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다. 시작은 호화찬란하게 시작했지만 끝은 그만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과 비슷한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잔치의 비유에 들어있다(마22:1~14). 마태복음 22장 14절을 보라. "청함은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최종적인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믿는 이는 천국을 이미 따놓은 당상처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의 시작일 뿐 결코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혼인잔치의
비유”(마22:1~14)는 A.D.33년경 예수께서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의 서두에 선포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여 성전정화를
하실 때에, 화가 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당신은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따진다. 그러자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들려주신 3가지 비유 가운데에서 세번째 비유가 바로 “혼인잔치의 비유”인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사실 2가지 비유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1절부터 10절까지가 첫 번째 비유이고,
11절부터 14절까지는 두 번째 비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1절에 보면, 비유들을 말씀하셨다고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혼인잔치의 첫 번째 비유(마22:1-10)를 보면, 어떤
왕이 혼인잔치를 베풀었는데 초대된 사람이 합당하지 않자, 왕은 그들을 심판해버린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모든 사람으로
확대해서 잔치에 참여케 했다는 것이 첫번째 비유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의 두 번째 비유(마22:11-14)는 누구든지 그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왕이 마련해준 예복을 주의하지 않는 자는 혼인잔치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생각해보라. 하도 잔치자리에 앉아만 있어 달라고 부탁해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면, 예복을 입든지 아니 입든지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까짓 예복 하나 입지 않았다고 자신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던져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는 왕이 지나친 처분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도 그냥 쉽게 되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왕은 왜 잔치의 초대자들의 제한을 철폐해 버렸을까? 그것은 먼저 초대된
고관대작들이, 그들에게만 베푼 왕의 호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왕의 잔치를 가볍게 여기고는 자기 일에
바쁘다고 오지 않거나 또한 보낸 종들마저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고관대작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그리고
그 성읍마저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잔치에 오기를 기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한을 없애버리신 것이다.
결국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 자들은
누구였는가? 최소한 그들은 신분상 고관대작들은 아니었다. 고관대작들은 이미 죽임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잔치에
참여했던 자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서민들이었을 것이며, 행상인이나 깡패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계층도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들이 나갔던 사거리는 왕이 살고 있는 도시 안쪽에 있는 사거리가 아니었다. 다른 마을로 들어가는 경계선에 위치한
도로였다. 그러므로 종들이 데려온 사람들 중에는 다른 마을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왕의 종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신실하게 부탁한다.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는 반드시 혼인잔치의 예복을 꼭 입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종들은 왕이
마련해 준 그 옷을 내주었다. 그렇다. 그 옷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부합되는 예복으로서 그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는
바로 그러한 옷이었다. 그러므로 그 옷만 입으면 그가 어떤 신분을 지녔든지, 어떤 계층에 속하든지 상관이 없다.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병든 자든지 건강한 자든지 상관 없다. 누구라도 그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옷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날 어떤 종이 일을 보러 지나가다가 그
옷을 받았다면 그도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그러한 자가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봐, 잔치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단코 그 예복을 벗어재끼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동네깡패가 그 옷을 입었다고
해보자. 깡패 자체의 신분만으로는 결단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자격을 철폐한 마당에 그 깡패도 주인이
내 준 옷만 입는다면 그도 또한 그 잔치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깡패는 그 옷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는 그 옷을 입기가 좀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록 깡패로 살아왔어도 왕까지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들어갈 때에는 받은 옷을 손에 꼭 쥐고 있었겠지만, 이내 그 옷을 던져버린다. 주인이 내어 준 예복을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누군지를 사람들에게 보게 하려면,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거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보여주며 의시대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자, 봐라. 내가 이래뵈도 왕이 불러주는 사람이야! 짜식아!"
하지만 잔치의 중간쯤이 되자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고 말았다. 주인이 그 잔치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때 들어온 왕은 잔치가 시작되기 전의 왕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전에는 잔치자리에 참여해준 것만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의 눈이 매섭기만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
왔는지를 조사하러 왔기 때문이다. 만약 잘못되면 그 잔치가 추한 잔치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잔치가 왕의 아들의 잔치의 격에
맞지 않는 잔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거지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채 그 자리에 우루루
앉아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그 잔치는 무슨 잔치가 되겠는가? 거지들의 잔치가 되고 말 것이다. 왕의 아들의 잔치가 거지들의 잔치로 변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왕은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추하게 만들지 않도록, 자신의 아들의 잔치를 더럽히지 않도록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왕의 눈에 그 옷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자, 보라. 과연 누가 그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자인가?
오직 고관대작들뿐이다. 하지만 고관대작들의 거만함과 불순종 때문에 왕은 잔치자리의 자격제한을 철폐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왕이 내어준 예복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 깡패같은 자였을 것이다. 그는 왕이 일부러라도 내 준 옷을 입지 않고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대로 잔치가 진행된다면 대체 그 잔치는 어떤 잔치가 되고 말겠는가? 깡패들의 잔치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사실 왕은 그 잔치가 더럽혀지거나 추해지지 않도록
비싼 돈을 들여서 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의 신분을 고위관직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옷을 마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옷을 내팽개쳐 버린
자가 있다면 그러한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마땅한가? 고이 내 보내는 것이 정상인가? 그 잔치를 능멸한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마땅한가? 당신이
그 왕이라면 자신의 아들의 잔치를 깡패의 잔치로 만들려는 자를 과연 가만 두는 것이 정상인가? 결국 그 사람은 왕의 수종자들에 의해 수족이
결박당 채 끌려 나가서, 어두운 감옥에 쳐넣어지고 말았다.
오늘날 이방인인 지금의
성도들은 누구인가? 고관대작들인가? 우리들 중에는 아무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다 하지 않았는가? 우리 이방인들은 원래부터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자격제한이 철폐되어서 그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자들이다. 아마 그때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격없는 우리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 잔치에 참여케 하기 위해서 비싼
댓가를 치르셨을 것이다. 그 아들을 대신 죽여 피값으로 만든 의의 옷을 손수 만드셨던 것이다(갈3:27,사61:10).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속죄의 옷, 의의 옷을 입고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이라도 그 옷을 벗어던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어떤 자이며, 어떤 죄를 지은 자인지가 적나나하게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조금 세상에서 놀았다고, 돈
좀 가지고 있다고, 세상적으로 명예를 좀 가지고 있다고, 교회 안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마련해준 옷을 입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 한다면,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를 가만히 두겠는가? 심판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천사들을 시켜 지옥에 곧장 떨어뜨려버릴 것이다(마3:12,
13:41~42).
믿음이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방인이었던 내가, 아니 죄인이었던 내가 어떻게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있을 수 없는 자였는데 여기에 있게 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 믿음이다. 내가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무엇을 붙들어야 할 지를 아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당신은 지금 과연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마련해준 그래서 우리의
죄악을 감추어주고 천한 신분도 감추어주는 의의 옷을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우리가 입던 자기 신분의 옷만을 입고 있는가? 이제까지 혹시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옷을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면, 이제는 당신 몸 가까이에 그 옷이 있는지 살펴보라. 아니 하나님이 마련해준 그 옷을
자신이 입고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자기 손에 쥐고 있는지 살펴보라. 혹 날씨가 더워서 옷을 벗어 놓았다 해도 그 옷만큼은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밖으로 쫓겨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의 소지품에 왕이 마련해준 옷이 있는지 지금
살펴보라.
정병진목사 (alletei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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