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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8. 21. (금) ·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교회」 동탄명성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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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zOgKTc8SqbM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71)] 거짓말하는 가짜 예언자들 사이에서 참 선지자의 삶을 보여준 에스겔(겔13:1~2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zOgKTc8SqbM

 

기독론(171)

거짓말하는 가짜 예언자들 사이에서

참 선지자의 삶을 보여준 에스겔

(겔 13:1-23)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에스겔은 말로만 장래를 예고한 선지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의 몸과 가정과 일상을 말씀의 표징으로 사용하셨다. 그는 패역한 백성에게 보냄을 받아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파수꾼이 되어 심판을 경고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의 삶을 미리 보여 주었다(겔 2:3-7, 3:4-11, 17; 요 14:10).

  그러나 에스겔이 섬긴 시대에는 참된 경고보다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이 더 환영받았다. 하나님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들이 자기 심령을 따라 말하면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이 있다고 선포했고, 곧 무너질 담에 회칠하여 안전해 보이게 했다. 어떤 여자 예언자들은 부적과 수건을 이용해 영혼을 사냥하고, 보리 몇 움큼과 떡 몇 조각을 얻으려고 거짓말했다(겔 13:3, 6-10, 17-19).

  거짓 예언이 위험한 까닭은 단순히 예측이 빗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회개해야 할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살아야 할 영혼을 죽음의 길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죄가 가득 차 심판이 가까웠는데도 안전하다고 위로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지 않는다. 거짓된 평강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채 겉만 덮는 회칠과 같다. 비바람이 닥치면 담도 무너지고 그 아래 피하던 사람도 함께 다친다.

  이런 시대에 참선지자는 사람들의 환호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에스겔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짊어진 표징으로 사백삼십 일을 한쪽으로 누웠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뒤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애곡하지 않았다(겔 4:4-6, 24:15-18). 그 삶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담당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심판받는 백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오늘날에도 거짓 예언은 형태만 달라질 뿐 같은 방식으로 영혼을 잠들게 한다. 과거의 교리와 유명한 인물의 말을 성경보다 높이고,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이후의 회개와 순종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목자가 양 떼를 먹이기보다 양의 기름과 털로 자기만 배불리며, 진리를 몰라도 배울 생각 없이 아는 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선지자의 길은 날마다 성경과 성령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받은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며, 자신부터 회개와 순종의 길을 걷는 데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에스겔이 어떻게 삶으로 예수님을 예표했는지, 거짓 예언자와 거짓 목자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주의 종과 성도가 어떻게 참선지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은 어떻게 삶으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실 예수님을 예표했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만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삼백구십 일 동안 짊어지고, 그 기간이 끝나면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사십 일 동안 담당하라고 하셨다. 하루를 일 년으로 정하셨으므로 그의 몸은 사백삼십 년이라는 긴 죄악의 역사를 보여 주는 표징이 되었다(겔 4:4-6). 그는 잠자는 자세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몸이 불편할 때마다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의 죄와 다가올 심판을 기억했을 것이다.

겔 4:4-6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또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필자는 이 사백삼십 일의 표징을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사백삼십 년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기까지 긴 시간을 지나야 했다. 출애굽기에는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여호와의 군대가 애굽 땅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출 12:40-41).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지만, 죄악의 역사와 연단의 기간을 건너뛰는 것은 아니다.

  에스겔이 죄악을 담당했다는 말은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백성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오래되었는지를 몸으로 드러내는 예언적 표징이었다. 죄책을 실제로 해결하신 분은 흠 없는 몸을 제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는 그분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얻었다(사 53:4-6; 벧전 2:24).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며 그 짐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짐을 지셨다(마 11:28; 고후 5:21). 에스겔이 한쪽으로 누울 때마다 백성의 죄악을 생각했듯이,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완고한 백성을 품으셨다. 예루살렘이 자신을 거절할 것을 아시면서도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 그들을 모으려 하셨다(마 23:37).

  에스겔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난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비추는 그림자다. 그는 한 민족의 죄악을 표징으로 짊어졌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드린 제사로 영원한 속죄의 길을 여셨다(히 10:10-14).

  또한 참된 말씀의 종은 입으로만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의 짐을 품고,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기도하며, 자기 편안함을 내려놓고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사람의 죗값을 대신 치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속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일이다. 다만 주의 종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감당하며 복음의 일꾼으로 충성해야 한다(골 1:24-25). 이것이 에스겔이 삶으로 보여 준 행동 예언의 의미다.

3. 아내의 죽음과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의 어떤 슬픔을 보여 주는가?

