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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독론(151)] 이사야의 예언(11) 재림주요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의 8가지 특징(03) 상 주시려 오심(이사야40:9~1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_-ECrPE4XxU
기독론 151
이사야의 예언(11)
재림주요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의 8가지 특징(03)
- 상 주시려 오심 -
(이사야 40:9-11)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사야는 재림(再臨, second coming)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예언한다. 그분은 만군의 여호와로 오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러 오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에게 상을 주러 오신다. 심판에는 두 방향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형벌로 임하지만, 참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한 자에게는 영생과 상급이 주어진다(롬 2:6-8). 같은 주님을 만나도 어떤 사람은 심판주로 만나고 어떤 사람은 상 주시는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면 먼저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한 분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출 3:14-15), 신약 시대에는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 아들이 나타나신 뒤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일하셨지만 두 분의 서로 다른 하나님이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고 말씀하셨고(요 5:17),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4:9). 그러므로 이사야가 여호와께서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고 예언한 말씀(사 40:10)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실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죽은 뒤의 결과와 분리된 시간이 아니다. 지금 드리는 예배와 기도와 찬송, 구제와 봉사와 충성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록된다. 반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죄를 쌓으면 진노를 쌓게 된다. 믿음으로 시작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회개하며 충성해야 한다.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를 불로 시험하시고(고전 3:12-13), 일생의 충성을 판단하시며, 합당한 자에게 '천국 집'과 '면류관'과 '보좌자리'의 3종류의 상을 주신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재림하시는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가 무엇이며, 행한 대로 주시는 보응과 상급이 무엇이고, 천국 집과 면류관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재림하시는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인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는 자신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선포하신 한 분 하나님이다(사 43:10-13). 그때는 아직 아들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 활동하시기 전이므로 구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두 존재처럼 나누어 말씀하지 않으셨다. 고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약 시대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는 아버지이고 예수님은 그와 별개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구약에서 '처음'이신 여호와께서 신약에서 '마지막'이신 예수로 나타나셨다. 처음과 마지막은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다(사 41:4, 44:6, 48:12, 계1:17, 2:8, 22:13).
신약에 들어오면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다(사 9:6). 아들이 있다는 말은 아버지가 계심을 전제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심은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방식과 같지 않다. 하나님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주장은 성경에 없다.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요 16:27-28). 그러므로 오늘날에 한국교회의 이단의 하나인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처럼 피조물('장길자')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높이거나 하나님을 인간 가족의 구조로 나누는 것은 한 분 하나님 신앙을 훼손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약의 구원 경륜 안에서 동시에 일하신다(요 5:17). 어느날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했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삼으셨다고 하면서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고 판단했다(요 5:17-18).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일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둘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며(마 10:40, 요 13:20),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서 일하신 결과다(요 14:10).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셨고(요 10:30),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4:9).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다(요 17:3). 고로 한 분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구원 사역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
이 관계는 재림의 주체를 밝히는 열쇠다.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여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신다고 예언했다(사 40:10-11).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함께 오시며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증언한다(마 16:27).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께서 동일한 심판과 보응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재림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다. 여호와께서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는 예언은 예수께서 상 주시는 재판장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이 진리를 들으려면 영의 귀가 열려야 한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면 회개와 영적 싸움의 필요성을 아무리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악한 영은 사람을 졸게 하고 말씀을 밀어내며 원망과 불평에 붙잡히게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여 악한 영을 대적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을 깨워야 한다. 목회자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각자가 회개하며 영적인 감각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재림주와 심판주와 상 주시는 주님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3. 하나님은 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외모나 교단의 이름이나 입술의 고백만 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각 사람이 실제로 행한 것을 따라 갚으신다. 보응(報應, recompense)은 행한 것에 합당하게 되돌려 주는 것을 뜻한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영생과 상으로 갚으시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른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갚으신다. 그러므로 보응에는 상과 벌이 함께 들어 있다.
바울은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선포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지만,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내리신다(롬 2:6-8).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은 믿음을 없애고 행위로 구원을 사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의 속죄(贖罪, atonement)로 과거의 죄가 용서되고 생명 주시는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온다. 이로써 사람은 영생을 얻고 구원(救援, salvation)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 뒤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답게 살았는지가 다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의 교훈과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교회에 등록했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가 공개된다(마 16:27).
