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03)]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08) 살려주시려 오신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님(호6:1~2,11:1,13:14 )

이 설교는 호세아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구속 사역을 깊이 있게 조명하며 성도 들에게 영적 소망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첫째로 정보배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한 신분적 의미를 넘어 세상으로 파송받은 사명자임을 강조하며, 결국 사망과 음부를 정복하고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구속자임을 역설합니다. 둘째로 인간이 겪는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징계이자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터널과 같음을 설명합니다. 셋째로 성도들이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굳건한 믿음으로 환난을 이겨내어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이자 왕으로 세워지기를 독려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호세아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주며, 왜 그분이 누구신지 계속 물어야 하는가?본문 →2여호와께서는 떠난 백성을 왜 치시고 찢으시며, 어떻게 다시 살리시는가?본문 →3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며 부활하심으로 살리시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는가?본문 →4호세아의 “내 아들”과 출애굽기의 “내 장자”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본문 →5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사명으로 세상에 보냄받았으며, 어떻게 상속자와 왕이 되는가?본문 →6죄 없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그 열쇠를 가지셨는가?본문 →7사망과 음부의 구속자를 믿는 성도는 고난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이길 수 있는가?본문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늘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무엇을 아시고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알수록 우리는 자신의 앞길도 그분께 맡길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救贖, redemption)하신 분이며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을 조금 알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성경이 그분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
그분이 누구신지만 묻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고,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려고 돕는 자이신 성령을 보내셨다. 회개(悔改, repentance) 가운데 악한 영이 떠나는 일을 통해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도 경험하게 하신다. 주님이 땅에서 행하신 일은 사복음서에서 살피고, 승천하신 뒤 이루신 일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지금 하늘에서 어떤 분으로 계시는지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살펴야 한다.
호세아서는 바로 이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왕이시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살폈다. 또 떠난 백성을 다시 사 오시는 남편이요 다시 오실 신랑이라는 것도 보았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정결하고 거룩해야 하며 음녀와 섞이지 말아야 한다. 열 처녀의 비유는 지혜롭게 준비하라고 하고, 달란트의 비유는 충성하라고 한다(마 25:1-30).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산다는 뜻이다.
이제 호세아서가 보여 주는 세 가지를 더 살필 차례다. 예수님은 다시 살려 주시는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망(死亡, death)과 음부(陰府, Sheol/Hades)의 권세에서 우리를 속량(贖良, ransom)하시는 분이다. 이 셋은 따로 떨어진 이름이 아니다. 사망을 이기셔야 우리를 살리실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으셨기에 그 사명을 이루신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호세아서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어떤 사명이 담겨 있으며, 사망과 음부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호세아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여 주며, 왜 그분이 누구신지 계속 물어야 하는가?
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거듭 물어야 하는가?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으로 생각하면 주님이 우리 삶을 책임지실 수 있는지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요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밝히신 말씀을 예수님도 자신에게 사용하신다(사 44:6; 계 1:17).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자신의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했다(요 20:28). 주님을 바로 알 때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신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도 그냥 익숙한 호칭으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마 16:16). 그리스도(基督, Christ)는 기름 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책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떠올리고, 아들이니 아버지보다 약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의 신분과 사명이 담겨 있다. 호세아서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함께 읽어야 이 뜻이 드러난다.
예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밝히셨다(출 3:14-15).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요 8:24). 필자가 요한복음의 헬라어 말씀을 읽으며 놀란 것도 이 대목이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시러 오신 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사야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밝히신 말씀과 맞닿아 있다. 그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으로만 생각했던 이해는 이 말씀 앞에서 무너진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일도 달라진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은 함부로 손댈 수 없다고 한 레위기 27장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 주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주님의 보호를 의지한다. 믿기로 결단했다면 한쪽 발은 주님께, 다른 발은 세상 신에게 걸쳐 두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지조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묻는 물음은 지식만 쌓으려는 물음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누구에게 삶을 드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물음이다.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믿음에는 두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바알도 찾아보고 무당도 찾아보면서 예수님께 우리 앞길을 책임져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자신을 주님께 바쳤다면 그분이 우리를 붙드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조금 맡기고 조금은 다른 힘을 붙잡는 삶에서 돌아서야 한다. 일편단심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지조다.
