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04)]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03) 환난전 휴거설 과연 성경적인가?(01)(살전4:13~18)

이 설교는 세대주의적 종말론, 특히 환난 전 휴거설의 성경적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성경을 해석하는 올바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특정 신학적 교리라는 안경을 벗고 오직 성경 본연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말씀을 직시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는 세대주의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엄격히 분리하여 7년 대환난 전 모든 교회가 휴거된다고 가르치지만, 이는 다니엘서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지적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환난을 피한다는 안일함에 빠지기보다, 마지막 때에 준비된 알곡이자 영적 군사로서 승리하기 위해 철저히 회개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종말론의 ‘신학적 안경’을 벗고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본문 →2세대주의는 일곱 시대와 이스라엘·교회, 천년왕국을 어떻게 구분하는가?본문 →3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본문 →4마지막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와 제3성전의 시대로 보는 해석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본문 →5데살로니가전서 4장이 말하는 휴거와 부활은 무엇인가?본문 →6주님의 공중 강림 때 누가 데려감을 당하며, 알곡 추수와 나팔은 무엇을 뜻하는가?본문 →7환난 전 휴거설을 분별하는 성도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본문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하려 할 때에는 우선적으로 공중 강림과 부활, 알곡의 추수, 남겨지는 사람, 마지막 나팔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지상재림을 살펴야 한다. 특히 이번 시간에 다룰 것은 환난 전 휴거설의 근거 가운데 첫째 대목으로서 '성도의 휴거'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대주의가 환난 전 휴거설을 어떻게 세웠으며, 성경이 주님의 공중 강림 때의 부활과 성도의 들림을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과연 얼마나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종말론의 ‘신학적 안경’을 벗고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종말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나는 이미 배웠으니 안다’는 확신이다. 장로교에서 배운 사람은 장로교의 설명을, 순복음에서 배운 사람은 순복음의 설명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해석의 출발점은 교단의 이름도, 유명한 주석도, 필자의 말도 아니다. 성경의 문장과 그 문장이 놓인 배경과 전체 흐름을 보아야 한다. 원문을 살피고, 예수께서 친히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귀담아들어야 한다.
세대주의는 특히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하려 한다. 그 방식은 한 구절의 문자적 의미를 소중히 여긴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어떤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피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에만 묶어 놓으면, 이미 오신 메시아를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다니엘서 9장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이 요한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하셨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예언이 바라보던 분을 가리키는 선구자였다(마 11:12-13). 예수님이 오셔서 제사의 완성을 이루셨는데도 옛 제사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경륜(經綸, economy)을 거꾸로 읽게 된다. 먼저 메시아의 오심과 십자가를 보고, 그다음에 다니엘의 예언과 성전의 문제를 읽어야 한다.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종말론을 잘못 배우면 실제 삶도 달라진다. 환난 전에 교회에 속한 사람은 모두 떠난다고 믿으면, 자신이 지금 깨어 있는지, 죄를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있는지 묻지 않게 되기 쉽다. 주님은 때를 계산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마 24:42). 그러므로 해석은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날 누구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지를 결정하는 목회의 문제다.
필자가 말하는 바를 듣고도 성경을 대조하여 잘못된 곳을 찾는다면 알려 주기 바란다. 필자는 고칠 의향이 있다. 그러나 판단하기도 전에 익숙한 안경을 다시 쓰고 ‘우리 교단에서는 그렇게 배웠다’고 멈추지는 말아야 한다. 성경의 저자가 뜻한 흐름을 찾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각 구절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말하자. 이것이 환난 전 휴거설을 검토하는 첫걸음이다.
2.세대주의는 일곱 시대와 이스라엘·교회, 천년왕국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세대주의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끄시는 방식을 일곱 시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타락 이전 아담의 무죄 시대, 타락 이후의 양심 시대, 바벨탑과 함께 이야기하는 인간 정부 시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시대, 모세 이후의 율법 시대,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은혜 곧 교회 시대,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다. 모세와 율법의 시대를 말할 때는 기원전 1446년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구분은 성경 역사의 순서를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시대마다 구원(救援, salvation)받는 방식이 다른 듯이 가르치면 문제가 생긴다.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받고 은혜 시대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식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의 둘째 특징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나온 민족 이스라엘을 땅의 백성이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 교회를 하늘의 백성이라 한다.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성전, 지상 왕국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교회는 하늘의 기업과 새 예루살렘을 받는 별도의 백성으로 둔다. 이렇게 둘을 영원히 나누면, 한 몸 안에서 두 백성을 함께 읽어야 풀리는 성경의 말씀을 읽기 어려워진다.