  에스겔의 삶에서 가장 아픈 행동 예언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었다. 하나님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겠다”고 미리 말씀하시면서도,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셨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한 일반적인 애도 행위를 삼가고,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발에 신을 신은 채 조용히 탄식해야 했다. 아침에 이 말씀을 백성에게 전한 뒤 저녁에 아내가 죽었고, 다음 날 그는 명령받은 대로 행했다(겔 24:15-18).

겔 24:16-18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명령을 받은 대로 행하매

  아내는 에스겔의 눈에 가장 귀한 존재였다. 그런 아내를 잃고도 공개적으로 울지 못했으니 그의 내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감정 없는 사람을 만들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에스겔의 개인적 슬픔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백성을 잃으시는 하나님의 더 큰 슬픔을 보여 주신 것이다. 백성에게 성전은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었다(겔 24:21).

  필자는 이 표징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추어 설명한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연결한다(엡 5:25-32). 그러므로 에스겔이 아내를 잃은 아픔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의 멸망을 바라보시는 아픔을 제한적으로 보여 준다. 이것은 모든 세부를 문자적으로 같게 만드는 등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가 심판 아래 놓일 때 느끼는 고통을 보여 주는 예표적 연결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즐거워하지 않으셨다. 죄가 가득 찼으므로 공의에 따라 심판하셨지만,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겔 18:23, 33:11).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심판을 유보하고 또 유보하셨지만, 백성이 계속 우상숭배와 불의를 행하자 마침내 성과 성전을 넘겨주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다. 그 성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한 채 심판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눅 19:41-44). 십자가를 앞두고도 자신을 배척하는 백성을 저주하기보다 품으려 하셨다. 에스겔이 아내를 잃고 조용히 탄식한 모습에는 죄인을 심판하시면서도 그 영혼이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미리 비친다.

  그러므로 심판을 전하는 사람은 냉혹한 정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며 우월감을 느낀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참선지자는 죄를 죄라고 분명히 말하되, 한 사람이라도 돌이켜 살기를 바라며 눈물로 경고한다. 다가올 재림과 심판을 말하는 목적도 공포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게 하려는 데 있다(벧후 3:9).

  에스겔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공개적인 장례 의식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탄식했다. 참된 주의 종은 자기 슬픔을 하나님께 맡기고 심판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눈물을 함께 품어야 한다. 진리를 굽히지 않으면서 영혼을 불쌍히 여길 때 그리스도의 심정을 드러낼 수 있다.

4. 거짓 예언자들은 무엇을 보지 못한 채 누구의 영을 따라 말했는가?

  에스겔 13장은 거짓 예언자의 근본 문제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환상이나 말씀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자기 심령에서 떠오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포장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자신이 보냄받았다고 주장했고, 거짓된 점괘를 말하면서 그 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겔 13:3, 6-7).

겔 13:3 주 여호와의 말씀이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참선지자는 먼저 듣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신의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은 뒤 백성에게 가라고 하셨다(겔 3:10-11). 파수꾼으로 세우실 때도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셨다(겔 3:17). 말의 출처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욕망과 두려움과 상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바꾸는 순간 선지자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된다.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침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답을 기대하고 찾아오며 먹을 것과 대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자기 권위와 생계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계시로 만들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거짓말은 평범한 착오보다 훨씬 무겁다. 그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을 진리로 믿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전통과 기득권을 앞세웠다. 예수님이 성전의 부패를 드러내고 병든 자와 죄인을 품으시자, 그들은 자신의 자리와 권위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다(마 21:12-16, 45-46; 요 11:47-53).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영접하지 않았다. 에스겔이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서 외로이 섰듯이, 예수님도 왜곡된 종교 체계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을 전하셨다.

  오늘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 자체가 그 말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는다. 말씀의 내용이 성경과 맞는지, 그 열매가 회개와 거룩함인지, 말하는 사람이 자기 이익을 구하는지 살펴야 한다(신 13:1-3; 마 7:15-20; 요일 4:1).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요 14:26, 16:8, 13).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합리화하고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면 그 출처를 의심해야 한다.

  필자도 자기 생각을 전하지 않기 위하여 성경을 반복해서 살피고 성령의 깨우침을 구한다고 고백한다. 현대의 자료와 인공지능은 정보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많이 유통되는 견해가 곧 진리는 아니다. 모든 답을 성경과 대조해야 한다.

  참선지자의 권위는 자신을 크게 보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말하지 않으며, 말씀하신 것은 반대가 있어도 전하는 데서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것이 없다면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거짓 계시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낫다.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자기 심령을 따라 말하는 오류에서 선지자를 지켜 준다.