호세아서는 돌아선 북이스라엘에게도 이 주님을 보여 준다. 다윗의 왕과 남편과 신랑으로만 그치지 않고, 맞고 찢긴 백성을 다시 살리시는 이, 애굽에서 아들을 부르시는 이, 음부와 사망에서 속량하시는 이로 보여 준다. 북이스라엘이 바알에게 향했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소망의 불을 끄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분이 누구신지를 계속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분의 이름과 행하신 일을 알면 지금 맞닥뜨린 어둠 속에서도 다시 주님께 돌아갈 길을 찾는다.
3. 여호와께서는 떠난 백성을 왜 치시고 찢으시며, 어떻게 다시 살리시는가?
호세아는 먼저 돌아가자고 외친다.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이다. 떠난 백성이 바알에게 제사하고 우상 앞에서 분향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호 11:1-2). 찢으시고 치시는 까닭은 멸망시키려는 데에 있지 않다. 다시 돌아와 살게 하려는 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마귀의 길을 따라 그에게 예비된 형벌에 참여하게 된다(마 25:41).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곳이 당신의 자녀가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호 6:1).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 말씀의 순서를 보라. 돌아가자는 부름이 먼저 있고, 찢으심과 치심 뒤에는 낫게 하심과 싸매어 주심이 있다. 찢는다는 말은 사자가 먹이를 물어 찢는 모습이 떠오를 만큼 강하다. 치신다는 말씀도 가벼운 훈계가 아니다.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도 계속 바알을 따르는 백성은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난 속에서 깨닫는다. 병과 가난과 어려운 환경을 겪고서야 주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아픔을 통해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살아나는 시작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심으로 고집을 꺾고 돌아오게 하신다. 왜 나만 치시느냐고 원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고집을 그대로 두면 끝내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고난이 올 때 그 까닭을 남과 비교하기보다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고 누구를 의지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바알과 함께 살다 바알의 마지막을 맞기를 원치 않으신다.
치셨지만 도로 낫게 하신다. 낫게 하신다는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라파, 곧 치료한다는 뜻이다. 싸매어 주신다는 말씀은 상처를 내버려 두지 않고 묶어 감싸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주님이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시므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절망의 외침이 아니다. 사람이 맞고 찢긴 자리에만 머물지 않도록 주님이 치료의 길을 여신다. 그것도 겨우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살리시고 일으키셔서 그 앞에 서게 하신다(호 6:2).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살리시고 제삼일에 일으키신다. 먼저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신 뒤 다시 살게 하시며, 마침내 일으켜 주신다. 여기서 일으킨다는 말은 부활(復活, resurrection)의 소망을 향한다. 초림(初臨, first coming)하신 주님은 죄에 매인 우리를 살려 주시고,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를 일으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약속은 잠시 상처만 덮어 두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주님 앞에서 살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4. 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며 부활하심으로 살리시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새인들이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주님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셨다. 오늘과 내일 하실 일과 제삼일에 이루실 일을 구분하여 말씀하신다(눅 13:31-33). 호세아서에서 이틀 뒤에 살리고 제삼일에 일으킨다고 한 말씀을 주님의 삶에서 보라(눅 13:32).
눅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어떻게 사람을 살리시는가?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심으로 사람을 살리셨다. 이어 제삼일에 완전하여지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따라 주님의 공생애를 보면 처음의 사역에서는 귀신 들린 자와 병든 자를 살리시고, 마침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살리시는 사명을 완성하신다. 첫해와 둘째 해의 치유와 축사(逐邪, deliverance), 셋째 해에 이르는 죽음과 부활의 길을 함께 보아야 한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그 사명의 길을 계속 걸어가셨다(눅 13:33).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림을 받는가? 죄와 악한 영의 문제를 외면한 채 겉의 고통만 덮어 두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 돌아와 자신과 조상의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무당과 점쟁이를 의지했던 죄를 끊어야 한다. 무당의 영이 떠나야 귀신이 쫓겨나고, 조상의 영이 떠나야 병이 낫는다. 회개는 몇 마디 형식적인 말로 끝내는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은 죄를 진실하게 자백하고, 반복해 쌓인 죄와 영의 문제를 끈기 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때 살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삶에 나타난다.
