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2(수) 수요기도회
제목: [레위기강해(15)] 성결법(02)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덕적 생활윤리규범(02) 십계명 준수와 특별규례(레위기19:1~20:2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Kw5XwHQKP9s
레위기강해 15
성결법(02)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덕적 생활윤리규범(02)
- 십계명 준수와 특별규례 -
(레위기 19:1-20:27)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원문 영상: https://youtu.be/Kw5XwHQKP9s
1. 들어가며
레위기는 과연 어떤 책인가? 단순히 옛 이스라엘의 제사 절차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그것보다 훨씬 높고 깊다. 왜냐하면 제사로 속죄받고 물과 피로써 정결하게 된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성결의 책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성막을 세우는 것으로 끝난다(출 40:1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목적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세우고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성막은 오늘날 교회를 예표한다(고전 3: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도 혼자 구원받았다고 만족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게 하려는 것이다(고전 3:17).
교회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 찬양하고 성가대로 섬기는 사람, 안내하고 차량을 운행하는 사람, 음식을 만들고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하다. 성도는 서로 섬기고 도움을 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때에 천국 집에 재료가 쌓인다.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은 섬길 대상과 공동체의 훈련을 잃게 하므로 위험한 생각이다. 교회로 모이는 것 자체가 목적의 전부는 아니지만, 성도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독선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사랑과 충성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친목 모임과 다른 까닭은 바로 '거룩함'에 있다. 만약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과 욕망을 따라간다면 세상의 모임과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은 교회가 자신처럼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믿을 때에 경험하는 속죄(贖罪, atonement)와 칭의(稱義, justification)는 신앙의 시작인 것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고 더러움을 씻어 주시는 까닭은 주님과 합한 거룩한 신부로 세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교회를 통하여 이루려는 거룩함이 무엇이며, 속죄와 정결과 성결은 어떻게 연결되고, 십계명과 특별 규례를 오늘의 삶에서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성막과 교회를 세우셨는가?
출애굽의 목적은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데에 있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서 성막이 완성되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출 40:33-35). 애굽의 억압에서 풀려난 백성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목적을 명확하게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룩하게 함을 받으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레 22:31-33).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하나님의 속성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사람이 더럽다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다. 마귀의 속성을 붙든 사람은 결국 마귀가 가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예수 믿게 하신 목적은 죄를 덮어 준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목적은 교회의 의미와도 직결된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름만 올리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하며 거룩함을 훈련하는 공동체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섬기며 자기중심성을 깨뜨린다. 찬양과 안내와 교육과 식사 봉사와 차량 운행 같은 작은 수고도 하나님 앞에 다 보고되고 또한 자신의 행위책에 기록된다. 교회 공동체를 무시하고 혼자서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섬기며 어떻게 충성을 배울 것인지 어럽게 된다.
고로 교회 생활은 천국의 지위와 상급을 준비하는 귀한 시간이 된다. 천국에서 예배드리는 자리와 주님과의 가까움은 이 땅에서 얼마나 정결하고 충성되게 살았는가와 고스란히 연결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간절히 회개하고 맡은 바 사역에 충성해야만이 한 칸이라도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다. 구원받았으니 교회에 나올 필요도, 물질과 시간을 드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기회를 스스로 버리게 된다.
만약 십일조와 헌신이 아까워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탐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구원하시고 천국에서 아름다운 지위와 상을 주실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더 받을 것인가보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억지로 재물을 빼앗는 분이 결코 아니다.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를 늘 생각하고 또한 기쁨으로 드린다.
출애굽과 성막, 교회와 섬김은 모두 거룩함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한다. 하나님은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거룩한 백성을 세워야 한다.
3. 속죄·정결·성결은 거룩함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가 레위기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한다는 우리는 구원의 목적을 분명히 알게 된다. 레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레위기 1장부터 10장까지는 주로 제사를 '속죄법'을 다루고, 11장부터 17장까지는 '정결법'을 다루며, 18장부터 27장까지는 '성결법'을 다룬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피를 통한 속죄가 필요하고, 부정한 것에 접촉하거나 섭취하여 더러워진 사람에게는 씻음과 정결이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다시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결의 삶이 필요하다.
'속죄'는 죄의 값을 해결하는 일이며, '정결'은 더러움을 씻는 일이다. 그렇다면 성결은 어떤 것인가? 성결(聖潔, holiness)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러움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킨다. 고로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계속 죄를 사랑하거나 짓고 있다면 그는 속죄의 목적을 상실하고 만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는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죄에서 떠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려고 구원하신 것이다.
