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과 선포의 강력한 효능(마4:1-11)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고 그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이다.
영계와 물질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권세는 과연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기도 많이하는 목회자나 세계적인 부흥사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도 나오는 것인가? 더불어 그러한 강력한 권세는 과연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가? 안수함으로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손을 휘저음으로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도함으로 사용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영계와 물질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권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질계와 영계를 향해 담대히 명령하고 선포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향해 명령하거나 선포하는 일은 오로지 신령한 목사님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과 같은 평신도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념하고 산다. 이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평신도도 명령하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나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 자신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흘러가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어느날 믿음도 굳세어지고 성품까지도 갖추어지게 될 때에 비로소 명령하거나 선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이러한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먼저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살펴보자. 먼저 예수게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 여기서는 예수님만 그 일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들이라면 누구라도 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이렇게 가르쳐주면, "목사님,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같은 사람은 어림도 없는 일이예요"라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댓구하려는 성도들을 위해, 승천하기 직전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며 새 방언들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그렇다. 믿는 자들이라면 예외없이 뱀들과 전갈들로 표현된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더욱이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탄마귀의 사망권세가 깨어진 이후에는 믿는 자라면 누구든지 귀신들의 대장인 사탄마귀도 대적할 수 있게 되었다. 야고보서 4장 7절의 말씀을 보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그렇지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로부터 도망가리라(약4:7/원문번역)"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사탄과 귀신들을 향해 명령하고 선포하는 일은 목회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성도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넋놓고 앉아 있으니, 마귀에게 당하고 있는 성도들이 오늘날 부지기수로 많지 않은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구약의 예표를 보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갔던 구원의 여정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 여정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여정과 똑같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까지 들어가는데, 그들은 약 3단계의 구원의 과정을 밟았다. 첫째로는 유월절날에 피의 강을 건넜다(출12:21~36). 애굽 경내에 있는 모든 장자들을 치는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살아남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집의 문설주와 좌우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은 서둘러서 애굽을 탈출했다. 그리고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바다인 홍해를 건넜다(출14:15~29). 이스라엘 백성이 이 홍해를 건넘으로 인하여 바뀐 것이 있다.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애굽백성이요 애굽의 노예였다. 하지만 홍해를 건넘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다. 해방받은 백성이 되었고 자유인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자기의 주인이자 지배자인 바로왕과 그의 군사들이 홍해에서 다 빠져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다(수3:7~17). 그들이 애굽에서 살던 삶의 방식을 모조리 광야에 묻어두고 새롭게 탄생하기 위하여 그들 모두는 요단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모든 믿는 사람들도 다 이 3단계의 구원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어린양의 피를 발라 장자죽음의 재앙을 면하게 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고전5:7, 요11:25~26). 이것을 "1차적인 구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의 구원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1차적인 구원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모든 성도들은 이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앞으로 더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두번째와 세번째 강을 건너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애굽의 바로왕과 그의 군대를 수장시키고 참된 자유인이 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은 죄로부터 구원은 받았으니 이제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그들을 물리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행26:18, 약4:7). 이것을 일컬어 "2차적인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간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자신의 육체의 욕심과 탐심을 벗어버림으로 비로서 몸의 부활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갈2:20). 이것을 일컬어 "3차적인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성도의 구원의 여정은 부활체의 몸을 입고 천국에 입성하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까지 이르지 못한 구원은 시작만 한 것 뿐이지 구원의 완성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원을 완성하기 원한다면 첫째, 어린양의 피의 효력을 믿어야 하며, 둘째, 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예수이름의 권세로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타락한 자신의 옛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서 육체의 본성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도들이 2차적인 구원의 단계와 3차적인 구원의 단계의 순서를 서로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성도들은 마귀와 귀신들을 물리치는 일보다 자신의 죄된 본성을 제거하는 일을 먼저 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순서다.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노정을 뒤집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그렇게 하지 말라. 만약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처리하는 일을 먼저 하고 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상대하려 한다면, 당신은 죽는 날까지 한 번도 마귀를 대적하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해야 할 지도 모른다. 타락한 본성은 우리 내면 안에 있고, 마귀와 그의 귀신들은 우리 밖에서 역사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자신의 육체 속에 거하는 타락한 본성을 다 이기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도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8~20,24)"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여정을 다시 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은 반나절이면 되는 일이었지만, 애굽에서 찌들어버린, 그들의 원망하고 불평하는 육신의 본성을 제거하는 일에는 무려 40년이 걸렸던 것이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육신을 벗을 때까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해야만 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서를 그것부터 잡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일보다 먼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사탄마귀와 귀신들을 대적하고 쫓아버리는 일이다. 이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예표적으로 보나 곧 언급할 예수님의 사역으로 보나 올바른 순서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경우를 보자. 예수님도 사탄마귀와 그의 악한 영들을 제어하는 일을 나중에 하셨겠는가 아니면 먼저 하셨겠는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탄원이다. 하지만 이 일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맨 마지막에 나온다. 예수님은 육체를 제어하는 일보다 사탄마귀를 대적하는 일을 먼저 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은 곧바로 광야로 가셔서 마귀와 싸우는 일을 먼저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순서는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치는 것이 먼저였고,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는 일은 나중이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구원의 순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그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 보자.
