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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0. 06. (화)2026년 교회표어 「시대적인 사명완성을 위해 성전을 짓는 해」 (역대상 28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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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205)]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요엘서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새로운 변화와 특징은 무엇인가?(욜2:28~29)

정보배 목사2026-10-06조회 4읽는 시간 약 26분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왜 요엘의 성령 약속과 오순절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가?2모세와 장로들, 엘닷과 메닷의 사건은 성령의 임하심에 관해 무엇을 보여 주는가?3요엘의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지면서 누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가?4직임을 위한 성령의 임하심과 거듭남을 위한 성령의 내주는 어떻게 다른가?5구약과 신약에서 성령의 은사와 그 지속성은 어떻게 달라지는가?6은사가 인격의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분별하고 지도해야 하는가?7성도는 어떤 목적과 자세로 은사를 구하고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설교 본문 기독론(205)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2) 요엘서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새로운 변화와 특징은 무엇인가? (욜 2:28-29) ·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은 요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를 살피는 두 번째 시간이다. 요엘이 예언한 성령 강림(聖靈降臨)은 무엇을 새롭게 바꾸었는가? 누구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의 은사(恩賜, spiritual gift)가 나타나면 그 사람이 곧 신령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인가? 이런 질문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성령을 사모하면서도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교회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놀라움을 보았다. 그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은사를 올바르게 감당하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역사와, 사람 위에 임하여 맡겨진 직임(職任)을 수행하게 하시는 역사도 함께 살펴야 한다. 요엘은 특히 예언과 꿈과 환상을 말하며, 공동체를 섬기도록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요엘의 약속이 오순절에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무엇을 분별하고 어떻게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요엘의 성령 약속과 오순절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가?

성경을 읽는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레위기 23장의 절기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에서 해답을 찾으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시는 통로였고,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성경을 이스라엘 중심으로만 읽으려 하면 절기의 성취를 놓친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첫 이삭을 드리는 절기, 그리고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가을에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다(레 23장). 일곱 절기를 일곱 등잔이 달린 등대에 비유하면, 가운데 등잔에 오순절이 놓이고 그 앞뒤로 세 절기씩 이어진다. 가운데에 놓인 오순절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부활하시고 높임을 받으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다. 절기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드러난 것이다(행 2:33).

사도행전은 오순절날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집에 가득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고 전한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1-4). 베드로는 그 일이 술 취함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때가 제삼시, 곧 아침 아홉 시였기 때문이다(행 2:15).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하지만, 성령 강림은 그날 아침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났다. 이것은 메시아가 이스라엘 가운데 오신 뒤, 그를 믿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넓어지는 전환을 보여 준다.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주님을 따르던 이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약속을 기다렸다(행 1:12-14). 그러다가 오순절에 그 약속을 실제로 받았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을 단순히 신비한 현상 하나가 일어난 날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사람들에게 확장되는 시작이며,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능력을 입히시는 사건이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그 은사를 누구를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3. 모세와 장로들, 엘닷과 메닷의 사건은 성령의 임하심에 관해 무엇을 보여 주는가?

요엘의 약속을 이해하려면 민수기 1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짐을 홀로 지던 모세는 그 책임이 너무 무겁다고 하나님께 아뢰었다. 하나님은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 칠십 명을 모아 회막 앞에 서게 하라고 하셨다. 그런 다음 모세에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여 백성의 짐을 함께 맡기겠다고 말씀하셨다(민 11:14-17). 왜 영을 부어 주셨는가? 지도자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직임을 주실 때 그 일을 감당할 능력도 주시는 것이다.

모세는 장로들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웠다.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예언했으나 그 예언은 계속되지 않았다(민 11:24-25). 여기서 은사가 나타난 목적을 보라. 그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거나 날마다 예언하며 사람을 모으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시고 백성의 짐을 함께 맡기셨다는 표지였다.

그런데 엘닷과 메닷은 회막에 나오지 않고 진영에 머물렀다. 두 사람에게도 영이 임하여 진에서 예언했다(민 11:26). 한 소년이 달려와 그 사실을 모세에게 알렸고, 모세를 섬기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들을 말리라고 청했다. 정해진 자리에 나오지 않았는데 진영에서 예언하니 여호수아의 눈에는 질서에 어긋나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권위가 흔들린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더 많은 백성에게 주시기를 소원했다(민 11:27-29).

