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93)]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4) 한 이레에 대한 세대주의의 해석과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02)(단9:24~2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YUm3zJD82MI
[이 설교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세대주의는 어떤 공헌과 오류를 함께 남겼는가?
2. 육적 이스라엘만 편드는 종말론은 왜 복음과 어긋나는가?
3. 144,000명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70이레를 그리스도 중심의 연속된 기간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5. 7년 평화조약과 환난 전 휴거 해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6. ‘하나님의 성전’은 왜 물질적인 제3성전만을 뜻하지 않는가?
7. 종말을 준비하는 교회가 세워야 할 성전과 싸울 대상은 무엇인가?
[설교핵심]
이 설교는 다니엘서의 70이레 예언을 중심으로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성경의 바른 해석 방향을 제시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세대주의가 성경 읽기를 대중화하고 선교 열정을 고취한 공로가 있으나, 마지막 한 이레를 미래로 유예하여 적그리스도와 유대인 중심의 교리를 만든 것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한 자의적 해석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제3성전 건립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맹목적 지지보다는, 모든 민족을 향한 회개와 천국 복음이 신약의 핵심 경륜임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물질적 성전 회복에 집착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영적 성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철저한 회개를 통해 천국 입성을 준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기독론(193)
다니엘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표(14) 한 이레에 대한 세대주의의 해석과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02)
(단 9:24-27)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는 성경의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예언이다.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 마지막 한 이레의 주인공, 환난과 휴거의 순서, 예루살렘 성전(聖殿, temple)의 재건 여부까지 달라진다. 여기에서 대체 신학(代替神學, replacement theology)과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라는 서로 다른 신학적 흐름도 갈라져 나왔다. 그러므로 70이레는 날짜를 계산하는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救援, salvation)의 경륜을 밝히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세대주의는 19세기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체계화된 뒤 미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방대한 주석을 따로 구입하기 어려웠던 평신도에게 성경 해석의 기본 틀을 제공했고, 임박한 재림(再臨, second coming)을 강조하여 수많은 사람을 선교에 헌신하게 했다. 한국교회도 그 열매를 크게 누렸다.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의 수고와 세대주의가 일으킨 선교 열정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헌이 있다고 해서 모든 해석이 옳은 것은 아니다. 마지막 한 이레를 앞선 69이레에서 떼어 2천 년 뒤로 옮기고, 그 기간에 적그리스도(Antichrist)가 이스라엘과 7년 평화조약을 맺는다고 해석한 데서 여러 문제가 생겼다. 교회를 이스라엘의 시간표에 잠시 끼어든 존재로 보고, 환난 전에 교회 전체가 휴거되며, 예루살렘에는 반드시 제3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이루신 새 언약(新約, new covenant)과 속죄(贖罪, atonement)보다 미래의 적그리스도와 물질적 성전에 시선이 쏠리게 되었다.
성경의 중심은 육적 이스라엘도, 적그리스도도, 날짜 계산도 아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복음을 받아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먼저 예수님의 몸이며, 이어 성령을 모신 교회와 성도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어린양 자신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세대주의의 공헌과 오류를 함께 분별하고, 육적 이스라엘과 144,000명에 대한 문자적 해석의 한계를 살피며, 70이레와 7년 평화조약과 제3성전의 문제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로잡고, 마지막 시대 교회가 세워야 할 성전과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세대주의는 어떤 공헌과 오류를 함께 남겼는가?
세대주의의 첫째 공헌은 평신도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도록 도운 것이다. 스코필드 이전에는 주석이 백과사전처럼 여러 권으로 되어 있어 목회자나 부유한 사람만 소유하기 쉬웠다. 그러나 관주성경은 성경 본문 아래에 해석과 시대 구분을 붙여 놓았다. 평신도도 성경을 펼쳐 해당 구절의 의미와 관련 성구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 읽기를 목회자에게만 맡기지 않고 모든 성도에게 확대한 것은 분명한 유익이었다.