고로 레위기 19장은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에 이어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거룩함은 흰옷을 입거나 외형을 특별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주께서 재림하신다고 믿으며 흰옷을 입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임박한 종말론을 믿고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영혼을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영적인 흰옷은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씻는 삶과 연결된다(레 19:2-4).
한편,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믿음과 칭의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운 공로를 감사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교리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아 속죄가 구원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출애굽과 레위기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불러내셨다고 증언한다(출 19:23, 레 11:25, 19:2, 20:26). 이신칭의를 고백하면서도 음란과 탐욕과 미움 속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목적을 놓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날마다 외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거룩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주님 곁에 가까이 서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주님이 거룩하시므로 그분 가까이 있을 사람도 정결하고 충성된 사람이어야 한다. 고로 우리의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참으로 회개하고 거룩함을 이루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 아니할 수 없다.
레위기 22장은 거룩하게 되려면 계명을 지켜 행하라고 말한다(레 22:31-33). 죄를 짓고 난 뒤 속죄 제사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럽혀졌다면 속죄하고 씻어야 하지만, 그 뒤에는 더 이상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삶이 뒤따라와야 한다. 성결은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생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죄'(레 1-10장)와 '정결'(레 11-17장)과 '성결'(레 18-27장)은 서로 경쟁하는 교리가 아니다. '속죄'가 죄의 값을 해결하고 '정결'이 더러움을 씻는다면, '성결'은 구원받고 깨끗해진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단계다. 이 셋을 분리하면 한쪽에서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은혜를 죄의 구실로 바꾸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할 뿐 아니라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4. 레위기 19장은 십계명을 어떻게 생활윤리로 풀어 주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십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먼저 밝히시고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구원이 먼저이고 계명은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법도에 주어진 것이다(출 20:1-3).
그런데 레위기 19장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일상의 윤리로 풀어 주는 말씀이다.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헛된 것들에게 향하지 말고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는 명령에서 나타난다(레 19:4). 그리고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여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설명된다(레 19:12, 22:32).
넷째 계명인 안식일 준수는 부모를 경외하라는 다섯째 계명과 함께 나온다(레 19:3). 하나님은 다시 성소를 귀히 여기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다(레 19:30). 거룩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과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서 함께 드러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모를 멸시할 수 없고, 세상일만 좇으면서 영혼을 위한 시간을 전혀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째 계명은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된다(레 19:16). 사람을 비방하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의 뿌리를 품는 일이다. 일곱째 계명으로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레20:10)은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는 명령과 정혼한 여종과 동침한 경우의 규례에서 구체화된다(레 18:20, 19:20). 우리 주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까지 마음의 간음이라고 밝히셨다(마 5:27-28).
여덟째와 아홉째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고 속이지 말며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나타난다(레 19:11). 열째 계명은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고 원수를 갚지 않으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과 연결된다(레 19:18). 그런데 탐심은 우상숭배에 해당하므로 마음에 세상 욕심을 가득 품은 사람도 십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골 3:5).
그러므로 십계명은 구약의 낡은 규칙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더라도 미워하면 살인의 죄를 저지른 것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며, 탐심을 붙들면 우상숭배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셨으니 자신은 어떤 계명일지라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교회 안에 음란과 거짓과 탐욕이 가득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또한 교회 직분자가 되었지만 맨날 직장과 사회에서 부정한 행동을 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 나와 경건한 사람처럼 기도한다면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십계명들 중에서도 안식일 준수 계명(제4계명)은 도덕법과 의식법의 성격을 함께 지닌 독특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안식일에는 노동을 멈추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음식을 사 먹지 말라고 하는 문장 자체가 계명의 핵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은 있었지만 음식을 먹었다고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민 15:32-36).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옳다고 가르치셨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막 2:27-28, 3:4).
오늘날 성도가 토요일의 의식 규정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주일에 예배드리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안식일을 주신 도덕적 목적을 붙들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과 자유를 얻고, 일주일에 하루는 세상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마 11:28-29). 육체가 음식을 먹어야 살듯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 엿새 동안 삶을 위하여 일하되 하루는 영혼을 살리는 날로 구별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 의도이기에, 오늘날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하면서 예배를 드린다.