북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어도 바알에게 돌아가듯, 사람도 한 번 주님을 찾고서 다시 옛 의지처로 돌아가기 쉽다. 무당과 점쟁이를 섬긴 죄, 조상 제사에 마음을 내준 죄를 남겨 둔 채 악한 영에게 나가라고만 하면 문제의 뿌리가 그대로 남는다. 돌아가자는 호세아의 외침은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외침이다. 그래서 회개할 때는 무엇을 섬겼고 누구에게 도움을 구했는지 분명히 고백해야 한다. 진실한 자백과 계속되는 회개를 지나 주님께 온전히 돌아와야 한다. 치유를 바랄 때도 그분이 왜 먼저 돌아오라고 하시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이 너무 괴로워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그때 주님이 살리러 오셨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필자가 목회 현장에서 본 박카록 성도는 뇌에 큰 문제가 생기고 출혈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실려 갔으나 다시 일어섰다. 이처럼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악한 영에 눌린 자를 놓아주시는 분이다.
고난은 끝이 막힌 굴과 같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길은 지나가는 터널과 같다. 터널 안은 어둡지만 그 끝에는 다시 빛이 있다. 지금 겪는 괴로움이 마지막 장면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오늘 사람을 살리시며 마침내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둠 속에서도 살리러 오신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5. 호세아의 “내 아들”과 출애굽기의 “내 장자”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무엇을 떠올리는가?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말하면 이 이름에 담긴 사명을 놓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그분이 아버지보다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하나님의 일을 맡아 그분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대사처럼 세상에 오신 분이다. 이를 알려면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부터 보아야 한다.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셨다. 그런데 그 아들은 부름을 받고도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바알에게 제사하고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했다(호 11:2). 사랑을 받아 애굽에서 나온 자가 다시 애굽의 신을 따라간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6장에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말씀과 11장에서 아들을 불러냈다는 말씀은 서로 연결된다. 아들이라고 불렸다는 자격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르신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을 섬겨야 한다(호 11:1).
호세아의 말씀은 출애굽 때 바로에게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들, 자신의 장자라고 정의하셨다. 이어 바로에게 그 아들을 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고 명하시고, 보내기를 거절하면 바로의 장자를 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출 4:22-23). 애굽의 권세는 하나님의 아들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여기서 아들은 부름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자이며, 장자는 뒤에 기업을 이을 자다. 보내심과 불러내심을 함께 보라. 아버지는 목적을 가지고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고, 사명을 이루게 하신 뒤 다시 부르신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애굽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 세상에 갇힌 자를 살리시려는 것이다. 아들은 그곳에 영원히 갇혀 죽도록 보내진 자가 아니다. 맡은 사명을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자다.
예수님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이 말씀은 다시 울린다.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자 요셉은 주의 천사가 알려 준 대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했다. 헤롯이 죽은 뒤 다시 나오자 마태는 애굽에서 아들을 불렀다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했다(마 2:13-15). 예수님은 애굽으로 가셨다가 다시 불러내심을 받으셨다. 그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뜻을 보아야 한다. 아들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다시 부르시는 분이다.
왜 하필 애굽인가? 옛 이스라엘을 붙들어 두었던 애굽은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을 보여 주고, 예수님이 어린 시절 실제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알게 하시려는 뜻을 여기서 읽는다. 그분은 도망쳐 숨어만 계신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품고 계신다. 그곳을 떠나 돌아오실 때에는 아들의 길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실 사명이 계속된다. 그래서 호세아의 한 문장과 마태가 전한 어린 예수님의 길은 함께 읽어야 한다.