셋째 특징은 교회 시대를 이스라엘 역사 사이에 삽입된 기간으로 보는 것이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 중 예순아홉 이레가 지난 뒤 교회 시대가 들어왔고, 교회가 떠나야 이스라엘에게 남은 한 이레가 시작된다는 설명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 교회는 환난 전에 공중으로 올라가고, 땅에서는 이스라엘이 마지막 시련을 겪는다. 그러므로 환난 전 휴거설은 데살로니가전서 한 구절만 보고 갑자기 나온 주장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어 세운 시간표에서 나온 결론이다.
이 흐름은 존 넬슨 다비에게서 시작되어 스코필드의 관주성경을 거치며 미국 교회와 선교 현장에 널리 퍼졌다. 한국에도 그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들어왔다. 순복음의 환난 전 휴거설과 일부 장로교회 안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도 이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세대적 진리』의 그림과 도표를 보면 이 체계가 얼마나 촘촘하게 짜였는지 알 수 있다. 체계가 촘촘하다고 그 연결 하나하나가 곧 성경 본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al kingdom)에 관해서도 같은 문제가 생긴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첫째 부활(復活, resurrection)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말한다. 장로교 통합 측의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지만, 필자는 실제 천년의 왕 노릇이 있다고 믿는다. 세대주의와 다른 대목은 왕 노릇 하는 장소다. 세대주의는 재림(再臨, second coming) 뒤 이 땅에 지상 왕국이 세워진다고 보고, 필자는 천국의 땅에서 왕 노릇 한다고 본다(계 5:10; 20:4-6).
계 20:6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5장 10절의 ‘땅에서 왕 노릇’과 20장의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함께 읽되, 어느 땅을 가리키는지를 물어야 한다. 필자가 천국의 땅으로 이해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일곱 나팔의 재앙을 통해 지상의 환경을 심판하신 뒤에, 천국에 있던 성도들이 다시 그 험한 지상으로 내려와 살 이유가 무엇인지 묻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자의 종말론적 해석이며, 이 해석을 따라가려면 해당 본문을 직접 펴서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의 장소를 정해 놓고 모든 성구를 거기에 억지로 맞추지 않는 일이다.
3.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환난 전 휴거설의 시간표를 알려면 다니엘서 9장을 보아야 한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그의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의 기한이 정해졌다고 했다. 세대주의는 ‘네 백성’이 유대 민족이고 ‘네 거룩한 성’이 예루살렘이므로, 이 예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읽는다. 그래서 예순아홉 이레 뒤에 교회가 나타나도 예언의 시계는 멈춰 있어야 한다고 한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그러나 그 말씀은 다니엘의 백성이 왜 보존되어야 했는지도 보여 준다.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속해지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일을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할 수 있는가(단 9:24)? 할 수 없다.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오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보존하신 것은 그 백성에게서 여자의 씨,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서였다. 백성은 그분이 오시는 통로였고, 예언의 중심은 오실 그분이다.
다니엘서 9장 26절은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앞의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를 합치면 예순아홉 이레다(단 9:25-26). 여기서 끊어지는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이 오셔서 제사를 완성하셨으므로 다시 옛 성전을 짓고 옛 제사를 회복하는 일을 예언의 궁극적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이라는 장소의 다툼을 넘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를 말씀하셨다(요 4:21-24).
칠십 이레를 읽는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이다. 필자는 일곱이라는 수가 안식일과 안식년, 면제년과 희년으로 이어지는 구약의 흐름 속에서 메시아의 성취를 바라보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칠십 이레의 끝을 오직 먼 미래의 민족적 회복에 묶어 놓으면, 이미 오신 희년의 주님을 지나치게 된다.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요한에게까지 이르렀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 순서를 분명하게 한다(마 11:13).
그렇다면 ‘네 백성’과 ‘네 성’을 무시하자는 말인가? 아니다. 다니엘이 받은 예언은 실제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향해 주어졌다. 하지만 그 백성과 성을 통해 오실 분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이스라엘을 빼 버리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뒤로 미루지도 않는 것이 바른 순서다. 세대주의가 본문에 없는 긴 교회 시대를 예순아홉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넣었는지, 그 이유를 다음 질문에서 살펴보자.