사실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율법에는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이 함께 있다고 정의한다. 전통적으로 볼 때, '하라'고 하는 명령을 248개로 분류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365개로 분류하여, 모두 613개라고 말한다. 특히 율법의 규례들 가운데, 레위기 18장은 이방 풍속과 음행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 금지를 강조하고 있고, 레위기 19장은 십계명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생활을 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피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사랑과 정직과 예배를 실제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5. 성도는 죄의 세력을 이기고 실제로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계명이 거룩한 삶의 기준이라 해도 인간의 힘만으로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기는 어렵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계속 사람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요일 2:16). 바울도 선을 행하려는 원함은 있으나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문제를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고 불렀다(롬 7:18-20).
내 속에 거하는 죄를 깊이 살펴보면 사실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들어와 정욕과 혈기와 탐심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로 내 속에 들어있는 뱀들과 귀신들이 낱낱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날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뿐만 아니라 수 백 수 천 개의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된다. 악한 영을 그대로 둔 채 좋은 말씀만 계속 먹는 것은 몸에 붙은 거머리를 떼지 않고 보약만 먹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영양이 들어올수록 거머리만 더 힘을 얻을 뿐이다.
필자도 오랫동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는 말씀을 붙들고 화를 내지 않으려고 훈련했다. 겉으로는 거의 화를 내지 않았지만 혈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경이 맞으면 터질 시한폭탄처럼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 년 전부터 회개기도를 하며 속에 있는 악한 영을 내보내기 시작한 뒤,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있는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십계명을 지키는 일이 이전보다 더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방향이 함께 필요하다. 먼저 회개하여 더러운 영을 내보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힘써야 한다. 악한 영을 내보내지 않고 의지만으로 계명을 지키려 하면 실패가 반복되기 쉽다. 반대로 악한 영만 꾸짖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거룩한 성품이 세워지지 않는다. 회개와 순종이 함께 가야 한다.
구약은 주로 속죄와 정결과 계명 준수를 가르치지만,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사람에게서 나가게 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막 1:25-27, 눅 10:17-20).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단지 습관이나 성격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도 대적해야 한다.
그렇다고 율법 조항을 문자적으로 과도하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과거 보수적인 신앙에서는 주일에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 먹는 행위 자체를 안식일 위반으로 정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목적이 사람을 살리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막 3:4, 눅 6:9). 규정의 외형만 붙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깨닫고 영혼을 살려야 한다.
'성결'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완벽해졌다고 자랑하는 상태가 결코 아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악한 영을 내보내며 성령을 의지하여 계명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나타는 열매다. 실패했을 때에는 속죄의 은혜로 돌아가 다시 씻고, 같은 죄의 통로를 끊으며,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칭의로 시작된 구원은 실제적인 거룩함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6. 몰렉·점술·제사·음행을 금하신 이유와 심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에게 가나안과 애굽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레 18:3). 그것들 가운데 가나안 풍속의 대표적인 죄는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일이었다. 몰렉 우상을 불로 달군 뒤 살아 있는 아이를 그 팔 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우상에게 승리를 구하기 위하여 생명을 희생시키는 극악한 죄였다(레 18:21). 하나님은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자를 반드시 죽이고 백성 중에서 끊으라고 명령하셨다(레 20:2-3).
그렇다면 애굽의 풍속이란 무엇인가? 애굽의 풍속과 연결되어 있는 죄에는 점술과 주술과 신접 행위가 있었다. 하나님은 점을 치거나 술법을 행하지 말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다(레 19:26, 31). 자녀를 불 가운데 지나게 하는 자,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한 자와 초혼자를 용납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신 18:10-11). 무당을 살려 두지 말고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자를 멸하라는 말씀도 있다(출 22:18-20).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무속과 불교와 조상 제사의 영향을 받아 살아왔다. 특히 조신시대에 활성화되었던 조상 제사 제도는 효도와 결합되어 모든 가정이 거부하기 어려운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제사를 받으러 오는 존재는 죽었던 자기의 조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그 사람의 조상의 모습을 흉내 내고 오는 것이다.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르며 절하는 의식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귀와 신을 부르고 섬기는 통로가 된다. 국화를 바치는 행위도 제사의 향을 대신하는 의식에서 나왔으므로 성도는 그 영적인 의미를 분별하고 금해야 한다.
