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창조사학 특강 - 4. 고대 한민족의 신앙과 번영
https://blog.naver.com/cliok/220924399624
다음으로, 아사달에 정착한 고대의 한민족은 어떠한 신앙을 가졌으며,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위쪽 사진은 환웅천강도라는 중국에서 발견된 그림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를 중국인마저도 그대로 믿고 그려놓은 것이지요.
위 사진은 동방에 정착한 셈계의 장자의 백성들은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사달의 넓은 들판과 한반도에 퍼져 나가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나 임금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신앙이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규원사화 단군기라는 고대 역사책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신으로 가장 높은 으뜸 자리에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고 전 세계를 주관하고, 수 없이 많은 사물을 만드시니 넓고 넓게 둘러싸므로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아주 밝고 밝아 작은 티끌하나 새지 않도록 하시었다"
이 단군기에 보는 바와 같이 우리민족의 신에 대한 정의가 확실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유일신이요, 창조의 신이요, 빛과 같이 밝은 신이다.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의 야훼 하나님하고 정의가 똑 같습니다.
또한 고대 한국인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고조선의 역사학자였던 신지(臣智)의 역사책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타나 있습니다.
"체일용삼(體一用三)이요 삼신일체(三神一體)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이렇게 쓰여 있는데, 이것은 몸은 하나인데 활동만 창조의 신, 구원의 신, 역사의 신 이런 식으로 활동만 셋으로 한다. 그리고 이 세 신은 사실은 하나이다. 이 셋이 모이면 하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의 삼위일체 이론하고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 까마득한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어찌하여 기독교의 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삼위일체 신학을 정통으로 꿰뚫었을까요?
그것은 원래 우리 민족의 집안이 셈의 제사장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윤내헌 교수의 고조선사 연구에 보면 "이는 3.1 사상 또는 삼위일체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 후에 한민족 사상의 주요한 요소를 형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흑백논리도 아니고, 있다 없다도 아닌, 항상 세 개의 요소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임금일지라도 항상 나무로 된 집을 짓고 살았고, 돌로 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땅은 나그네와 같은 삶이고 돌아갈 집이 저 세상에 있다는 나그네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이 나그네 정신과, 훗날에는 구원, 천국, 낙원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복음의 전파가 없었을 때에도 자생적으로 메시아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때는 미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정도령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사상 자체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상이 우리 민족의 고유의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김진홍 목사님의 강연에도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고대 한국인이 지켜 오던 법으로서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은 유대인들의 십계명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히려 열 개로 늘려 있는 것을 십계명의 뜻은 다 들어 있는 일곱 가지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여덟 번째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align="left"왼쪽>
-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
-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있는 것을 사랑하라.
-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또한 고대 한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왕을 세우지 않고 신정일치의 전통을 잘 이어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이 그토록 원했던 그 사상을 고대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잘 지켜 온 것입니다. 즉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의 인도 하에 신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도읍의 이름도 신시(神市), 즉,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마을로 불렀던 것입니다. 나라를 세운 목적도 특정인의 이익이나 특정 종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은 놀랍게도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사람 사회에 유익을 끼친다, 모든 인류에게 봉사한다는 뜻의 '이타주의 사상', '박애(博愛)사상', 즉 기독교로 볼 때 '아가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위해 세워진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군(檀君)이 나라를 이끌어 왔는데요, 단군은 어떤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직책의 이름이었습니다. 단군(檀君)이란 신단수(神檀樹)라는 거룩한 나무 밑에서 제사를 인도하던 신정일치 사회에서의 천군(天君)을 뜻합니다.