민 11: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하기를 바라는 모세의 마음이 담겨 있다. 모세만 백성의 모든 일을 감당하게 두지 않으시고 장로들에게 영을 주셨다면, 언젠가 더 많은 사람에게도 주시지 않겠는가? 모세의 말은 곧 뒤에 요엘이 전할 약속을 생각하게 한다. 요엘이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835년에서 830년 무렵으로 추정되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이런 소원을 밝힌 때는 그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1445년 무렵이다. 먼저 모세가 모든 백성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원했고, 훗날 요엘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 날을 선포한 것이다. 민수기의 사건은 직임과 성령의 능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보여 준다.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지도자가 드물었다. 지도자가 없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남유다가 여호사밧 이후 요아스 무렵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와 바알 신앙으로 어지러워진 역사를 생각해 보라. 소수의 사람에게만 영의 역사가 집중되는 상태로는 공동체의 위기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단지 개인이 신비한 일을 체험한다는 소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분의 일을 맡고 감당하게 하신다는 소식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도 엘닷과 메닷을 막지 않은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라. 모세는 회막으로 나온 장로들이 자기 곁에서만 예언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영을 주신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예언하는 것을 들었을 때, 차라리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바란 것은 자기에게 집중된 권한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다. 백성 모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바라보는 마음이 여기에 있다.

4. 요엘의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지면서 누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가?

요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전했다.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된다. 남종과 여종도 그 약속에서 빠지지 않는다(욜 2:28-29).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 남자냐 여자냐, 높은 지위에 있느냐 낮은 자리에 있느냐가 성령을 받는 경계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오순절의 새로운 변화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베드로는 오순절에 나타난 일을 바로 이 요엘의 말씀으로 설명했다(행 2:16-18). 그날 한곳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는 모습을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이 들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고 놀랐다(행 2:5-12). 오순절에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 모두에게 방언이 나타났다. 방언은 성령을 받고 그 충만함을 경험하는 데 기본적으로 열려 있는 은사다. 하지만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그 사람이 어떤 직임까지 온전히 감당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요엘의 약속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욜 2:32; 행 2:21). 구원의 길을 특정 민족이나 소수의 예정된 사람에게만 묶어 놓을 수 없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며, 성령의 약속이 당시 듣던 이들과 그 자녀들, 먼 데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선포했다(행 2:38-39). 요엘이 예언한 성령의 확대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열리는 구원의 길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는 말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저마다 교회를 떠나 자기 뜻대로 예언하고 사역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언과 꿈과 환상을 누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요엘은 많은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새 시대를 알렸지만, 그 은사의 목적이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문은 넓게 열렸지만, 받은 것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분별과 책임이 요구된다.

“누구든지”라는 말을 듣고 두 방향으로 잘못 나아갈 수 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은사를 특정 지도자에게만 묶어 두려 한다. 다른 쪽에서는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누구나 준비와 분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예언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바꾼다. 둘 다 요엘의 약속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한다. 모든 사람이 성령을 사모하되, 실제 은사를 사용하며 직임을 맡을 때에는 그 사람과 공동체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은사를 받은 사실보다 그 은사를 어디에 쓰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 교회에도 이 약속이 절실하다. 한 사람만 나라의 우상숭배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한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빗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여 강이 되듯이 여러 사람이 함께 회개해야 한다. 필자는 이 시대에 회개와 천국 복음이 한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민족 가운데 증거되기를 원한다. 나라가 영적으로 갈림길에 놓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깨우셔서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5. 직임을 위한 성령의 임하심과 거듭남을 위한 성령의 내주는 어떻게 다른가?

성령의 역사에는 구원과 관련된 측면과 직임을 위한 측면이 있다. 사람 안에 들어와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가 있다. 또 사람 위에 임하여 맡겨진 직무를 수행할 은사와 능력을 주시는 역사가 있다. 요엘서의 예언은 자녀들의 장래 일 말함과 꿈과 이상,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심을 앞세우므로 특히 직임을 위한 외적 역사에 초점이 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읽을 때에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새롭게 됨도 함께 살펴야 한다.

