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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7. 03. (금)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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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eoUn1kt1QxA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39)] 다윗의 아들 솔로몬(17) 본받지 말아야 할 솔로몬의 다른 모습은 무엇이었나?(열왕기상10:21-1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eoUn1kt1QxA


 

 

1. 들어가며

  솔로몬은 이름부터 평화의 왕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의 평화, 평강을 뜻하는 ‘샬롬’ 계열과 연결된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안에도 ‘살렘’ 곧 평화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예루살렘은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전쟁과 분쟁을 겪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를 다윗의 성으로 삼으시고, 장차 하늘의 성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게 하셨는가? 그것은 참된 평화가 전쟁이 없는 외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원수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때 비로소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윗은 전쟁의 왕(정확히는 '전쟁에 능한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원수를 물리쳤고, 하나님이 주신 왕국의 터를 세웠다. 솔로몬은 그 터 위에 세워진 평화의 왕이었다. 그는 다윗이 피 흘려 싸워 얻은 평화를 누렸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지혜로 백성을 재판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여러 면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왜냐하면 그는 평화의 왕이었고 지혜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지만 그리스도 자체는 아니었다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참된 평화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지혜의 왕이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부터 뒤로 물러났으며, 성전을 건축했으나 성전이 가리키는 교회의 비밀대로 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누린 영광은 정말 눈부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영광 속에는 본받지 말아야 할 다른 모습도 있었다. 열왕기상 10장과 11장은 솔로몬에게는 은금과 말과 병거와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것들은 우연한 정보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 위에 세울 왕에게는 세 가지를 금하셨기 때문이다(신 17:16~17).. 그것은 곧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 말을 많이 두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이 그것을 범했다고 고발한다(왕상 10:21-11:13)

신 17:16~17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하며,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돌아서게 하지 말고, 은금도 지나치게 쌓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살필 때에는 부릅 뜬 두 눈이 필요하다. 한 눈으로는 그를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 눈으로는 그에게서 드러난 인간의 실패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예표자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이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했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남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솔로몬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는가?

  솔로몬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다윗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씨를 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일차적으로 이 말씀은 솔로몬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삼하 7:12~13).

삼하 7:12~13 네 날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내가 그의 왕위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솔로몬은 첫째로 평화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다윗은 전쟁을 통해 원수를 제압했고, 솔로몬은 그 결과로 평화를 누렸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의 시대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각기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말한다(왕상 4:24-25).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멸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참된 안식과 평강을 주실 것을 예표한다.

  둘째로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그는 재판하는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듣는 마음과 지혜를 주셨다(왕상 3:7-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시다. 솔로몬에게는 지혜가 주어졌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이다(마 12:42).

마 12:42 남방 여왕이 심판 때에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셋째로 솔로몬은 성전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했다(왕상 6:1-38). 그는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그 성전은 돌과 금과 백향목으로 된 건축물에 머물지 않는다. 그 성전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세우실 교회를 예표하기 때문이다(아가서). 그러므로 솔로몬을 볼 때 우리는 단지 고대 이스라엘의 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지혜로 심판하시며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지만 실체가 아니다. 솔로몬이 예표라면 예수님은 실체다. 솔로몬의 평화는 일시적이었으나 예수님의 평화는 영원하다. 솔로몬의 지혜는 받은 지혜였으나 예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솔로몬의 성전은 무너졌으나 예수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솔로몬의 영광도 바르게 해석되고, 솔로몬의 실패도 바르게 분별된다.

 
3. 성전 건축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표하는가?

  솔로몬의 가장 큰 업적은 성전 건축이었다. 그는 다윗이 준비한 재료와 유언을 따라 여호와의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장소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심이었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 성전의 의미는 더 깊어진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엡 1:22~23).

엡 1:22~23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예표한다. 바울은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고전 3:16).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전이 물질적 건물에서 인격적 성전으로 옮겨 간다는 점이다. 구약의 성전은 눈에 보이는 집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생명 주는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의 완성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성전을 지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큰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질문이 생긴다. 성전을 지은 사람이 과연 성전의 의미를 끝까지 알고 살았는가. 물질적 성전을 지은 사람이 참된 성전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비밀대로 살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솔로몬의 영광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아가서를 통해 그 성전의 영적 의미를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담겨 있다. 왕은 잃어버린 신부를 찾아오고, 신부는 왕의 사랑을 받아 왕궁에 들어가며, 마침내 왕의 동산에 거주하는 자로 성숙한다. 이것은 단지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찾고 세우고 성숙하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가곡시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아가서는 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의 영적 의미를 노래한 계시다. 그러나 솔로몬의 비극은 그가 이 계시를 받았음에도, 그 계시대로 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는 성전을 지었지만 자기 마음의 성전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신부의 정절을 노래했지만 자기 삶에서는 많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4. 아가서는 왜 솔로몬의 사적 연애담으로만 볼 수 없는가?

  아가서는 겉으로 보면 사랑 노래다. 히브리어 제목은 ‘쉬르 하쉬림’, 곧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잠언 3,000개를 말했고 노래 1,005편을 지었다고 기록한다. 그 많은 노래들 가운데 성경 안에 남은 대표적인 노래가 아가서다(왕상 4:32).