즉 미스터 헤븐(Mr. Heaven)이지요. 생명나무(生命樹), 즉,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거룩한 제사를 지내던 천군(天君)을 줄여서 단군(檀君)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신이 정한 성역인 에덴동산 중앙에 서 있던 나무아래에서 신에게 경배하였는데요, 우리 민족도 신이 임하셔서 여러 가지를 듣고 지도하던 나무, 즉, 신단수(神檀樹)도 생명나무(生命樹)와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방으로 이주한 우리민족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장자권자(長子權者)가 백성을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였건만 아무도 영웅호걸을 숭상하지 않고 대제국이라는 이름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아 그 대제국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우리민족을 격하시키기 위해 오랑캐라는 뜻의 동이족(東夷族)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글자 속에 큰 활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방에 있는 활을 잘 쏘는 나라라는 뜻이지요. 지금도 올림픽에서 활 쏘는 종목은 항상 금메달을 따오지요. 그것은 과거부터 우리민족에 그러한 소질이, 유전자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방족(東方族)이라 불리는 고대 한민족의 여러 나라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이주한 한 형제요 공동체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우애로 살았기 때문에 전쟁이 있을 이유가 없고 자기 자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빌로니아다, 앗시리아다, 징기스칸이다 하며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지식의 부족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약하고 부족한 민족으로 평가절하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평화를 사랑한 우리 조상들은 흰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 이라고 불려 졌으며,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자는 큰 자를 공경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 중의 하나인 회남자(淮南子)는 이 동방에 있는 장자권의 나라, 곧 엘람과 앗수르의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회남자 대형훈(淮南子 隊形訓)을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동방의 덕목이 어진 고로 군자의 나라가 있다 하느니라."
'중국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중국의 정치가 혼란에 이르면 동방에 가서 배워 오라.' 이것이 고대 중국사람들이 오랫동안 진심으로 의존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21세기의 중국인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회남자(淮南子)의 이 말대로 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동방에 돈 독(毒)이 오른 나라가 있으니... 돈 독(毒) 의 나라라 하느니라."
한류열풍도 돈과 관련하여 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섬김과 사랑으로 이웃나라를 도와서 고대에 빛나던 한민족의 이름을 다시금 높여야 할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고인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인돌에 대해서는 무덤이다 제단이다 여러 가지 학설이 많습니다마는 원래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제단을 지키던 원로가 돌아가시니까 평생 정들었던 고인돌 밑에 묻어드리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제사보다는 형식만 남아가지고 조상 제사 드리는 무덤으로만 인식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인돌은 대단히 큽니다. 어떤 것은 상판의 길이가 10m, 폭이 4m 되는 것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제단, 거대한 돌 강대상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세계적으로 고인돌은 'Dolmen'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우리말의 '돌멩이'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에 고인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세계 고인돌의 50퍼센트가 한반도와 만주 땅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 민족이 거의 대부분이 성직자 집안이었다, 곧, 전 세계 강대상의 50퍼센트가 우리나라에 있었으니, 우리는 제사장 집안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조선의 영역을 지도로 나타내면 왼쪽 그림과 같습니다. 동방족들은 아리라, 곧 지금의 송화강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흩어져 살면서 서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온 중국인들, 곧 야벳 족속들은 중원대륙으로 내려갔을 때, 기술, 종교, 문화적으로 그 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방족 형님들에게 계속적으로 도움을 청하게 되었으며, 동방족들은 중국인들을 계속해서 도와주다가 그중의 일부는 아예 산동반도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산동반도와 중국의 동해안에 걸쳐 동이족들이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기록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방족들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훗날 장보고 시절에도 이 지도가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해온 경로를 잘 알기 때문에 심지어는 수메르의 잔재로 남아있던 나라, 비록 니므롯의 나라가 되어 버렸고 바벨론의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그 추억을 더듬어서 고대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도로 찾아가는데, 그 당시 역사기록을 보면 중동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서 '수밀이국'과 교통하였으며, 무슨 왕 몇 월 며칠에 '수밀이국' 사람 몇명이 찾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수메르는 망했고, 이미 나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통해 여전히 수메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 표현하다 보니 '수밀이'가 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수메르국 여인의 장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수메르 땅의 제국인 페르시아, 곧 성경의 '파사'지역에 남아있는 벽화입니다. 이 벽화에 보면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제일 오른쪽에 보시면 긴 도포를 입고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하고 당당하게 칼을 차고 있는 이 청년은 바로 한국 (고구려나 신라)에서온 청년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를 나누었음을 이 벽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오른 쪽 그림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 남아있는 사신들의 행렬도 벽화입니다. 전 세계의 사신들이 페르시아 (파사)의 왕에게 알현하면서 선물과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 많은 사신 중에 몇몇 사람들은 까마득한 땅 끝, 동방에서부터 온 동방족 사신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 규원사화 | ||