거듭남 곧 중생(重生, regeneration)은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과 연결된다. 반면 위에 부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 필요한 도구와 힘을 주는 일과 연결된다. 필자는 복음서를 함께 읽을 때 요한복음에서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위에서 능력을 주시는 역사를 특히 살피게 된다. 같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사람 안의 생명과 밖으로 나타나는 직임의 능력을 구별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이 두 측면을 혼동하면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사람이 환상을 보거나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그 영혼이 거듭났고 성품까지 성숙했다고 단정한다. 또 은사가 없다는 이유로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다고 속단한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성품이 바뀌는 일과, 밖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받아 특정 일을 수행하는 일은 함께 필요하지만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한쪽만으로 온전한 사역을 이루기 어렵다.

예컨대 귀신을 내보내는 직임을 맡은 사람이 축사의 능력 없이 그 일을 하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고 자신이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은사는 강한데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 능력이 사람을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영광을 얻는 도구가 된다. 필자가 사역을 살피며 알게 된 것은 회개를 통해 사람의 안이 정결해지고, 그 직임에 맞는 은사가 합당하게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은사를 사모하면서도 죄를 붙들고 있으면 이미 주어진 능력조차 누리지 못할 수 있다.

필자는 사역 중 은사가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에 자리 잡는 모습을 영적으로 살핀 일이 있다. 그런데 사람 안에 악한 영이 많으면 은사가 임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거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의 목적은 남보다 대단한 은사를 얻어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 죄를 끊고 정결해져서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는 데 있다. 성령의 내주를 통한 인격의 변화와 직임을 위한 능력이 함께 가야 한다.

예를 들어 영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악한 영을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같지 않다. 누군가에게 보는 은사가 있어도 축사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의 필요를 살피면서 각 사역자에게 무엇이 열렸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구별하려 한다. 은사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양만 보고 무리하게 축사하도록 내보내면 사역자 자신이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에게 맡기신 범위 안에서 일하게 해야 한다.

성령을 받았다고 설교 준비가 필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그 시간에 말씀을 주실 것이라며 공부와 준비를 버린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도 사용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지 않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와 자기 생각을 혼동하는 일이다. 예언과 설교를 구별하고, 성령께 순종하면서도 성경을 깊이 공부해야 한다.

6. 구약과 신약에서 성령의 은사와 그 지속성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구약에서는 성령께서 왕과 선지자와 사사, 특별히 세우신 지도자에게 임하셔서 그 직임을 감당하게 하셨다. 사사로는 옷니엘과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을 생각할 수 있다. 왕으로는 사울과 다윗이 있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여러 장로의 일도 보았다. 이들에게 영이 임한 목적은 각기 달랐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한다는 점은 같았다. 영을 받은 소수의 사람만을 바라보며 공동체 전체가 수동적으로 남아 있을 때의 한계도 있었다.

사울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여 예언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무엘이 먼저 그것을 알려 주었고, 사울이 선지자 무리와 함께 예언할 때 사람들은 놀랐다(삼상 10:5-13). 그러나 그 일이 사울의 인격과 이후의 순종을 보증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을 때 그 사자들에게도 예언이 나타났고, 사울 자신에게도 다시 예언이 나타났다(삼상 19:20-24). 은사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삶을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민수기 11장의 장로들도 예언을 하다가 그쳤다. 구약의 은사가 특정 시기에 임하고 멈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약의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께서 사람 안에 내주하시면서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역사도 함께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가 한 번 임하면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은사가 남아 있다고 그 사람이 언제나 올바르게 쓰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욕심과 교만에 사로잡혀도 은사가 나타날 수 있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구약에는 한 사람이 필요에 따라 특정한 능력을 받고 그 일을 마치면 그 역사가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민수기의 장로들에게 예언이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일이 좋은 예다. 왕이나 사사에게 임한 능력도 그 직무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신약에는 성령께서 안에 거하시면서 여러 은사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의 인격이 완성될 때까지 은사를 기다렸다가 주시는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능력의 지속성과 인격의 성숙을 같은 뜻으로 읽으면 큰일 난다.