왕상 4:32 그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었다

  그러나 아가서를 단순히 솔로몬의 사적인 연애담으로만 읽으면 본문이 가진 영적 깊이를 잃어버린다. 실제 역사서에는 솔로몬의 많은 아내들이 언급되지만,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실제 왕비로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또한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로 기록된다(왕상 14:21).

왕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유다의 왕이 되었으니,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만일 아가서가 단순히 솔로몬이 가장 사랑한 실제 왕비의 역사 기록이라면, 그 여인의 이름과 그 자손의 위치가 역사서에 더 분명히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솔로몬의 개인적 애정사를 넘어, 성령의 감동 안에서 그리스도와 신부 교회의 비밀을 예표적으로 담은 가곡시로 읽어야 한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이름 자체가 솔로몬과 깊이 연결된다. 아가서의 흐름에서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으로 이해된다. 곧 솔로몬에게서 나온 짝, 솔로몬의 참된 배필을 가리킨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온 원리와도 연결된다. 아담에게 하와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듯, 솔로몬에게 술람미는 원래 잃어버렸던 참된 짝을 상징한다. 이 예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핵심은 “솔로몬이 어떤 여인을 사랑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신부를 찾으시는가”다. 왕에게는 왕비 60명과 후궁 80명과 무수한 처녀들이 있었지만(아 6:8),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불린 여인은 하나였다(아 6: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신부의 정절과 성숙과 동역의 차원을 보여 준다.

  또한 아가서의 문학적 성격은 성경 안에서 이미 암시된다. 아가서는 설명문이 아니라 노래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합창이 이어지고, 꽃과 나무와 동산과 포도원과 향품과 색깔이 신학적 상징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역사적 사실 여부의 차원에서만 묶어 두면 본문이 말하려는 깊은 뜻을 놓치게 된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실제 삶을 미화하려고 주어진 책이 아니라, 솔로몬이라는 왕의 틀을 통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 교회를 계시하려고 주어진 책이다. 그래서 아가서를 읽는 독자는 솔로몬의 사생활을 따라가려는 사람이 아니라, 솔로몬을 넘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예표는 예표자에게 머물면 오해가 되고, 실체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계시가 된다. 놋뱀을 바라본 자는 살았지만, 훗날 사람들이 놋뱀 자체를 섬기자 그것은 우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아야지, 솔로몬 자체를 이상화하면 안 된다. 아가서는 솔로몬을 높이려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노래하려는 책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실패를 보면서도 아가서의 계시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솔로몬의 실패는 예표자와 실체 사이의 차이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솔로몬의 실패가 더 아프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가서를 통해 한 신랑과 한 신부의 비밀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솔로몬은 실제 삶에서 한 신부만 사랑하는 길을 걷지 못했다. 그는 왕비와 후궁을 많이 두었고, 그 여인들의 신들과 요구에 마음을 내어 주었다. 그는 아가서의 신랑을 노래했지만, 그 신랑처럼 살지는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솔로몬에게서 본받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모습이다.

 
5. 솔로몬은 왕의 금지 명령 중 무엇을 어겼는가?

  솔로몬의 타락은 우연히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왕의 규례를 하나씩 어긴 결과였다. 신명기 17장은 왕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금지 명령을 말한다. 첫째, 말을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 둘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은금을 많이 쌓지 말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왕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하는 대표적인 통로다.

  그런데 열왕기상 10장과 11장은 솔로몬이 바로 이 세 가지를 모두 범했음을 보여 준다. 먼저 첫째로, 그는 은금을 지나치게 많이 쌓았다. 열왕기상 10장은 솔로몬 시대에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금이 많았다고 말한다. 왕의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고,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도 정금이었다(왕상 10:21).

왕상 10:21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고,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도 모두 순금이었다. 그 시대에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귀라면 감사함으로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금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금이 왕의 안전감이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금은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영혼이 붙들리면 우상이 된다.

  둘째로 솔로몬은 말과 병거를 많이 두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에게 병거와 마병이 많았고, 애굽에서 말이 들어왔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단지 군사력 증강이 아니다. 신명기 왕의 규례가 특별히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한 부분과 연결된다. 애굽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군사력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왕상 10:26,28).

왕상 10:26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었다. 왕이 그것들을 병거성들과 예루살렘 왕 곁에 두었다

왕상 10:28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들여왔으며 왕의 상인들이 값을 주고 사 왔다

  셋째로 솔로몬은 아내를 많이 두었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에게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 있었다고 기록한다. 왕의 결혼은 단순한 사생활이 아니었다. 많은 결혼은 정치적 동맹의 수단이었고, 이방 여인들은 자기 나라의 신들을 함께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왕에게 아내를 많이 두면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경고를 가볍게 여겼다(왕상 11:3).

왕상 11:3 그에게 왕비가 칠백 명이요 후궁이 삼백 명이었는데,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다

  세 가지 금지 명령은 오늘의 성도에게도 그대로 영적 원리가 된다. 은금은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말과 병거는 세상의 힘과 제도와 군사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많은 아내는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해야 할 마음이 여러 사랑으로 나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문자 그대로 왕이 아니더라도 이 세 가지 시험을 받는다. 돈이 많아지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할 수 있고, 힘이 생기면 기도보다 사람의 방법을 의지할 수 있으며, 관계가 넓어지면 주님 한 분을 향한 정절이 흐려질 수 있다. 솔로몬의 실패는 고대 왕궁 안의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성도의 마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다.

