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02)]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7) 신부는 어떻게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호2:19~20)

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부로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성경적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처녀의 삶, 음녀와 섞이지 않는 순결함, 그리고 마태복음의 열 처녀 비유 속 기름 준비를 실천해야만 진정한 구원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의 목적은 성도들이 안일한 신앙에서 벗어나 철저한 회개와 행함이 있는 믿음을 통해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자격을 갖추도록 영적으로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은 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언제 완성되는가?본문 →2초림 이후 그리스도인은 왜 약혼한 신부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본문 →3그리스도께 드릴 거룩한 처녀는 어떤 삶으로 준비되는가?본문 →4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누구이며 누구를 따르는가?본문 →5열 처녀는 누구이며 혼인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은 어디인가?본문 →6열 처녀의 등불과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본문 →7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신부는 어떻게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가?본문 →1. 들어가며
여호와께서는 바알을 따라간 북이스라엘에게 다시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약속하셨다. 한 번 품고도 돌아오지 않은 백성을 또 품으시겠다는 선언이다.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first coming)과 재림(再臨, second coming)에 비추어 보았으니,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영원한 신랑이 오실 때 그분의 신부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혼인잔치가 끝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처녀로 말했고, 사도 요한은 어린양을 따르며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으며, 예수님은 등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를 말씀하셨다(고후 11:2; 계 14:4; 마 25:1-13). 이 세 장면은 서로 다른 신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혼한 성도가 신랑을 실제로 맞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드러낸다.
열 처녀가 누구인지, 혼인잔치는 어디에서 열리는지, 등불과 여분의 기름은 각각 무엇인지 모르면서 준비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름을 남에게 빌릴 수 있는가? 문이 닫힌 뒤에도 다시 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해야 지금의 삶이 달라진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을 받은 성도가 어떤 처녀로 자신을 지키고 무엇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은 왜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언제 완성되는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보여 주는 책을 묻는다면 아가서 전체를 떠올릴 수 있다. 필자는 이 주제를 다루며 『바른 아가서 강해』도 썼다. 예언서 가운데서는 호세아서가 유난히 강력하다. 예레미야에는 광야에서의 신혼 사랑이, 이사야에도 남편과 신부의 언어가 나오지만,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다시 장가들겠다는 말씀을 거듭 선포한다(렘 2:2; 사 54:5; 호 2:19-20).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이미 남편을 저버린 북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이끌고 나라를 세운 기원전 931년 무렵부터 기원전 722년 멸망할 때까지 약 이백십 년을 지냈다. 처음부터 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혼합된 신앙을 가졌고 아합 시대에는 바알 숭배에 깊이 빠졌다. 남편이신 여호와의 마음에서 보면 가장 심하게 바람난 백성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버리셔도 할 말이 없는데 주님은 버린다는 말보다 다시 품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이 약속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보아야 한다(호 2:8, 13-17).
여호와께서는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 그리고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하셨다. 장가들겠다는 말씀이 거듭 나오며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신다(호 2:19-20). 죄 많은 백성에게 관계 회복의 값을 여호와께서 먼저 내놓으신 것이다. 사람의 변덕에 매인 약속이 아니라 끝까지 아내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우리는 흔히 북왕국이 무너진 뒤의 역사를 지우고 그들이 끝내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들이 왕과 지도자와 제사 없이 오랫동안 지내다가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호 3:4-5). 필자는 사마리아에 남은 사람들이 다시 여호와를 찾은 역사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일부러 사마리아의 여인을 찾아가신 일을 이 약속의 성취로 본다(요 4:4-26).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자리와 오실 메시아를 물었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다윗 왕이 다시 무덤에서 나와 통치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이 오셨다.
남유다 역시 멸망 뒤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회복의 움직임을 겪었지만 다윗왕이 다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호세아가 말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우두머리를 세울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호 1:11). 그러므로 남쪽만 참 백성이고 북쪽은 영원히 버려진 백성이라는 식으로 이 역사를 읽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두 편 모두에게 오셨고 사마리아에서도 신랑의 약속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영원히 살되’라는 약속은 초림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초림하신 예수님을 믿고도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고,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했다(딤후 4:10; 딤전 1:19-20). 가룟 유다의 끝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도 가볍게 볼 수 없다(마 27:3-5; 행 5:1-11). 히브리서는 은혜를 맛보고도 약속의 안식에 이르지 못할 위험을 거듭 경고한다(히 3:12-19, 6:4-8, 12:16-17). 하나님은 영원한 신랑이 되고자 초림하셨지만, 우리가 그 손을 놓고 떠날 수 있다. 영원한 혼인의 완성은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때 드러난다.
