조상이 범죄한 결과 아래 태어났다는 사실만 말할 뿐, 자기들도 그 영향 속에서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며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파수꾼은 그들의 자기기만을 깨뜨리고 지금의 상태로는 안전하지 않다고 알려야 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부는 목적은 사람을 정죄하여 죽이는 데 있지 않다. 다가오는 칼을 피하여 살게 하는 데 있다. 에스겔 33장은 하나님이 한 땅에 칼을 임하게 하실 때 백성이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칼을 보면 나팔을 불어 경고한다고 설명한다(겔 33:2-5). 경고는 심판이 실제로 다가오기 때문에 필요한 사랑의 행동이다. 아무 문제도 없다고 안심시키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살 수 있는 길을 정확히 알려 주는 것이 사랑이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위험에 놓일 수 있다. 오랜 세월 예수를 믿고 기도하고 금식했어도 성품이 달라지지 않고, 우상숭배와 탐욕과 음란과 교만을 버리지 않았다면 현재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나 과거의 신앙 고백만으로 영혼이 자동으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일이 기쁘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거나 순종하려는 열망도 없으며, 죄를 계속 합리화한다면 파수꾼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필자는 처음에는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여 영접 기도까지 이끄는 일을 매우 기뻐했다. 자신도 불신자에서 신자가 된 과정을 겪었기에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교인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을 깨워 회개시키는 특수한 사명이 자신에게 맡겨졌다고 고백한다.
이 사명은 기존의 교리 체계와 충돌할 수 있다. 오랫동안 안전하다고 배운 사람에게 지금의 믿음과 삶을 다시 살피라고 하면 거부감이 생긴다. 그러나 파수꾼은 사람들의 익숙함을 보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위험이 분명하다면 나팔을 불어야 한다. 다수가 듣지 않아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경고를 받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
3. 에스겔은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를 대신하여 전해야 했는가?
에스겔에게는 자기 생각을 선포할 권리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은 뒤 포로 된 자기 민족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의 반응에 맞추어 내용을 바꾸거나, 듣기 좋은 부분만 골라 말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선포해야 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정보만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자기 존재가 말씀 앞에 붙들리고, 그 말씀의 무게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귀로 듣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교리와 여론보다 지금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의 깊게 분별하는 일이다. 파수꾼은 자기 확신을 크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정확히 받아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말을 독립적으로 만들어 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시며, 자신이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10). 예수님의 이 순종은 에스겔의 사역이 미리 보여 준 길이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입의 말을 듣고 대신 경고했듯,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셨다.
오늘의 주의 종도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자기 학식과 교단의 전통과 대중의 요구만 반복하면 살아 있는 파수꾼이 될 수 없다. 성경을 깊이 살피고 성령이 무엇을 깨우치시는지 민감하게 들어야 한다. 기존의 신학은 참고할 수 있지만, 서로 반대되는 장로교와 웨슬리안의 교리를 각각 절대적인 복음으로 삼을 수는 없다. 최종 기준은 교리가 아니라 성경과 성령이다.
인공지능도 기본 상식과 자료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수가 말해 온 보편적 견해를 종합하는 성격 때문에, 그것을 곧바로 성령의 음성과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필자는 성경 번역과 연구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면서도 잘못된 관성에 따라 답한 부분을 반복해서 고치게 하고 검토한다고 말한다. 도구는 사용할 수 있지만 최종 판단은 성경 본문과 성령의 깨우침 앞에서 내려야 한다.
사람이 듣기 싫어한다고 말씀을 바꾸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기존 교계가 불편해할 내용을 그만 전하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며,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분명하면 살아 있는 동안 전해야 한다고 고백한다. 파수꾼은 자신의 안전보다 맡겨진 영혼의 생명을 앞세워야 한다.
4. 하나님은 왜 그를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에게 보내셨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을 언어가 다르고 말이 어려운 민족에게 보내지 않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에스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알아듣고도 마음이 완고하여 듣지 않았다(겔 3:5-7).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종에게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가장 가까운 대상을 먼저 맡기신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에스겔은 자기 언어로 자기 민족을 깨워야 했다.
