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온라인새벽기도회(2026.09.25/금)] [사역자론(19)]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3)(창35:9~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nofWSS9XIZk
[설교핵심]
이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천국에서 받게 될 5대 면류관 중 충성, 의, 그리고 승리의 면류관의 의미와 자격을 성경적 인물들을 통해 심도 있게 조명합니다. 저자는 단순한 일회성 헌신이 아닌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과 고난을 이겨내는 합당한 삶의 증명이 면류관의 핵심 조건임을 역설합니다. 특히 야곱과 요셉의 생애를 본보기로 삼아, 영적 축복에 대한 강렬한 사모함과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자 면류관의 실체임을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성도들이 현실의 역경을 하나님의 단련 과정으로 수용하며, 개인의 축복을 넘어 공동체적 사명을 완수하여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독려합니다.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7가지 질문]
1. 충성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은 어떤 삶을 끝까지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가?
2. 승리의 면류관은 무엇이며, 맡겨진 과업을 ‘이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은 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어떤 복을 약속하셨는가?
4. 야곱은 어떻게 장자권을 사모하고 그 복을 자녀들에게까지 넓혔는가?
5. 야곱의 이십 년과 얍복강 기도는 승리의 길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6. 요셉은 꿈을 붙들고 어떤 고난을 지나 맡겨진 사명을 완수했는가?
7. 오늘의 사역자는 무엇을 사모하고 견디며 자신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가?
사역자론(19)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은 무엇인가?(03)
(창 35:9-12)
동탄명성교회 · 정보배 목사
1. 들어가며
이번 시간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冕旒冠, crown) 가운데 세 번째 면류관을 살펴보려 한다. 앞선 시간에 살펴본 '충성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주어진 일을 한 번 잘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맡겨진 일을 끝까지 감당하며 마침내 완성하는가? 면류관에 대한 말씀은 그 질문을 우리 앞에 놓는다.
예배를 한 번 드리고, 헌금을 한 번 하고, 교회를 위해 청소를 한 번 한 일도 주 안에서는 헛되지 않다. 그러한 수고는 천국 집을 짓는 재료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류관은 한 번의 수고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에게 작은 일을 맡겨 보시고, 그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는지를 지켜보신다. 이 땅에서 무엇을 사모하고 어떤 시련을 통과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이루는지가 우리의 영원한 상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번 시간에 살펴볼 '승리의 면류관'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 도착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길이 있으며, 그 길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맡겨진 사명을 완수한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 불리고, 요셉이 긴 고난 끝에 가족의 생명을 보전한 일을 통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충성과 의의 면류관을 기억하면서 야곱과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완수했고, 우리도 어떻게 승리의 면류관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충성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은 어떤 삶을 끝까지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가?
하나님 앞에서 제 길을 끝까지 걸어간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는 충성(忠誠, faithfulness)의 면류관이 있다. 누구나 한 번은 잘할 수 있다. 교회에서 음식을 한 번 만들고, 청소를 한 번 하고, 물질을 한 번 드리는 것도 귀하다. 그 일 하나하나가 천국 집의 재료가 된다. 하지만 주님께서 보시는 충성은 끝까지 변함없이 그 일을 감당하는 데 있다. 처음의 열심이 사라지고 어려움이 닥치자 일을 내려놓는다면, 그 수고를 오래 지켜 낸 사람과 같을 수 없다. 충성의 면류관을 생각할 때 우리는 늘 ‘얼마나 오래 주님께 맡은 자리를 지켰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준비시키실 때 처음부터 큰 일을 맡기지는 않으신다. 작은 일을 하나 맡겨 보시고 그가 어떻게 감당하는지 지켜보신다. 그 일을 성실히 마치면 다음 일을 맡기실 수 있다. 작은 일도 거절하면서 큰 일을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겠는가? 믿음의 분량이 모자라거나 마음이 교만하면 오래 견디지 못한다.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이 작아 보여도 그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한 번 쓰시고 곧바로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가 같은 마음으로 맡은 일을 계속하는지를 보신다. 누가 시켜 줄 때만 잠깐 움직이다가 다음에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실 일이 점점 줄어든다. 주님이 쓰실 사람으로 부르셨는데도 본인이 그 기회를 거부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때 ‘주님이 왜 큰 일을 주시지 않는가’부터 따질 것이 아니라 ‘지금 맡은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쓰임 받을 기회를 가볍게 여기고 뒤늦게 후회해도 지나간 시간이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장자의 복을 소홀히 여겼던 에서의 경우를 보라. 그가 나중에 눈물로 그것을 구했으나 돌이키지 못한 일을 히브리서 12장은 들려준다(히 12:16-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작은 일을 맡기실 때, 또 주의 종을 통해 일할 자리를 열어 주실 때 순종해야 한다. 지금 맡은 자리에서 충성하지 않으면서 훗날 천국에서 충성의 면류관을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의의 면류관(義의 冕旒冠, crown of righteousness)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낸 사람에게 주어진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켰으므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고백했다(딤후 4:7-8).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고난을 겪고 시련을 통과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길을 끝까지 걸어간 것이다.