6.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사명으로 세상에 보냄받았으며, 어떻게 상속자와 왕이 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주님은 제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이를 영접한다고 하셨다(마 10:40). 보내심을 받은 이는 보낸 분의 일을 들고 간다. 또 예수님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하셨다(요 8:42). 이 보내심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목적을 가지고 파송한다는 뜻을 지닌다. 아들이란 이름에 파송과 사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저 신분을 얻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의 가정과 교회와 시대에 보내셨는가? 믿지 않는 이들이 있는 집안에 먼저 회개의 길을 듣게 하셨다면 거기에는 맡기신 일이 있다. 애굽 같은 세상 가운데 주님의 소식을 전하고, 죄와 악한 영의 권세에서 사람을 건지는 일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돌아가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영원히 세상에 머물 자가 아니다. 주님은 당신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시려 한다. 우리의 몸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났지만, 영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보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끝날 존재가 아니라 돌아갈 본향이 있는 존재다. 지금의 삶에서 이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두려움에 묶인 종으로 살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롬 8:15-16). 그러나 아들이라는 이름은 고난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자녀는 후사, 곧 상속자(相續者, heir)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이어 말한다(롬 8:17-18).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장자는 기업을 받을 자다. 더 나아가 이기는 자는 왕 노릇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간다. 이기는 자가 이스라엘로 불리고 장자의 기업을 받는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신과 함께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3:21). 보좌는 다스림과 심판의 자리다. 사명을 완수한 자를 아버지께서 다시 부르시고, 이기는 자에게 기업을 물려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담긴 마지막 소망이다. 오늘의 고난만 보면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영광의 약속을 보면 끝까지 회개하고 믿음을 지킬 힘이 생긴다.
그 약속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회개의 말씀을 짐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먼저 듣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으로 보냄받은 자가 세상에 매여 살 수는 없다. 귀신이 회개를 가로막고 여러 어려움을 일으켜도 주님의 부르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처음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싸움이 시작될 때 오히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기억해야 한다. 장자의 복은 이름만 붙여 놓은 칭호가 아니다. 이겨서 기업을 받을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7.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그 열쇠를 가지셨는가?
세상에 파송된 아들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시려면 무엇을 이겨야 하는가? 마귀가 붙든 가장 큰 권세는 사망이다(히 2:14).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죄를 지은 자를 사망이 붙들고, 그 뒤를 음부가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사망만 잠깐 피하게 하는 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낼 분이어야 한다. 호세아는 바로 그 약속을 들려준다(호 13:14).
호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속량은 값을 치르고 사 오는 일이다. 죄의 권세 아래 붙잡힌 사람을 그냥 놓으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구속자가 값을 치르고 건져 낸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 곧 가까운 이를 되찾는 구속자가 되셨다. 이사야도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을 선포한다(사 25:8). 호세아가 음부에서 속량하고 사망에서 구속하겠다고 한 약속은 사망을 멸하시는 주님에게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께 넘어왔는가? 마귀는 죄를 지은 자에게 사망의 권세를 사용한다. 예수님께도 광야에서 시험을 걸었으나 주님은 세 번의 시험을 모두 이기셨다(마 4:1-11). 그 뒤에는 거짓 고소로 주님을 죽이려 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권세가 얽히고,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군중 앞에서 그분을 넘겨주었다. 바라바가 놓였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과 제자들까지 두려움 속에 그분 곁을 떠났다.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걸으셨다.
광야에서 마귀는 주님의 배고픔을 붙잡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 했으며,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고, 세상의 영광을 내보이며 자기에게 절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시험도 주님을 죄에 빠뜨리지 못했다. 사망 권세를 사용하려면 먼저 죄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에게서는 틈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거짓 고소로 방향을 바꾸었다. 안식일 문제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주장,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운다는 말씀까지 왜곡했다. 끝내 죄 없는 분을 죽음에 넘겼으나 그 죄 없음이 도리어 마귀의 패배를 결정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다. 죄가 없는 분을 사망에 넘긴 것은 마귀가 자기 권세를 불법으로 사용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그 손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님께 돌아왔다. 이 영적 권세의 전환을 보아야 십자가가 왜 우리의 생명과 연결되는지 알 수 있다. 주님은 죽음을 피해서만 승리하신 것이 아니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심으로 사망이 더는 자신을 붙들 수 없음을 드러내셨다.