여기에 보면,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2가지였다. 예수님은 2가지 방법을 사용해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마4:4,7,10). 그때 마귀의 시험은 3가지였다. 하지만 모두 다 구약에 기록된 성경말씀들을 마귀에게 선포하심으로 그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두번째는 마귀더러 떠나갈 것을 명령하심으로 물리치셨다(마4:10).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마귀를 물리치신 것은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고 그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하심으로 성취하신 것이다.이러한 사실을 좀 더 살펴 보자면 이렇다. 첫번째 두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순종하도록 교묘히 말을 포장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것쯤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예수님도 그의 말에 넘어가게 만드는 교묘한 속임수였다. 예수님은 결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의 말을 듣는 즉시 그의 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16절에 보면, 영계의 법칙이 한 가지 나온다. 그것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영적 비밀들을 다 아시고 있었다. 그러므로 결코 마귀의 말을 들어주지 아니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돌을 떡덩이로 못만드신다거나 예루살렘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보호를 못받으실 리는 만무하다. 문제는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 "기록되었으되... 또 기록되었으되...기록되었으되"라는 선포였다는 사실이다. 마귀를 물리 칠 수 있는 첫번째 키워드는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말씀을 그의 귓가에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마귀로 하여금 떠나갈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만약 세번째 시험 때에도 예수께서 마귀더러 떠나갈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마귀는 아마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 것이다.
어떤 성도는 말한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그를 물리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가능한 것이지 사람인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마태복음 4장 1~11절의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 마귀를 대적한 적이 있으셨는가? 없었다. 예수님은 오직 이렇게 마귀에게 말했다.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시험받으실 때에 결코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해 마귀를 이기신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람의 신분으로서, 배가 고파서 돌맹이 하나 들 수 없는 약한 상태이셨지만, 그런 상태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마귀의 시험과 마귀와 귀신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너무나 자명하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면 된다. 예수께서 이미 믿는 우리에들에게 사탄마귀를 대적하고, 귀신들을 쫓아버릴 권세를 주셨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똑같이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고 떠나갈 것을 명령함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눅10:19, 막16:17~18).
사실 우리가 마귀나 귀신들보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명령이나 선포를 두려워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그들이 떠나가는 것이다(요일4:4).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예수께서 2천년전에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에 그들이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구원의 여정에서 마귀와 그의 귀신들을 물리치는 일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는 구원의 여정을 바로 잡아야 한다. 당신도 이제 시작해보라. 당신도 그들에게 기록된 말씀을 선포해보라.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떠나갈 것을 명령해보라. 그러면 그들이 우리의 명령과 선포에 순종하는 존재임을 당신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약4:7).
구약을 다시 한 번 보라. 단 한 사람도 마귀와 그 귀신들과 싸웠다거나 그들에게 명령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가? 단 한 군데도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 마귀와 싸워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이후 달라졌다. 예수께서 그들을 이기시고 얻어낸 권리가 이제는 우리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 놀랍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위임해준 그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면허를 따서 장롱 속에 넣어둔다면 어딘가를 빨리 가려할 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처음에는 좀 접촉사고가 나더라도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라. 그리고 맞딱뜨려 보라. 그렇게 몇 번 또 몇 번 하다보면 운전하는 것도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면 고속도로도 나가서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 거듭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취해내야 할 두번째 구원이다. 이 순서를 결코 바꾸지 말라. 당신도 예수님처럼 해보라. 그것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무장시켜 줄 것이다. 그러한 선포와 명령이 물질계를 움직이고 우리의 몸으로부터 질병을 떠나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가정의 우환과 사고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줄 것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예수이름의 권세를 마음껏 사용해보라. 그래야 체험이 생긴다. 체험이 생겨야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는 어느 때이든지 마귀와 귀신들을 향해 크게 선포할 때이다. 그리고 한 번 명령했으면 그들이 떠날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명령하라. 처음에는 100번 명령해야 이루어지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다보면 50번만 해도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 작은 경험들이 축적되면, 10번만 명령해도 이뤄지는 것을 당신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정작 나중에는 2번만 명령해도, 아니 예수님처럼 단 한 번만 명령해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을 꿈꾸라. 그리고 오늘부터 실천해보라. "내 몸과 내 가정에 질병을 가져다 주고, 우환과 사고를 가져다주는 이 더럽과 악한 귀신아, 이제는 내게서 떠나갈지어다. 내 몸과 가정에서 떠날지어다." "이 모든 영적인 일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탄 마귀야, 이제 너의 궤계가 다 천하에 다 드러났도다. 너는 이제 내게 아무런 권세가 없음을 선포하노라. 그러니 이제 내 모든 일에 손을 뗄지어다. 너희들의 모든 계획은 무효화되었음을 내가 너에게 선포하노라. 패배자여, 이제는 내게서 떠날지어다. 이제 내 생각에서까지 영원히 떠날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