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0(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세대주의(03)]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02)(갈3:28~29)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HHiiIoDYH50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7가지 질문]
1. 세대주의는 왜 생겨났으며 이스라엘과 교회를 어떻게 나누는가?
2. 대체신학은 무엇이며 세 가지 유형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3. 호세아의 ‘내 백성 아닌 자’를 바울은 누구로 해석했는가?
4.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어떻게 한 백성으로 만드셨는가?
5. 대체신학이 성경 해석에 기여한 점은 무엇인가?
6. 대체신학과 세대주의는 각각 어떤 극단에 빠졌는가?
7. 구약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확장되는가?
[설교핵심]
이 설교는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의 한계와 위험성을 비판하며 복음의 본질을 회복할 것을 강조합니다.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유대인 중심의 지상 왕국과 제사 회복을 주장하지만, 정보배 목사는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신약의 원리에 역행하는 논리로 규정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대체 신학과 이스라엘을 영원히 구별하는 세대주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모든 구약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확장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혈통적 유대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바른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세대주의(03)
세대주의의 성경해석법,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02)
(갈 3:28-29)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오늘은 세대주의의 성경 해석법이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두 번째로 살펴본다. 세대주의는 인류 역사를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따라 여러 시대로 나누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끝까지 구별한다.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 정부 시대, 약속 시대, 율법 시대, 은혜와 교회 시대, 천년왕국 시대라는 구분이 대표적이다. 존 넬슨 다비에게서 시작된 흐름은 스코필드의 관주성경을 거치며 널리 퍼졌고, 미국의 세대주의와 중국에서 들어온 지방교회 계열의 가르침으로도 전해졌다.
세대주의는 왜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는가? 이스라엘은 땅의 백성이고 교회는 하늘의 백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 예루살렘, 다윗의 왕위, 성전과 제사가 문자적으로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난 전 휴거 뒤에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천년왕국에서 유대인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성전 제사를 다시 드린다는 주장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말한다(엡 2:14-15). 구약의 약속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모든 믿는 자에게 확장되었다.
반대로 대체신학(代替神學, replacement theology)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교회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에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보는 공헌이 있지만, 이스라엘을 저주받은 민족으로 여기고 배척하는 반유대주의로 나아간 잘못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대체신학과 지나친 세대주의를 모두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대주의와 대체신학의 발생 배경과 공헌과 한계를 살펴보고, 구약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확장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세대주의는 왜 생겨났으며 이스라엘과 교회를 어떻게 나누는가?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사람을 다르게 다스리셨다고 보는 신학 체계다. 다비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로 일하면서 국가가 목사를 임명하고 교구를 나누며,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없는 사람이 제도에 따라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교회 제도에 깊이 실망했고, 성령을 모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들이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형제교회의 배경이며, 교회가 무너진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19세기에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적그리스도, 유대인의 회복,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구하는 일이 활발했다. 1844년 재림을 주장한 운동처럼 특정한 때를 계산하는 일도 있었다. 다비와 그 후대 사람들은 이런 연구를 종합하면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는 체계를 세워 갔다. 후대의 스코필드는 이를 일곱 시대의 관주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환난 전 휴거와 천년왕국에 관한 세부 시간표도 발전했다.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을 땅의 백성으로, 교회를 하늘의 백성으로 구분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기업으로 보고, 예루살렘이 지상의 영원한 도성이 되며, 다윗과 같은 왕이 다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한다. 에스겔 성전이 실제로 세워지고 희생 제사가 회복되어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더 좋은 본향과 하늘의 성을 바라보게 하는 모형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의 땅에 살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히 11:8-16). 그들이 찾은 본향은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었다. 다윗에게 약속된 왕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참된 왕이 되셨고,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 18:36).
세대주의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하는 근거로 ‘비밀’을 강조하는 것도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방인도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며, 함께 약속에 참여한다고 말한다(엡 3:6). 이 비밀은 구약 시대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때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3. 대체신학은 무엇이며 세 가지 유형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대체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교회로 확장되었다고 보는 신학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나라를 빼앗아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는다.