둘째 공헌은 재림의 긴박성과 선교의 열정을 일깨운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의사와 교사와 선교사들이 낯선 나라로 들어갔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하여 이 민족을 섬겼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인 선교 국가가 된 데에는 그 헌신의 열매가 들어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지나치게 분리했다. 하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을 위한 경륜을 따로 가지고 계시며 교회는 그 계획 사이에 잠시 삽입된 존재라고 보았다. 메시아를 거절하여 멈춘 이스라엘의 시계가 교회의 휴거 뒤 다시 움직이고, 마지막 7년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유대 민족을 중심으로 일하신다고 설명한다. 이 틀을 유지하려면 70이레의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본문이 말하지 않은 약 2천 년의 공백을 넣어야 한다.
또한 세대주의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과 성전에 관한 예언을 미래에 문자적으로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이 세워지고, 유대인들이 다시 제사를 드리며, 이방 민족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 다니엘서 9장 27절의 한 이레를 적그리스도의 7년으로 바꾸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불법한 자를 그 성전 안에 앉히면서 하나의 종말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이 해석은 성도의 관심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보다 미래의 정치와 전쟁에 집중시킨다. 예수께서 한 이레의 절반에 끊어지심으로 죄를 속죄하고 희생제사를 그치게 하신 사건이, 적그리스도가 조약을 깨고 제사를 금지하는 사건으로 바뀐다. 성도는 회개와 성결(聖潔)을 준비하기보다 이스라엘의 전쟁과 제3성전의 건축을 종말의 시계처럼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를 전부 악한 것으로 몰아붙여서도 안 되고, 그 공헌 때문에 오류까지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성경 보급과 선교의 열매에는 감사하되, 본문에 없는 공백과 시간표는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이나 단체를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빗나간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신학은 성경을 돕는 도구여야 하며 성경 위에 서는 틀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육적 이스라엘만 편드는 종말론은 왜 복음과 어긋나는가?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마 10:5-6). 메시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고, 율법과 언약과 예배와 약속을 받은 유대 민족 가운데 태어나셨다(롬 9:4-5).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역할과 그들에게 먼저 주어진 은혜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도 큰 믿음을 보셨다(마 8:5-13; 15:21-28). 부활하신 뒤에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셨다(마 28:18-20). 베드로가 할례자 중심의 사역에 머물렀을 때에는 바울을 불러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갈 2:7-9). 하나님의 구원 경륜은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유대인에게만 갇히지 않았다.
바울은 자기 동족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육신의 동족이 돌아오기를 바랄 만큼 고통스러워했다(롬 9:1-5). 그러나 혈통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고,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 참유대인이다(롬 2:28-29; 9:6-8).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민족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다(갈 3:28-29).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귀한 사명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군사 행동을 옳다고 하고, 팔레스타인 사람과 무슬림의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사람의 생명도 귀하고 팔레스타인 사람의 생명도 귀하다. 우리 민족도 육적 혈통으로 보면 이방인이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든 회개하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종말론은 신앙을 육적인 전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이스라엘이 이기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박수치고, 상대 민족이 죽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순간 복음의 보편성을 잃는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을 죽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고 하신 적이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 박해를 받았고, 죽인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예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은 반드시 성취된다. 그러나 사람에게 맡기신 사명은 그의 순종 여부와 관계가 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받고도 자기 민족을 괴롭힌 앗수르가 망하기를 바라며 다시스로 도망쳤다. 하나님은 그를 돌이켜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고, 그 성의 사람들이 돌이키자 재앙을 거두셨다(욘 1:1-3; 3:4-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까지 구원하기 원하셨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세워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혈통적 특권보다 믿음과 순종이 중요하다.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성도의 유일한 사명은 아니다. 교회가 받은 명령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증인이 되고 모든 민족에게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행 1:8; 눅 24:47). 이스라엘도 이 보편적인 복음 안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다(엡 2:14-18).
4. 144,000명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 7장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가운데 인침을 받은 144,000명이 나온다. 세대주의는 이를 육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나온 문자적인 유대인 사명자로 본다.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되고 나면 이들이 마지막 7년 동안 세계에 복음을 전하며, 마침내 육적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으로 이끈다고 해석한다(계 7:4-8).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경 앗수르에 멸망하여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졌다. 오늘날 누가 르우벤 지파이며 누가 납달리 지파인지 혈통으로 정확히 가려 열두 지파에서 똑같이 12,000명씩 뽑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요한계시록의 숫자와 지파 명단은 하나님의 종들의 충만함과 완전한 질서를 보여 주는 영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현대 이스라엘 국적이나 유대 혈통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 14장의 144,000명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고,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지니며, 사람 가운데서 속량되어 하나님과 어린양께 처음 익은 열매가 된 이들이다(계 14:1-5). 그들의 핵심 표지는 국적이 아니라 어린양을 따르는 믿음과 정결(淨潔)과 충성이다. 마지막 때 주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혈통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준비되어 어린양을 끝까지 따르기 때문에 선택된다.
