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5)] 세대주의(世代主義)의 성경해석법(04) 성경적인 올바른 휴거론은 어떤 것인가?(살전4:13~18)

본 설교는 세대주의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환난 전 휴거설의 오류를 성경 원문과 천국의 실제를 바탕으로 비판하며, 올바른 종말론적 대안을 제시하는 강연입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구체적인 본문 해석을 근거로, 교회가 7년 환난을 전혀 겪지 않고 공중으로 휴거된다는 주장은 성경적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마지막 때에 극심한 환난과 믿음의 시련을 통과하게 되며, 진정한 휴거는 마지막 나팔(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알곡을 추수하는 형태로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이 잘못된 휴거론에 의존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를 버리고, 철저한 회개와 죽음을 각오한 믿음으로 다가올 환난과 주의 재림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휴거론을 분별할 때 왜 성경 전체와 원문, 교회사와 천국의 실상을 함께 살펴야 하는가?본문 →2세대주의의 네 전제와 ‘7년 대환난 전 교회 전체 휴거’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본문 →3죽은 성도와 살아 있는 성도는 어떻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은 누구와 함께 공중에 오시는가?본문 →4성도의 환난과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다르며, 교회 전체가 환난 전에 들림받는가?본문 →5계 3:10·눅 21:34-36·계 4:1은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를 뜻하는가?본문 →6요한계시록은 환난 중의 성도와 일곱째 나팔 때의 알곡 추수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본문 →7휴거를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회개하고 환난과 영적 싸움에 대비해야 하는가?본문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에는 세대주의에 관한 다섯 번째이자 그 성경해석법에 관한 네 번째 말씀을 나눈다. 주제는 성경적인 올바른 휴거론이다. 휴거(携擧, rapture)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교회가 모두 칠 년 대환난 전에 올라간다는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의 시간표가 과연 성경 전체와 맞는가? 이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再臨, second coming)과 환난(患難, tribulation), 성도의 부활(復活, resurrection)과 마지막 심판까지 함께 읽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각 견해가 나름의 성구를 제시하므로 한 대목만 들으면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필자도 자신의 설명이 단 한 번의 수정도 필요 없는 백 퍼센트의 해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성경 말씀은 진리이지만 사람이 그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는 더 살필 여지가 있다. 한두 해 뒤에 더 분명해진 부분이 있으면 설명을 다듬을 수도 있다. 끝에 가서 사건을 지나 보아야 드러나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설명을 신조처럼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잘못된 시간표를 믿고 준비를 미루면 귀한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고 환난 앞에서 설 힘도 잃는다. 성경에 더 가까운 길을 지금 찾아야 한다.
다니엘의 마지막 한 이레에 언약을 굳게 하는 이가 그리스도인가 적그리스도인가를 두고도 해석은 갈린다. 이견을 지닌 형제를 이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이유로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말씀을 전체로 읽고 원문을 대조하며, 교회사에서 어떻게 설명해 왔는지도 살펴야 한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피며 확인했다고 밝히는 내용은 성경의 직접 인용과 구별하면서 들으면 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라는 주장과 성경이 보여 주는 알곡의 휴거 시점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2. 휴거론을 분별할 때 왜 성경 전체와 원문, 교회사와 천국의 실상을 함께 살펴야 하는가?
먼저 한 책, 한 구절만 떼어 읽지 말아야 한다. 성경 전체의 증언,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교회사에서 축적된 해석을 서로 대조해야 한다. 여기에 필자는 자신이 영적 세계에서 확인한 실상도 함께 고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은 개인적인 체험이다. 문헌과 원문을 찾아 주는 도구가 발달해도 기록되지 않은 체험을 대신 확인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체험 한 장면만으로 성경을 제쳐 놓아서도 안 된다. 성경의 여러 책이 서로 보완하는 곳을 먼저 보아야 한다.