이 주장은 세 가지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징벌적 대체신학이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메시아를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교회를 선택하셨다고 본다. 둘째는 경륜적 대체신학이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를 계획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을 임시로 사용하셨다가 교회가 세워진 뒤에는 버리셨다고 본다. 셋째는 구조적 대체신학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창조, 타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교회, 새 하늘과 새 땅의 구조로 이해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그 구조 안의 독립된 종말론적 백성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이 성취된다는 방향을 가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단순히 껌처럼 사용하다가 뱉어 버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호세아서를 보면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음행했어도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계속 부르셨다. 하나님은 한 번 사랑하신 백성을 쉽게 폐기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스라엘에서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육신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도 아니고,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고 했다(롬 9:6-8).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약속의 성취가 혈통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해 모든 것을 빼앗았다고 말하는 것도 과하고, 이스라엘에게만 약속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도 과하다.
4. 호세아의 ‘내 백성 아닌 자’를 바울은 누구로 해석했는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세 자녀의 이름으로 보여 주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피를 갚고 그 나라를 폐하실 것을 뜻했다(호 1:4-5).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였다(호 1:6).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곧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었다(호 1:9). 북이스라엘은 송아지 우상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하나님을 떠났고, 앗수르에 멸망하여 여러 민족과 섞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셨다. 호세아 2장 23절은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너는 내 백성이라” 하시겠다고 약속한다. 호세아 1장 10절도 전에 내 백성이 아니라고 했던 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마지막 때 다시 민족적으로 회복된다는 해석도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방인에게 적용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다고 했다(롬 9:19-24). 따라서 “내 백성 아닌 자”는 이방인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자를 가리킨다.
누가복음 2장에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가 나온다(눅 2:36).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의 후손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마지막 때 육적 이스라엘이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해석 중심은 사도 바울의 복음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했다.
5.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어떻게 한 백성으로 만드셨는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다(갈 3:28-29). 혈통과 할례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다.
에베소서 2장은 이방인이 원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며, 둘로 하나를 만드셔서 원수 된 것과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엡 2:11-15).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받는 두 종류의 백성으로 끝까지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허신 담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비밀은 이방인들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엡 3:2-6). 교회는 유대인만의 몸도 아니고 이방인만의 몸도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쳐진 새 사람이다. 이 교회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이슬람 사람이나 유대인이나 어느 민족도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북한에서 태어났다고 모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교단에 속했다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소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 이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하며, 누구든지 주 예수께 나아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6. 대체신학이 성경 해석에 기여한 점은 무엇인가?
대체신학은 지나친 반유대주의로 나아간 약점이 있지만,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게 했다는 큰 공헌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후 1:20). 구약의 성전, 제사, 제사장, 예루살렘, 가나안 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모형이었다.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켰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는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가 성전이 되었다(요 2:19-21; 고전 3:16). 구약의 반복되는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완성되었다(히 9:11-14; 10:10-14). 레위 지파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린다(벧전 2:5, 9).
예루살렘도 이 땅의 정치적 수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으며, 믿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했다(히 11:10, 13-16). 가나안 땅은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게 하는 표지였다. 그러므로 구약의 약속을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영토 문제와 동일시하여 이스라엘이 무조건 그 땅을 영원히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대체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도 분명히 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고 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29절은 혈통의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의 상속자라고 한다. 이 때문에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특정 민족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대체신학은 성경의 중심을 민족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겼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언한다고 하셨다(요 5:39). 구약을 유대인의 경전이라고 버리고 신약만 읽는 것도 잘못이지만, 구약의 모든 약속을 민족적 이스라엘에게만 돌리는 것도 잘못이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모든 믿는 자에게 풍성하게 확장된다.
7. 대체신학과 세대주의는 각각 어떤 극단에 빠졌는가?