히브리서가 들려주는 에서의 일을 보라. 그는 한 그릇 식물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고, 뒤에 눈물을 흘리며 복을 구해도 돌이킬 길을 찾지 못했다(히 12:16-17).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먼저 말씀하셨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은혜를 가볍게 여겨 잃을 수 있다는 경고는 함께 전해야 한다. 북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할수록,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가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지도 물어야 한다.
3. 초림 이후 그리스도인은 왜 약혼한 신부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신분은 무엇인가? 필자는 혼인을 기다리는 약혼(約婚, betrothal)의 상태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중매한다고 했다(고후 11:2).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결혼식이 모두 끝났다면 왜 아직 그분께 드리려 한다고 말하겠는가? 헬라어 하르모조는 혼인시키다와 약혼시키다라는 뜻을 지닌다. 필자는 이 문맥에서 성도를 그리스도께 약혼시켰다는 뜻을 살려 읽는다.
약혼은 가벼운 말장난이 아니다. 필자는 친구가 약혼을 깨뜨리면서 법적 책임을 지는 일을 보았고, 그때 약혼에도 효력이 있음을 새삼 알았다. 요셉이 마리아와 아직 함께 살기 전 임신한 사실을 알고 조용히 끊고자 고민한 일도 약혼 관계가 엄중했음을 보여 준다(마 1:18-19). 그러나 약혼과 혼인의 완성은 구별된다. 약속한 상대가 있어도 잔치를 치르고 영원히 함께하는 날은 아직 앞에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은 속죄(贖罪, atonement)의 은혜를 주시고 생명 주는 영으로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언어로도 말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셨으므로 주님이 먼저 그 약속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엡 1:13-14). 하지만 사람이 주님을 부인하고 다른 사랑을 따라 약혼을 깨뜨리는 위험은 남아 있다. 하나님 쪽의 신실함과 사람 쪽의 배반 가능성을 한꺼번에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했다고 선포한다(계 19:7-9). ‘예비하였다’는 말은 초림을 믿은 모든 사람이 준비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혼인을 마쳤다는 말과 다르다. 믿음으로 주께 속한 뒤에도 그분을 기다리며 자신을 준비하는 시간이 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뒤 지금까지 교회가 살아온 시간은 바로 그 기다림의 시간이다.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신랑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세 종류의 처녀를 보여 준다. 바울이 말한 정결한 처녀, 요한이 본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 그리고 예수님이 비유하신 슬기로운 처녀다(고후 11:2; 계 14:4; 마 25:2). 세 번 모두 핵심은 신랑을 믿는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에게 합당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약혼한 사람은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남편을 구하지 않는다.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교회 전체가 환난 전에 공중에 올라가 칠 년 동안 혼인잔치를 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을 따라 혼인잔치의 완성된 자리를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본다(계 19:7-9, 21:1-2, 9-10). 칠 년의 공중 잔치를 당연한 시간표로 전제하면 지금 약혼한 성도가 어떻게 준비할지를 놓치기 쉽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가 그 준비의 차이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4. 그리스도께 드릴 거룩한 처녀는 어떤 삶으로 준비되는가?
첫째, 정결한 처녀여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처녀’라고 불렀다(고후 11:2). 개역한글의 ‘중매함이로다’를 읽으며 지금 혼인까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힘쓰는 일은 교회를 그리스도께 바칠 수 있는 상태로 세우는 것이다. 약혼한 신부가 결혼할 날까지 자신을 지키는 일이 남았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이 쓴 정결하다는 말은 헬라어 하그노스다. 필자는 그것을 단지 겉을 씻어 깨끗해 보이는 일로 좁히지 않고,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처녀가 되는 일로 설교한다. 성결(聖潔, holiness)은 더러움을 씻는 것에 더하여 주님의 소유로 구별되어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아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구약의 레위기가 가르친 속죄와 정결(淨潔)과 성결의 흐름도 여기에 이어진다.