지금 우리의 삶은 그날의 판결을 만들어 간다. 한 시간의 예배, 한 번의 기도, 한 사람을 위한 중보, 보이지 않는 곳의 봉사, 복음을 전한 한마디가 모두 계산된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시간도 기록된다. 하나님께서 계산하신다는 말은 성도를 불안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충성과 눈물도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으신다는 위로이며, 은밀한 죄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경고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님을 어떻게 만날지는 오늘의 삶과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며 충성한 사람은 상 주시는 주님을 만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품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심판주를 만나게 된다. 예수를 믿지 않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상을 논할 수 없다. 구원의 터 위에 선 사람은 벌을 피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주님께 기쁨으로 인정받을 삶을 준비해야 한다.
4. 구원받은 뒤의 삶과 회개는 최종 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그 뒤의 모든 선택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은 믿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고 증언하지만, 성경은 동시에 믿는 자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회개하라고 경고한다. 한때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받은 자답게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며 죄를 붙들면 전에 받은 탕감이 취소될 수 있다. 히브리서의 반복된 경고도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믿음에서 떠날 수 있음을 깨우친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로 회개를 막아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행위구원론이라고 몰아붙여서도 안 된다.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며, 회개(悔改, repentance)는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실제적인 길이다. 사람은 자신의 선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대신할 수 없지만, 속죄받은 뒤에도 죄를 사랑하며 산다면 마지막에 그 믿음이 참되었는지 드러난다.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깨우친 공로는 존중해야 하지만, 그들의 모든 해석을 성경보다 높은 최종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나는 장로교 목사로서 교단을 사랑하고 아끼지만 교단의 교리가 성경의 경고와 어긋날 때에는 성경을 따라야 한다. 앞선 세대가 다 알지 못했던 것을 다음 세대가 말씀 안에서 더 분명히 찾아야 한다. 교단은 성도를 교리 안에 가두는 아버지가 아니라 더 배우고 온전해지도록 돕는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큰 복이다. 요한계시록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는다고 말한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낙원,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다. 상급의 크기를 논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 두루마기를 빨고 성 안에 들어갈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한다(계 22:14).
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도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는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주어진다. 이미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죄와 세상과 육신과 욕심을 이기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죽을 때에는 각 사람의 상태가 결정된다. 재림 전 죽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과 행위를 판단받고 낙원과 성 밖과 지옥의 길이 나뉜다. 재림 때 살아 있는 사람은 공중에 오신 주님 앞에서 판결을 받게 된다. 어느 경우든 죽은 뒤에 잘못된 삶을 다시 고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회개하고 지금 믿음을 지켜야 한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미움과 음란과 탐욕을 끊으며, 악한 영과 싸우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돌이켜야 한다. 가족의 영적인 귀가 열리지 않았다면 정죄하기보다 그를 위하여 계속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천국을 준비하도록 중보해야 한다. 누군가의 기도 때문에 닫힌 영의 귀가 열리고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뒤의 삶은 천칭에 올려진 것처럼 가볍지 않다. 선으로 행한 것과 악으로 행한 것이 드러나며, 회개하지 않은 죄가 쌓이면 영혼을 무겁게 한다. 그러므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를 두려움으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깨어 있게 하는 은혜로 받아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회개하며 주님을 사랑한다면 예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길을 완주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5. 이사야 40장은 재림주의 상급과 보응을 어떻게 예언하는가?
이사야 40장은 시온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와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게 한다. 그 하나님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주 여호와다. 그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며, 상급을 가지고 오고, 보응을 앞세워 오신다. 동시에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고 어린양을 품에 안으신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왕과 재판장으로 오셔서 각 사람의 삶을 결산하시며 자기 백성을 돌보실 것을 보여 준다(사 40:9-11).
여기에는 ‘상급’과 ‘보응’이 함께 나온다. 상급은 선을 행하고 충성한 자에게 주시는 좋은 보상을 가리킨다. 보응은 선과 악을 포함하여 행한 대로 갚는 더 넓은 말이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오실 때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벌을 받는다. 재림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결과를 주는 사건이 아니라 각 사람의 믿음과 행위를 공의롭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예레미야도 여호와께서 마음을 살피고 뜻을 시험하여 각각 그의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신다고 선포했다. 사람은 겉으로 경건하게 보일 수 있고 자신의 동기를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심장과 폐부를 살피신다. 같은 봉사를 해도 주님을 사랑하여 한 것인지 사람의 칭찬을 얻으려고 한 것인지 아신다. 같은 고난을 견뎌도 믿음으로 견딘 것인지 불평하며 형식만 지킨 것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응에는 실수가 없다.