구약에서 성령을 받았던 지도자의 수와 신약에서 열리는 길에도 변화가 있다. 요엘의 예언은 아들과 딸, 늙은이와 젊은이, 남종과 여종을 함께 부른다. 신약의 성도는 특별한 소수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동일한 직임과 동일한 특별 은사를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필요와 맡기실 일을 아시고 그에 합당한 능력을 주신다.

필자는 영적 세계를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십사만 사천 명과 영적 나이가 높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일을 맡기시는 모습을 생각해 왔다. 구약에 은사를 맡길 사람이 소수였다는 설명도 이 영적 이해와 연결된다. 그러나 신약의 새로움은 분명하다. 어느 몇 사람의 신분만 바라보지 말고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 특정 직임을 맡는 사람에게는 그 일에 맞는 은사와 능력이 더해진다.

이 점에서 성령의 은사를 장식품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직임은 수행하지 않으면서 “나도 이런 능력이 있다”고 드러내려고 은사를 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능력을 돈벌이나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돌릴 위험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어느 교회에 어떤 일을 맡기셨는지, 그 일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필자는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은사를 공동체의 필요와 직무에 연결하여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7. 은사가 인격의 성숙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분별하고 지도해야 하는가?

은사가 뛰어난 사람이 곧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필자는 예언을 잘하고 환상을 본다는 이유로 한 남자 목회자와 여자가 함께 교회를 시작한 사례를 알았다. 시간이 지나 그 여자가 “목사님과 맞지 않으면 교회를 해체하겠다”고 말했고, 결국 그날 교회가 무너졌다. 환상과 예언은 있었지만 그 은사를 바르게 감당할 인격과 공동체의 질서가 함께 자라지 못한 것이다. 교회가 은사를 분별하지 않고 사람 하나의 능력에만 매달리면 공동체가 흔들린다.

고린도전서는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까닭을 개인의 과시가 아니라 공동의 유익에서 찾는다(고전 12:7).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 은사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교회를 세우는가? 약한 자를 살리고 맡은 일을 돕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이름을 높이고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는가? 은사의 크기보다 사용되는 방향을 보아야 한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필자는 동탄에서 예언한다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 말이 맞는지 분별하기 어려웠지만 지나고 보니 약 95퍼센트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예언을 받으러 다니고 돈을 바쳤다. 어떤 이는 나이 일흔이 되도록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목회자로서의 준비는 하지 않았다. 잘못된 예언을 분별하지 못하면 세월과 물질을 잃고 하나님이 맡기신 현실의 일을 놓친다.

예언한다고 하는 사람에게 묻고 돈을 바치며 이곳저곳을 따라다니는 일이 어찌 교회를 세우겠는가? 필자는 이런 모습을 보며 무당에게 묻고 복채를 주는 일과 무엇이 다른지 자문했다. 은사가 실제로 조금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섬기는지, 자기만의 일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모으는지를 보아야 한다. 특히 예언을 받았다는 이유로 말씀 공부와 실제 준비를 멈춘다면, 그 말은 사람을 세우지 않고 붙들어 놓는 셈이다.

한때 필자도 신사도 운동과 빈야드 운동에 속한 것으로 알려진 예언 사역자를 찾아가 본 일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길게 예언하던 그가 필자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예언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건네주었는데, 집에 와서 들어 보니 녹음된 내용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여러 경험을 거치고 말씀과 은사를 더 살핀 뒤에야 예언 사역의 이름과 분위기만으로 그 내용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례는 성경의 직접 진술이 아니라 필자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은사를 받는 과정에는 지도와 질서도 필요하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하자 귀신들이 나가고 병든 사람들이 나았으며 남녀가 세례를 받았다(행 8:5-12). 그러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한 뒤에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한다(행 8:14-17). 이것은 사마리아의 새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끊어진 별개 무리가 되지 않고 함께 연결되는 질서를 생각하게 한다.