필자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세계를 향해 직접 설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에스겔의 부르심을 보며 자신이 가장 잘하는 한국어로 한국 교회와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먼저임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번역자와 영상과 책의 통로를 붙여 다른 언어권으로 보내실 수 있다. 실제로 한국어로 먼저 선포된 말씀이 영어로 번역되어 전달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산업과 기술의 나라로 성장한 과정도 한 예가 된다. 과거에는 일본과 미국의 제품을 부러워했지만 오늘날에는 한국의 가전제품과 휴대전화가 세계에서 인정받는다. 필자는 이와 같이 마지막 시대의 중요한 영적 깨달음도 한국어로 먼저 나오고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고 본다. 물질적 발전을 자랑하는 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진리로 세계를 섬길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어의 역사도 이 사명과 연결된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다. 한글은 발음 기관의 모양과 천지인의 원리를 반영한 배우기 쉬운 문자였지만 오랫동안 ‘언문’이라 불리며 천한 백성이 쓰는 글로 낮게 여겨졌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누구나 말씀을 읽고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도착한 일은 한국 선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선교사들은 나라를 지배하려는 군대가 아니라 성경과 교육과 의료로 백성을 섬기러 왔다. 한글 성경을 읽은 평민과 여성에게 배움의 길이 열렸고, 교육받은 이들이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며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필자는 한글과 성경의 만남이 대한민국의 영적·교육적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과 연희전문학교 같은 교육기관은 신분 때문에 배울 수 없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한글을 익혀 성경을 읽은 평민과 여성들이 공부를 계속하고, 해외에서 학위를 받은 인재들이 다시 학교와 사회를 세웠다. 필자는 오늘날 대부분의 자녀가 대학 교육을 받을 만큼 강한 교육열도 이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배우기 쉬운 한글과 성경의 만남이 잠자던 총명함을 깨웠고, 평범한 사람도 다니엘처럼 말씀을 연구할 토대를 얻었다.
우리 민족은 무속과 제사와 수많은 미신 속에서 살아왔다. 문지방을 밟거나 밥을 먹으며 소리를 내거나 다리를 떨면 복이 나간다는 식의 금기가 일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한글 성경이 보급되면서 그런 두려움 뒤에 있는 우상숭배와 악한 영의 역사를 분별하게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복음의 빛이 들어왔기에 한국인은 말씀을 더욱 간절히 받아들였다.
필자는 사계절이 분명한 환경도 기다림과 부지런함을 익히는 데 한몫했다고 본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듯, 한국 성도에게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 같은 영적 열망이 자라났다는 것이다. 또한 자유대한민국이 전쟁과 핵의 위협 속에서도 세계 선교를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모든 배경은 우월감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복음으로 세계를 섬길 책임을 깨닫게 한다.
필자는 일본 열도와 제주도가 태풍과 지진의 위험을 막아 주는 지리적 울타리처럼 보이는 것도 감사의 제목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리적 조건이나 군사력만으로 나라가 안전한 것은 아니다. 북한과 공산주의 국가가 핵무기를 가지고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복음 선교의 문도 넓게 열린다.
5. 파수꾼은 악인과 의인을 각각 어떻게 깨우쳐야 하는가?
에스겔 3장은 파수꾼이 상대해야 할 사람을 악인과 의인으로 나눈다. 악인에게는 지금 가는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해야 한다. 악인이 경고를 받고 돌이키면 살 수 있다. 파수꾼은 죄가 가져올 결과를 감추지 말고, 회개의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야 한다(겔 3:18-19, 33:8-9).
의인에게도 경고가 필요하다. 과거에 의롭게 살았거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모든 선택이 자동으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의인이 자기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면 그의 과거 의로운 행위가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겔 3:20, 33:12-13). 그러므로 이미 믿는 사람도 현재 죄를 짓고 있다면 깨우쳐 범죄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말씀은 파수꾼의 사명이 불신자를 교회로 데려오는 데서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처음 믿게 하는 일도 귀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 사람을 깨우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여기며 죄를 가볍게 보는 사람이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면, 그도 살고 파수꾼도 자기 영혼을 보전한다.
예수님도 믿음이라는 이름만 붙들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경고하셨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마 7:21). 행위가 구원의 값을 지불한다는 뜻이 아니다. 참된 믿음에는 회개와 순종의 열매가 나타나며, 열매가 전혀 없다면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오늘날 많은 교인이 죄 사함의 교리만 듣고 정결과 성결을 놓쳤다고 진단한다. 예수를 믿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악한 영을 한 번도 내보내지 못하고 질병과 저주에 눌려 있는 까닭은 죄를 자백하고 깨끗해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성경이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귀신이라고 직접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필자가 축사 사역에서 확인한 영적 체험과 해석이다.
파수꾼은 악인에게는 죄에서 돌이키라고 하고, 의인에게는 의롭다 함을 받은 뒤에도 죄에 머물지 말라고 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 말하면 온전한 경고가 아니다. 믿음의 출발을 부정해서도 안 되고, 믿은 뒤의 회개와 순종을 삭제해서도 안 된다. 시작과 과정과 끝을 함께 전하여 영혼이 실제로 생명의 길을 걷게 해야 한다.