십사만 사천 명을 예로 들어 보자.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강의하던 이천십칠년 무렵,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곱하고 여기에 천이라는 충분한 수를 곱해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성도 전체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천국의 실상을 살피기 전에는 그것이 가장 가까운 설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필자가 영적 세계에서 확인했다고 밝히는 바로는, 하나님께서 땅에 인을 쳐 보내신 종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며 그들에게는 정해진 자리와 이름이 있다. 이들은 장차 왕 노릇할 이기는 자들과 관계된다. 성경이 지파마다 일만 이천 명을 열거하는 사실과 필자의 체험에서 받은 이해를 혼합하여 성경 한 절의 직접 문장처럼 쓰지는 말아야 한다(계 7:4-8).
세대주의는 계 7장의 지파 이름을 민족적 이스라엘만으로 읽고 이방인 성도를 그 수에서 완전히 떼어 낸다. 그러나 단 지파와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은 계 7장의 목록에 없다. 반면 에스겔이 본 성읍의 문에는 단 문이 분명히 나온다(겔 48:32).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을 적은 열두 문이 있고, 사방에 세 문씩 있으며,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있다(계 21:12-14). 두 본문을 함께 놓고 읽어야 한다. 단이라는 이름이 어느 목록에서는 빠지고 다른 환상에서는 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의 목록만으로 하나님 나라 전체에서 그 지파를 지워 버릴 수 있겠는가?
계 21:12-14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요한계시록은 동편에 세 문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세 문이 각각 어느 지파의 문인지는 여기에서 나열하지 않는다. 에스겔은 동편을 요셉 문, 베냐민 문, 단 문이라 밝힌다(겔 48:32). 요한이 적지 않은 이름을 에스겔이 기록한 것이다. 한 선지자가 본 것을 다른 선지자의 본문으로 보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의 한 대목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실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신학교에서 책마다 전문 연구를 하는 이들과 대화하며 한 책을 깊게 파는 수고의 가치를 알았다. 동시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바울서신과 요한계시록을 갈라 놓은 채 서로 비추어 보지 못하면 종말의 큰 흐름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과목만 가르치는 학원과 여러 과목을 엮어 보는 학원의 차이와 같다. 종합해서 보면 단일 본문에서 놓친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래도 필자의 설명만 들으면 모든 의문이 곧바로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도는 말씀을 다시 확인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3. 세대주의의 네 전제와 ‘7년 대환난 전 교회 전체 휴거’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세대주의의 큰 전제는 네 가지다. 성경을 종말 시간표에 맞추어 문자적으로 읽는 일, 이스라엘과 교회를 끝까지 분리하는 일,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 그리고 지상의 천년왕국이다. 이 네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에서 마지막 한 이레를 먼 미래로 옮기고, 그 기간을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언약하는 칠 년으로 해석한다. 교회는 그 전에 모두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남은 이스라엘이 따로 환난을 통과한다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한 이레를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제사의 완성에서 떼어 미래의 적그리스도에게 넘기는 순간, 시간표 전체가 달라진다(단 9:24-27).
이러한 해석은 존 넬슨 다비의 세대주의와 뒤이은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통해 크게 퍼졌다. 다비는 십구 세기에 살았고,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초판은 이십 세기 초에 나왔다. 미국 교회에서는 이 틀이 힘을 얻었고, 미국에서 배워 온 선교사와 설교자를 통해 다른 나라에도 전해졌다. 한국에는 여러 경로로 들어왔지만 모든 교회가 이 체계를 똑같이 따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익숙한 안경을 쓰면 성경에서도 그 안경의 색을 먼저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들은 도표를 잠시 내려놓고 성경 본문을 다시 읽어야 한다.