5.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외치는 예언은 왜 영혼을 사냥하는가?

  거짓 선지자들이 전한 대표적인 메시지는 “평강”이었다. 나라가 우상숭배와 불의로 가득하고 바벨론의 칼이 다가오는데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누군가 약한 담을 쌓자 다른 사람들이 그 위에 회칠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담의 기초와 내부가 부실한데 겉만 희게 칠하면 잠시 튼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폭우와 우박과 폭풍이 닥치면 담은 무너진다(겔 13:10-14).

겔 13:10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회칠한 담은 회개 없는 위로를 보여 준다. 죄를 버리지 않고 우상을 품은 채 살아가는데도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안심시키면 돌이킬 이유를 잃는다. 듣는 순간에는 편하지만 심판의 비바람이 닥칠 때 그 말은 영혼을 지켜 주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까지 빼앗는다.

  여자 예언자들의 행위도 같은 목적을 가졌다. 그들은 사람들의 팔뚝에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의 머리에 맞는 수건을 만들며 영혼을 사냥했다. 보리 몇 움큼과 떡 몇 조각을 얻으려고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않아야 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렸다(겔 13:17-19). 필자는 이 장면을 종교적 외형과 신비한 도구로 권위를 꾸미면서 물질적 이익을 얻는 거짓 사역으로 설명한다.

겔 13:18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팔뚝에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영혼을 사냥한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끄는 대신 자기 영향력 아래 붙잡아 두는 것이다. 거짓 예언자는 상대가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보다 계속 자신을 찾아오기를 원한다. 신비한 말과 물건과 행위를 의존하게 하여 판단력을 빼앗고, 대가를 받으며, 자기 권위를 강화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반응을 더 두려워하게 만든다면 이미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원리는 오늘날의 쉬운 구원 메시지에도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복음의 기초다(롬 3:28). 그러나 믿음을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면허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은혜는 경건하지 않은 것을 버리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친다(딛 2:11-14). 회개와 순종의 열매가 전혀 없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면, 평강이 없는 사람에게 평강을 선포하는 셈이다.

  참된 위로는 죄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살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사냥한 영혼을 놓아주고, 다시는 그들의 손에 사냥물이 되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겔 13:20-23). 말씀은 잘못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돌이킬 길을 제시한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죄를 자백하여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함을 이루어 가게 한다(요일 1:7-9; 롬 8:13-14).

  그러므로 우리는 듣기 편한가만 묻지 말고 그 말이 영혼을 어디로 이끄는지를 보아야 한다. 죄를 가볍게 만들고 말하는 사람에게 종속시키는 메시지는 경계해야 한다. 반대로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끌며 실제 삶의 변화와 순종을 낳는 말씀은 생명을 살린다. 참된 평강은 위험을 부정해서 얻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 주어지는 열매다(롬 5:1).

6. 자기만 먹는 거짓 목자와 양 떼를 살리는 참목자는 어떻게 다른가?

  거짓 예언자의 문제는 에스겔 34장에서 거짓 목자의 문제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었다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양의 기름을 먹고 털을 입으며 살진 자를 잡았지만,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다. 상한 자를 싸매거나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도 않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도 않았다(겔 34:2-4).

겔 34:2-3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목자가 양의 젖과 털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성경이 인정하는 원리다(고전 9:14). 문제는 양에게서 도움을 받으면서도 양을 살리는 책임을 버리는 데 있다. 성도들이 피땀 흘려 드린 예물로 생활하면서 진리를 연구하지 않고, 병들고 눌린 영혼을 외면하며, 자기 자리만 지킨다면 삯꾼의 길로 가는 것이다.

  공적 권한을 맡은 지도자도 같은 원리 아래 자신을 살펴야 한다. 권한과 재정은 백성을 섬기라고 맡겨진 것이다. 국가의 권세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두려움이 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어야 한다(롬 13:1-4). 법과 제도를 자기 이익에 사용하면 맡겨진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거짓 목자의 반대편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신다. 하나님은 목자들이 양 떼를 버렸으므로 친히 양을 찾고 돌보겠다고 하셨다. 흐리고 캄캄한 날에 흩어진 곳에서 건져 내고, 좋은 꼴을 먹이며, 잃어버린 자를 찾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싸매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겔 34:11-16). 그리고 한 목자, 곧 하나님의 종 다윗을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하시겠다고 하셨다(겔 34:23).

  이 약속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 삯꾼처럼 위험이 오면 도망하지 않으신다. 자기 양을 알고 양도 주님을 알며, 우리 밖의 양까지 인도하여 한 무리와 한 목자가 되게 하신다(요 10:11-16). 거짓 목자가 양의 생명을 이용해 자기를 살린다면, 참목자는 자기 생명을 내어 주어 양을 살린다.