행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필자는 이 장면을 보며 은사에도 바른 지도와 계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깊이 생각했다. 빌립이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떠나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 다만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그 일을 함께 살피고 잘못 사용할 때 바로잡아 줄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스승은 자신을 통해 전해진 은사를 누군가 잘못 사용할 때 주님께 구하여 그 은사가 닫히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필자가 들은 사역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스승을 통해 은사를 받고 지도를 받는 유익과, 혼자 능력을 좇다가 통제 없이 타락할 위험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은사만 보고 사람을 따라갔다가 그의 거친 성품과 삶 때문에 실망한 사람이 적지 않다. 반대로 인격은 훌륭해 보이지만 고통받는 사람의 문제를 실제로 돕는 능력이 전혀 없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는 성숙한 인격과 직임을 감당할 은사가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고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신사도나 빈야드라는 이름, 화려한 예언이나 영적 분위기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사람의 삶과 은사의 열매, 공동체 안의 책임을 살펴야 한다.

8. 성도는 어떤 목적과 자세로 은사를 구하고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왜 은사를 구하는가? 자기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맡아 섬기기 위해서인가? 먼저 일반적으로 주신 재능과 은사로 공동체를 섬길 수 있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직무가 주어졌다면 그 일에 맞는 은사를 구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 필자가 살피기 어려운 영역을 부목회자가 살피도록 영안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 그 은사는 개인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에 쓰이도록 주어진 것이다.

필자는 회개와 천국 복음을 이 시대에 전하는 사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주실 때 표적과 기적이 사람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보러 왔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다. 오늘 우리도 능력을 보이는 일 자체를 목적 삼아서는 안 된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도록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은사라야 한다. 회개 없이 능력만 좇으면 은사가 드러나도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사람이 준비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사람 안에서 이끄실 때에는 순간순간 들려주시는 말씀에 순종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끊어야 한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므로 어느 쪽을 따를지 날마다 선택해야 한다(갈 5:16-17). 탐욕과 자기 자랑을 붙든 채 은사만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인격의 성숙은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는 자리에서 자란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필자 역시 주님 앞에서 인격이 성숙하고, 맡겨진 일을 감당할 은사도 합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영적 세계를 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넉넉하지 않다. 강한 은사를 얻었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돈벌이와 명예의 수단으로 삼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 그 결말이 얼마나 두려운지 필자는 영적 체험 가운데 살펴보았다. 생명책의 이름까지 지워질 수 있음을 보았기에 은사를 농락하는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것은 필자의 체험을 밝히는 말이며, 그래서 더욱 회개와 순종을 권하는 것이다.

필자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설교를 연구하며 이 길을 걸어온 것은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한다고 할 때 가짜와 진짜를 분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겪었다.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 교단의 익숙한 설명만 되풀이해도 길을 잃고, 은사의 겉모양만 좇아도 속임을 당한다. 어느 편의 이름표를 달았는가보다 실제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가가 중요하다. 진리의 길은 둘로 갈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목회자는 더 공부하고 성도는 더 분별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놓고도 회개와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 나라가 공산주의로 기울 것인가, 자유와 신앙을 지킬 것인가 하는 위기의식 속에서 필자는 우상숭배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지나면서도 그 길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혼자만 아는 복음으로 남겨 둘 수 없다. 많은 사람이 함께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충성해야 한다. 한 방울의 물은 작지만 함께 모이면 강이 된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욱 겸손해야 한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기 뜻대로 휘두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공동체를 떠나 독립하는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 지도받을 것은 지도받고, 잘못 사용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직분을 맡았다가 교만하여 무너지면 그동안의 수고가 허사가 될 수 있다. “주님, 이 몸을 공동체의 필요에 드리겠습니다. 주신 은사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끝까지 섬겨야 한다.

9. 나오며

요엘의 성령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지며 가져온 변화와, 그 은사를 감당하는 길을 살펴보았다. 모세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을 받기를 원했고, 요엘은 만민에게 영을 부어 주실 날을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신 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 약속이 실제 역사 가운데 나타났다. 이제 성령의 은사는 특별한 몇 사람의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직임을 위해 공동체 안에서 쓰여야 한다.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일과, 위에서 능력을 주셔서 직무를 감당하게 하시는 일은 함께 살펴야 한다. 은사가 인격의 성숙을 보증하지 않으므로,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계속 회개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을 공부해야 하며, 예언을 받는 사람도 그 말을 성경과 삶의 열매로 분별해야 한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공동체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죄를 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를 모두 주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지도와 권면을 받아들이고, 받은 직임을 끝까지 겸손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06일(화) ·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