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90)]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1) 70이레의 환상과 성취(05)(단9:24~2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bSDlEjPO81c
[설교의 메시지를 파악하게 해주는 핵심질문 7가지 ]
1.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할 세 가지 마스터 키는 무엇인가?
2. 왜 70이레의 핵심은 날짜가 아니라 죄 용서와 그리스도인가?
3. 다니엘서 9장 24절의 여섯 가지 목적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4. 70과 490이라는 수에는 어떤 안식년과 희년의 비밀이 있는가?
5. 안식년과 면제년은 무엇이 다르며 각각 무엇을 놓아 주는가?
6. 희년이 회복하는 네 가지는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7. 희년의 성취자 예수를 믿는 성도는 마지막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기독론(190)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1)
70이레의 환상과 성취(05)
(단 9:24-27)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다니엘서의 70이레(七十週, seventy weeks)는 왜 70에 7을 곱한 기간으로 주어졌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날짜와 연도를 맞추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 기간에 이루려 하신 뜻을 보아야 한다. 다니엘서 9장 24절은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날 것이라고 선포한다. 결국 70이레의 핵심은 죄를 용서하고 마귀의 종 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실 기름부음받은 자(受膏者, anointed one)다.
예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마 18:21-22). 다니엘의 70이레와 예수님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는 말씀에는 같은 수가 들어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에 담긴 용서와 해방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네 가지 중요한 예표가 있다. 제2장의 손대지 아니한 돌, 제7장의 인자 같은 이, 제9장의 기름부음 받은 자, 제10장부터 제12장까지의 세마포 옷을 입은 이다. 그 가운데 제9장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을 예언한다. 이는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죽으러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둔다.
그런데 70이레(단 9:24-27)는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어서 여러 이단과 종말론이 자기 시간표를 세우는 데 이용해 왔다. 특히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는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긴 교회 시대를 넣고, 마지막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는 종말의 7년으로 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의 순서를 따르지 않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본문을 그대로 읽으면, 초림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죄 용서가 핵심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하는 마스터 키는 무엇인가? 적어도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단 9:24). 둘째, 70이라는 수에 담긴 안식년·면제년·희년의 구속적 의미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대하 36:21; 단 9:24). 셋째,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를 떨어뜨리지 말고 연속된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단 9:24-27). 이 외에도 더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열쇠만 제대로 사용하면 70이레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계획하신 인류의 자유와 기업 회복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70이레를 여는 세 가지 마스터 키와 다니엘서 9장 24절의 여섯 목적, 숫자에 담긴 안식년과 희년의 비밀,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성도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할 세 가지 마스터 키는 무엇인가?
필자가 신학교 기숙사 사생회장을 맡았을 때 였다. 그때에 회장직 때문에 모든 방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를 받은 적이 있다. 각 방의 열쇠로는 자기 방만 열 수 있지만 마스터 키는 어느 방이든 열 수 있었다. 70이레에도 수많은 해석 가운데 본문의 전체 문을 열어 주는 마스터 키가 필요하다. 어느 한 연대나 번역만 붙잡아서는 전체를 풀 수 없다.
첫 번째 마스터 키(key, 열쇠)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基督中心的解釋, Christ-centered interpretation)이라는 키다. 다니엘서 9장 24절의 여섯 일을 완전히 이룰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고레스는 포로 귀환을 허락했고, 느헤미야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했지만 죄를 종결하거나 영원한 의를 가져오지 못했다. 역사적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부분적으로 예표할 수는 있어도 예언의 최종 실체가 될 수는 없다.
두 번째 마스터 키는 70이라는 숫자 속에 감추어진 구속의 의미다. 70은 7에 10을 곱한 수이며, 70이레는 70에 다시 7을 곱한 기간이다. 그리고 490은 다시 49에 10을 곱한 수이다. 여기서 7은 안식을 가리키고, 49는 해방의 주기를 가리키고, 10은 충분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70이라는 수를 통하여 땅과 사람을 쉬게 하고 죄의 빚을 탕감하며 종을 풀어 주고 잃은 기업과 가족을 회복하실 뜻을 미리 다니엘에게 보여 주신 것이.