  주의 종은 이 선한 목자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 말씀을 정확히 먹이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병든 자와 상한 자를 외면하지 않고, 길을 잃은 자를 찾아야 한다. 필자가 귀신 들리고 병들고 억눌린 영혼을 위한 축사 사역을 힘들어하면서도 계속 감당하는 이유도 “네가 아니면 누가 그 영혼을 돌보겠느냐”는 주님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 직분만 유지해서는 참목자가 될 수 없다.

  동시에 양들도 사람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목자는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종이지 영혼의 주인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양을 자기 영향력 아래 묶거나, 자신에게 배운 사람의 사명까지 통제하려 한다면 선한 목자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든 주의 종과 성도는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그분 앞에서 직분과 삶을 결산한다(벧전 5:2-4). 그러므로 목자는 양을 먹이고, 양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하며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7. 참선지자는 왜 사람의 전통보다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참선지자의 기준은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나 오랜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도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칼빈이든 어거스틴이든 웨슬리든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 아래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네가 칼빈보다 똑똑하냐”는 질문으로 성경의 확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유명한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불법을 행하면 주님께 외면받을 수 있다(마 7:21-23). 믿음의 고백과 삶의 열매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참된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순종으로 나타난다(마 7:24-27; 약 2:17).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경고를 통하여 이미 믿는 사람도 끝까지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반대로 이기지 못하면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경고로 읽는다(계 3:5). 또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성문으로 들어갈 권세를 얻고,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성 밖에 있다고 말한다(계 22:14-15). 그러므로 회개와 거룩함을 선택 사항으로 만들 수 없다.

  이 가르침은 행위로 구원의 값을 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죄 사함과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믿음으로 받는다(롬 3:24-28).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자백하여 깨끗함을 받고, 성령을 따라 몸의 행실을 죽이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요일 1:9; 롬 8:13; 빌 2:12-13). 믿음은 시작이며,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순종하는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성경 번역과 사본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어떤 번역본 하나를 오류가 전혀 없는 절대 기준으로 높여서는 안 된다. 필자는 후대의 소문자 사본을 주로 반영한 번역보다 더 오래되고 초기 본문에 가까운 대문자 사본들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킹제임스성경도 유익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되 유일하게 완전한 번역으로 절대화하지 말라고 권한다. 중요한 구절은 여러 번역과 사본 자료를 비교하고 문맥과 원어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다고 개인의 독특한 해석을 무조건 진리라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사람의 전통을 성경 아래 두듯이 자신의 생각도 성경 아래 두어야 한다.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주신 경고와 일치하는지 검증해야 한다(행 17:11; 계 2:7). 오래된 견해라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며 새롭다고 무조건 참된 것도 아니다.

  필자는 2013년부터 2020년까지 구원 얻는 회개를 집중적으로 전하며 성경 전체를 다시 살폈다고 고백한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의 믿음 고백만 강조하고 이후의 회개와 성결을 약화한 기존 구원론의 한계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 깨달음 때문에 반대와 오해를 받아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로 결정했다. 참선지자는 자기 체계를 보호하려고 성경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앞에서 자기 체계를 고치는 사람이다.

8. 마지막 시대의 주의 종과 성도는 어떻게 참선지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

  먼저 주의 종은 자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목회 경력이 길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더 성장하기 어렵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라도 어떤 분야에서 앞서 걸었고 성경적 열매가 있다면 겸손히 물어야 한다. 아는 체하며 거짓된 답을 주는 것보다 “나는 아직 모른다”고 인정하고 배우는 편이 영혼을 살린다.

  필자는 약 육 년 전만 해도 축사 사역을 충분히 알지 못했지만, 그 분야에 먼저 길을 닦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찾아가 배웠다고 고백한다. 배우는 동안 자신이 이미 아는 성경 지식을 내세워 따지지 않고, 필요한 것을 겸손히 받으려 했다. 배움은 수치가 아니다. 다만 가르친 사람이 배우는 이의 사명까지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다. 각 사람의 길과 부르심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전 3:5-9).

  다음으로 주의 종은 말씀과 성령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잠든 밤에도 파수꾼 한 사람은 성벽 위에서 적의 움직임을 살펴야 한다. 위험을 보았다면 나팔을 불어야 하며, 반대가 두려워 침묵해서는 안 된다(겔 33:2-6). 참선지자는 사람을 공격하려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경고한다. 자신부터 회개하고 삶을 정결하게 하면서, 성도들이 죄와 저주와 악한 영의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실제적인 길을 알려 주어야 한다.