레위기에서 거룩함은 말뿐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방인의 풍속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음행과 금지된 성관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안식일과 절기와 안식년을 공동체와 함께 지켰다. 마지막에는 자신과 소중한 것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바침이 있었다(레 18-27장). 순종과 바침은 실제 행동이다. 신약의 성도에게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삶의 순종이 따로 갈 수 없다. 성령의 깨우침을 거스르고 세상 풍속을 좇으면서 거룩한 처녀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찌 그 거룩함으로 나아가는가? 필자는 귀신과 더러운 영이 육체 안에서 사람을 끌어당길 때 인간의 절제만으로는 마음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고 경험해 왔다. 행동을 잠시 억누를 수 있어도 생각의 전쟁은 계속된다. 그래서 진실한 회개(悔改, repentance)가 필요하다. 죄를 깨닫고 자백하며 회개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하여 악한 영이 떠나갈 근거를 마련하고, 주께서 그 영을 내보내시도록 구해야 한다. 그렇게 더러운 영을 내보내며 성령의 통치를 받을 때 거룩한 삶이 실제로 가능해진다고 필자는 가르친다.
‘정결한 처녀’라는 말은 천국에 가려고 스스로 흠을 없애 보라는 요구가 아니다. 먼저 주님의 속죄와 생명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붙들고 죄를 회개하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다. 부정한 것을 품은 채 믿는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신랑에게 바쳐질 준비가 되지 않는다. 거룩함은 신랑과의 약속을 삶으로 지키는 일이며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5. 음녀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누구이며 누구를 따르는가?
둘째,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여야 한다. 요한은 시온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선 십사만 사천 명을 보았다. 그들은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있고,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다. 땅에서 구속받은 그들 외에는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다(계 14:1-3). 요한이 이어서 그들의 삶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라.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갔다.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개역한글은 ‘정절이 있는 자’라고 옮겼다. 원문에는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가 나온다. 이는 실제 성별에 따라 남자만 혼인잔치에 참여한다는 뜻이 아니다. 필자는 신랑이신 어린양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신부의 순결을 이 표현에서 본다. 요한계시록에는 해를 입은 여자와 그 남은 자손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는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불리는 큰 음녀가 나온다(계 12:1, 17, 17:1-5). 어린양의 신부는 음녀가 끌어들이는 길과 짝하지 않는다.
음녀와 함께 더럽혀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의 길도 같은 주인처럼 좇거나, 세상의 쾌락과 인기와 명예를 더 사랑하며 신랑에게서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겉에서는 경건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것을 따를 수 있다. 필자는 주의 종도 강단에서는 바른 말을 하면서 실제 삶은 그 말과 달리 사는 일이 있음을 경고한다. 악한 영을 회개로 내보내지 않고는 그런 유혹을 지속해서 이기기 어렵다. 처녀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더럽힘을 거절하는 실제 삶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 뒤를 따라간다. 신랑이 가는 곳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길을 번갈아 좇는 사람을 온전한 신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도 없다(계 14:5). 특히 말씀을 맡은 종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고도 아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이 구절을 읽으며 얼마나 진실하게 말씀을 전했는지 스스로 돌아본다. 거짓말 없는 입과 흠 없는 삶은 신랑을 따라가는 처녀의 모습이다.
필자는 십사만 사천 명을 마지막 시대에 혈통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뽑힐 사역자들로만 보는 세대주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요한이 본 이들은 땅에서 유혹을 이기고 구속받아 어린양께 속한 처음 익은 열매다(계 14:3-4). 필자는 이 표현을 첫째 부활(復活, resurrection)에 참여한 자들의 모습과도 연결하여 읽는다. 또 계시록 7장에서 인 맞은 자들을 악한 영이 해하지 못하게 하는 장면을 함께 본다(계 7:3-4, 9:4-5). 참으로 구별되어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은 이름만 말하는 사람과 삶이 다르다.
