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맨
나중에 쓰여진 성경책으로 알려져 있다(A.D.95~96). 그때는 이미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적어도 60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것은 지상에 계셨던 그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사도요한이 본 것은 이제는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원래
그분이 가진 신성한 영역을 전부 다 소유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본 예수님은 지상의 예수님하고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지상에 계실 때의 예수님은 인자하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어쩌면 형님같이 자상하신 모습이었다. 하지만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의 모습은 위엄이 가득했고 그분의 목소리는 권위가 가득했다(계1:13~16). 그러니 그분을 뵙자마자
그는 엎드려야 했다.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계1:17).
그렇다면 그렇게 자상하시고
친구가 되어주셨던 그 예수님을 우리는 이제 영영 뵐 수 없다는 말인가? 아마 그럴 것 같다. 천상의 예수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오실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상의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7b~18a).
여기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분명 천상의 예수님은
형님같은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다. 아니 하나님 자신 바로 그 자체이셨던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이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겸손히
낮추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그분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러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표현했다고 해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보다 못한 분이실까? 그래서 하나님이 따로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따로 계시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그렇게
낮추신 것만을 가지고 그것이 누구신지에 대한 우리의 판단기준으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2가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조금 못하신 존재가
아닌가 하는 점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긴 하셨으나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처럼 사랑하신 것은 아니시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틀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이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주의깊게 살펴봄으로 알 수 있다. 천상의 예수님의 모습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주의깊게 들어보자. 당신도
구약의 증거와 예수님의 언급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이야말로 곧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이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사9:6,
요14:9).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요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요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을 요한계시록을 통해 그 증거들을
살펴보자.
첫째, 그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오직 성부 여호와 하나님만이 사용하시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셨으며,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자기선언과 같은 그러한 자기선언을 예수님께서도 그대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에고 에이미'방식이라 말한다. 말하자면 "나는~이다."라는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을 가리킨다(출3:14). 우리말
개역성경을 보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문에
의하면 그것은 "나는 ~이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그 부분을 "히브리어)나는 나다"라고 각주를 따로 달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당신을 표현하는 가장 합당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다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플 때에 그분은 "나는 치료의 하나님"이며, 내가 낙심하고 있을 때에는 그분은 "나는 위로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표현하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셨다.
예를 들어,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 "나는 포도나무다(요15: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또한 요한복음 8장에서는 출3:14에 나오는 성부하나님의 자기선언(에고 에이미)이 그대로 3번씩이나 연거푸
나온다(요8:24,28,58).
놀랍게도 이런 표현방식은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쓰던 방식과 그대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출3:14).
그런데 성부께서 요한계시록에서 당신을 정의하시고 있는 표현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다(계1:8)"을 예수님께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계22:12~13). 곧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주 하나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22:12-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예수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더군다나
요한계시록 1:8에서는 분명히 장차 오실 분이 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뒤에 가서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니(계3:11,22:12)"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둘째, 예수님의 모습과 그분의 음성이 여호와의 모습이나 음성과 똑같다. 예수님의
모습은 빛나는 흰 옷을 입으시고 머리털도 양털같이 하얀 분이시다(계1:14). 그런데 이보다 약 500년전이나 앞서 살았던 선지자의 눈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이와 똑같이 보였다(단7:9). 그리고 예수님의 목소리가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하였는데(계1:15),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도 똑같이 많은 물소리였다고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겔43:2). 다시 말해 천상의 예수님은 곧 성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계1:14 그(인자같은 이)의 머리와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단7: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여호와)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계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겔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셋째,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보좌는 오직 단수로 나올 뿐이다. 다시 말해 그 하나인 보좌인
하나님의 보좌이면서 예수님의 보좌인 것이다(계22:1,3).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으시면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요, 그분이 보좌에서 내려오시면 예수님으로 보여지는
것이다(계3:21).
계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로부터 나와서
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넷째, 이제 마지막으로 소아시아 일곱교회들에게 주신 말씀들을 살펴보자. 그 말씀들 전부에서
말을 시작하시는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 말씀이 끝나가는 싯점에서는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표현하신다(계2:7,11,17,29, 3:6,13,22). 다시 말해 보좌 앞에 일곱 영이신 성령님은 곧 온 세상을 감찰하는 불꽃같은
예수님의 눈이셨던 것이다(계1:4, 3:1, 5:6).
그렇다.
지각이 우둔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삼위의 방식으로 나타나시고 또 그렇게 일하셨다. 하지만 천국에서 만나뵈는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정병진목사(alletei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