  여기서 솔로몬의 실패가 분명해진다. 그는 지혜를 많이 배웠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단순하게 순종하지 못했다. 지혜의 왕이었으나 지혜의 근본인 여호와 경외에서 흔들렸다. 성전을 지은 왕이었으나 자기 마음의 성전을 지키지 못했다. 평화의 왕이었으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우상숭배의 길을 열었다.

 
6. 이방 여인들은 어떻게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켰는가?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의 타락을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그가 늙었을 때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했고, 그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처럼 여호와께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왕상 11:4).

왕상 11:4 솔로몬이 늙었을 때에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그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아 여호와께 온전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단어는 “마음”이다. 솔로몬이 처음부터 성전을 버린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를 부인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조금씩 돌아섰다. 영적 타락은 대개 이렇게 온다. 갑자기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옆에 다른 사랑을 허용한다. 처음에는 정치적 필요라고 말하고, 다음에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우상에게 공간을 내어 준다.

  솔로몬은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과 밀곰같은 이방 신들을 따랐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을 지은 왕이면서 동시에 우상들의 산당을 세우는 왕이 되었다. 이것은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한 손으로 성전을 지은 사람이 다른 손으로 우상의 산당을 세웠다. 한 입으로 지혜를 말한 사람이 다른 삶으로 어리석음을 행했다. 한 노래로 술람미의 정절을 찬양한 사람이 실제 삶에서는 많은 이방 여인의 마음을 따라갔다(왕상 11:5~8).

왕상 11:5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가증한 신 밀곰을 따랐다

왕상 11:7 솔로몬이 예루살렘 앞 산에 모압의 가증한 신 그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세우고 암몬 자손의 가증한 신 몰록을 위하여도 그렇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늙었을 때’라는 표현도 두렵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젊을 때 받은 은혜만으로 끝까지 서는 것이 아니다. 젊을 때 뜨거웠어도 늙어서 마음이 식을 수 있고, 한때 성전을 위해 헌신했어도 말년에 우상에게 공간을 내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은 시작의 열심보다 끝의 충성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죄를 지었지만 통회하고 돌이켰다. 솔로몬은 큰 지혜를 받았지만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다. 성도는 은사를 받은 뒤에 더 두려워해야 하고, 쓰임을 받은 뒤에 더 회개해야 하며, 열매를 맺은 뒤에 더 겸손해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에게서 본받지 말아야 할 두 번째 모습이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삶으로 지키지 못했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일편단심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실제 삶은 일편단심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랑을 가졌으나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다. 많은 여인을 얻었으나 참된 짝의 비밀을 놓쳤다. 많은 신전을 허용했으나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는 성전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러나 다윗을 기억하셔서 그 나라를 솔로몬 생전에 찢지 않겠다고 하셨고, 그의 아들에게서도 한 지파를 남겨 두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지만 동시에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 준다. 솔로몬의 죄는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죄는 나라의 분열로 이어졌다(왕상 11:11~13).

왕상 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것을 행하고 내 언약과 율례를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왕상 11: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날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으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부귀와 영광만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의 부귀 속에 숨어 있던 위험을 보아야 한다. 그의 정치적 성공 뒤에 숨어 있던 영적 타협을 보아야 한다. 그의 많은 지식과 문화적 능력 속에 숨어 있던 하나님 경외의 결핍을 보아야 한다. 영적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노골적인 반역만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해야 할 마음이 조금씩 나뉘는 것이다.

 
7. 전도서는 솔로몬의 마지막 깨달음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솔로몬의 생애를 볼 때 우리는 한 가지 희망도 본다. 그는 타락했지만, 전도서의 마지막 고백 속에서 인생의 결론을 말한다. 전도서는 세상의 지혜와 부귀와 쾌락과 수고를 다 경험한 사람이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다. 그는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하나님 없이 누리는 모든 영광이 결국 헛되다는 고백이다.

  솔로몬은 많은 책을 지었고 많은 지식을 얻었으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누렸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해와 빛과 달과 별이 어둡기 전에, 곧 인생의 힘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전 12:1).

전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해야 한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할 해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그리해야 한다

  전도서의 결론은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것이다(전 12:13~14).

전 12:13~14 일의 결론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

  이 고백은 솔로몬이 말년에 깨달은 마지막 진리다. 그는 지혜를 얻었지만 지혜대로 살지 못했다. 그는 성전을 지었지만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끝까지 섬기지 못했다. 그는 아가서를 통해 신부의 일편단심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여러 여인의 마음과 여러 신의 유혹에 흔들렸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고백한다.

  이 점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경고이면서 동시에 교훈이다. 사람은 큰 은사를 받을 수 있다. 큰 지혜를 받을 수 있다. 큰 사명을 받을 수 있다. 성전을 짓는 엄청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붙들리지 않으면, 사람은 뒤로 물러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경외다. 업적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떨 줄 아는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의 꽃 하나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솔로몬의 영광이 하찮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생명의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영광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 준다(마 6:29).