주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은 시작의 뜨거움만이 아니다. 바람이 한 번 불자 주저앉아 짜증을 내고, 어려운 일이 생기자 금세 돌아서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결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완주할 수 없다. 믿음의 심지가 굳어야 한다. 바울이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그 길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고 나서야 의의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가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길에서 맡겨진 과업 자체를 완성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는가?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상을 받을 만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울에게도 선한 싸움이 있었고 달려야 할 길이 있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뒤에야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면류관을 말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이 일을 감당한 네 삶이 옳다’고 인정하실 만한 길을 걸어야 한다. 면류관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땀 흘려 지킨 믿음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3. 승리의 면류관은 무엇이며, 맡겨진 과업을 ‘이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세 번째가 승리의 면류관(勝利의 冕旒冠)이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을 전쟁에서 적을 무찌르는 뜻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 각자에게 맡기신 과업을 끝까지 수행하고 완성하는 것에 대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이 고난 속에서도 달려갈 길을 지켰다면,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사람은 마침내 그 길에서 맡은 일을 완수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면류관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면류관을 가리키는 헬라어 ‘스테파노스’에는 경기에서 이긴 자가 받는 관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은 세상에서 운동하는 경기자라도 썩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절제하지만, 우리는 더더욱 썩지 않을 것을 얻으려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한다. 디모데후서 2장 5절도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의 승리를 세상 경기의 일등 상 하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에게만 맡기신 길을 두고 다른 사람을 모두 패자로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감당한 자를 보시고 ‘너는 네 사명을 잘 마쳤다’고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중도에 그 길을 저버린다면 승리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없다. 데마는 한때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의 어려움에 참여했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바울은 안타까움을 표현했다(딤후 4:10). 그가 끝까지 바울 곁에서 복음 전파에 머물렀다면 어땠겠는가? 필자는 맡겨진 길에서 돌아서는 일을 두렵게 여긴다. 천국에서 어떤 자리에 이를지도 그 길의 끝과 자신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중에 힘들다고 떠나 버리면, 함께했던 수고가 있다고 해도 완수한 사람의 상을 받을 수는 없다.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 경기하는 사람이 절제하는 까닭은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도달해야 할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경기 도중 마음대로 코스를 벗어나 버린다면, 아무리 빨리 뛰었어도 그는 결코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 사역자의 길도 그렇다. 시작할 때 능력이 보였는지나, 사람이 많이 따랐는지보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마지막까지 어떻게 수행했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승리의 면류관을 사모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분별하고, 그 과업에서 도망가지 않아야 한다.
승리한 사람들의 생애에는 고난과 역경이 빠지지 않는다. 욥과 모세, 다니엘과 여호수아, 다윗을 생각해 보라. 그중에서도 야곱과 요셉은 맡겨진 일을 붙들고 오래 견디는 길을 특별히 선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다고 해서 모든 장애물을 즉시 걷어내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죽을 고비를 넘고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여 물러서면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 주께서 사람을 단련하시는 과정으로 받고 끝까지 서 있어야 한다.
4. 하나님은 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어떤 복을 약속하셨는가?
우리는 이제 창세기에서 이기는 자의 전형적인 모델을 보여주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그는 야곱이다. 우선 창세기 35장 9절부터 12절의 말씀을 살펴 보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 복을 주신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고향을 떠날 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요단을 건너갔지만, 돌아올 때는 아내들과 자녀들과 많은 소유를 데리고 왔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기 전의 일이므로 그에게는 열한 아들과 딸 디나가 있었다. 그가 빈손으로 떠났다가 두 무리를 이루어 돌아온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다(창 35:10). 야곱은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강의 씨름 뒤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고, 창세기 3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 그 이름을 거듭 확증해 주셨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발뒤꿈치를 붙잡은 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 있다. 필자는 여기서 ‘이겼다’를 하나님을 적으로 삼아 싸워 굴복시켰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길을 붙들고 결국 그 과업을 이루어 냈다는 뜻으로 읽는다. 즉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들을 다 이겨내고 극복하여 결국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야곱에게 나타나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리시며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신다. 장차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그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그의 허리에서 나오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땅을 그와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창 35:11-12).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그간 주님께서 못 하셔서 야곱의 길이 막힌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못한 채 포기하면 자신이 걸어갈 그 길을 놓쳐 버리지만,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는 없던 길도 만들어 주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이름을 바꾸신 일에는 그런 복의 선언이 함께 들어 있다.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서 왕 노릇 하는 자가 되는가? 하늘에서 왕 노릇하는 자리는 사실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 불릴 만한 이긴 자, 곧 주께서 맡기신 과업을 완성한 자가 될 때에 그 영광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야곱에게서 왕들이 나오리라는 약속을 볼 때, 우리는 그가 한때 장자권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얼마나 얼마나 붙잡고 씨름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복은 야곱 한 사람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말씀에서 특별히 야곱에게 주목하는 까닭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그가 걸어온 길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이삭에게서 야곱이 태어났다. 이들도 다 약속을 받았고 약을 믿었으며 약속을 전수해 주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었다. 한 명의 아들에게만 그 약속을 전수해 준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달랐다. 야곱에게서는 열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들 모두가 장차 이스라엘의 백성의 기초들이 되었다. 약속의 자손이 한 사람에서 여러 지파로 넓어지는 자리에 야곱의 생애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그저 자녀가 많아졌다는 감탄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 수많은 사람들이 차지할 복이 더 넓어지고 크게 열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5. 야곱은 어떻게 장자권을 사모하고 그 복을 자녀들에게까지 넓혔는가?