4.마지막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와 제3성전의 시대로 보는 해석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다니엘서 9장 27절에는 한 이레 동안 언약을 굳게 하고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세대주의는 이 ‘그’를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敵基督, antichrist)로 해석한다. 예순아홉 이레 뒤에 교회 시대라는 긴 간격을 넣고, 남은 한 이레를 지구 역사의 마지막 칠 년으로 옮긴다. 그때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다가 삼 년 반이 지나 본색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한 이레가 곧 ‘칠 년 대환난’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 해석을 밀고 나가면 다음 단계도 필요해진다.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하려면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제3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적그리스도가 성전을 세워 유대인에게 메시아인 듯 보이다가, 이레의 절반에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제사를 막으며 짐승의 표를 강요한다는 시간표가 만들어진다. 박해를 통과한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이어 지상의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9장 27절을 읽으며 필자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는 번역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금지한다고 읽으면 미래의 적그리스도가 성전의 제사를 강제로 중단시키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필자는 제사와 예물이 그치게 되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제사의 완성과 연결하여 읽는다. 단어 하나가 뒤이어 세우는 성전과 환난의 시간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한 제사를 이루셨는데, 옛 제사를 다시 드려야 종말의 계획이 완성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시간표를 설명할 때 데살로니가후서 2장도 다니엘서 9장과 이어 붙인다. 바울은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며, 그가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내세운다고 했다(살후 2:3-4). 세대주의는 그 불법의 사람을 다니엘서 마지막 한 이레의 ‘그’와 동일시하고, 그의 성전을 미래의 제3성전으로 정한다. 여러 구절이 이렇게 한 체계 속에 들어가면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구절들을 잇는 고리가 본문 자체의 말씀인지, 후대의 시간표인지 확인해야 한다.
살후 2:4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성경은 불법의 사람이 하나님이라 내세우는 일을 말한다. 그 사실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 전체를 그 사람의 협약 기간으로 놓고, 그것을 제3성전의 건축과 환난 전 교회 전체의 휴거까지 잇는 것은 세대주의의 해석이다. 필자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를 먼저 그리스도의 성취로 읽는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사를 완성하셨다면, 왜 다시 물질적 성전과 제사를 하나님의 마지막 경륜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가?
이스라엘의 절기를 끌어와 그 체계를 보강하기도 한다. 봄의 절기들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도 미래의 민족 이스라엘을 통해 완성된다고 한다. 이때 나팔절은 교회의 들림, 속죄일은 환난 중 이스라엘의 회개, 초막절은 지상 천년왕국으로 배열된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육적 이스라엘만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서도 말씀을 이루신다고 본다. 절기의 배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앞에 와서는 안 된다.
세대주의의 설명에서는 이스라엘이 환난 가운데 짐승의 표를 받으라는 강요와 박해를 겪는다. 그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만이 구원자임을 깨달아 회개하는 일이 속죄일의 성취가 되며, 이어 초막절의 성취로 지상의 천년왕국에 들어간다고 본다. 앞서 땅에서 떠난 교회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한 이레가 끝날 때까지 공중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 이처럼 절기와 마지막 한 이레와 두 백성의 분리가 한 묶음으로 움직이기에, 칠 년 환난 전 휴거설을 검토하려면 그 묶음의 시작인 다니엘서 9장의 해석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칠 년 대환난’이라는 정확한 기간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읽어도 그 숫자가 없고, 요한계시록을 읽어도 그 명칭 그대로 나오지 않는다. 다니엘서의 한 이레를 먼 미래의 칠 년으로 옮기고, 거기에 데살로니가후서와 요한계시록의 사건을 이어 붙여 얻은 것이다. 필자는 이를 성경에 쓰인 그대로의 문장과 구분한다. 성경이 성도의 들림을 말한다는 것과 모든 교회가 칠 년 환난 전에 올라간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다.