세 번째 마스터 키는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와 한 이레의 연속성이다. 본문은 일곱 이레가 지나고 예순두 이레가 지나며 마지막 한 이레가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 준다(단 9:25-27). 그런데 69이레 뒤에 정해지지 않은 긴 간격을 집어넣고 마지막 한 이레만 먼 종말로 옮기면 예언이 끊어진다. 그렇게 하면 27절의 ‘그’를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로 해석하게 되고, 그가 7년 평화조약을 맺었다가 3년 반 뒤에 제사를 금지한다는 시간표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그’를 앞에서 말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읽으면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초림 사역 안에서 다 해결된다. 주님은 공생애 마지막에 가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피로 제자들과 언약을 세우셨고, 공생애 뒤 십자가에서 끊어지셨으며, 완전한 속죄(贖罪, atonement)를 이루어 희생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하셨다(막 14:24; 히 10:10-14).
그러므로 세 개의 열쇠는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숫자의 구속적 의미를 보며 예언의 연속성을 지킬 때 70이레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 기준을 놓치면 초림하신 예수님의 죽음보다 종말의 적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쏠린다. 다니엘서 9장에는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고 황폐하게 하는 사건도 나온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40년 만에 실행된 예표적인 인물일 뿐이다. 정말 2천 년을 뛰어넘어 종말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력이 등장했다고 해서 예언의 주인공까지 대적 세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악한 세력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배경이며, 중심은 끊어짐을 당하면서도 새 언약(新約, new covenant)을 세우는 그리스도다. 본질을 붙들면 적그리스도의 출현 날짜를 계산하는 데 빠지지 않고 예수님의 속죄와 언약을 붙들게 된다.
3. 왜 70이레의 핵심은 날짜가 아니라 죄 용서와 그리스도인가?
그러므로 70이레를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이지만 날짜가 중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 왕의 명령을 기점으로 삼아야 할른지, 그리고 한 이레를 며칠이나 몇 년으로 계산해야 할 것인지에 따라 여러 시간표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재림 시기에 대한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24:36).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해야 하지만 숫자를 억지로 짜 맞추어 날짜를 확정해서는 안 된다.
70이레의 중심은 죄를 용서할 자가 온다는 데 있다. 다니엘은 단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갈 날만 묻지 않았다.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와 자기 민족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정치적 포로 귀환을 넘어 인류를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셨다. 사람을 원래의 고향과 가족과 기업으로 돌아가게 할 완전한 희년의 계획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할 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여기의 일곱과 일흔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여 그 다음에는 미워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을 따라 완전한 용서와 해방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다니엘서의 한 ‘이레(일곱, 7)’는 문맥에 따라 한 묶음의 일곱을 뜻한다. 일곱 날이 될 수도 있고 일곱 해로 계산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수를 통하여 죄를 끝내고 해방을 이루실 충분하고 완전한 기간을 정하셨다는 사실이다. 본문이 말하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죽음과 언약과 제사의 종결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선다.
다니엘서 9장의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재림 때 나타날 적그리스도보다 먼저 초림하여 죽으실 예수님을 보여 준다. 다니엘서 7장의 '인자 같은 이'는 영광과 권세를 받고 재림하실 왕을 강조하지만, 제9장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단 9:26). 우리의 죄를 용서하려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실 어린양이 만세 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벧전 1:18-20).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신 뒤에는 구원의 범위도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혈통적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다(롬 2:28-29; 갈 3:29). 70이레의 죄 용서와 자유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4. 다니엘서 9장 24절의 여섯 가지 목적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70이레에 정해진 여섯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반역을 끝내는 것이며, 둘째 죄를 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죄악을 속죄하는 것이며, 넷째 영원한 의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 환상과 선지자의 말씀을 확정하고 성취하는 것이며, 여섯째 지극히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가 70이레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할 가장 강력한 근거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고레스도 느헤미야도 사람을 죄에서 구원(救援, salvation)할 수 없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죄값을 지불하셨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져오셨다(롬 3:21-26). 주님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독립시키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건지는 영적 메시아로 오셨다.
다섯째로 환상과 선지자의 말씀에 인을 친다는 것은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고 성취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 다니엘서의 환상도 예외가 아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과 인자 같은 이와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세마포 옷을 입은 이는 모두 초림과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여섯째로 지극히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붓는다는 말씀은 사람 한 명에게만 기름을 붓는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처소가 성별되는 것을 가리킨다. 필자는 이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교회가 탄생하는 사건과 연결하여 해석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뒤 성령을 보내심으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행 2:1-4; 고전 3:16).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성령을 받은 자가 거룩한 처소로 세워진다.
그러나 우리말 번역 가운데는 이 마지막 표현을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는다’고 사람에게 적용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표현은 문맥상 지극히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곳을 가리킬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거룩한 처소에 기름이 부어지는 의미를 선택한다.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 개인이 기름부음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분이 성령을 보내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처소로 기름붓고 구별하시는 교회의 탄생까지 70이레의 목적 안에 들어온다.