| 내용
서문·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이라는 책 이름은 작자가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다. 작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는 것과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 씩씩한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 여러 사서(史書)가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었지만, 작자는 유학자들의 사관은 주체성 없는 존화사대사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 온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 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작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의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 震域遺記≫인데, 이 책은 고려 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 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삼국유사≫보다 훨씬 씩씩하게 쓰여진 사서이다. ≪조대기≫가 실재했던 고기임이 ≪세조실록≫을 통해서 확인되므로, ≪진역유기≫라는 책도 실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의 <조판기>와 <태시기>에서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즉, 환웅은 신교(神敎)를 선포하고 치우씨(蚩尤氏)·고시씨(高矢氏)·신지씨(神誌氏)·주인씨(朱因氏) 등, 신하의 보필을 받아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伏羲氏)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易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적이 많은 것은 환검이다. 그는 환웅의 아들로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박달나라 임금이 되어 수도를 길림(吉林)에 두었으며,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을 거느려 그 영토는 멀리 요서(遼西)지방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에는 문화도 더욱 발전하여 8가(八加)의 관료를 두고, 제천(祭天)을 시작했으며, 8조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교화하였다. 2대 임금 부루(夫婁)는 큰 홍수를 다스리고 도산(塗山)에서 하(夏)의 우(禹)임금과 만나 화해했으며, 환인·환웅·환검을 제사하여 비로소 삼신(三神)에 대한 제사가 확립되었다. 부루는 또한 중국의 순(舜)임금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옥저·비류·졸본을 거느리게 되었다. 부루 이후의 임금들은 그 치적이 간단히 처리되어 있는데,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러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단군기>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만설>에서는 우리 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지리(地利)로써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神敎)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의 근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이 책은 결국 민족고유신앙인 신교의 입장에서 쓰여진 일종의 종교사화(宗敎史話)인데, 엄밀한 문헌고증의 토대 위에서 구성된 역사책이 아니라, 주로 전승되어 온 민속자료에 의거해서 엮어진 것이다. 따라서, 상고사의 역사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기보다는 한국문화의 저류를 이루어 온 민속적 역사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 역사의 창세기와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고기라고 통칭되어 온 국내측 자료밖에 없다. 중국인들은 기자 이후의 역사만 적었을 뿐이다. 고기는 처음에는 삼신(환인·환웅·단군)에 관한 전설만 적었으나, 시대로 내려오면서 삼신 이후의 역사를 첨가해 놓았다. 예를 들어 조선 세조 때 권람(權覽)이 지은 ≪응제시주 應製詩註≫에서는 단군의 아들 부루가 도산에서 하우(夏禹)와 만났다는 이야기가 첨가되고, 18세기 초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에서는 단군이 백성들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치고 군신·남녀·의복의 제도를 정했으며, 단군이 팽오(澎吳)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렸다고 썼다. 그러나 대체로 유학자들의 역사책에서는 부루 다음의 왕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단군시대 47대 왕명을 나열하고, 나아가 동이(東夷)라고 총칭되었던 동방의 여러 종족들을 단군조선의 주민인 배달민족으로 간주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웅대한 대제국으로 재구성한 것은 대체로 한말의 대종교(大倧敎) 성립 이후부터이다. ≪단기고사 檀奇古史≫와 ≪환단고기 桓檀古記≫는 대종교인들이 쓴 대표적 사서로서, 전자는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것이고, 후자는 역대의 고기들을 모은 것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실은 한말·민족항일기의 대종교인들이 창작해서 넣은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단군 47대의 왕명은 ≪규원사화≫의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고 있어서, 이 책이 대종교의 역사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나 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대종교인의 사서들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여 서술하였으므로, 이를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동이족을 모두 배달겨레로 해석한 것은 여진족·거란족·몽고족 등 북방민족까지도 한민족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단군조선이 기원전 24세기에 이미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도 문헌자료는 물론이요 고고학자료에 의해서도 아직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책들이 조선 후기와 한말에 유행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사상사적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사상사의 흐름 속에 유학자들의 역사의식에 대항하면서 그들에게 지속적인 자극을 주는 민족고유의 사상적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의 근간이 되는 단군민족주의가 민족항일기에는 독립운동의 거점 마련에 커다란 구심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
|
은율 고인돌
황해도 은율군 운산리 소재. 길이 약 8미터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북방식 고인돌이다.
개설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고대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도에는 강화의 부근리·삼거리·오상리의 약 120여 기(基)의 고인돌군, 고창 상갑리·죽림리 등 고창군 전역 205군집(群集) 총 1,665기의 고인돌, 화순 효산리·대신리의 고인돌 500여 기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
||
한반도 고고학 15
한반도 인류전파설 유력
구석기부터 역사시대까지의 주역
일찌기 예술 · 과학 고도로 발달한 민족
우리나라 예언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분이 바로 정감(鄭鑑)이란 분이다.