원문의 ‘처녀’와 ‘따라가는 자’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자는 신약 헬라어 직역 작업도 계속해 왔다. 교회 자료실에는 작업한 번역의 약 칠십 퍼센트를 올려 두었다. 번역어 하나로 본문의 강조가 가려질 수 있기에 말씀을 맡은 종은 원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그러나 원어를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입에 거짓이 없고 어린양을 실제로 따라가는 것이다(계 14:4-5).
그러므로 누구의 신학을 따르는지보다 실제 누구의 인도를 따르는지가 중요하다.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도 세상의 욕망 때문에 돌아서는가, 아니면 어린양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는가? 자신은 신부라고 주장하면서 음녀의 손도 함께 잡고 있다면 그날 신랑을 어떻게 맞겠는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처녀는 오직 어린양께 속하여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다.
6. 열 처녀는 누구이며 혼인잔치가 열리는 신랑의 집은 어디인가?
셋째, 슬기로운 처녀여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는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마 25:1-2). 필자도 한때 이 열 명을 신부의 들러리라고 배웠다. 신부의 집에서 친구들이 신랑을 마중 나갔다가 데리고 돌아온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비유 전체를 보면 그 열 처녀가 바로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야 할 당사자다.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성도들, 곧 약혼한 신부의 모습을 보인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왜 들러리로만 볼 수 없는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잔치에 들어갔고, 늦게 온 나머지는 ‘주여 주여’ 하며 자신들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마 25:10-12). 단순한 친구들이 신랑을 안내할 일을 잊어서 혼인잔치에 늦은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신랑에게 받아들여질지의 문제다. 신부가 될 사람은 신랑의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부 자신의 집이라면 그 문을 열지 말지 신랑이 결정하는 비유가 성립하겠는가? 이 집은 신랑의 집이다.
이전에 배운 설명대로 신부의 친구들이 신부의 집에서 나왔다면, 기름을 사러 갈 때에는 자기 집 쪽으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신랑은 들어갈 문을 결정하고 처녀들은 그분이 받아 주기를 기다린다. 필자는 신부들이 신랑의 성을 향하여 왔고, 신랑이 늦어져 그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읽는다. 문이 닫힌 뒤 신랑에게 열어 달라고 하는 마지막 외침까지 이 순서에서 이어진다(마 25:5-12).
그 신랑의 집은 새 예루살렘 성이다. 요한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신부처럼 단장한 거룩한 성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계 19:7-9, 21:1-2). 천사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겠다며 그 성을 보였다(계 21:9-10). 필자는 돌과 성벽을 인격적인 아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성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 성도들을 신부로 본다. 신랑의 성문을 누가 통과할지는 성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다.
마태복음 24장 끝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어느 날 올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곧이어 예비하고 있으라고 명하시고,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누구냐고 물으셨다(마 24:42-45). 그 질문에 이어 25장에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장면이 나온다. 필자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지혜 있게 준비하라’는 면을, 달란트의 비유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면을 본다. 달란트는 주인이 맡긴 사명을 다한 종의 문제이고, 열 처녀는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준비의 문제다. 무엇보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잠을 한순간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실제로 신랑이 더디 오자 열 처녀 모두 졸며 잤다(마 25:5). 여기서 모두가 피곤하여 잠시 잠든 이야기와, 오랜 기다림 끝에 먼저 죽은 성도의 상태를 필자는 함께 생각한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씀하셨고, 데살로니가전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말한다(요 11:11-14; 살전 4:13-16). 슬기로운 처녀도 잠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비유의 차이는 몸을 움직여 밤새 버텼느냐가 아니다. 신랑이 늦게 와도 불을 밝힐 준비를 이미 갖추었느냐에 있다.
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렸다(마 25:6). 영적으로 어두운 때를 암시하는 밤중이다. 필자는 이 외침을 마지막 때 천사장의 소리와도 연결해 본다(살전 4:16). 그 외침에 모두 일어나 등을 손질했지만, 이미 준비한 것이 달랐다. 필자는 주님을 눈으로 직접 뵐 날이 가까울 수 있다고 권면하며, 백이십 세까지 건강을 지켜 그분을 뵙고 싶은 소망도 품는다. 그러나 그날과 시각은 사람이 정할 수 없다(마 24:36, 25:13). 그러므로 오래 살 것만 기대하는 대신 지금 깨어 준비해야 한다.