마 6:2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

  결국 솔로몬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광을 주실 수 있는가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그 영광 속에서도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가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을 보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마지막 고백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로 돌아와야 한다.

 
8. 성도는 왜 뒤로 물러가지 말고 전진해야 하는가?

  솔로몬의 실패를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결론은 하나다. 신앙은 뒤로 물러가는 길이 아니다. 영의 세계에는 후퇴가 없다. 뒤로 물러가면 그것은 안전한 중립이 아니라 침륜을 향한 미끄러짐이 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뒤로 물러가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히 10:38~39).

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혼을 얻을 자들이다

  솔로몬은 뒤로 물러갔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 시작했다. 지혜를 구했고 성전을 지었다. 그러나 부귀와 군사력과 이방 여인의 유혹 앞에서 점점 뒤로 물러갔다. 처음에는 나라의 평화를 위한 결혼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지혜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배려와 포용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우상숭배가 있었다.

  성도에게도 같은 시험이 온다. 배우자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진리의 수준을 낮출 것인가. 가족이 불편해한다고 회개와 천국복음의 길에서 물러날 것인가. 세상이 부담스러워한다고 영적 전쟁을 멈출 것인가.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에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거룩해져야 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회개해야 하며,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앞서 걸어가야 한다.

  가족 구원의 문제도 이 원리 안에서 보아야 한다. 성도는 가족을 버리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족의 불신앙에 맞추어 자신의 영적 걸음을 낮추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불신 가족을 구원하려면 먼저 믿는 자가 더 분명히 서야 한다. 회개하는 삶, 변해 가는 성품, 흔들리지 않는 예배, 거짓 없는 말,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가 가족에게 증거가 된다. 말로 설득할 수 없을 때 삶이 증언해야 하고, 삶으로도 시간이 걸릴 때 기도가 길을 열어야 한다.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집이 구원받을 길이 열리는 것은 믿는 자가 뒤로 물러가서가 아니라, 믿는 자가 먼저 생명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행 16:31).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믿음의 길은 끌려가는 길이 아니라 이끌어 가는 길이다. 물론 성도는 교만하게 가족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리를 낮추어 모두를 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내가 먼저 변화되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회개하여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내며, 내가 기도하여 가족이 언젠가 돌아올 길을 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했다. 이것이 성도의 방향이다(빌 3:13~14).

빌 3:13~14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얻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

  전진하는 신앙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신앙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회개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 주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받은 은혜에 머물지 말고, 아직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솔로몬의 실패는 우리에게 말한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성전을 지었다고 성전의 영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지혜를 받았다고 끝까지 지혜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끝까지 신부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 길은 혼자만의 길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전진하면 가족이 따라올 길이 열린다. 내가 뒤로 물러가면 가족도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지 않는 가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그 가족에게 맞추어 신앙을 후퇴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기도와 회개와 변화된 삶으로 끌어가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실제적 교훈이다.

 
9. 나오며

  솔로몬에게서 무엇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 왕이었고,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며 성전 건축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받은 계시대로 끝까지 살지 못했다. 성전을 지었으나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고, 아가서를 통해 한 신부의 정절을 노래했으나 실제 삶에서는 많은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금하신 은금의 축적과 말과 병거의 의지와 많은 아내를 두는 일을 모두 범했으며, 결국 우상숭배의 길을 걷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만 보지 말아야 한다. 그의 실패를 보아야 한다. 큰 은사와 큰 사명과 큰 업적이 있어도 사람이 뒤로 물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성도는 신앙의 기준을 세상이나 가족이나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낮추지 말아야 한다. 사랑해야 하지만 타협하지 않아야 하며, 기다려야 하지만 후퇴하지 않아야 한다.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서는 더 회개해야 하고, 더 거룩해져야 하며, 더 변화된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게 된다.

  솔로몬의 마지막 고백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더 알고, 그리스도의 뜻을 더 따르며,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 사모하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믿음으로 가족과 이웃까지 생명의 길로 이끄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02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약의 솔로몬 왕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그가 보여준 영적 타락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신앙의 전진성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성전을 건축하고 지혜를 드러냈으나, 결국 수많은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며 우상 숭배에 빠지는 치명적인 영적 퇴보를 겪었다고 설명합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말년에 전도서를 통해 회개함으로써 간신히 구원에 이르렀음을 시사하며,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에서 뒤로 물러나지 말고 오직 천국을 향한 푯대를 바라보며 전진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의 변화된 삶과 지조 있는 믿음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후손까지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통로가 됨을 일깨우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설교요약]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한 왕이었다. 그는 평화의 왕이었고 지혜의 왕이었으며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예표한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다. 그는 아가서를 통해 한 신랑과 한 신부의 정절과 사랑을 노래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많은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금하신 금은의 축적, 말과 병거의 의지, 많은 아내를 두는 일을 그는 모두 범했다. 그 결과 그의 마음은 여호와에게서 돌아섰고, 그는 이방 신들을 위한 산당까지 세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셔서 그를 즉시 멸하지 않으셨고, 솔로몬은 말년에 전도서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실패를 경계해야 한다. 신앙은 가족이나 세상에 맞추어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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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투박한 요약 글).