앞에서 잠깐 밝힌 바 있지만 이분은 조선조 중엽에 활동한 사람으로 이씨 선조 이담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이란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고 하며, 이씨의 한양 오백년이후 정씨의 계룡산 몇백년, 조씨의 가야산 몇백년, 그 다음은 범씨의 완산(完山) 몇백년 등 이씨왕통이 끝나도 계속해서 위와같이 이어진다는 흥망대세를 추수(推數)하여 밝혔고 그 중간에 세태와 민심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해 놓은 정감록 비결책이 있다.
이 예언서는 격암 · 토정 · 도선 · 무학 등의 예언서에서 발췌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 정감과 이담이 사실인물이란 증거는 없으며, 문헌상으로는 정조9년 1785년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에서 정감록이라는 책에 대한 언급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감록 비결책은 남사고의 예언을 방불케 하는데 이는 남사고의 예언을 정감록이란 비결책을 만들때 많이 응용했으리라 사료된다.
이밖에 우리 민족에게는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이란 미래의 영원한 우리나라를 뜻하는 예언이 민간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조말때의 어수선한 세태속에서도 희망을 안겨주는 남조선「염원복락 피난처」라는 예언은 이미 오래전부터 민가에 널리 뿌리박고 있었는데 격암비록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남조선신앙」은 외국 여러나라에 나타난 낙원처 유래 즉 인도의 … 히브리인의 에덴동산, 도교의 상청옥경(上淸玉京), 그리스도교의 천국 등에 비하여 매우 세부적이며 객관적 사실의 충동에 의해 자연히 성립되었다는 점과 … 고정하여진 것에 대해 미완성기변동의 것으로서 언제든지 필요한 수정과 보충을 가할 수 있는 점 다시 말하면 다른나라 것은 극히 주관적이며 공중누각에 지나지 않는데 비해 이것은 진보한 형태에 있는 것에 특색이 있다고 본다.
이와같이 한민족의 예언은 수천년을 두고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예언도 특별한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필자는 위의 예언들을 고고학과 같이 과학적인 분석 검토를 피하고 독자들이 읽으면서 이해하는 방향으로 기술하였다.
지금까지 「한민족기원」을 통해 남다른 민족관을 펴 보임으로써 잊혀졌던 상고사를 재 발굴하는 과정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경제와 사회문화 그리고 과학까지 또 장래의 예언까지 구석구석 살펴 보았는데 우리민족은 참으로 위대한 민족임을 재발견케 하였다. 그 결과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드문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민족이며 동양삼국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종주국(宗主國)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는 고고학계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적어도 1백만년 전에 한민족의 직계조상으로 믿어지는 고 인류들이 단양을 중심해서 살았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석장리와 전곡과 이북 상원 용곡리 등 가는 곳곳마다 구석기시대부터 살기 시작했고 이 조상들이 중기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와 오늘에 이어지면서 계속적으로 살아온 증거가 오산리 신석기 유적과 주암댐 수몰지역 유적에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한반도에 우리민족의 기원지 및 아시아 특히 중앙 및 동북아시아의 인류기원설을 한반도에 두는 것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유물보다도 한반도가 훨씬 앞서 있음을 고고학 조사결과 점차 드러나고 있는데 유인된 것이다. 최근 용곡리에서 약40만년전의 유인두개골이 대량 발견됨으로 해서 중국의 주거점 유물을 연대상 능가하거나 맞먹는 시기인데 중국의 북경원인은 실은 그 증거가 미약한 상태이다.
프랑스 고고학자 떼이이르 드 사르댕과 데이비드슨 블랙 박사는 주거점의 석회암 동굴에서 화석퇴적장소를 발굴하여 사람의 어금니 2개를 발견하고 이것을 북경원인이라 명명하고 이 어금니를 중심하여 두개골을 상상해서 복원한 것이 바로 북경원인이다.
그것마저도 없어지고 지금 박물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모양을 상상해서 만들어 놓은 석고라는 것이다.