이 흐름은 이스라엘의 절기에도 나타난다. 유월절·무교절·초실절·칠칠절로 이어지는 봄 절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 강림을 보여 준다. 나팔절(喇叭節, Feast of Trumpets)·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초막절(草幕節, Feast of Booths)로 이어지는 가을 절기는 마지막 때의 소집과 악의 청산과 영원한 거처를 보여 준다. 초림의 예수께서 죄 용서와 교회의 탄생을 시작하셨고, 재림(再臨, second coming)하실 예수께서 그 구속의 경륜을 완성하신다.
봄 절기와 가을 절기를 한데 섞어서는 안 된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무교절의 무덤, 초실절의 부활, 칠칠절의 성령 강림은 초림의 사역 안에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가을에는 나팔이 울려 백성이 모이고, 속죄일에 죄와 악이 청산되며, 초막절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기쁨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70이레는 초림만 말하고 끝나는 예언도 아니며 재림의 사건만 떼어 다루는 예언도 아니다. 초림으로 시작된 죄 용서와 교회의 성별이 재림 때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거처로 이어지는 하나의 구속사다.
그러므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도 혈통과 지리만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천국에서 이스라엘은 '이기는 자들'을 가리키고, 거룩한 성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진다. 이것이 다니엘서 9장 24절의 여섯 목적이 향하는 최종 방향이다.
5. 70과 490이라는 수에는 어떤 안식년과 희년의 비밀이 있는가?
70은 7에 10을 곱한 수다. 7은 이 땅에서의 완전한 주기를, 10은 충분함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安息年, sabbatical year)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되찾으신 기간이 바벨론 포로 70년이다. 역대하 기자는 유다가 포로로 떠난 뒤 땅이 황폐한 채 안식년을 누리며 70년을 지냈다고 기록한다(대하 36:20-21).
필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기 시작한 주전 1399년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전 586년까지를 계산해 보았다. 그 기간은 813년이다. 813년을 7년으로 나누면 116번의 온전한 안식년 주기가 나온다. 만약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숫자 그대로 모두 갚게 하셨다면 116년 동안 땅을 비우게 하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70년을 정하셨다. 이는 기계적인 날짜 계산보다 7 곱하기 10이라는 영적 의미를 보여 준다.
희년도 마찬가지다. 813년에는 50년 단위의 희년이 16번 포함된다. 이스라엘은 그 희년도 온전히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누락을 산술적으로 더하여 116년이나 16회의 별도 기간을 부과하신 것이 아니라 70이라는 수로 충분한 징계와 안식을 나타내셨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징계하시면서도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다.
70이레는 70에 다시 7을 곱한 490이다. 이를 49년 단위로 보면 희년의 주기를 열 번 충분히 펼친 수가 된다. 정확히 50년마다 오는 희년과 산술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일곱 안식년의 완성과 희년의 자유를 충만하게 이루실 뜻이 담겼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만세 전에 설계하시고 그 중심에 기름부음 받은 자를 두셨다.
숫자의 비밀을 깨닫게 된 계기도 중요하다. 다니엘은 자신만 편안히 살 길을 구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자기와 자기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했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눈물 흘리는 종에게 70년을 넘어 70이레의 비밀을 보여 주셨다. 자기 죄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오늘 우리도 대한민국의 역사와 교회의 형편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온 우주와 나라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통하여 시대를 움직이신다. 다니엘처럼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데 머물지 말고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자신은 왕궁에서 평안히 살 수 있어도 민족의 황폐함을 두고 울었던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계시를 주셨듯이,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품는 기도는 마지막 시대의 비밀을 감당할 그릇을 만든다.
그러므로 70과 490을 단순한 연대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70년은 빼앗긴 땅에 안식을 돌려주는 기간이고, 70이레는 죄와 마귀에게 빼앗긴 인간에게 영원한 자유를 돌려주는 기간이다. 숫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의 충만한 성취를 가리키는 표지다.
6. 안식년과 면제년은 무엇이 다르며 각각 무엇을 놓아 주는가?
안식년과 면제년(免除年, year of release)은 모두 칠 년을 단위로 하지만 대상과 시작점이 다르다. 안식년은 공동체 전체에 정해진 일곱째 해에 땅을 쉬게 하는 규례다. 육 년 동안 씨를 뿌리고 포도원을 가꾸어 소출을 거두지만 일곱째 해에는 파종도 가지치기도 하지 않는다(레 25:1-5). 이 규례의 핵심은 땅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는 데 있다.