필자가 영적 세계를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실 144,000명의 사명자 가운데에는 한국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의 문자를 한국 민족으로 바꾸자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사명자의 범위를 육적 유대인에게만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에서든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충성하는 사람을 불러 쓰신다. 마지막 전쟁에 참여할 자는 교단과 혈통이 아니라 영적 준비 상태로 구별된다.
로마서 11장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육적 유대인만 자동으로 모두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된다(롬 11:25-27). 유대인 가운데도 그리스도를 믿고 돌이키는 자가 구원받으며, 이방인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가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한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조건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며, 꺾이는 이유는 불신앙이다(롬 11:17-23).
그렇다고 유대 민족을 버렸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가 교만하지 말고 원가지를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나님은 꺾인 가지도 믿지 아니함에 머물지 않으면 다시 접붙이실 수 있다(롬 11:18-24).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그들의 불신앙까지 언약의 특권으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이방인도 같은 믿음과 회개로 들어왔으므로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144,000명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면 교회의 시야가 넓어진다. 유대인을 사랑하되 모든 민족을 함께 품고, 마지막 사명을 특정 혈통에 맡긴 채 자신은 환난 전에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나 자신이 어린양을 따르는 정결한 첫 열매로 준비되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종말론은 다른 민족의 역할을 구경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오늘 내가 충성된 사명자로 준비되게 하는 말씀이다.
5. 70이레를 그리스도 중심의 연속된 기간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70이레를 바르게 해석하는 첫째 기준은 그리스도 중심이다. 다니엘서 9장 24절은 허물을 마치고 죄를 끝내며 죄악을 속죄하고 영원한 의를 드러내며 환상과 예언을 성취하고 지극히 거룩한 것에 기름을 붓는 일을 말한다. 고레스와 아닥사스다와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포로 귀환과 성전 및 성벽 재건에 쓰임받았지만 인류의 죄를 영원히 없애지는 못했다. 이 여섯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단 9:24; 히 9:11-15).
둘째 기준은 70×7이라는 수에 담긴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의 구조다. 하나님은 일곱째 해에 땅을 쉬게 하고 동족의 빚을 면제하며 종을 놓아주라고 하셨다(레 25:2-7; 신 15:1-18).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49년 다음 해에는 희년의 나팔을 불어 자유를 선포하고, 팔린 기업을 되돌리며, 각 사람이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셨다(레 25:8-13). 490년은 희년의 49년을 열 번 품은 기간이다.
예수께서는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의 실체로 오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안식을 주고, 죄의 빚을 탕감하며, 사탄에게 눌린 자를 풀어 주고, 잃어버린 하늘의 기업과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셨다(마 11:28; 눅 4:18-21). 그러므로 70이레는 적그리스도가 활동할 시기를 계산하는 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해방을 이루시는 구속의 시간표다.
셋째 기준은 7이레와 62이레와 1이레를 연속된 기간으로 보는 것이다. 본문 어디에도 69이레 뒤에 시간이 멈추고 2천 년의 교회 시대가 삽입된다는 말이 없다. 7이레와 62이레 뒤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나타나고, 이어지는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그가 끊어짐을 당하며 희생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한다(단 9:25-27). 이 세 구간은 한 예언 안에서 이어진다.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거꾸로 계산하면 연대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기원전 457년 아닥사스다 왕 제7년에 에스라가 귀환하여 백성을 말씀으로 돌이켰고, 뒤이어 느헤미야가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했다(스 7:7-10; 느 2:1-8). 그때부터 7이레와 62이레가 지나 주후 27년경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 3:13-17; 행 10:38).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인 약 3년 반 뒤 주후 30년경 십자가에서 끊어짐을 당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마 26:28). 그분이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반복하던 희생제사와 예물은 효력을 다하고 그치게 되었다(히 10:10-14). 그러므로 다니엘서 9장 27절의 ‘그’는 많은 사람과 새 언약을 굳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뒷부분의 황폐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대조되는 별개의 존재다.