필자의 가문에도 나라에서 삼강문을 만들어 주어 해마다 그곳에서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 예수 믿기 전에 그곳에 들어갔을 때에는 언제나 차가운 기운과 두려움을 많이 느꼈다. 거기에는 조상을 가장한 엄청난 영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경우 조상신을 섬기는 의식이 가문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짜 신을 버리고 참 신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다면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신을 찾아가 그에게 묻거나 점술과 제사의식을 행해서는 아니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묻고 그분만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우상숭배는 역시 한일합방 후에 실행된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이다. 그때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굴복했다. 그런데 그때에도 주기철 목사와 일부 목회자는 목숨을 걸고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해방 뒤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가결했으나 자기 합리화로 유야무야된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가볍게 여기면 나라와 교회가 징계를 받는다. 그래서 해방 후에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오늘의 교회도 다른 신과 타협하지 않고 구약의 여호와이시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한 분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뿐 아니라 '음행'도 엄중히 금하셨다. 레위기 18장과 20장은 간음, 근친상간, 월경 중인 여인과의 동침, 동성 간 성행위, 짐승과의 성행위를 금하고 있다(레 18:6-23, 20:10-21). 간음한 자와 근친상간한 자에게 죽음과 끊어짐의 형벌을 선고하신 것은 성적인 죄가 개인의 쾌락으로 끝나지 않고 가정과 공동체와 후손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것들 중에 '근친상간'은 열성 유전자를 겹치게 하여 후손에게 심각한 유전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을 높인다. 지적 장애, 백색증, 다지증과 합지증, 색맹과 조로증 같은 사례가 나타난다. 이를 통하여 근친상간이 후손에게 미치는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적 사례를 모든 환자의 원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되지만, 가까운 혈족 간 출산이 유전 질환의 위험을 높인다는 경고는 분명하다.
그리고 '동성 간 성행위'는 구약에서만 금지된 것이 아니다(레 18:22, 20:13). 바울은 여자와 남자가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를 따르는 행위를 부끄러운 욕심이라로 설명했다(롬 1:26-27). 교회는 사회적 비난이나 법적 압력을 두려워하여 성경이 죄라고 한 것을 죄가 아니라고 바꾸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사람을 미워하거나 조롱하는 방식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길을 전해야 한다.
나라가 악한 풍속과 성적 타락을 법과 문화로 보호하면 영적인 어둠이 깊어진다. 공산주의적 통제나 권력 집중을 막고 자유로운 신앙과 양심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거리의 구호만으로 나라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먼저 우상숭배와 음행과 탐욕을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려야 한다. 회개 복음이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출발점이다.
7. 노인·약자 보호와 혼합·과목 규례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성결법은 하라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특별 규례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부모와 노인을 공경하고, 가난한 자와 장애인을 돌보며,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땅과 사람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러한 특별 규례는 거룩함이 예배당 안의 경건한 모습이 아니라 약한 이웃과 피조물을 대하는 생활윤리인 것을 보여 준다.
첫째, 부모를 경외하고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레 19:3, 32, 20:9). 하나님은 늙고 약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늙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무가치하게 취급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백발 앞에서 일어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한다.
둘째,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장애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곡식을 거둘 때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과 포도 열매를 남겨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먹게 해야 했다(레 19:9-10). 보아스가 룻을 위하여 이삭을 일부러 흘려 두게 한 것도 이 규례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룻 2:15-16).
품꾼의 삯을 미루거나 이웃을 착취해서도 안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뒤에서 저주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 장애물을 놓는 일은 약점을 악용하는 잔인한 죄다. 하나님은 장애인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속이는 행동까지 보고 계신다(레 19:13-14).
이스라엘도 한때 애굽에서 종과 나그네로 살았다. 자신이 약했을 때 도움받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약한 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도 병들고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 낯선 환경에 들어온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가장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셋째, 서로 다른 종류를 함부로 섞지 말아야 한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거나 한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거나 두 재료로 짠 옷을 입지 말라는 규례가 있다(레 19:1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종류와 경계를 존중하라는 원리를 보여 준다.
영적으로도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어 신앙을 타협하면 양쪽이 함께 더러워질 수 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가 될 수 없다(고후 6:14-18). 성도는 무당과 점술과 다른 신앙을 섞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겨야 한다. 일편단심으로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하신다.
넷째, 파괴된 땅도 조금 안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게서는 가나안 땅에 과목을 심으면 처음 삼 년 동안 그 열매를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고, 넷째 해의 열매는 여호와께 드리며, 다섯째 해부터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레 19:23-25). 곡식이 아니라 과목에 주신 규례이므로 당장 굶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더럽혀져 사람을 토해 낸 땅이 새 백성을 받아들이며 회복할 시간을 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기다림의 원리는 사람을 세우는 일에도 적용된다. 새 가족이 교회에 들어오면 과거의 상처와 습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실수하더라도 정죄하여 내쫓지 말고 적응하고 자랄 시간을 주어야 한다. 필자도 성도의 잘못을 알면서 즉시 공개하거나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한다.