제목: [기독론(139)] 다윗의 아들 솔로몬(17) 본받지 말아야 할 솔로몬의 다른 모습은 무엇이었나?(열왕기상10:21-1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솔로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평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옛 이름인 살렘 또한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평화를 뜻한다. 그런데 역사상 예루살렘만큼 많은 전쟁을 겪은 도시도 드물어서, 그 땅에서 일어난 전쟁이 무려 삼천 번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바람 잘 날 없던 그 땅을 하나님이 평화의 도시라 부르신 이유는 다름 아니라 다윗 때문이다. 다윗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시온 산성을 찾아내어 그곳을 예루살렘으로 삼았고, 그로 인하여 하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과 장차 임할 새 예루살렘 성까지도 다윗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게 되었다. 수많은 전쟁의 상흔이 있는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도시를 끝까지 평화의 도시라 부르신 것은, 결국 그 땅의 참된 평화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윗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이 되었기에,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거듭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다. 맹인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외친 말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스스로를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 밝히시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계 22:16, 계 3:7).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은 장차 임할 새 예루살렘을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훗날 살펴볼 아가서의 신부 이미지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계 21:2).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히브리서 또한 오늘의 성도들이 이미 영적으로 이르러 있는 곳을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선언한다 (히 12:22).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그런데 정작 다윗의 친아들의 이름은 솔로몬이었다.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의 예표였을 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의 생애가 수백 년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그려 내는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 전체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아래 정교하게 짜여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솔로몬에게는 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을 건축한 왕이라는 영광스러운 모습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의 말년에 나타난 전혀 다른 모습, 곧 본받지 말아야 할 모습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왕상 10:21-11:13).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이 어떤 왕이었으며, 그가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고, 또한 그가 어떻게 타락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솔로몬은 어떤 왕이었는가?(평화의 왕, 지혜의 왕, 성전을 건축한 왕)

  솔로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세 가지 대표적인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그는 평화의 왕이었다. 그의 이름 자체가 평화를 뜻하며, 다윗이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나라를 세운 것과 달리 솔로몬의 시대에는 큰 전쟁이 없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왕상 4:25).

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도 무력이 아니라 혼인 동맹을 통해 유지되었으니, 이는 뒤에서 다시 다룰 그의 많은 아내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로 왕 히람과도 무력이 아니라 조약으로 화친을 맺었다 (왕상 5:12).

왕상 5:12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므로 히람과 솔로몬이 서로 화친하여 그 두 사람이 서로 조약을 맺었더라

  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뒷받침되었기에 성전 건축이라는 대역사를 수행할 여력도 생길 수 있었다.

  둘째로 그는 지혜의 왕이었다. 성경은 그의 지혜의 근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왕상 4:29-31).

왕상 4:29-31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가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의 지혜에 대한 소문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멀리 남방 스바 땅까지 퍼져 나갔다. 스바의 여왕이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사건이 그 증거다 (왕상 10:1). 그러나 이 지혜는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의 지혜와 동방 사람의 지혜까지 폭넓게 흡수한 것이었다. 그가 남긴 잠언과 전도서를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빼놓으면 얼마든지 세상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처세훈과 격언들이 상당히 많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잠언은 지혜로운 말 한 마디를 이렇게 묘사한다 (잠 25:11).

잠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이러한 격언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처세의 지혜다. 이는 그의 지혜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와 혼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그의 방대한 저작을 이렇게 요약한다 (왕상 4:32-33).

왕상 4:32-33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도 말한지라

  셋째로 그는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 그는 스무 살에 왕위에 올라 스물네 살이 되던 해, 곧 주전 966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칠 년 만에 완공하였으니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이 세 가지 모습, 곧 평화의 왕과 지혜의 왕과 성전을 건축한 왕이라는 정체성이야말로 솔로몬이 다윗의 참된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3. 솔로몬은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며 그 나라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삼하 7:12-13).

삼하 7:12-13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이 언약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에게서 성취되었으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솔로몬 한 사람으로는 결코 다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곧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위와 영원한 성전, 곧 교회를 세우실 것을 미리 가리키는 예언이었던 것이다.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평화롭고 지혜로운 왕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성전을 건축한 왕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하셨으니,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행 2:1-4).

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더하여졌으니, 이는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행 2:41).

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이처럼 다윗이라는 그림자에서 솔로몬이라는 예표로, 그리고 예표에서 그리스도라는 실체로, 마침내 실체에서 교회라는 성취로 이어지는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에베소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엡 1:22-23).

엡 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여기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단지 그리스도께 속한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와 능력이 흘러넘치는 살아 있는 몸임을 보여준다. 같은 서신은 그 몸이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엡 4:13).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솔로몬 한 사람의 지혜와 영광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가 함께 자라 갈 때에만 이르게 되는 완성이다. 그런데 그 교회란 다름 아니라 성령이 들어와 생명을 주는 영으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다. 고린도전서는 이를 성전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확인시켜 준다 (고전 3:16).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 자신도 성전을 자기 육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직접 밝히신 적이 있다 (요 2:19, 21).