6. 경고를 외면한 자와 침묵한 파수꾼의 피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에스겔 33장의 나팔 비유는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파수꾼이 다가오는 칼을 보고 나팔을 불었는데도 어떤 사람이 경고를 듣지 않았다면, 그가 죽은 책임은 자기에게 돌아간다. 경고를 받았다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외면했기 때문이다(겔 33:4-5). 하나님은 사람을 억지로 회개시키지 않으시며,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 응답의 책임을 물으신다.
반대로 파수꾼이 칼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으면 문제가 달라진다. 백성 중 한 사람이 자기 죄악으로 죽더라도 하나님은 그 피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겠다고 하신다. 죄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살릴 수 있는 경고를 알고도 숨긴 파수꾼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영혼의 위험을 본 사람에게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파수꾼은 밤이고 낮이고 깨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도 한 사람은 성벽을 지켜야 한다. 술에 취하거나 졸아서 적군을 놓치면 자신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영적 파수꾼도 시대의 흐름과 교회의 상태를 살피고, 죄와 거짓 가르침과 임박한 심판을 분별하여 나팔을 불어야 한다.
이 책임 때문에 주의 종은 외롭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필자는 설교와 축사와 새가족 돌봄과 교회 행정과 재정 확인을 감당하다 보면 주일 사역이 끝난 뒤에도 새벽 두 시까지 일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을 상대하는 축사는 집중력과 영육의 에너지를 크게 소모한다. 월요일에는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만큼 지치지만, 고통받는 영혼을 누가 불쌍히 여기고 도울 것인가라는 주님의 물음 때문에 다시 일어선다고 고백한다.
그 시간에 가족은 편안히 잠들어 있고 자신만 설교의 난관과 행정의 무게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내가 남편의 사역을 당연히 감당할 일로 여기며 전적으로 믿고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신뢰 역시 사역을 지탱하는 한 부분이다. 지도자의 외로움은 자기를 높이라는 신호가 아니라, 사람에게 기대기보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라는 부르심이다.
사람들이 그만 말하면 편해질 것이라고 권해도 파수꾼은 맡겨진 경고를 포기할 수 없다. 필자는 기존 교리를 흔들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이 보여 주신 구원의 길을 숨겼다가 영혼들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자기 생각을 함부로 정죄의 나팔로 불어서는 안 된다. 먼저 주님께 묻고 성경으로 확인하며 성령의 허락 안에서 정확히 말해야 한다.
경고를 전한 뒤에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듣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움직일 수는 없다. 파수꾼은 진리를 분명히 전하고 자신의 삶으로 증언해야 하며, 듣는 사람은 말씀 앞에서 돌이킬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각자의 책임이 분명할 때 경고는 협박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이 된다.
7. 속죄받은 의인에게도 왜 회개·정결·성결이 필요한가?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구원의 출발이다. 그러나 출발한 사람이 계속 죄의 길을 걷고도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에스겔은 의인이 죄악을 행하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수님도 사람을 열매로 알고, 마지막에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마 7:16-23, 16:27). 믿음과 행위를 서로 원수처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참된 믿음은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속죄와 정결과 성결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속죄는 예수님의 피로 죄의 값을 용서받는 일이고, 정결은 회개와 자백을 통하여 죄와 더러움에서 깨끗해지는 일이며, 성결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품과 행실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일이다. 속죄만 반복하여 말하면서 정결과 성결을 생략하면,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죄의 습관과 악한 영의 영향 아래 머물 수 있다.
바울은 큰 집에 금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와 질그릇도 있으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조건에는 깨끗함과 거룩함과 준비됨이 포함된다(딤후 2:20-21). 사울왕처럼 한때 쓰임받았어도 불순종을 계속하면 버릴 그릇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자신을 살피고 죄를 회개하여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교리는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참고 자료이지 성경 위에 서는 최종 기준이 아니다. 장로교의 구원론과 웨슬리안의 구원론이 서로 다른 지점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한 전통만 절대적인 정통으로 놓고 다른 쪽을 모두 이단이라 하면 모순이 생긴다. 필자는 자신의 구원론을 정리한 『바른 히브리서 강해』에서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이 어떻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온전한 구원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고 말한다.
회개와 성결을 강조한다고 행위로 구원을 사는 사람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고, 요한계시록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생명나무와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말한다(마 7:21, 계 22:14). 행위는 구원의 값을 대신하는 공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과 계속되는 회개의 열매다.
성도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바뀌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겸손과 순종이 자라고, 예배가 기쁨이 되며, 죄를 미워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져야 한다. 아무 변화 없이 신앙의 연수만 쌓인다면 파수꾼의 나팔을 듣고 다시 돌이켜야 한다. 의인을 깨우치는 목적은 믿음을 빼앗는 데 있지 않고 끝까지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다.
8. 에스겔의 사명은 예수님과 오늘의 파수꾼에게 어떻게 이어지는가?