5.데살로니가전서 4장이 말하는 휴거와 부활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부터 18절은 주님 안에서 잠자는 자와 살아남은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살전 4:16-17). 끌어올린다는 동사는 ‘하르파조’로, 낚아채어 데려가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이 사건을 휴거라 부르는 것은 옳다. 필자는 휴거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바울이 ‘잠자는 자’라 한 사람들은 단지 잠든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두고 잠들었다고 하셨다가 그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죽은 성도들이다(요 11:11-14). 그래서 바울의 순서는 분명하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 죽은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성도도 변화되어 그들과 함께 끌어올려진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일과 산 자를 변화시키는 일은 부활의 사건에 속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변화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일어나는지 말한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변화되며,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산 사람도 변화된다(고전 15:51-52). 데살로니가전서의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가 끌어올려진다’는 순서와 함께 읽어야 한다. 어느 한 대목만 따로 떼어 칠 년 전의 날짜를 그 안에 써넣어서는 안 된다.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요한계시록 20장은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을 말한다(계 20:4-6). 필자는 최종 백보좌 심판을 위해 모든 죽은 자가 일어나는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 부르고, 그전에 일어나는 부활들을 첫째 부활에 속한 것으로 설명한다(계 20:11-15). 그러므로 지금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천국의 낙원으로 가는 개인적 부활과, 주님이 공중으로 강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이 함께 일어나는 단체적 부활을 구별한다. 그 뒤 지상 재림 때의 부활도 별도의 단체적 사건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라는 이름만 보고 모든 사건을 한 시각에 밀어 넣지 말아야 한다.
사망도 둘을 구분하여 설명했다. 첫째 사망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며,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를 둘째 사망이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말한다(계 20:6).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사건을 분별할 때 이 사망의 차이까지 함께 살펴야, 몸이 죽는 일과 최종 심판 뒤의 영원한 운명을 혼동하지 않게 된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금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은 부활체를 입고 천국의 한편인 낙원으로 간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고, 이 땅에서 맡은 사명과 행한 일에 따라 상급과 책망을 받는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행위책에 남아 있다면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살아 있을 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라고 권한다. 이 부분은 바울의 짧은 휴거 구절 안에 모두 적힌 내용이 아니라 필자가 영적 체험과 목회에서 전해 온 설명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무렵 죽는 성도는 왜 ‘먼저 일어난다’고 했는가? 필자는 그때 주님이 낙원이 아니라 공중으로 강림하여 성도를 모으시므로, 그 무렵 죽은 사람의 심판을 잠시 유보하고 그를 머물게 하셨다가 먼저 일으키시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어 살아남은 성도도 변화되어 주님을 맞는다. 개인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부활과 재림 때의 단체적 부활을 이와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두 경우를 섞으면 바울이 굳이 ‘죽은 자들이 먼저’라고 한 순서를 놓치게 된다.
6.주님의 공중 강림 때 누가 데려감을 당하며, 알곡 추수와 나팔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대주의의 환난 전 휴거설은 교회의 모든 지체가 빠짐없이 올라간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므로 일부는 들림받고 일부는 땅에 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소개한 『세대적 진리』에도 거듭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므로 몸이 나뉠 수 없다는 논리가 제시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사람이 밭에 있을 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셨다. 두 여자가 맷돌질할 때도 그렇다(마 24:40-41). 몸의 하나 됨을 내세워 주님의 경고를 지워서는 안 된다.
마 24: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누가복음은 밤에 한자리에 누워 있을 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남겨지는 장면도 전한다(눅 17:34). 한 지역이 낮일 때 지구 반대편은 밤이다. 어느 나라의 시계로만 주님의 오심을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주님이 오시는 날과 시각은 우리가 정할 수 없다. 예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날짜를 맞추라는 말이 아니라, 갑자기 오실 때 준비된 모습으로 서 있으라는 말씀이다(마 24:36, 42-44).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흰 구름 위에 인자 같은 이가 앉아 있고, 손에는 예리한 낫이 들려 있다. 천사가 땅의 곡식이 익었으니 거둘 때가 되었다고 외치자,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고 곡식이 거두어진다(계 14:14-16). 필자는 이것을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때 익은 곡식, 곧 알곡을 거두시는 장면으로 읽는다. 모든 곡식을 상태와 관계없이 한꺼번에 가져가는 그림이 아니다.