우리는 먼저 강한 대체신학의 극단을 거부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끝났고, 저주받은 민족이며, 없어져도 되고,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므로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복음이 아니며,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적 비극을 정당화할 수 없다. 유대인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긍휼을 거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지나친 세대주의도 거부해야 한다. 교회와 이스라엘이 끝까지 완전히 다른 두 백성이고, 이스라엘만 땅의 백성으로 남아 천년왕국에서 성전 제사를 다시 드린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부정하게 된다. 예수님이 오신 뒤에는 민족과 혈통에 따른 특별한 구원의 통로가 남아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을 문자적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을 무시하고 억지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과 복은 순종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약속의 자녀가 그 말씀을 이어받아 성취하기 때문이다(롬 9:6-8).
교회도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원감람나무가 아니라 돌감람나무로서 뿌리의 진액에 참여한 자다. 원가지도 믿지 않으면 꺾였으므로, 우리도 자만하지 말고 두려워해야 한다(롬 11:17-21). 이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유대인과 이슬람 사람을 멸시하거나 정치적으로 특정 민족을 무조건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구원받도록 도와야 한다.
이스라엘 중심의 세대주의와 교회 중심의 반유대주의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 됨을 온전히 붙들지 못한다. 한쪽은 유대인을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쪽은 유대인을 지나치게 낮춘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한 몸으로 부르며, 누구든지 믿는 자를 약속의 상속자로 세운다.
8. 구약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확장되는가?
구약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확장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단지 팔레스타인의 땅을 소유하는 약속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16, 29).
이스라엘이 맡았던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교회 안에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은 열방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했지만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 맺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셨다(마 21:43).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민족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것이다(마 28:19-20).
호세아의 말씀처럼 내 백성 아닌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로암미가 암미가 되고, 로루하마가 긍휼을 받는 자가 된다(호 1:10; 2:23). 이것은 혈통의 회복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사람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은 놀라운 은혜다. 우리가 구약을 버려서도 안 되고, 이스라엘에게만 약속을 돌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뿌리의 진액을 받아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교회 가운데 거니시며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다(계 1:12-13, 20). 촛대는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완성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마지막 시대에는 이 교회를 통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이슬람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의 벽은 허물어졌고, 모두가 하늘의 기업을 받을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 민족의 정치적 회복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붙들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그 약속을 맡은 사람은 충성으로 응답해야 한다. 교회가 거룩한 신부가 되고, 악한 영을 몰아내며, 모든 민족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경륜이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난다.
세대주의는 단순히 시대를 나누는 공부가 아니다. 시대를 나누는 방식이 구원의 백성을 나누는 방식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율법 시대와 은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성경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유대인은 율법으로 구원받고 이방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나누면 복음의 중심에서 벗어난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그 약속에 참여한다(창 15:6; 롬 4:9-12).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세대주의가 말하는 하늘의 백성과 땅의 백성이라는 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대적인 벽이 될 수 없다. 성경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것을 말한다(엡 1:10). 교회가 하늘의 복을 받고 이스라엘이 땅의 복을 받는 두 구원 체계가 아니라, 한 주님을 믿는 자들이 한 몸으로 부름받아 하늘의 기업을 바라본다. 땅의 약속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게 하는 방향으로 완성된다.
대체신학의 세 유형을 구분하는 이유는 모든 대체신학을 한꺼번에 정죄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다. 징벌적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지만, 그 심판을 민족 전체에 대한 영원한 폐기로 확대한다. 경륜적 대체신학은 교회의 영원한 계획을 잘 보지만 이스라엘을 단지 임시 도구로 축소한다. 구조적 대체신학은 구원의 전체 구조를 정리하지만, 하나님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기다리신 사실을 놓칠 수 있다. 그러므로 구별은 필요하지만, 사랑과 약속을 지우는 구별은 옳지 않다.