요 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구약의 성전과 성막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건물 하나를 웅장하게 세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실 일의 예표였던 것이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솔로몬이 그것을 완성한 구조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몸 된 교회를 세우시는 경륜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다윗은 생전에 성전을 직접 건축하지는 못하였으나, 아들을 위하여 건축 재료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대상 22:5).

대상 22:5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은 재료를 준비하였더라

  아버지가 준비하고 아들이 완성하는 이 구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속의 경륜을 예비하시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그 경륜을 완성하시어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성전이 완공되고 언약궤가 들어가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같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할 정도였다 (왕상 8:10-11).

왕상 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 장면은 훗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사건과도 맞닿아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솔로몬 자신은 봉헌 기도에서 이 성전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왕상 8:27).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계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리이까

  그는 이처럼 성전이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는 그릇에 불과함을 입술로는 고백하였으면서도, 정작 그 성전이 가리키는 참된 실체가 무엇인지는 끝내 삶으로 풀어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서도, 정작 그 성전이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다. 성전은 지어졌지만 그 성전이 상징하는 바, 곧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을 성령으로 감동하시어 아가서를 짓게 하셨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원제는 "쉬르 하쉬림"으로,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 최상급 표현이다. 이는 이 책이 단순한 연가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도 가장 고귀한 노래로 취급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물질적인 성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인격적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문학적인 작품으로 남기게 하신 것이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언젠가 무너지지만,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이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 노래는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에 남겨진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워낙 뛰어났기에 하나님이 그 재능을 사용하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솔로몬은 서른 살에 성전을 완공하였으니, 아가서 역시 그 무렵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전을 건축하는 왕이라면 마땅히 그 성전이 상징하는 바를 깊이 연구하여, 왕 된 자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고 왕비 된 자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늙어서는 아내들의 말을 따라 타락하였다고 기록한다. 아내들이 각기 자기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을 가지고 들어오자, 그 신들을 위한 신전까지 지어주고 그것을 섬기도록 허용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타락은 서른 살 무렵, 곧 성전을 완공한 이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전을 지었다는 사명은 이루었으나, 그 성전이 가리키는 실체,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삶으로 소개하는 사명은 끝내 다하지 못한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이 궁극적으로 가리켰던 실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간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마 27:51).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곧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해석해 준다 (히 10:19-20).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솔로몬이 지은 물질적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그 성전이 늘 가리켜 왔던 참된 실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살 길이 비로소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5. 아가서는 왜 가상의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가서를 실제 역사적 기록으로 읽으면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먼저 아가서에 등장하는 지명인 바알하몬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지명이다. 아가서 후반부에는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을 두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상징적인 지명이다 (아가 8:11).

아가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열매로 말미암아 은 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또한 아가서의 여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실명으로 등장하지 않고, 오직 "술람미 여자"라는 표현으로만 불릴 뿐이다. 이 여인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점점 깨닫게 되고, 마침내 당당한 전사와도 같은 신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예루살렘의 딸들과 더불어 노래를 주고받는다 (아가 6:13).

아가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구경하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구경하고자 하느냐

  또한 아가서의 신랑은 신부를 향하여 레바논에서부터 함께 가자고 노래한다 (아가 4:8).

아가 4: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며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이처럼 아가서의 지리적 배경은 예루살렘 남쪽이 아니라 북쪽의 레바논 산악 지대에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정작 솔로몬의 유일하게 이름이 밝혀진 왕후 나아마는 레바논이 아니라 동쪽의 암몬 사람이었으니, 지리적으로도 아가서의 신부와 나아마는 서로 다른 인물임이 분명해진다. 만일 솔로몬의 실제 아내 중 하나가 술람미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열왕기나 역대기의 족보 기록에도 마땅히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은 다윗이 왕위 계승자를 정한 방식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다윗은 죽기 전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밧세바에게 맹세한 대로 그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았다 (왕상 1:29-30).

왕상 1:29-30 왕이 이에 맹세하여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고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그가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이처럼 다윗은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다. 그렇다면 솔로몬도 만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면 마땅히 그 아들을 왕위에 앉혔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였으니, 이는 술람미 여인처럼 특별히 사랑받은 아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 증거가 된다. 솔로몬에게는 왕후가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여인들 가운데 이름이 밝혀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왕상 11:3).

왕상 11: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천 명에 가까운 여인들 가운데 실제로 첫날밤을 치른 이가 설령 백 명 정도였다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 어디에도 왕자들 사이의 왕위 다툼에 대한 기록이 없고, 오직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한 사람의 이름만 등장한다. 그 아들이 바로 르호보암이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유일하게 밝혀진 왕비 나아마다 (왕상 14:21).

왕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나아마는 암몬 사람이었으니 아가서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 지역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결국 성경에서 이름이 밝혀진 왕후는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의 어머니, 곧 족보를 기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했던 나아마 한 사람뿐이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아가서는 실제 있었던 특정 왕비와의 연애 사건을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영감을 주어 짓게 하신 가상의 문학 작품, 곧 노래 중의 노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솔로몬의 실제 부인들은 누구였는가?

  솔로몬 자신이 태어난 배경부터가 사랑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다윗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로하였던 아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삼하 12:24).