그 이외도 북경원인에 대해 신빙성을 부정하는 증거들이 있다. 함께 발굴한 배문중(裵文中 : 고생물학자)의 1928년 여름 발굴책임자의 보고서 내용에 북경원인은 자바원인과 거의 같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북경원인이 석회암 광산에서 채석하는 인부들에게 죽은 원숭이 두개골을 가져다가 북경원인이라고 조작한 사실이 무근이 아님을 말해 주는데 자바원인은 발견자 네덜란드 사람 듀보아의 날조품인 첫번째의 두개골은 원숭이뼈로 발각되었고 두번째 두개골은 약 5백년전 화산폭발로 죽은 현대인의 두개골임을 1907년 셀렌카씨의 조사에 의해 탄로난 유명한 일화로 미루어볼 때 북경원인도 치아복원설의 정식보고 뒤안길엔 조작설이 있고 보면 한국의 용곡리의 많은 두개골은 어쩌면 한반도의 인류전파설이 가장 유력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한민족은 구석기시대는 물론 역사시대의 주역임을 말없이 위와같은 자료들이 뒷받침되고 있어 한반도에서 빙하기시대때 간빙기때 더위를 피해 북상하는 사슴과 곰 등 먹이를 따라 만주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그리고 알래스카 · 남북아메리카까지 확산됐고 유럽 전지역까지 퍼져 산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황인인 우리 민족이 온 지구상에 선주주민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환인국은 전 아세아에 약 1만년전에 12환국을 두었고 환웅 18대, 환검(단군) 47대로 내려오면서 광활한 영토와 거대한 민족(BC1666년 고불단군왕조시대 인구조사에 의하면 총인구 1억 8천만명이었다고 함. 그 당시에 아시아 인구 전체를 말함)임이 드러났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예술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민족임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훝어 보았다.
위와같은 유구한 한민족의 모든 역사내용물을 하루속히 한국의 정식 역사책에 수록하고 교과서에 밝혀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회복하여 빛나고 잘사는 미래의 한국을 건설하기를 독자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리며 이만 한민족기원을 끝마칠까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다선(茶仙) 우찬무(禹燦武) -
| 갈대아 우르
|
|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습니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왼쪽 그림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실제모습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
수메르
엔키의 어깨 위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으며 엔키 앞에는 태양신 우투의 모습도 보인다.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2005. 2. 26. 조선일보 기사 '대영박물관이 온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라크 남부의 고대유적도시 우르. 1920년대 발굴에서, 서기전 26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여왕 푸아비의 무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10명의 여인이 순장(殉葬)됐는데, 한 여인의 주변에서 금빛이 번쩍였습니다. 황소의 황금 가면이었습니다. 황금 황소는 목제 11현 수금(竪琴·하프의 일종)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발굴단장 L. 울리는 “순장된 한 여인의 손은 현이 있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20세기 발굴 유물 중 최고품의 하나로 꼽히는 4500여년전 수메르문명의 수금은 이렇게 발굴됐습니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인데, 이것이 이난나 여신의 상입니다. 머리에 있는 이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신전은 공공연한 난교의 장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습니다.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입니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지요.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는 청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고대(古代) 수메르의 신전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빚고 성행위를 한 까닭은?
세상을 바꾼 식품이야기(1) 보리편- 강인한 생명력의 보리 이야기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
|
|
|
|
|
엿기름이 바로 맥아?
|
|
| (고대의 맥주 제조) |
점토판에 의하면 그 무렵 수메르 사람들은 맥주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로 생각하여 사원 안에서 종교의식의 하나로 이 술을 빚었습니다. 당시 맥주를 만드는 일은 여성이 맡아서 했으며, 술 빗는 양조가는 존경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맥주와 관련된 신화에는 어김없이 여신들이 등장합니다.
![]() |
(신전에서의 성행위)
그 무렵 신전에서 맥주를 빚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수메르 사람들은 농사에 도움을 주는 비는 신의 땀방울이라고 여겼습니다. 신들이 성행위를 자주 해야 비가 많이 내려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신이 성적으로 흥분해 땀을 흘리게 하기 위해서는 신전의 여사제들이 하늘의 신들이 볼 수 있도록 신전에서 성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전 제례에 참가하는 사람은 여사제와 '사통하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행위가 곧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성행위 때 맥주를 마셨습니다.
==========================================================================
성경이 말하는 공룡의 생성과 멸종 원인 [스크렙] [천지창조의 증거들]
|


이런 말이 성경에는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