안식년에 저절로 난 소출은 땅 주인만 독점할 수 없었다. 주인과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거류민이 함께 먹고 가축과 들짐승도 먹었다(레 25:6-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땅에서 유대인만 배불리 먹이려 하지 않으셨다. 나그네와 종과 짐승까지 은혜를 누리게 하셨다. 이는 온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기다린다는 말씀과 연결된다(롬 8:19-21).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외형만 붙잡았지만, 주님은 병들고 사탄에게 매인 자를 고쳐 참된 안식을 주셨다(마 12:8; 눅 13:10-1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시며 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면제년은 땅보다 사람에게 초점이 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지거나 종으로 팔려 온 때부터 육 년을 섬기고 일곱째 해가 되면 그를 놓아준다. 공동체에 정해진 같은 해에 일제히 돌아오는 안식년과 달리, 사람마다 빚을 지고 종이 된 시점에 따라 놓이는 때가 달라질 수 있다. 그때 형제의 빚을 탕감하고 히브리 종을 자유롭게 하되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넉넉히 주어야 했다(신 15:1-3, 12-15).
주기도문에도 면제년의 정신이 담겨 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의 헬라어 ‘오페일레마’는 빚을 뜻한다. 우리말 성경은 죄로 풀어 번역했지만, 그 배경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놓아준 것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빚을 용서해 달라는 간구가 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도 큰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적게 빚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마 18:23-35).
안식년이 놓아주는 것은 땅이며, 면제년이 놓아주는 것은 빚진 사람과 종 된 사람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땅이며, 죄로 마귀의 종이 된 인간도 하나님의 소유다. 예수께서는 육체에 참된 안식을 주고 죄의 빚을 탕감하며 마귀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풀어 주려고 오셨다.
7. 희년이 회복하는 네 가지는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희년(禧年, Jubilee)은 안식년과 면제년을 포괄하면서 두 가지 회복을 더한다. 일곱 안식년, 곧 49년이 지난 뒤 50년째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일곱째 달 열흘 속죄일에 뿔나팔을 불어 온 땅의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했다(레 25:8-10). 그 나팔을 ‘요벨’이라고 하며, 희년은 완전한 해방과 원상 회복의 해다.
희년의 첫 번째 회복은 땅의 안식이다. 파종과 가지치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땅을 쉬게 한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마귀에게 점령당하여 고통받던 육체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다. 주님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두루 다니시며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고치셨다(행 10:38).
두 번째 회복은 종의 해방과 빚의 탕감이다. 마귀는 죄를 근거로 사람을 붙들고 종노릇하게 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값을 지불하셨다. 사람이 회개(悔改, repentance)하여 죄를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고 악한 영이 떠날 근거가 생긴다(요일 1:9). 축사(逐邪, deliverance)는 내 몸이 귀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음을 선포하고 마귀의 지배에서 놓이는 일이다.
셋째는 소유지, 곧 기업의 회복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하여 조상의 땅을 팔았더라도 희년이 되면 본래 소유지로 돌아갔다. 우리의 본래 기업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늘의 상속자로 계획하셨고,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빼앗긴 기업을 다시 차지하도록 길을 여셨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되려면 믿음으로 시작할 뿐 아니라 끝까지 회개하며 주님을 따라야 한다.
넷째는 가족의 회복이다. 종이 되었던 사람은 희년에 원래 가족에게 돌아갔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다. 마귀는 사람을 자기 가족으로 만들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피값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려보내신다. 희년은 단지 감옥에서 풀려나는 소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본향과 기업과 가족을 모두 되찾는 적극적인 구원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다. 땅도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며, 천국과 그 기업도 하나님의 것이다. 마귀는 어느 것도 영원히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보내 육체에 안식을 주고, 빚을 없애고, 종을 해방하며, 하늘의 기업과 하나님의 가족을 회복하신다. 490년이라는 70이레는 바로 이 희년의 충만한 성취를 향한다.
8. 희년의 성취자 예수를 믿는 성도는 마지막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희년의 성취자로 오셨다.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읽으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듣는 자들의 귀에 응했다고 선언하셨다(눅 4:16-21).
초림하신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희년을 시작하셨고, 성령을 보내 교회를 거룩한 처소로 세우셨다. 마지막 때에는 가을 절기의 순서가 성취된다. 나팔절에는 주님이 천사들을 보내 나팔을 불게 하여 자기 백성을 소집한다. 필자는 이것을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할 전사들을 부르는 소집으로 해석한다. 속죄일에는 악의 세력이 청산되고, 초막절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영원한 천국의 거처가 완성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전사 같은 신부를 준비하는 때다. 아가서가 보여 주듯이 성도는 백합화같이 정결한 신부일 뿐 아니라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전사 같은 신부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신부로 세우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자기만 간신히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도 하늘의 기업과 가족에게 돌아오게 해야 한다.