교회가 연약한 사람을 견디지 못하고 규칙만 들이대면 상처를 더하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되 사람이 회개하고 이해하고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새 땅이 쉼을 얻고 과목이 열매 맺을 때를 기다리듯, 성도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8. 거룩한 교회는 연약한 성도와 나라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거룩한 교회는 십계명을 입으로만 가르치는 공동체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만들지 않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예배의 날을 구별해야 한다. 부모와 노인을 공경하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음욕을 품지 않으며, 도둑질과 거짓과 탐심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생활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도덕적 거룩함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사람을 무자비하게 내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이삭을 남겨 두고, 품꾼의 삯을 제때 주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새로 들어온 성도가 실수할 때에도 그가 말씀에 적응하고 상처가 아물도록 기다려야 한다. 거룩함과 자비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성도의 죄를 안다고 해서 함부로 공개하거나 수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진리를 가르치고 필요한 권면을 하되, 성령께서 그 사람을 깨닫게 하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성도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곧바로 공동체를 떠나거나 목회자가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 비난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말씀 안에 머물면 어느 날 이해하고 변화될 수 있다.
나라를 세우는 일도 교회의 회개에서 시작된다. 우리 역사는 무속과 제사와 신사참배를 통하여 다른 신을 섬긴 죄가 깊었다. 해방 뒤에도 교회가 우상숭배의 죄를 충분히 회개하지 않고 자기 의를 주장한 부분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성적 타락과 탐욕과 권력 숭배가 나라를 어둡게 한다. 교회가 먼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고 긍휼을 베푸신다.
자유와 삼권분립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행동만으로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악한 통치자를 허락하실 수 있으므로, 성도는 나라를 비난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자신과 교회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회개한 교회가 진리를 말하고 약자를 돌보며 정직하게 살 때 나라를 살리는 빛이 된다.
거룩한 교회는 다른 신앙과 진리를 섞지 않는다. 무당과 점술과 조상 제사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겨야 한다. 동시에 교회 안의 연약한 사람을 품고 기다리며,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과 노인을 돌보고,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 십계명의 생활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진리에 대한 단호함과 사람을 향한 오래 참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성도 개인도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미움과 음욕과 탐심을 회개하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다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실제로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일하고, 예배를 지켜야 한다. 말로만 거룩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구별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거룩함을 회복하면 세상 모임과 분명히 달라진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상처 입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약자를 돌보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회개한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성막을 통하여 세우고자 하신 거룩한 공동체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성막과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신 목적과 속죄·정결·성결의 관계, 십계명 준수와 특별 규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는 데서 일을 끝내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다. 속죄는 죄의 값을 해결하고 정결은 더러움을 씻으며, 성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삶이다.
레위기 19장은 십계명을 부모 공경과 안식일 준수, 우상 금지, 정직과 이웃 사랑이라는 생활윤리로 풀어 준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고백에 머물지 않고 미움과 음욕과 탐심을 버리며 계명을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지만 의지하지 말고 회개하여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내보내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몰렉 숭배와 점술과 조상 제사와 음행을 엄중히 금하신다. 교회와 나라는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먼저 회개해야 한다. 동시에 부모와 노인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와 장애인을 돌보며, 창조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거룩함은 죄와 타협하지 않는 일과 약한 사람을 자비롭게 돌보는 일을 함께 포함한다.
새로운 땅과 과목에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듯 새로 믿은 성도에게도 적응하고 자랄 시간이 필요하다. 교회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지만 실수한 사람을 즉시 정죄하여 버려서도 안 된다.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며 기도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하여 십계명을 지키고 약자를 돌보며, 회개와 오래 참음으로 교회와 나라를 거룩하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22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레위기 19장에서 20장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성결법과 도덕적 윤리 규범을 강해하며, 구원의 목적이 단순한 죄 사함을 넘어 거룩한 삶의 실천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출애굽의 본질을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거룩함으로 정의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십계명 준수와 이방 풍속인 우상숭배 및 음행의 금지를 강조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은 혼자가 아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섬김을 통해 완성되며, 내면의 악한 영을 몰아내는 회개가 동반될 때 비로소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설교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이신칭의의 교리에만 머물지 말고, 약자를 배려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 진정한 성결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목적을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