삼하 12: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이처럼 사랑으로 태어난 솔로몬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평생 그러한 사랑을 나눌 짝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대조가 아닐 수 없다.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다윗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에게는 최소한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그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삼하 3:2-5).

삼하 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긴 뒤에도 처와 첩을 더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다윗의 아내들은 그 이름과 자녀까지 상세히 성경에 남아 있는 셈이다. 이러한 다윗과 비교할 때, 솔로몬의 수많은 아내들의 이름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은 더욱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솔로몬에게 실제로 특별히 언급되는 부인들이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다. 솔로몬은 왕이 된 직후 애굽과 혼인 관계를 맺어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다윗 성에 머물게 하다가 훗날 별궁을 지어 그를 위해 내어 주었다 (왕상 3:1).

왕상 3: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인척 관계를 맺어 바로의 딸을 맞이하고 그를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이 완공되기를 기다리니라

  이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었다. 당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애굽과 혼인 동맹을 맺음으로써 주변 나라들은 감히 이스라엘을 넘볼 수 없었고, 그 결과 여러 나라의 왕들이 저마다 자기 딸을 솔로몬에게 바치게 되었다. 그렇게 바쳐진 여인들이 쌓여 마침내 천 명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는 애초에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시편 45편에는 두로의 딸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시 45:9, 45:12).

시 45:9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시 45:12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자들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다만 시편 45편은 솔로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고라 자손이 지었을 가능성이 있는 시이므로, 이를 근거로 두로의 딸을 솔로몬의 확정된 아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두 번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스바의 여왕이다. 스바의 여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왕상 10:1).

왕상 10:1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그리고 그 지혜에 감탄하여 이렇게 고백하였다 (왕상 10:7).

왕상 10:7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게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과의 만남 이후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민족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 아들은 훗날 아버지를 찾아 예루살렘에 왔으나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호와 신앙을 전파하였고,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사도행전에는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올라왔던 에티오피아 내시가 등장한다 (행 8:27).

행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 관리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가 성경 두루마리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자 빌립 집사가 나아가 복음을 가르쳐 주었고, 그는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였다. 훗날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에도 에티오피아에 살던 그 후손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대규모 이주 작전이 실제로 있었으니, 오늘날 이스라엘 안에 흑인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배경에도 이러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결국 이름과 사연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솔로몬의 아내는 첫 번째 정략결혼의 상대였던 바로의 딸과, 역사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스바의 여왕, 그리고 족보를 위해 이름이 밝혀진 나아마 정도다. 나머지 수백 명의 여인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성경에서 사라졌으니, 이는 그들과의 관계가 애초에 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7. 솔로몬은 무엇으로 타락하였고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가 지켜야 할 원칙을 이미 분명하게 규정해 두었다 (신 17:16-17).

신 17:16-17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는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솔로몬은 이 세 가지 명령을 모두 어겼다. 그가 해마다 거두어들인 금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왕상 10:14).

왕상 10:14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또한 그는 병거와 마병을 대량으로 모아들였다 (왕상 10:26).

왕상 10:26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자기 왕에게도 두었으며

  무엇보다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첩으로 맞이하였다. 성경은 그 실상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왕상 11:1-2).

왕상 11:1-2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나라를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성전을 짓는 데는 칠 년이 걸렸지만, 자신의 왕궁을 짓는 데는 무려 십삼 년이라는 더 긴 시간을 쏟았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늙어서는 이방 아내들의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이 각기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을 위한 산당까지 예루살렘 인근에 지어 주었다. 성경은 그가 섬기게 방치한 우상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왕상 11:5, 7).

왕상 11:5,7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성전을 건축한 바로 그 왕이 우상의 신전까지 세워 준 것이니, 이는 참으로 비참한 타락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결국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고전 10:20).

고전 10: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솔로몬이 세워 준 산당들은 단순한 문화적 관용이 아니라 실제로 귀신을 섬기는 처소를 예루살렘 인근에 허락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직접 심판을 선언하셨다 (왕상 11:11).

왕상 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다윗을 향한 언약 때문에 그 심판은 유예되었다 (왕상 11:12-13).

왕상 11:12-13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나라를 온전히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그리하여 그의 죽음 직후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여로보암이 이끄는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고 오직 두 지파만이 아들 르호보암에게 남겨졌다. 그나마 나라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구원받았는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전도서를 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도서는 온통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라는 탄식으로 가득하다 (전 1:2).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의 지혜와 권세와 향락을 다 누려 본 그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청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한다 (전 12:1-2).

전 12:1-2 너는 청년의 때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리고 전도서 전체의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전 12:13-14).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이는 죽음을 앞둔 솔로몬이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돌이켜 회개하였음을 보여주는 고백이다. 훗날 유다 왕 므낫세도 솔로몬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우상을 숭배하였으나 환난 중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신 전례가 있다 (대하 33:12-13).