이 예언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성취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분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신다. 이십사 장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잡고 왕 노릇하시는 것을 감사한다. 그때 죽은 자가 심판을 받고,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작은 자와 큰 자에게 상이 주어지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멸망한다(계 11:18).
재림의 날에 일어나는 두 일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땅을 망하게 한 자들은 진노 아래 멸망하지만, 주의 이름을 경외한 자들은 상을 받는다. 어제까지의 말씀에서 재림주가 악인과 죄인과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면을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같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상을 주러 오신다는 면을 보는 것이다. 이 둘을 함께 알아야 재림의 공의와 소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의 핵심은 단지 무서운 심판이 다가온다는 데 있지 않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는 외침은 믿음으로 충성한 성도에게 위로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 수고, 가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 작은 교회를 지킨 충성, 아무도 모르게 드린 헌신을 주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 성도는 그날 예수님을 피해야 할 심판주가 아니라 기다리던 상 주시는 주님으로 만나야 한다.
6. 재림 때 받을 신분·지위와 상급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천국에서 받는 것에는 신분과 지위가 있고 상급이 있다. 신분과 지위는 아들로 인정받는가, 상속자가 되는가, 왕 노릇하는 자가 되는가와 관련된다. 상급은 이 땅에서 행한 구체적인 충성과 수고에 대하여 주시는 보상이다. 둘은 연결되지만 같은 방식으로 계산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일했다는 사실만으로 높은 신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이 같은 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신분과 지위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죄와 죽음과 사망을 이기고, 세상과 육신과 욕심과 정욕을 이기며, 사탄과 마귀와 귀신을 이겨야 한다. 영적 전쟁을 피하면서 천국에서 고귀한 지위를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보호 장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공격해야 한다. 특히 지금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예리한 검을 가진 군사로 설 수 있다.
왕 노릇은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높은 지위와 관련된다. 재림하신 예수께서 왕 노릇하시며, 그분과 함께 이긴 성도들도 왕권에 참여한다. 이것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권력욕과 다르다. 죄와 악한 영을 이기고 맡겨진 사명에 충성한 자가 주님의 의로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이 땅에서 먼저 자신과 악한 영을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
상급은 크게 세 방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천국 집과 그 터전이며, 둘째는 면류관이고, 셋째는 보좌의 자리다. 오늘은 그중 천국 집과 면류관을 중심으로 다룬다. 보좌의 자리는 아버지께서 정하시는 상으로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므로 다음 시간에 살펴본다. 지금은 분명히 주어진 천국 집과 면류관의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상급을 뜻하는 헬라어 ‘미스도스’(μισθός, misthos)는 일한 것에 대한 보수나 보상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속히 오시며 자신이 줄 상을 가지고 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상은 막연한 기분이나 칭찬이 아니라 주님이 실제로 주시는 보상이다(계 22:12).
신분과 상급을 구별하면 신앙생활의 여러 결과를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한 번의 기도와 찬송과 봉사는 하나하나 상으로 기록되어 천국 집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일생 동안 한 직임을 변함없이 지킨 충성은 마지막에 면류관으로 인정받는다. 죄와 세상과 악한 영을 이긴 삶은 천국의 지위와 연결된다. 주님은 한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것을 뭉뚱그리지 않고 각 영역에 맞게 정확히 판단하신다.
그렇다고 상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상급은 다른 성도보다 높아지려는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여 충성한 삶에 대한 인정이다. 천국에서 상을 받은 사람을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켰는지가 드러난다. 상은 자기 영광을 자랑하게 하는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충실히 응답한 삶을 증언한다.
7. 우리의 행위는 어떻게 천국 집의 재료로 쌓이는가?