에스겔은 하나님의 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대신 깨우는 파수꾼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말씀을 전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셨다(마 4:17). 믿음의 이름만 가진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고 경고하고,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에스겔의 삶은 자기 백성에게 배척받으면서도 끝까지 경고하고 살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나타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소수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백이십 명이 한곳에 모여 성령을 기다렸고, 성령이 임한 뒤 복음은 세계로 퍼져 나갔다. 1885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통하여 그 복음이 한글로 전해졌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시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할 책임을 받았다. 듣는 사람이 적어 보여도 파수꾼의 한 번의 나팔이 다음 세대와 다른 민족을 살릴 수 있다.
필자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대면 모임이 막히고 방송을 통하여 설교가 더 널리 퍼진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본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도 풀리지 않던 질문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회개와 천국복음’ 채널을 듣고, 속죄와 정결과 성결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시대의 재난이 말씀을 듣게 하는 새로운 통로가 된 것이다.
필자의 삶에도 새벽을 깨우는 훈련이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새벽 네 시에 정화수를 뜨러 나갈 때 문 여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기 위해 늘 귀를 기울였다. 당시에는 우상숭배의 환경이었지만, 그 경험을 통하여 새벽에 깨어 있는 습관이 생겼다고 회고한다. 이제는 우상을 위한 새벽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대한민국과 세계 성도를 깨우는 말씀의 새벽을 지키고 있다.
파수꾼의 사명은 한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축사 사역 뒤 온몸이 땀에 젖고, 설교와 행정과 재정과 새가족 돌봄을 마치면 깊이 지치지만, 처음 찾아온 한 영혼이 주님께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왔다면 외면할 수 없다. 지도자는 외롭고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받아 충성해야 한다.
말씀을 배우는 성도도 파수꾼의 사명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 홈페이지의 신론과 기독론과 구원론과 성령론과 은사론과 교회론과 종말론과 요한계시록 강해를 차례로 공부하고, 창세기 강해 172편과 『하나님의 경륜』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영과 혼과 몸으로 지으신 목적과 구원 경륜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권면이다. 지식을 쌓는 데서 멈추지 말고 받은 달란트와 사명을 따라 다른 영혼을 깨워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처럼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마 25:1-30). 서머나 교회처럼 죽도록 충성하고,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계 2:8-11, 3:7-13).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파수꾼은 사람을 겁주기 위하여 나팔을 부는 사람이 아니다. 잠든 영혼과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믿는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진리를 외치는 사람이다. 자기 말이 아니라 성경과 성령의 말씀을 전하고, 자신도 날마다 회개하며, 위협과 피로 속에서도 맡겨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때 에스겔과 예수님을 통하여 이어진 생명의 경고가 이 시대에도 울려 퍼진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워 악인과 의인을 깨우치게 하신 뜻을 살펴보았다. 파수꾼은 다가오는 칼을 먼저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을 살리는 사람이다. 자기 생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동족에게 경고해야 한다.
악인이 경고를 듣고 돌이키면 살 수 있고, 의인도 죄의 길로 향할 때 깨우침을 받아야 생명을 보전한다. 파수꾼이 충분히 경고했는데도 사람이 외면하면 그 책임은 듣지 않은 사람에게 돌아가지만, 위험을 알고도 침묵했다면 하나님은 그 피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신다. 그러므로 영혼의 상태를 보고도 괜찮다고만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속죄받은 의인에게도 정결과 성결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뒤 회개와 자백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품과 행실을 바꾸어야 한다. 행위가 구원의 값을 대신하지 않지만,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와 순종의 열매가 따른다. 믿음과 행위를 갈라놓지 말고 끝까지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에스겔의 파수꾼 사명은 아버지께 받은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깨우신 예수님의 삶을 미리 보여 주었다. 그 복음은 제자들을 거쳐 한국에 이르렀고, 한글 성경과 교회와 교육을 통하여 이 민족을 깨웠다. 이제 한국 교회도 받은 말씀을 자기 안에만 간직하지 말고 세계의 잠든 영혼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주의 종과 성도는 성경과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사람의 평가보다 맡겨진 영혼의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자신도 날마다 회개하며 깨어 있고, 다가오는 위험을 분별하여 사랑으로 경고하며, 작은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고 전하여 자신과 맡겨진 영혼을 함께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8월 20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에스겔 선지자의 사명을 현대 목회자의 역할과 연결하여,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진리를 파수하고 성도들을 깨워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에스겔이 패역한 세대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사역자도 대중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대변하며 영혼들을 회개로 인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맹목적인 교리에 안주하지 말고 속죄를 넘어선 성결한 삶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회복하여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설파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마지막 때에 직면한 성도들이 영적 잠에서 깨어나 천국 입성을 준비할 수 있도록 경고의 나팔을 부는 파수꾼의 사명을 다짐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