호세아의 자녀 이름은 하나님께서 죄를 가볍게 여기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스르엘은 피의 심판을, 로루하마는 긍휼의 중단을, 로암미는 언약 관계의 파괴를 보여 준다. 그런데 그 심판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다시 이름을 바꾸실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말씀으로 끝내지 않고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신다(호 1:10). 이 회복의 말씀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도 열어 주어진 복음으로 증거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의 행동도 이 경계를 허무는 사건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혼혈족으로 멸시했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셨고 그 여인에게 생수를 약속하셨다(요 4:4-14). 예배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 하는 논쟁을 넘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다고 하셨다(요 4:21-24). 이제 혈통과 지역이 예배의 자격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중심이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자랑할 이유가 없다.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너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고 상기시킨 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졌다고 말한다(엡 2:12-13). 이 은혜를 기억하면 유대인을 멸시할 수 없고, 이슬람 사람을 증오할 수도 없다. 받은 은혜가 크므로 더 많은 사람을 품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대체신학이 제사 제도의 완성을 강조한 것도 중요하다.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다시 동물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면 십자가의 완전성을 약화시키게 된다. 구약의 제사가 가리키던 실체가 이미 오셨고, 그분의 단번의 제사로 죄 사함의 길이 열렸다. 교회는 제사를 반복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히 13:15).
또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은 교회가 자기 이름을 높이라는 뜻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왕처럼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거룩한 삶으로 섬기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교회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한다고 했다(벧전 2:9). 그러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말을 자랑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명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더 큰 책임을 받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성경의 이름으로 무조건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는다는 이유로 현재의 모든 정치적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다. 땅의 주권과 국제정치의 문제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다루어야 하며, 교회는 어느 민족의 폭력도 성경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도 팔레스타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모두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고집을 강제로 꺾어 약속을 이루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북이스라엘은 선지자의 말을 거절했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흩어졌다. 남유다도 회개하지 않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약속의 씨를 일으키셨다. 약속은 혈통의 자랑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자 안에서 이어진다. 이것이 로마서 9장이 말하는 약속의 자녀다.
우리도 언제든지 교만해질 수 있다. “나는 교회에 속했으니 무조건 안전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은혜를 자기 소유로 바꾼다. 바울은 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 돌감람나무인 우리도 아끼지 않으실 수 있다고 경고했다(롬 11:21).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을 정죄하는 대신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음과 순종을 끝까지 지켜야 하며, 받은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구약의 약속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원래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에게 미쳤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고(창 12:3), 바울은 그 약속이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설명한다(갈 3:8). 그러므로 확장은 원래 약속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하나님의 본래 목적에 따라 더 넓게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면, 교회의 선교도 민족 차별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 순서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준다(행 1:8). 어느 민족을 더 귀하게 여기거나 덜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우리부터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야 한다. 교단의 이름이나 민족적 배경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필자도 목사직을 받은 교단을 귀하게 여기지만, 소속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개인의 믿음과 교회 공동체의 믿음,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사람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이 진리를 붙들고 촛대를 지켜야 한다. 주님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며 교회에게 말씀하신다(계 1:12-20). 촛대가 교회에 옮겨졌다는 것은 교회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뜻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실 수 있고, 믿음을 지키면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출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벽을 허물고, 거룩함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결론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 확장되었다. 이 약속을 받은 사람은 자신만 복 받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자녀가 되도록 섬겨야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목적이며, 교회가 받은 제사장 나라의 사명이다. 이 사명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세대주의의 혼란과 대체신학의 교만을 함께 넘어설 수 있다.
이 원칙은 우리의 예배와 선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배당의 이름이나 국가의 경계가 하나님의 임재를 독점하지 못한다. 주님을 믿는 곳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규모나 민족의 숫자를 자랑하지 않고, 진리와 사랑과 순종으로 주님의 몸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이 성취되고 확장된다는 말의 실제 의미다. 우리는 이 진리를 다음 세대에도 바르게 전해야 한다.
이 복음의 질서는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특정 민족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겸손히 서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약속의 자녀가 되도록 섬겨야 한다.
9. 나오며
우리는 세대주의가 왜 생겨났는지, 대체신학이 무엇이며 어떤 공헌과 한계를 지녔는지, 호세아의 ‘내 백성 아닌 자’를 바울이 이방인을 포함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시고, 구약의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여 교회와 모든 믿는 자에게 확장하셨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강한 대체신학에도 빠지지 말아야 하고, 교회와 이스라엘을 끝까지 두 백성으로 나누는 지나친 세대주의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도 구원받아야 하며, 이방인도 구원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의 상속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적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구약의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늘의 기업을 차지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20일(일)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