세대주의가 말하는 모든 문장을 같은 강도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휴거가 있다는 사실은 맞다. 주님이 공중으로 오시는 일과 이어서 지상에 나타나시는 일을 구별하는 점에도 맞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 사이를 칠 년으로 벌리고 교회 전체를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빠짐없이 데려간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도 ‘칠 년 대환난’이라는 이름의 기간이 직접 적혀 있지 않다. 다니엘의 한 이레를 억지로 미래에 떼어 놓고, 그 위에 모든 성도가 환난을 피한다는 결론까지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
필자는 세대주의를 믿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로 대한다. 다른 시간표를 가졌다고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가 모두 일찍 떠난다고 안심하여 회개(悔改, repentance)와 인내를 미루는 것은 위험하다. 주님의 재림을 빨리 만나고 싶다는 소망은 귀하다. 그러나 너무 살기 힘드니 환난이 오기 전에 나만 떠나고 싶다는 마음에 교리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 성도는 환난을 견딜 사람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 차이 때문에 세대주의의 역사와 근거를 묻는 것이다.
4. 죽은 성도와 살아 있는 성도는 어떻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은 누구와 함께 공중에 오시는가?
휴거는 실제로 일어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주님의 강림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앞의 14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때 혼자 오시다가 그제야 처음 성도를 모으는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천국에 이른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일이 먼저 제시된다(살전 4:14).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왜 죽은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오는가?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은 재림 때까지 모두 무덤에 누워 영과 육이 다시 결합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는 개인적으로 부활하여 천국의 낙원에 간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고, 사명과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을 받은 뒤 예비된 처소에 들어간다. 필자가 영적 세계에서 확인했다고 밝힌 바로는, 지금 천국의 땅에서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al kingdom)이 진행되고 있고 그곳에서 왕 노릇하는 성도들이 있다. 필자의 부모도 무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다고 증언한다. 무덤은 육신을 장사한 자리이지 지금 성도가 사는 천국의 집이 아니다.
이것이 재림 전 죽은 성도의 개인적인 첫째 부활이다. 공중 강림 때 일어나는 것은 재림 무렵의 단체적인 둘째 부활에 속한다. 이때 죽은 알곡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알곡 성도가 변화되어 함께 주님을 맞는다. 이어 주님의 지상 재림과 백보좌 심판 때 남겨진 성도와 불신자의 부활이 뒤따른다. 둘째 부활은 이 사건들을 포함하는 단체적인 부활이다(살전 4:16-17; 고전 15:51-52; 계 20:11-15).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필자는 주님이 재림하려 공중에 계신 때에 죽는 이들의 경우도 구별한다. 평소처럼 낙원에서 심판이 진행되는 시점이 아니므로 그 심판이 잠시 유보되고, 그들은 먼저 일어나 주님을 맞는다. 그러므로 ‘무덤에 있다’는 설명이 이 특별한 때에는 일부 맞을 수 있어도, 재림 전 죽은 성도가 모두 계속 무덤에 있다는 교리로 넓혀서는 안 된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 왕 노릇하는 성도와 공중 강림 무렵 먼저 일어나는 성도를 구분해야 바울의 순서가 선명해진다.
세대주의는 공중 강림을 ‘교회를 위하여 오심’, 지상 재림을 ‘교회와 함께 오심’으로 나눈다. 그러나 주님은 공중으로 오실 때부터 이미 천국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 유다서도 주님이 수많은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심을 전한다(유 1:14-15). 그 무리에는 천사들과 먼저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있다. 공중에서는 이 땅의 익은 알곡이 더해진다. 그들은 환난을 피하려 따로 빼돌려진 무리가 아니라 곧 있을 아마겟돈 전쟁에 소집되는 주님의 전사다. 공중 강림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 재림이 이어진다. 두 사건을 구별하되 칠 년의 간격을 억지로 끼워 넣어서는 안 된다.
5. 성도의 환난과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다르며, 교회 전체가 환난 전에 들림받는가?