십자가 곁에서 누가 주님을 지켰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빌라도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그분을 넘겨주었고, 지도자들은 거짓 고소를 멈추지 않았다. 혜택을 받은 많은 사람도 주님을 위해 나서지 못했다. 제자들까지 흩어졌으니 주님은 외로이 사명을 감당하셨다. 은혜를 입고도 위험이 닥치면 등을 돌리는 사람의 모습을 여기서 본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지켜야 할 때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죄 없으신 분의 죽음은 사람들의 배반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길이 되었다.
사도 요한이 영광 중에 나타나신 주님 앞에 엎드러졌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살아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계 1:17-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세세토록 살아 계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사망에서 우리를 구속하리라고 하신 호세아의 약속이 가리키는 분이다.
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열쇠는 권세를 뜻한다. 사망도 음부도 이제 최후의 주인이 아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사망과 음부까지 불못에 던져진다. 불못은 둘째 사망이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그곳에 던져진다(계 20:14-15). 지금의 음부와 최후의 불못을 하나로 뭉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에 사망과 음부가 불못에 던져지는 순서까지 보아야 한다. 주님은 그 모든 권세의 마지막을 정하실 분이다.
8.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를 믿는 성도는 고난 속에서 어떻게 끝까지 이길 수 있는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예수님께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셨다(마 16:18).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건지러 오셨다는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 믿음으로 회개하며 끝까지 간다면 음부가 주님의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없다.
고난이 닥치면 마귀는 이제 끝이라고 속삭인다. 회개를 시작할 때는 기쁘게 나아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가로막는 어려움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때가 믿음을 버릴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회개의 길을 알게 하셨다면 그 자리에는 맡기신 사명이 있다.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말고 집안과 교회 가운데 주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서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 주실 장자의 기업과 보좌를 바라보며 견디어야 한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 곁을 떠나 바알을 따랐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돌아올 길을 보여 주셨다. 앞서 살핀 남편과 신랑의 약속도 여기서 다시 만난다. 하나님은 떠난 백성을 사 오시고 다시 혼인하시겠다고 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요 4:1-26). 소망이 없어 보였던 북이스라엘의 후손에게도 주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리셨다. 호세아서는 그래서 복음서의 복음서와 같다. 다윗의 왕, 남편과 신랑, 살리시는 이, 하나님의 아들,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가 모두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한쪽에서는 살리러 오신 주님을 말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무당과 다른 신을 찾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만 믿고 따라야 한다. 주님의 보호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죄를 회개하며 맡기신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현재의 환난과 핍박, 악한 영의 공격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굴이 아니라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주님의 손을 놓지 말고 끝까지 통과해야 한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주님의 사람의 소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26). 지금은 어려움 속에서도 살리시는 주님을 만나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날을 바라본다. 우리의 미래를 정하는 것은 지금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는 믿음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그분의 허락 없이는 어떤 권세도 우리 생명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없다는 각오로 서야 한다.
9. 나오며
호세아서가 보여 주는 살리시는 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망과 음부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았다. 여호와께서는 떠난 백성을 치시고 찢으셨으나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돌아오라고 부르셨고, 낫게 하고 싸매며 이틀 후에 살리고 제삼일에 일으키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시며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그 살리시는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못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신 분이며,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다시 돌아가실 분이다. 호세아가 말한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과 출애굽기가 말한 장자는 그 이름에 담긴 파송, 귀환, 상속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보냄받았다. 고난을 피하기만 바라지 말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과 함께할 기업과 보좌의 약속이 있다.
무엇보다 주님은 죄 없이 죽으셨다가 살아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 그분이 구속자이시므로 음부의 권세가 주님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 지금의 아픔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터널의 어둠 속에서도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살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회개하며 믿음을 지키고, 다른 신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며, 끝까지 이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살리시는 주님을 굳게 붙들고 하늘의 기업을 이어받아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02일(금) · 정보배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