7. 열 처녀의 등불과 슬기로운 처녀가 준비한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미련한 다섯은 등을 가져갔으나 여분의 기름을 가져가지 않았다. 슬기로운 다섯은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까지 담아 갔다(마 25:3-4). 이 차이를 막연히 ‘믿음이 있고 없고’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열 사람 모두 처녀라 불렸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등불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고 신랑을 기다리던 성도라고 본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신랑이라 부르며 마중 나갔겠는가?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등불은 무엇인가? 요한은 보좌 앞에 켜진 일곱 등불이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기록했다(계 4:5). 필자는 이를 마태복음의 등불과 연결하여 성령을 가리키는 표지로 읽는다. 성도에게는 이미 성령의 불이 켜져 있다. 그러나 등에 든 기름만으로 신랑이 더디 오는 긴 밤을 견디기는 어렵다.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그릇에 담아야 한다. 등불과 기름을 모두 성령이라고만 하면 슬기로운 다섯이 따로 가지고 온 그릇의 뜻을 설명하지 못한다.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기름은 어떤 성질이 있는가? 첫째, 슬기로운 자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었다. 신랑이 왔을 때 미련한 자들이 불이 꺼져 간다며 기름을 달라고 하자, 슬기로운 자들은 함께 쓰기에 부족하다며 직접 사라고 했다(마 25:8-9). 다른 성도의 준비를 빌려 신랑 앞에 설 수 없다. 각자가 준비해야 한다. 둘째, 그 기름이 있어야 등불이 계속 타올라 신랑을 맞을 수 있다. 필자는 기름을 신랑이 신부로 알아볼 만한 삶의 증표로 본다. 셋째, 그것은 값을 치러 사야 했다. ‘파는 자에게 가서 사라’는 말에는 이미 준비한 사람들이 들인 대가가 있다.
그 대가를 무엇으로 치르는가? 주님께 바친 시간, 눈물, 회개, 기도, 수고, 핍박을 견딘 순종이 한 방울씩 더해진다. 말로만 믿는다고 되풀이하면서 삶은 아무것도 주께 드리지 않았다면 기름그릇을 언제 채우겠는가? 필자는 기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랑을 향한 실제 헌신에 따르는 수고와 값을 말한다. 자기가 채운 것은 남에게 넘겨 줄 수 없고 남이 흘린 눈물도 자기의 것으로 쓸 수 없다.
미련한 처녀들은 알고도 게을러서 준비하지 않은 것인가, 처음부터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인가? 필자는 마태복음 25장 2절의 ‘미련한 자로 있었고 슬기로운 자로 있었다’는 헬라어 미완료형에 주목한다. 그 상태가 이전부터 이어졌다고 읽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은 등만 들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줄곧 준비의 필요를 몰랐던 사람들로 본다. 슬기로운 다섯은 처음부터 더 준비해야 할 것을 알고 그릇에 기름을 계속 채웠다. 그날 닥쳐서야 차이를 깨달은 사람은 너무 늦었다.
‘왜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는가?’라는 질문도 해야 한다. 예수님만 믿고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얻으면 어떤 준비도 없이 혼인잔치에 들어간다는 말만 들은 성도는 기름그릇을 따로 마련해야 할 이유를 배우지 못한다. 신랑이 늦어지자 등불이 꺼져 가는 위기가 비로소 드러났다. 오늘 말씀을 듣는다면 그 차이를 지금 알아야 한다. 훗날 문 앞에서 기름이 부족하다고 놀랄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그릇을 채워야 한다.
8. 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신부는 어떻게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가?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다. 예비했던 이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마 25:10). 성경은 ‘등을 가졌던 자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예비했던 자들’이라고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예비하는 일이다. 일찍부터 신랑을 생각하며 기름을 지니고 있던 자가 그분의 집으로 들어간다.
마 25: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남은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했으나, 신랑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마 25:11-12). 신랑을 주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이 장면을 불신자에게만 돌려놓으면 믿고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시는 경고를 듣지 못한다. 문이 닫히고 나서 기름을 빌리거나 뒤늦게 값을 치러 채울 수 없다. 필자는 죽은 다음에야 주님께 헌신해 온 삶을 새로 마련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살아 있을 때 준비해야 한다.