천국 집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진다. 다른 터를 놓을 수 없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뒤에 행한 일이 천국 집의 재료가 된다. 믿기 전에 행한 선한 일은 이 땅에서 자녀와 후손이 받을 복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천국 집의 재료와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좋은 말을 들을 때 미루지 말고 속히 예수를 믿어야 한다. 믿은 뒤에 행한 선은 이 땅의 복과 하늘의 상으로 함께 연결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각 사람의 행위는 그날 불로 시험받는다. 불을 견디는 행위는 남아 상을 받지만, 불타 버리는 행위는 손해를 받는다. 사람 자신이 구원을 받더라도 불 가운데서 겨우 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있을 수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풍성한 상을 받는 것이 같지 않은 이유다(고전 3:12-15).
여기서 개역개정이 ‘공적’이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 ‘에르곤’(ἔργον, ergon)으로, 문맥에서는 각 사람이 행한 일을 가리킨다. 천주교적인 공로를 쌓아 구원을 산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먼저 있고, 그 터 위에서 믿는 자가 행한 일이 시험받는다. 구원의 기초는 예수님이며, 상급의 재료는 구원받은 뒤의 행위다.
금과 은과 보석은 불을 견디는 행위를 나타내고, 나무와 풀과 짚은 불에 타 버릴 행위를 나타낸다. 같은 일을 했어도 동기와 태도에 따라 재료가 달라질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 이미 사람의 칭찬이라는 상을 받은 것이다. 하늘에 남을 상이 없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은밀하게 드리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갚으신다.
이 원리는 헌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름을 알리지 않고 성전 건축과 복음 사역을 위해 드리는 사람이 있다. 말씀으로 영혼이 깨어났음을 감사하여 아무도 모르게 큰 물질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 동기까지 보신다. 어떤 헌신은 금으로, 어떤 헌신은 은으로, 어떤 헌신은 보석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높이고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드리면 나무와 풀과 짚처럼 불타 없어질 수 있다.
예배 한 번, 기도 한 번, 찬송 한 절, 청소 한 번, 식당 봉사 한 번, 전도 한마디가 모두 재료가 된다. 자녀와 가족을 위한 회개기도와 중보도 기록된다. 천사는 그 행위를 기록하고 하나님께 보고하며, 인정된 행위는 천국 집을 세우는 재료가 된다. 몸이 피곤해도 새벽기도에 나와 말씀을 듣는 충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몸만 와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면 그만큼의 차이도 정확히 계산된다.
천국 집에는 집만 아니라 터전도 있다. 집은 예배와 기도와 봉사와 헌신의 재료로 지어지고, 땅은 영적 전쟁과 연결된다. 악한 영과 싸우고 회개하며 영적인 땅을 넓혀 갈 때 천국의 터전도 넓어진다. 부모가 영적 전쟁과 회개에 힘쓰면 자녀에게도 기본적인 터전의 복이 이어질 수 있다. 집은 큰데 땅이 좁은 것보다 넓은 정원과 아름다운 환경을 가진 집이 더 풍성하듯, 성도는 행위의 재료와 영적 전쟁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천국 집을 준비하는 가장 실제적인 길은 오늘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특별한 무대에 서야만 보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주님 때문에 행한 일이 불을 견디는 재료가 된다.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생색보다 은밀함을 선택하며, 일의 크기보다 사랑과 믿음의 동기를 지켜야 한다.
8. 면류관은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주어지는가?
면류관은 한 번의 행위에 즉시 붙는 보상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은 뒤의 일생을 통틀어 살피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맡겨진 일을 완수한 자에게 주시는 명예로운 상이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므로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위하여 예비되었다고 고백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 예수께서 그날에 그 면류관을 주신다(딤후 4:7-8).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는 말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의 삼분의 이를 충성하다가 마지막에 믿음을 버리고 사명을 놓아 버리면 끝까지 지킨 충성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 면류관은 한때 뜨거웠던 기억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이어진 지조를 증언한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완주가 필요하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오늘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면류관을 준비한다.
충성의 면류관은 맡겨진 직임을 변함없이 감당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큰 교회에서 많은 사람을 섬겼다는 이유만으로 면류관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열 명의 성도를 돌보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아픈 할머니를 찾아가 기도하며 말씀을 전한 목회자는 충성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큰 교회를 맡고도 말씀과 돌봄을 다른 사람에게만 미루며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규모가 면류관을 대신하지 못한다.