세대주의는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震怒, wrath)를 받을 수 없으니 진노의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모두 휴거된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6장의 여섯째 인에서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바위에게 숨겨 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을 근거로 삼는다(계 6:16-17).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을 보면 앞의 네 인에서는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달리고, 다섯째 인에는 죽임당한 증인들의 호소가 있으며, 여섯째 인에는 해와 달과 별의 이상이 나타난다. 이어 나팔 재앙이 펼쳐진다. 인은 큰 흐름을 먼저 보여 주고, 나팔은 그 안의 재앙을 더 자세히 펼쳐 보이며, 마지막 대접은 적그리스도의 치하에 쏟아지는 심판이다. 첫째부터 넷째 나팔에는 자연계에 타격이 오고, 다섯째부터 일곱째 나팔에는 사람에게 직접 닥치는 화가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장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에서 교회 전체가 먼저 떠났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환난과 진노를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도 핍박을 받는 환난이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라고 하셨다(요 16:33). 반면 음행과 탐심과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는 성도에게 그러한 죄를 경계하면서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진노가 임한다고 말한다(엡 5:5-6). 교회에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자기 죄를 덮는 방패가 되지 않는다.
엡 5:5-6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골로새서도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며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열거하고,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한다(골 3:5-6). 이 경고가 믿는 이에게도 주어진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육체의 죄를 끊지 않으면 징계를 피할 수 없다. 회개하지 않은 죄를 통해 악한 영이 들어와 사람을 괴롭힌다. 자기 속의 죄와 영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그것을 모두 욥처럼 의롭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여기면 회개할 길을 놓친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먼저 죄를 인정하고 끊어야 한다.
물론 의로운 길을 걸으며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받는 핍박도 있다. 죄 때문에 받는 징계와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환난을 하나로 섞지 말아야 한다. 어느 경우든 교회에 속했다는 이름만으로 환난이 자동 면제되지는 않는다. 다섯째 나팔 때 황충에게 괴롭힘을 당하도록 허용된 대상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이다(계 9:4-5). 인 맞은 종과 준비되지 못한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 일곱 나팔이 울리는 동안 땅에 성도가 전혀 없다는 세대주의의 전제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6. 계 3:10·눅 21:34-36·계 4:1은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를 뜻하는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부터 보자. 주님은 그들이 적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셨다(계 3:8). 그리고 인내의 말씀을 지킨 그들을 시험의 때에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세대주의는 개역한글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를 그때가 오기 전에 장소를 옮겨 공중으로 데려간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러나 주님의 보호가 반드시 이 땅에서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가? 필자는 원문의 ‘지킨다’는 뜻에 주목한다.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보전하실 수도 있다.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베드로가 갇힌 옥에서도 주님은 그를 건져 내셨다(행 12:6-11). 요셉이 감옥에 있던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창 39:21).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말에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칠 년 전에 이 땅을 떠난다’는 결론을 곧바로 끌어낼 수 없다. 성도는 옥 안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고 환난을 겪으며 믿음을 지킬 수도 있다. 약속의 주체는 시험을 이기는 사람을 지키시는 주님이다.
또 누가복음 21장 34절부터 36절을 연결한다. 거기에는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고, 장차 올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면이 있다. 세대주의는 ‘피한다’를 환난의 시작 전에 모든 성도가 지구에서 들려 올라가는 일로 해석한다. 그러나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경계하신 삶의 상태다.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에 빠져 있으면 그날이 덫처럼 닥친다. 깨어 기도하고 그 걸림돌을 피하라는 말씀을 칠 년 전 교회 전체의 휴거라는 날짜표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눅 21:34-36).