70이레를 연속된 기간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한 예언은 초림하신 그리스도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향해 마무리된다. 그 뒤 복음의 문은 모든 민족에게 활짝 열렸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실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6. 7년 평화조약과 환난 전 휴거 해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성경에는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7년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문장이 없다. 다니엘서 9장 27절은 그가 한 이레 동안 많은 사람과 언약을 굳게 한다고 말할 뿐이다. ‘한 이레’를 7년으로 계산한 뒤 그 주체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로 바꾸고, ‘언약’을 정치적인 평화조약으로 바꾸면서 7년 평화조약이라는 교리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데살로니가후서 2장이 결합되었다. 바울은 주의 날 전에 배교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 자신을 높이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울 것이라고 했다(살후 2:1-4). 세대주의는 이 불법한 자를 다니엘서 9장 27절의 ‘그’와 동일시하고, 그가 유대인에게 성전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기 때문에 평화조약을 맺는다고 추론했다. 3년 반 뒤에는 조약을 깨고 그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시간표가 완성되었다.
요한계시록에는 1,260일과 마흔두 달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나온다(계 11:2-3; 12:6, 14; 13:5). 이것들은 3년 반에 해당하지만 ‘7년 대환난’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를 미래로 옮긴 뒤 그 전반과 후반을 각각 3년 반으로 나누어 요한계시록에 덧씌웠기 때문에 7년 대환난이 된 것이다. 서로 다른 본문을 이미 정한 시간표에 맞추어 짜 맞춘 결과다.
환난 전 휴거설(患難前携擧說, pretribulationism)도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7년에 다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일하시려면 그 사이에 삽입되었던 교회가 먼저 하늘로 올라가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 전체가 휴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자신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환난과 죽음을 겪을 것을 말씀하셨다(마 24:9-13). 요한계시록도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죽이는 장면을 보여 준다(계 13:7-10).
교회의 휴거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익은 곡식을 거두는 추수가 나온다(계 14:14-16). 다만 예수 믿는 이름만 가졌다고 교회 전체가 환난 전에 자동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마지막 전쟁에 참여할 첫 열매와 알곡으로 준비된 자가 먼저 거두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안전한 탈출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순교까지 각오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환난을 피할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있다가 실제 핍박이 닥치면 믿음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성경의 종말론은 공포를 조장하지 않지만 고난을 숨기지도 않는다. 교회는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어떤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믿음과 회개와 충성을 준비해야 한다. 주께서 재림하시면 입의 기운으로 불법한 자를 죽이고 강림의 광채로 폐하실 것이다(살후 2:8). 마지막 승리는 교회의 정치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 속한다.
7. ‘하나님의 성전’은 왜 물질적인 제3성전만을 뜻하지 않는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의 ‘하나님의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세워질 제3성전으로 단정하려면 먼저 신약에서 ‘성전’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야 한다. 헬라어에는 성전으로 번역되는 대표적인 두 단어가 있다. ‘히에론’(ἱερόν)은 성전 뜰과 건물을 포함한 물질적 성전 구역을 가리킨다. ‘나오스’(ναός)는 본래 성소를 뜻하며 물질적 성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영적인 성전에도 쓰인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 쓰인 단어는 ‘히에론’이 아니라 ‘나오스’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예루살렘의 돌 성전이 반드시 재건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불법한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침범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리에서 자신을 높이며,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는 영적 실재를 포함한다. 물질적인 성전이 다시 세워질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종말의 필수 조건으로 만들 근거도 없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은 건물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예수께서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요 2:19-21). 이때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성전’도 나오스다.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참성전은 먼저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신 뒤에는 믿는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신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성전은 나오스다(고전 3:16-17; 6:19).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다.
성전의 궁극적인 완성은 새 예루살렘에서 나타난다. 요한은 그 성 안에서 별도의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계 21:22). 구원의 경륜은 돌로 된 성전으로 되돌아가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제3성전의 건축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교회의 중심 사명이 될 수 없다. 돌 성전이 실제로 세워진다 해도 그것이 예수님의 몸과 교회라는 참성전을 대신하지 못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성전은 회개하여 죄를 씻고 성령께서 거하실 처소가 된 사람들이다. 성전의 재건 여부를 바라보며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기보다 나 자신이 거룩한 성전으로 준비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8. 종말을 준비하는 교회가 세워야 할 성전과 싸울 대상은 무엇인가?