대하 33:12-13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시 왕이 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이러한 전례에 비추어 볼 때, 극심하게 타락하였던 솔로몬 역시 죽기 전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그가 성전을 건축했던 사명 때문에, 하나님은 말년의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돌이키게 하셨을 것이다. 구원은 결코 그의 행위나 업적, 곧 성전을 지었다는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엡 2:8-9).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돌아볼 때, 그는 화려하게 살았던 영광에 비해 참으로 초라하게, 간신히 구원의 문턱을 넘은 자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목회 사역 가운데 영으로 천국의 정경을 살펴본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다윗은 보석으로 빛나는 왕복을 입고 있는 반면 솔로몬은 그 아버지의 뒤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이는 같은 천국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 삶의 결실에 따라 받는 영광의 정도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엄중한 사실이다.

  이러한 솔로몬을 예수님도 두 차례 직접 언급하셨다. 첫 번째는 들의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다 (마 6:28-29).

마 6:28-29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꽃 하나의 아름다움만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두 번째는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다 (마 12:41-42).

마 12:41-4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솔로몬이 애굽 사람의 지혜와 동방 사람의 지혜까지 두루 터득하여 큰 지혜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 지혜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만 온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그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혜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8. 신앙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솔로몬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가 아내들의 신앙에 자신을 맞추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아내들에게 전하기보다, 도리어 아내들이 섬기던 우상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쪽으로 뒤로 물러났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태도를 향해 분명하게 경고한다 (히 10:38-39).

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같은 히브리서는 더 나아가 한 번 은혜를 맛본 자가 뒤로 물러나 타락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경고한다 (히 6:4-6).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신앙의 세계에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시며 회개하여 처음 행위로 돌아갈 것을 명하셨다 (계 2:4-5).

계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솔로몬 역시 성전을 지을 때 품었던 첫사랑과도 같은 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서서히 식어 갔다는 점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이 책망과 동일한 원리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신앙 여정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빌 3:13-14).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원리는 목회 현장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믿지 않는 남편이 신앙이 있는 아내에게 말씀을 제대로 못 듣겠으니 좀 더 가까운 다른 교회로 옮기자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 아내는 상담을 청하며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그 요청을 들어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으나, 신앙은 앞으로만 전진이 있을 뿐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그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지켜보니,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결국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부가 함께 교회 자체를 떠나 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믿음이 약한 배우자의 형편에 맞추어 신앙의 자리를 낮추고 뒤로 물러선 이들은, 이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앙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따라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를 통해서는, 오히려 그 가정 전체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먼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가운데, 배우자가 따라오지 않아 낙심하는 이들에게도 같은 원리를 권면한다. 당신이 언제까지 이 길을 홀로 갈 것인지 지켜보고 있다고, 배우자의 걸음에 맞추어 신앙의 자리를 옮기는 것은 반드시 망하는 길이라고 분명히 일러 준다. 오직 주님께서 주실 것을 바라보며 오늘도 전진하는 것만이, 결국 그 사람을 통하여 가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학 시절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고향으로 내려가 함께 지낸 일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석 달 만에 아버지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여섯 달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아버지는 결국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셨다. 또한 군에서 군종병으로 복무했던 아들이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뒤, "아빠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다"고 고백하며 스스로 신앙을 갖게 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열매들은 신앙이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전진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원리는 출애굽기의 훌과 그 후손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려 할 때 홀로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훌의 손자 브살렐은, 훗날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받아 성막을 짓는 데 쓰임 받았다 (대상 2:20, 출 31:2-3).

대상 2:20 훌은 우리를 낳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으며

출 31:2-3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순교에 이른 이들의 피값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 후손 가운데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시는 인물을 반드시 세우신다. 당장 눈앞의 형편이 나빠지고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갚으심이 뒤따른다. 율법은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만을 정결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레 11:9).

레 11: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수 있나니 물에 있는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비늘은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갈 때에만 제 기능을 하며, 뒤로 물러설 때는 오히려 몸에 걸려 상처를 낸다. 신앙도 이와 같아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표적을 향하여 좇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9. 나오며

  사도행전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 후손으로 오신 구주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행 13:22-23).

행 13:22-23 폐하시고 다윗을 세워 왕으로 삼으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다윗의 마음에 합한 삶과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구주는 이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그 가운데 솔로몬은 다윗과 그리스도를 잇는 예표의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어떤 왕이었으며,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고, 그의 성전 건축과 아가서가 무엇을 상징하며, 그의 실제 아내들이 누구였고, 그가 어떻게 타락하였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신앙이 왜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평화의 왕이자 지혜의 왕이었으며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표가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을 스스로 범함으로써 본받지 말아야 할 모습도 함께 남긴 인물이다.

  그는 금을 다량으로 쌓았고 말과 병거를 늘렸으며 수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그 결과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을 겪었고, 자신의 영혼도 우상숭배의 자리까지 떠내려갔다. 그러나 다윗에게 주신 언약과 그가 감당했던 성전 건축의 사명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어 말년에 돌이키게 하셨고, 그는 간신히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 이는 성도 된 자들이 결코 신앙에서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됨을 보여주는 엄중한 경고다.

  신앙은 오직 전진해야 한다. 배우자나 가족이 믿음의 길을 따라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형편에 맞추어 뒤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앞서 걸어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가정 전체를 붙드시고 구원으로 이끄신다. 장차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새 예루살렘의 신부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뒤로 물러섬 없이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신앙의 자리에서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향해 전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03일(금)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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