밤중에 기름을 판다는 말은 그것을 준비할 시간이 지금도 끝없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사러 간 동안 신랑이 왔고, 돌아왔을 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마 25:9-12). 처음부터 준비한 사람의 기름을 그 자리에서 나누어 쓸 수도 없었다. 오늘 듣고 깨닫는 말씀이 내일의 결단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살아서 회개하고 주께 드릴 삶이 있을 때 기름그릇을 채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지금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일에 지친 밤에도 죄를 돌아보며, 눈물로 회개하고,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말씀을 따라 맡은 일을 해내는 시간이 기름을 채운다. 슬기로운 처녀는 하루아침에 호리병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한 방울씩 모았다. 주님께서 보실 때 신부로 인정할 만한 삶의 증표가 이렇게 쌓인다. 필자는 믿음과 회개를 천국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으로, 그 믿음을 따라 살아 낸 행실을 신부의 준비를 완성하는 충분 조건으로 말한다. 구원(救援, salvation)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난 일이 아니다.
필자는 기름그릇의 크기와 채운 분량을 천국에서 누릴 상과 지위와 신분의 차이와도 연결한다. 많이 채운 사람과 거의 채우지 않은 사람이 같은 분량을 준비한 것은 아니다. 그날 성문을 통과하는 문제와 들어가서 누릴 영광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믿음만 말하고 자신을 드린 일이 전혀 없다면 무엇으로 신랑 앞에 서겠는가? 어린양의 아내에게 허락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계 19:7-8).
필자는 천국의 정의와 누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지, 천국의 신분과 상급, 천년왕국과 천국의 영광을 살피는 책도 준비해 왔다. 그 내용을 책으로 내면 각자가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더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다. 열 처녀의 말씀은 이미 우리 앞에 있다. 자신의 호리병에 얼마나 기름이 들어 있는지 지금 살펴야 한다.
이 말씀을 처음 듣고 자신의 준비가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돌이켜야 한다. 필자는 자신이 모르고 살았음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주께서 받아 주신다고 권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죽은 뒤에야, 또는 신랑이 문을 닫은 뒤에야 준비하려 한다면 늦다. 지금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며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다. 기름은 옆 사람에게 달라고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필자에게 맡기신 것은 필자가 감당하고, 각자가 맡은 삶은 각자가 그분 앞에 올려 드려야 한다.
주의 종들도 이 경고를 들어야 한다. 한번 믿었으니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말만 전하고, 끝까지 회개하며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면 문 앞에서 울 성도에게 무슨 답을 하겠는가? 주님은 말씀을 맡긴 종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마 24:45-51, 25:14-30). 필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려고 원문을 살피고 있다. 듣는 사람은 그 가르침을 듣고 오늘 자기의 기름그릇을 확인해야 한다. 그날까지 준비할 시간이 영원히 남아 있지 않다.
신랑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오늘의 준비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등불이 켜졌다는 사실을 감사하되, 그 불이 신랑을 맞을 때까지 타도록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오직 어린양을 따르는 거룩한 처녀로 자신을 지키고, 음녀의 유혹을 끊고, 하루하루의 순종으로 그릇을 채워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그날과 그 시를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마 25:13). 바로 이 시간이 깨닫고 시작할 때다.
9. 나오며
호세아의 영원한 혼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되어 재림의 혼인잔치로 이어지며, 그날 신부가 어떻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지금 우리는 신랑과 약혼한 성도다. 바울의 정결한 처녀, 요한이 본 더럽히지 않은 처녀, 예수님이 말씀하신 슬기로운 처녀로 그분 앞에 서야 한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으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자만 신랑의 집에 들어갔다. 준비하지 못한 자가 문 앞에서야 깨달은 일을 우리는 지금 알아야 한다. 성령의 등불을 받았다는 고백에 머물지 않고 회개하며 죄를 끊고, 어린양을 따르며, 시간과 수고와 눈물의 대가를 들여 기름그릇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부로 부르신 사랑을 가볍게 버리지 말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신랑이 오실 때 예비한 자로 인정받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01일(목)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