종말을 준비하는 교회가 세워야 할 성전은 먼저 성도 자신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사람은 거룩한 성전이므로 죄와 악한 영이 마음과 몸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이 붙어 있을 근거를 제거하며 예수 이름의 권세로 그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실제적인 과정이다.
교회의 싸움은 사람을 향한 싸움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도나 팔레스타인 사람, 다른 정치 진영과 민족을 원수로 삼아 없애려 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그 배후에서 죄와 미움과 전쟁을 일으키는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한다.
예수께서는 어떤 정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장 군대를 조직하지 않으셨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원수들의 손에 자신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도 복음을 위해 핍박과 순교를 감당했다. 신약의 교회는 사람을 죽여 승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죽기까지 어린양을 따름으로 악한 자를 이기는 공동체다(계 12:11).
이 싸움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다. 악한 영이 가득한 채 외부의 적만 공격하면 사탄에게 속는다. 혈기와 분노와 미움으로 이스라엘을 돕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교만과 음란과 탐욕과 시기와 미움을 자백하고 끊어야 한다. 회개로 성전이 깨끗해질 때 성령의 권세와 은사가 바르게 나타나며, 주님이 마지막 때 쓰실 수 있는 군사로 준비된다.
또한 교회는 모든 민족에게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대인도 들어야 하고 무슬림도 들어야 하며, 공산권과 복음이 닿지 않은 종족도 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면 죄의 빚을 탕감받고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과 하늘의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70이레가 보여 주는 안식년과 면제년과 희년의 복음이다.
주님이 마지막 때 나팔을 불어 사명자를 소집하실 때에는 준비된 자가 참여한다. 적진과 내통하는 간첩을 전쟁에 데려갈 수 없듯이, 죄와 악한 영을 품은 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거룩한 전쟁에 합당하지 않다. 교회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나 특정 종말론을 믿는다는 사실이 준비를 대신하지 못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라야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계 22:14).
성도는 박해를 피하기 위한 계산보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환난이 오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복음을 증언하며,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동시에 최종 심판과 원수 갚음은 주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황폐하게 하는 자를 심판하고 모든 전쟁을 끝내신다(살후 2:8; 계 19:11-21).
오늘의 사명은 분명하다. 물질적인 제3성전을 세우는 일보다 성도와 교회를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야 한다. 육적 원수를 만들어 미워하기보다 악한 영과 죄를 대적해야 한다. 유대인만을 위한 특별한 복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동일한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준비된 성도가 하늘의 기업과 신분을 얻고, 주님의 마지막 사역에 귀하게 쓰임받는다.
9. 나오며
다니엘서의 마지막 한 이레를 둘러싼 세대주의 해석과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을 살펴보았다. 세대주의는 관주성경을 통하여 평신도의 성경 읽기를 도왔고 선교 열정을 일으켰지만, 이스라엘과 교회를 과도하게 분리하고 마지막 한 이레를 2천 년 뒤로 옮김으로 7년 평화조약과 환난 전 휴거와 제3성전이라는 시간표를 만들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육적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셨지만 마침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무슬림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생명을 똑같이 귀히 여겨야 한다. 144,000명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도 혈통의 특권이 아니라 어린양을 따르는 믿음과 회개와 충성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70이레는 그리스도 중심, 안식년·면제년·희년 중심, 연속된 시간이라는 세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새 언약을 굳게 하고 제사를 그치게 하신 분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단번의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다. 요한계시록의 1,260일과 마흔두 달을 다니엘서의 미래 7년에 억지로 묶어 교회 전체의 환난 전 휴거를 확정해서는 안 된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성전은 ‘히에론’이 아니라 ‘나오스’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예루살렘의 물질적 제3성전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고, 성령을 모신 성도와 교회가 성전이며,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친히 성전이 되신다. 교회가 힘써 세워야 할 성전은 회개로 깨끗해진 사람과 거룩한 공동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는 종말론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를 바라보는 종말론을 붙들어야 한다. 날마다 죄를 회개하여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모든 민족에게 희년의 복음을 전하며, 하늘의 기업과 마지막 사명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바른 종말 신앙으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9월 16일(수)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