요한계시록 4장 1절의 ‘이리로 올라오라’도 살펴보자. 열린 하늘 문 앞에서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사도 요한이다. 그는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도록 성령에 감동되어 올라갔다(계 4:1-2). 이 개인의 계시 체험을 전체 교회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휴거된 사건으로 읽으려면 성경에 없는 대표 단수의 연결을 만들어야 한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 자체는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가 본 환상 속에서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가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땅에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에 나타나는 성도들은 누구인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성도들에게는 사로잡힘과 칼에 죽는 일이 있다(계 13:7-10). 그 자리에서 인내와 믿음을 지켜야 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은 자에게는 심판이 경고되고, 이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성도의 인내가 제시된다(계 14:9-12).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계속된다(계 14:13). 교회라는 낱말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성도 아닌 다른 무리로 밀어낼 수 없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도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 한다. 세대주의는 계명을 지키는 쪽을 유대인, 예수의 증거를 가진 쪽을 교회로 떼어 읽기도 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 말씀을 자신들의 안식일 준수와 연결한다. 그러나 한 절의 두 표현을 갈라 두 무리로 만들거나, 특정 교단만 마지막에 남을 성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주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을 곧바로 태양신 숭배자로 몰아가는 것도 옳지 않다. 사도 요한 자신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증언한다(계 1:10).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붙드는 성도가 환난 속에서 싸우는 것이다. 다른 견해를 지닌 그리스도인을 형제로 대하면서도, 환난을 통과하며 믿음을 지키라는 본문의 경고는 흐리지 말아야 한다.
7. 요한계시록은 환난 중의 성도와 일곱째 나팔 때의 알곡 추수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그렇다면 들림받는 시점은 언제인가? 환난을 아직 겪지도 않은 시작점이 아니라, 환난의 끝부분에 이르러 알곡이 익었을 때다. 예수님은 그날 환난 후에 해와 달과 별의 이상이 나타나고 인자가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며,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이 택한 자를 사방에서 모은다고 말씀하셨다(마 24:29-31). 성도가 환난을 통과한다는 말과 주님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데려가고 남겨 두신다는 말씀은 함께 읽어야 한다. 밭에 있는 두 사람, 맷돌질하는 두 사람, 잠자는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는 장면이 있다(마 24:40-41; 눅 17:34). 그날과 시각을 모른다는 경고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환난 후에 모으신다는 순서도 지워서는 안 된다.
마 24:29-31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요한계시록의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은 9장에 나온다. 다섯째 나팔에는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의 괴롭힘이 있으며, 여섯째 나팔 뒤에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계 9:1-21). 11장 14절은 둘째 화가 지나가고 셋째 화가 속히 이른다고 말하며, 15절에 이르러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이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큰 음성이 들린다. 환난을 지나며 하나님의 마지막 개입을 기다리던 성도에게 이 나팔은 결정적인 전환이다(계 11:14-18).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필자는 일곱째 나팔을 하나님의 나팔, 큰 나팔, 마지막 나팔과 함께 읽는다(살전 4:16; 마 24:31; 고전 15:52). 이 나팔 때 주님이 공중에 오셔서 익은 성도들을 모으신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흰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금 면류관을 쓰고 이한 낫을 들고 있다. 곡식이 다 익었으므로 거둘 때가 왔다는 외침 뒤에 낫이 휘둘러지고 땅의 곡식이 거두어진다. 환난과 핍박을 지나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알곡이 이 추수에 참여한다(계 14:14-16).
계 14:14-16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일곱째 나팔 뒤에 스물네 장로는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하신다고 경배한다. 그들의 말에는 앞서 계시록 1장 8절과 4장 8절에 있던 ‘장차 오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계 11:17). 필자는 이를 주님이 이미 공중에 오셨기 때문에 그 표현이 빠진 것으로 읽는다. 16장 5절에서도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로 부르는 점을 함께 본다. 이것은 여러 장을 연결하여 재림 시점을 읽는 설교의 논증이다. 11장 18절에는 상을 주실 때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가 왔다고 이어진다.