  또한 말씀을 전하는 자의 영적 상태가 공동체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이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계 1:20). 한 명의 사자가 어떤 말씀을 전하고 어떤 영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교회가 살기도 하고 병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강단은 경력이나 말솜씨만으로 맡길 자리가 아니다. 말씀과 성품과 회개의 열매를 살피며 두려운 마음으로 세워야 한다.

  에스겔이 마지막에 본 것은 회칠한 낡은 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새 성전이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쪽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오고 성전에 충만했다(겔 43:1-5).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킨 것이었다(요 2:19-21). 사람의 제도와 건물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야 한다.

겔 43:4-5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성도들도 이 사명에서 구경꾼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리를 전하는 종과 함께 기도하고, 각자 받은 은사와 달란트와 물질과 시간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는다(마 10:41). 눈과 귀와 손과 발의 역할이 다르듯 각자의 분량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어 같은 목적을 섬길 수 있다(고전 12:12-27).

  마지막 시대에는 간신히 구원의 문턱만 넘으려는 신앙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재림을 맞을 기름과 등불을 준비하고, 맡겨진 달란트를 남기며,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마 25:1-30). 필자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전쟁을 감당할 강한 군사를 세우기 원하신다고 강조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진리를 전하고, 들은 사람은 말씀으로 무장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참선지자의 길은 특별한 명칭을 얻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만큼 정직하게 말하고, 모르는 것은 배우며, 자기 이익보다 영혼의 생명을 앞세우고 끝까지 순종하는 데 있다. 주의 종은 내려놓으라 하시면 내려놓되, 맡겨진 동안에는 한 사람이라도 깨우기 위해 충성해야 한다. 성도도 한 알의 밀알처럼 이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요 12:24-26).

9. 나오며

  거짓말하는 가짜 예언자들 사이에서 에스겔이 어떻게 참선지자의 삶을 살며 예수님을 예표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짊어진 표징으로 사백삼십 일을 한쪽으로 누웠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아픔을 통하여 심판받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을 드러냈다. 그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실 예수님의 순종과 사랑을 미리 비추는 행동 예언이었다.

  거짓 예언자는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했다.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외치고, 무너질 담에 회칠하며, 보리 몇 움큼과 떡 몇 조각을 위해 영혼을 사냥했다. 그 결과 회개해야 할 사람이 안심하고, 살아야 할 영혼이 죽음의 길에 머물렀다. 오늘날에도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고 회개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메시지는 같은 열매를 낳을 수 있다.

  거짓 목자는 양의 기름과 털로 자기만 배불리고 양 떼를 먹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흩어진 양을 찾고 상한 자를 싸매며, 한 목자 곧 종 다윗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은 자기 자리와 이익보다 영혼을 살리는 일을 앞세우고, 성도는 사람을 절대화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의 전통과 유명한 신학자와 특정 번역본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최종 기준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앞에서 모든 교리와 체험을 검토해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복음의 기초를 붙들면서도, 계속 회개하고 성령을 따라 거룩함을 이루며 끝까지 이기는 삶을 준비해야 한다. 구원의 은혜를 죄의 면허로 바꾸지 말고 순종의 열매로 나타내야 한다.

  마지막 시대의 참선지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말씀 앞에 세워야 한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배우며,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생각을 꾸미지 않아야 한다. 다가오는 위험을 보았다면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팔을 불어야 한다. 동시에 심판받는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품고, 정죄의 기쁨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돌이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은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하고, 어떤 사람은 기도하며, 어떤 사람은 물질과 시간과 은사로 돕는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분량을 충성스럽게 사용하여 참된 말씀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말씀을 맡은 종은 양 떼를 바르게 먹이고, 성도는 들은 말씀으로 자신을 단장하며, 모두가 참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야 한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무엇이 부족하며 어떤 부분을 도울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듣기 좋은 거짓 평강보다 생명을 살리는 진리를 선택하고, 기름과 등불을 준비하며, 맡겨진 달란트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따라 충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8월 21일(금)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에스겔 선지자의 고난과 순종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삶에 투영하며, 오늘날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참된 사명감을 촉구하는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수백 일간 옆으로 누워 자거나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을 억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인간의 이론이나 신학적 기득권에 안주하여 평강만을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태만을 강하게 비판하며, 오직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 자기 갱신과 겸손한 배움을 실천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정보배 목사는 성도와 목회자 모두가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여 강력한 영적 군대로 준비될 때, 다가올 심판 앞에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완수할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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