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클래스(Top Class)
성만찬의 의미, 최고의 신분을 지니셨지만 가장 낮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그분의 삶
2013.11.20
여러분은 탑 클래스(Top Class)가 받는 혜택을 받아보았는가? 공부에 있어서도, 재산에 있어서도, 권력에 있어서도 최고의 등급이 된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탑 클래스가 한 번 되어보라. 비행기를 탈 때에도, 골프장에 가서도, 은행에 가서도,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도 그 대우가 다르다. 왜 그런가? 재산과 권력과 그 무언가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별장을 한 두 개쯤 가지고 있거나 가끔씩 필드에 나가서 골프를 즐기는 것 그리고 여름휴가를 해외로 나가는 것 등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다. 혹시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VVIP카드를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카드사에서 발행하는 VVIP카드는 기본적으로 아이패드 내지는 아이폰을 선물로 그냥 준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부자들이 갖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급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꼭 같은 클래스의 사람들만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만 사돈을 맺는다. 그들이 모이는 사교장소에 가 보라. 들어가는 입구의 인테리어부터가 벌써 다르다. 그리고 한 접시에 수 만원을 호가하는 음식은 실로 눈으로 보기만 해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다.
이와는 반대로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 즉 '과시욕' 또한 실로 대단하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급인지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수 천 만원 혹은 수 억 원을 호가하는 악세사리를 주저없이 구입한다. 왜 그런가? "나는 니네들과 급이 다르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려고 그러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특징들은 많이 배운 자들에 있어서도 거의 똑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자신의 클래스와 맞는 사람들과만 만나기를 즐겨했을까? 그리고 은연 중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기적들을 마구 행하셨을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 천대받은 자들, 아프고 병들어 버려진 자들 곧 세리와 창녀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러면, 실제로 예수님의 클래스를 재본다면 어느 정도였을까?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사람이 아니신 분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원래 그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같은 클래스를 가지고 있으셨다. 그런데 정작 그분은 자신이 가진 권력과 능력과 신분을 드러내거나 그것을 과시하며 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최고의 탑 클래스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병들고 신음하고 소외받고 천대받는 자들을 종처럼 섬기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것이다.
A.D.55년경 사도바울이 개척했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거기에도 여전히 자신의 클래스를 자랑하려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드러내려고 묘한 수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과는 급수가 다르다는 것을 은연 중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로 인해 교회는 아파해야 했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들을 향해 강한 말로 경고했다. 음식으로 교회를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가 모두 다 똑같이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한 형제자매인데, 어찌 부자라고 자신은 가난한 자와 다르다고 표시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커다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어찌 이것이 그 때에만 주어진 경고였을까? 오늘날 자신이 사회적으로 드러낼 만한 신분이나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몸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클래스를 내려놓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가지고 다른 약한 지체들을 겸손히 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 예식의 근본정신을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린도교회의 부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부요함을 과시했던 것일까? 여러분은 그들의 외모를 살펴 보았는가? 지금 당신의 눈에 그들의 옷매무새와 악세사리가 보이는가? 그러한 것들도 분명 그들 자신이 부자인 것을 드러내는 데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자신을 드러내는데 사용한 방법은 바로 '음식'이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먼저는 말씀의 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나서 세례받은 자들만 남아 성만찬 예전의 예배를 드렸다. 특히 성만찬 예배를 마친 다음에는 공동으로 같이 모여 함께 식사를 했다. 각자가 싸 온 음식을 같이 나눠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성만찬을 집례하기 전에 자기가 집에서 싸 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성만찬이 끝난 다음에 모두 같이 애찬을 해야 했지만, 배가 고프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자신이 싸 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어버린 것이다. 그때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가난했기에 싸 온 음식이 없었다. 부자들이야 자신이 싸 온 음식이니 자기가 가지고 온 음식을 갖다먹는 데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가난한 자는 그들과는 달랐다. 가난한 자들은 그냥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부자들은 자신이 싸 온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이 정도쯤 되는 사람이야, 너희들과는 급이 달라"라며 은연 중 가난한 자를 속으로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의 식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염없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배에 나오기를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싸오지 못하니, 자신이 가난한 자요 궁핍한 자인 것이 더욱 더 드러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들도 부자들과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기에 그들 역시 성찬예배 즉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했다. 그러니 그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의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오늘 성만찬 예배 때에 무시당하지 않고 넘어갈 있을까를 염려했을 것이다. 말씀의 예배를 마치기만 하면 돌아갈 것이라고 수 백 번도 더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들은 고민이 없었을까?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말 못할 고민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징계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징계를 받고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이 싸 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인하여 교회를 가난한 자와 부자를 분열시킨 죄의 징계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한 몸인 교회를 어찌 음식을 통해 둘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가난한 자건 부자건 간에 둘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분량은 동일하거늘, 어찌 세상에서 좀 가졌다고, 아니 세상에서 좀 배웠다고 남들 위에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주님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자들의 최종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부자들은 알게 모르게 약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감당 못할 이름 모를 병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자들 중의 몇몇 자녀는 벌써 죽음을 맛보고 있었다. 오늘날 부자들, 재벌들, 권력가의 집안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불치의 병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는 비명횡사하든지 자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부자들 자신은 정작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이 교회 안에서 한 지체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대로 외부적인 문제 즉 먹는 음식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었고, 반면에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내부적인 문제 곧 자기자신과 자기의 자녀들의 약해짐과 질병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부자들을 향해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만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 교회를 다시 하나되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부자들이여, 제발 성만찬이 끝날 때까지 식사하지 말고 기다리라(고전11:33~34)." 바울은 말한다. "왜 먼저 자기의 음식을 갖다 먹으므로 인하여 스스로 징계를 자초하느냐?" "그렇게 하면,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자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른지는 몰라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서 부어버리는 징계를 받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왜 이러한 영적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이드냐?", "왜 음식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그렇게 자신의 심판을 자초한단 말이냐?"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레벨로 구분한다면, 과연 우리 중 누가 감히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겠는가? 아니 어찌 그분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식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누가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격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레벨을 기꺼이 낮추셨다. 아니 우리의 수준으로 맞추어 버리신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우리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서였다. 아니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배반하고 부인한 자들까지 용서해주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탑 클래스를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섬기는 데에 사용하신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잘난 티를 내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남을 섬기는 것이다. 나보다 약한 지체들을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다. 혹시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거나, 남보다 더 많이 배운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약한 자들을 섬기라는 주신 것임을 알라. 그런 삶이야말로 탑 클래스를 가진 자의 삶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자신의 어떠함을 자랑하지 말라. 주님 앞에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이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면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여 주변의 약한 지체들을 섬겨보라. 섬기되 오른 손이 하는 일이 왼 손이 모르게 섬겨보라.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성만찬을 행하도록 명령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한 몸된 교회를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