알곡을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환난을 조금도 보지 않게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주님의 군대를 모으는 것이다. 천국에서 이미 왕 노릇하는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오고, 이 땅에 살아 있다가 익은 성도와 그 무렵 먼저 일어난 성도가 공중에서 합류한다. 아직 악한 영이 많고 믿음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전사의 자리에 세울 수는 없다. 나팔절에 군대를 소집하듯 익은 자를 부르신 뒤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이 가까이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큰 흐름에서는 환난 후 휴거다. 그러나 환난의 끝자락에서 익은 자를 먼저 거두시므로 지상의 모든 일이 단 한순간에 끝난 뒤에야 휴거가 있다는 뜻도 아니다. 환난 전과 후를 단순히 달력의 양끝으로만 나누어서는 이 시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마지막에 남겨진 성도도 즉시 모두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남은 환난과 대접 심판 가운데 믿음을 지켜 구원받을 길이 있다. 적그리스도와 짐승을 따르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때, 아직 남겨진 성도는 더 어려운 선택 앞에서도 예수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알곡으로 선택되어 주님을 맞는 자리와 남겨져 더 견뎌야 하는 자리를 같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8. 휴거를 기다리는 성도는 어떻게 회개하고 환난과 영적 싸움에 대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모두 칠 년 환난 전에 올라간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때에도 믿음을 지켜야 할 성도가 있다. 두려운 일이 다가오면 그제야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죄를 자백하고 끊어야 한다. 지금은 환난의 압박이 아직 본격적으로 닥치지 않았기에 회개하고 훈련받기에 좋은 때다. 음란과 탐심과 우상숭배를 품고 있으면서 입술로만 휴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자신 안의 악한 영을 다루고 정결해져 주님의 일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필자는 죽음 앞에서 떨지 않고 주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지 살피려고 번지점프를 해 본 적이 있다. 남이섬 부근에서 다른 목회자 두 사람과 함께 약 백 미터 높이로 올라갔다. 한 번에 팔만 원쯤 하는 체험을 무료로 하게 되었지만, 앞에 선 목회자의 다리는 발판에서 후들거렸다. 줄이 매여 있고 아래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높은 곳에 서니 두려움은 실제였다. 필자는 그 순간 주님께 목숨을 맡길 각오를 생각했고, 자신이 떨지 않고 발을 내디딜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 경험이 실제 순교와 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환난을 말로만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핍박의 때에 남겨졌다면 그때도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살려고 진리를 버리면 생명을 잃고, 주님께 생명을 맡기면 주께서 붙드신다.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이 적그리스도의 세계적 체제에 무턱대고 휩쓸리지 않고 회개하는 사람과 주님의 전사를 세우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사람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에 대적하여 영혼을 건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이가 익은 곡식이다. 힘든 세상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재림만 기다리지 말고, 지금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의 군사로 자라야 한다.
세대주의의 다른 휴거 시간표를 따르는 형제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먼저 올라간다’는 확신 때문에 환난의 준비를 미루지 않도록 분명히 말해야 한다. 사도 요한의 계시에는 환난 중에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있다. 그 성도처럼 믿음을 지켜야 한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주님이 인정하시는 알곡으로 서기 위해 회개와 말씀과 영적 싸움을 오늘부터 시작해야 한다.
9. 나오며
성경적인 휴거를 찾기 위해 성경 전체의 증언과 세대주의의 시간표, 환난 중의 성도와 일곱째 나팔의 추수를 살펴보았다. 휴거는 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실 때 죽은 알곡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알곡이 변화되어 그분을 맞는다. 그러나 그 시점은 교회 전체가 칠 년 대환난 전에 아무 시험도 받지 않고 떠나는 때가 아니다. 성도는 환난의 끝부분까지 믿음을 지켜야 하며, 주님은 익은 곡식을 마지막 나팔에 모으신다.
이 해석의 세부까지 인간이 모두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환난 후’라는 말씀과 바울의 나팔, 요한이 본 환난 중의 성도와 익은 곡식을 함께 읽어야 한다. 다른 견해를 지닌 형제를 존중하되 자신의 준비를 대신 맡겨서는 안 된다. 죄를 끊고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때가 오더라도 예수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마지막 나팔에 주님이 거두시는 알곡이 되도록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05일(월)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