사랑의 면류관도 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움을 품지 않고 끝까지 사랑을 베푼 삶은 주님께 인정받는다. 인내와 오래 참음의 면류관도 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핍박받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상대가 몰라서 그러는 것임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을 위하여 기도했다면 그 오랜 참음이 면류관이 된다. 사울이 모르고 교회를 박해했으나 주님을 만나 바울이 된 것처럼, 믿지 않는 가족도 기도로 변화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살도록 허락된 데에는 서로의 구원을 돕는 사명이 있다. 믿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믿는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배우자를 붙여 주신 까닭이 그 사람을 끝까지 품고 구원하도록 하기 위함일 수 있다. 성급히 미워하고 포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영혼으로 보고 오래 참아야 한다. 그 인내가 일생의 충성으로 인정될 때 면류관이 된다.
면류관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나타난다. 어떤 것은 왕관처럼 화려하고, 어떤 것은 월계관처럼 보이며, 어떤 것은 티아라와 같은 모양을 가진다. 그 위의 보석과 빛깔과 크기와 종류는 일생의 수고와 충성을 드러낸다. 천국에서 성도들이 면류관 쓴 사람을 존경하는 까닭은 장식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그 면류관이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지킨 삶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나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준비하여 들고 대기하는 천사를 보았고, 나를 위하여 준비된 면류관도 확인했다. 그 면류관은 매우 화려했지만 화려함 자체가 핵심은 아니었다. 면류관에 박힌 보석 하나하나가 이 땅에서 감당한 수고와 충성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천국의 면류관은 막연한 비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생을 결산하여 친히 씌워 주시는 실제적인 상이다.
평신도도 여러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 직분의 이름보다 실제 삶이 중요하다. 예배와 기도, 가정에서의 인내, 복음 전도, 구제와 봉사, 맡은 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다면 각각의 영역에서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면류관은 목회자나 유명한 사람만의 상이 아니다.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 재림주의 공의다.
면류관은 예수님께서 직접 씌워 주시는 상이다. 천국 집의 재료는 각각의 행위가 기록되며 쌓이지만, 면류관은 일생 전체를 보신 의로우신 재판장이 마지막에 판정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눈앞의 성과가 작다고 낙심하지 말고,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사명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마지막을 보시며 변함없는 충성을 기억하신다.
9. 나오며
재림하시는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행한 대로 주시는 보응, 구원 이후의 회개, 이사야가 예언한 상급, 천국의 신분과 상급, 천국 집과 면류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구약에서 상급과 보응을 가지고 오시는 주 여호와는 신약에서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구원 경륜을 이루시며, 마지막에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결산하신다.
그날에는 두 결과가 나타난다. 불의를 따르고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가 임하고, 참고 선을 행하며 주의 이름을 경외한 자에게는 영생과 상이 주어진다.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은 뒤의 삶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날마다 회개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사람으로 준비해야 한다.
천국의 신분과 지위는 이기는 삶과 연결되고, 상급은 구체적인 행위와 일생의 충성에 따라 주어진다.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봉사와 헌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금과 은과 보석 같은 천국 집의 재료가 된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위는 불타 없어질 수 있으므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 악한 영과 싸우고 회개하며 영적인 터전도 넓혀 가야 한다.
면류관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다. 큰 사역보다 맡겨진 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이 중요하고, 사람의 칭찬보다 주님의 인정이 중요하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사랑하고 오래 참으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주님이 오실 때 상이 없는 자를 정죄하기보다 자신이 오늘 어떤 상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재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운 심판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 집과 의의 면류관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으로 기쁘게 맞이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22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이사야 40장을 바탕으로 재림주이자 심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설명하며, 그분이 가져오실 상급과 보응에 대한 영적 교훈을 전달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구약의 여호와가 곧 신약의 예수님임을 강조하며,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이 영의 귀를 열어 회개하고 마지막 심판 때에 벌이 아닌 상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특히 천국의 상급은 단순한 보상을 넘어 천국 집의 재료가 되는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물과 충성된 삶에 주어지는 면류관,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 보좌의 자리라는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됨을 상세히 풀어냅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하늘 나라의 지위와 신분을 결정짓는 과정임을 인식하고,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켜 영광스러운 상을 예비할 것을 촉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