계 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마태복음 24장도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은다고 한다(마 24:30-31). 데살로니가전서의 하나님의 나팔,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나팔, 마태복음의 큰 나팔을 함께 읽으면, 들림은 주님을 맞을 사람을 모으는 사건으로 보인다. 필자는 일곱 나팔이 울리는 과정 뒤에 주님이 공중으로 강림하시고, 요한계시록 14장의 알곡 추수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나팔과 추수, 천사의 모음을 서로 떨어진 장식으로 보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와 천사의 장면도 이 흐름 속에서 읽는다. 일곱 나팔이 울리는 동안 주님께서 공중으로 강림하실 준비를 하시고, 작은 두루마리와 관련된 사명을 천사에게 넘기신 뒤 구름 위에 나타나 알곡을 거두신다(계 10:1-11; 14:14-16). 그러므로 나팔을 듣는다는 말은 막연히 하늘을 바라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권면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모인 알곡은 곧이어 있을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에 참여할 주님의 전사들이다. 혼인잔치를 위해 모든 교인을 예외 없이 먼저 데려간다는 세대주의의 설명과 다른 까닭이다. 주님 곁에 설 사람이라면 지금 충성되고 정결(淨潔)해야 한다. 지은 죄를 회개하여 악한 영이 떠날 근거를 만들고 그 영들을 내보내야 한다. 전쟁에 나갈 사람 안에 원수의 첩자가 가득하다면 어떻게 그를 주님 곁에 세우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신앙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남겨진 모든 사람이 곧바로 멸망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공중 강림 때 알곡으로 선택되지 못한 성도도 남은 기간에 믿음을 지키고 주님께 나아올 수 있다. 지상 재림 때 불신자와 남겨진 신자들의 부활이 함께 일어날 것으로 추측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깨어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와, 들림의 장면에 선택과 남겨짐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7.환난 전 휴거설을 분별하는 성도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환난 전 휴거설에서 가장 염려하는 것은 성도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겨 회개와 인내를 미루는 일이다. ‘나는 교회에 속했으니 칠 년 환난이 오기 전에 반드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남겨질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난이 왔는데도 자신이 땅에 남아 있다면 얼마나 크게 흔들리겠는가? 반대로 어려운 때에도 믿음을 지킬 준비를 해 왔다면 주님이 언제 데려가시든 말씀을 붙들 수 있다. 바로 이 차이를 지금의 신앙에 적용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를 보라. 모두 신랑을 기다렸고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말은 달랐다(마 25:1-13). 밖으로 보이는 신앙의 모양만으로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들림을 읽는 성도는 ‘휴거가 있다’는 말에서 멈추지 말고 ‘그날 내가 준비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주님이 갑자기 오실 것을 안다면 오늘의 회개를 내일로 미룰 수 없다.
회개는 단지 종말의 한 사건에 끼기 위한 형식이 아니다. 회개를 거듭 권하는 까닭은 죄를 자백할 때 행위책에 기록된 죄가 지워지고, 악한 영이 떠날 근거가 생기며, 성도가 정결해져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섭섭한 마음 하나 때문에 말씀에서 멀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듣고 죄를 돌이키며, 환난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믿음을 길러야 한다.
그렇다고 세대주의를 따르는 사람을 모두 이단이라 부를 일은 아니다. 정동수 목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다면 형제다. 킹제임스 성경을 높이 평가하고 스코필드 계열의 세대주의 해석을 따른다 해도,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정죄할 이유는 없다. 해석의 차이는 성경을 펴서 검토하고, 사람은 형제로 대해야 한다. 다른 해석을 배웠다는 이유로 서로를 끊어 내는 태도 또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니다.
필자 자신도 독자에게 ‘무조건 필자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칠 년이라는 숫자가 있는지 찾아보고, 마태복음 24장의 데려감과 남겨짐을 지우지 말고, 요한계시록 14장의 익은 곡식을 확인하기 바란다. 부활과 공중의 영접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 위에 붙인 모든 시간표는 본문과 대조해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환난 전 휴거설의 근거 가운데 첫째를 다루었으며, 나머지 근거와 성경적 휴거의 문제는 다음 시간에 이어 살펴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자신 안의 악한 영을 내보내며, 맡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 주님이 알곡을 거두시는 날 나팔소리를 듣고 그분 곁에 설 수 있도록 오늘 믿음을 지켜야 한다. 이 권면은 어느 종말론 도표를 이기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그날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할 성도가 되는 데 목적이 있다.
8.나오며
환난 전 휴거설이 나온 세대주의의 일곱 시대와 두 백성의 구분,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 해석, 데살로니가전서의 부활과 들림, 예수님의 데려감과 남겨짐을 살펴보았다. 성도의 휴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교회가 칠 년 환난 전에 빠짐없이 올라간다’는 주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니엘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에서 읽어야 하며,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는 익은 알곡이 모인다.
그러므로 성도는 익숙한 교리의 안경을 벗고 성경의 말씀과 사건 순서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남겨질 가능성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오늘 회개하며 믿음을 지켜야 한다. 동시에 다른 종말론을 배웠다는 이유로 형제를 정죄하지 말고, 함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 깨어 준비한 알곡으로 응답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8일(월)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