그 준비의 첫째는 회개다. 마귀와 내통할 죄의 근거를 그대로 둔 사람은 거룩한 전쟁에 쓰임받기 어렵다. 회개기도문으로 죄를 자백하고 악한 영을 내보내며 몸과 마음을 주님의 소유로 구별해야 한다. 필자는 오늘날의 회개 훈련을 주님이 마지막 전사 후보자를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본다. 죄 덩어리요 흙 덩어리였던 이방인도 회개하면 은혜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
영적 속박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도 희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다만 정신질환이나 현실 판단 상실을 한 가지 영적 원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자해·타해 위험이나 급성 정신증이 나타나면 즉시 119와 응급실 또는 정신건강의학과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회개와 축사는 전문 치료를 임의로 중단할 근거가 아니다. 생명을 보호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 자유를 섬겨야 한다.
그 준비의 둘째는 바른 말씀에 서는 것이다. 번역과 교리의 틀이 잘못되면 성경을 읽고도 본뜻에서 멀어질 수 있다. 세대주의적 번역은 70이레를 적그리스도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고,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의 틀에 갇힌 번역은 한 번 얻은 구원이 회개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처럼 읽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원감람나무도 믿지 않을 때 꺾였으므로 돌감람나무였던 이방인은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롬 11:17-22; 빌 2:12).
유대인도 버려야 할 민족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다. 루터의 후기 반유대적 글이 후대의 반유대주의에 악용되었듯이, 예수를 거절한 조상의 죄를 이유로 오늘의 후손을 미워하거나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에게는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 그러므로 살인과 낙태와 자살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은 정죄하지 말고 즉시 곁을 지키며 전문적인 응급 도움을 연결해야 한다.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기업을 차지하고 다른 영혼까지 이끌 사람을 찾으신다. 희년의 성취자이신 예수를 붙들고 회개하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이 부르시는 대열에 설 수 있다.
9. 나오며
지금까지 70이레를 여는 세 가지 마스터 키와 죄 용서라는 중심 주제, 다니엘서 9장 24절의 여섯 목적, 70과 490의 영적 의미, 안식년·면제년·희년의 차이와 마지막 시대의 준비를 살펴보았다. 70이레는 날짜를 맞히기 위한 암호가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하여 죄를 끝내고 인간을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하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다니엘서 9장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고레스나 느헤미야로 완성되지 않는다. 초림하여 십자가에서 끊어지고 자신의 피로 언약을 세우며 완전한 제사로 옛 제사를 끝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예언을 이룬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 교회를 거룩한 처소로 세우셨고 다시 오셔서 영원한 의와 희년의 나라를 완성하신다.
70은 7에 10을 곱한 수이며, 70이레는 70에 다시 7을 곱한 수다. 이 숫자는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은 날짜를 산술적으로 정산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안식과 면제와 희년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루실 것을 보여 준다. 70년 동안 땅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70이레를 통하여 사람과 기업과 가족까지 회복하신다.
안식년은 땅을 놓아주고, 면제년은 빚진 자와 종을 놓아주며, 희년은 여기에 소유지와 가족의 회복을 더한다. 우리의 육체도, 생명도, 천국의 기업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의 빚을 갚고 마귀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풀어 하늘의 본향과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때의 전사 같은 신부로 준비되어야 한다. 날마다 회개하여 마귀가 붙잡을 근거를 없애고,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 말씀과 복음으로 다른 영혼을 살려야 한다. 혈통과 교단과 과거의 신앙경력에 기대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리하여 희년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고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하늘의 기업과 하나님의 가족에게 돌아가며 다른 영혼도 그 대열에 서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11일(금)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다니엘서의 ‘70이레’ 환상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풀어내어, 이것이 단순한 날짜 계산이 아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적 설계임을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70이레의 핵심을 구약의 안식년, 면제년, 희년 개념과 연결하며, 이는 인간이 마귀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죄 사함을 얻고 영원한 기업을 회복하는 과정을 예표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세대주의적 해석처럼 미래의 적그리스도나 물리적 날짜에 집착하기보다,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끝내고 영원한 의를 드러내신 본질적 사역에 집중할 것을 촉구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참된 자유와 희년의 축복에 동참하여 천국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70이레 환상의 궁극적 목적임을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