그렇다면 야곱이 이긴 자가 된 길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사모함'에서부터였다. 어머니 리브가의 태에서 쌍둥이가 밖으로 나올 때,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은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필자는 여기서 형 에서보다 앞서 복을 받고 싶어 했을 만큼 사모했던 동생 야곱의 마음을 본다. 태중에서 그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성경이 기록한 것은 없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붙잡은 장면은 훗날 장자권을 향해 매달린 그의 삶과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향한 사모함이 있다.
야곱이 약 16세가 되었을 때다. 그는 형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와 허기진 상태에 맞춰서 팥죽을 끓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형의 장자권을 사들였다. 그때 에서는 배고픔 앞에서 장자권을 가볍게 여겨버렸다. 그런데 야곱은 그 권리를 얻고자 기회를 만들고 붙잡었던 것이다. 그 뒤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에게서 장자의 축복까지 받아냈다. 필자가 살펴본 야곱의 나이로는 이때가 일흔여섯 살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사들이고 축복을 받기까지는 6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야곱의 속임이 있었고 형제의 갈등도 점차 깊어졌다. 그러나 장자의 복을 향해 야곱이 얼마나 집요하게 나아갔는지도 드러난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꾼 에서와 야곱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권도 얻었고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에서의 마음을 매우 격동시켰다. 그래서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틈을 보고 있었을 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말한다. 조금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서 피해 있으라고 말이다. 결국 정든 고향산천과 부모님 곁을 떠나갈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지팡이 하나와 기름병 한 개뿐이었다. 가다가 벧엘에서 꿈을 꾸며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자기 길에 함께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그가 일대일로 하나님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야곱은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낯선 땅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필자도 처음부터 성경을 잘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서 교회를 가게되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다. 교회는 세련되어 보였고, 학생들은 부자같이 보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나온 필자로서는 모두가 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더욱이 당시 같은 학년 고등부 학생만 약 백오십 명이 출석하고 있었으니 기가 죽을만도 하다. 그런데 설교 시간이 되면 고등부 2학년 담당목사님이 설교단에 오르시어 설교를 하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스피노자와 소크라테의 말, 토끼와 거북이 같은 세상 예화는 많이 들려주면서도, 정작 다니엘이나 사드락·메삭·아벳느고, 바울과 야곱의 이야기 같은 말씀은 들을 수가 없었다. 성경 인물을 하나도 모르던 필자는 성경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정말 귀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가난한 시골 유학생으로서 성경책이 비싸서 그러한 성경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장년부 주보에서 수요일에 있는 ‘수요 성서 강해’를 보고 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니이신 변한규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러 갔다. 그리고 그때의 감동은 정말 잊을 수 없었다. 그때 ‘필자는 내가 만약 목회자가 된다면 나는 성경 말씀만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결심 뒤에도 성경을 깨닫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핵심을 찾기 위해 오래 공부를 해야 했다. 성경을 전할 때에는 잠깐 감동을 주는 예화나 육체의 복을 받은 이야기로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필자는 깨달았다. 하나님이 종이 되려는 자는 천국을 사모해야 하고, 고난을 통과해야 하며,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 길을 걸어왔다. 필자는 여기서 필자 자신의 말씀과 은사를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온 모든 길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다가 목회자가 되었고 2013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개를 약 칠 년 정도 전한 뒤, 2020년부터 약 4년간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영의 세계를 활짝 열어 주셨다. 나중에 필자가 받은 은사를 살펴보니 처음에는 ‘은사 사모함의 은사’를 받았는데, 다시 이 년이 지난 뒤에는 ‘은사 열어 주는 은사’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2020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사역을 알지도 못했고 또한 그러한 능력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회개와 천국복음이 중요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더해 주셨다. 그러나 받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니만큼 그것을 돈이나 명예를 위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있다.
야곱에게도 복을 독차지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는 아니었다. 훗날 얍복강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야 했을 때, 자신이 겪은 형제 간의 아픔을 자녀들에게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형제의 난이 자신의 자녀들에게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한 사람에게만 주지 않고 모든 자녀들이 함께 언약(言約, covenant)의 계승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태어난 베냐민까지 포함하여 열두 아들이 한 백성의 줄기가 되게 하였다. 특히 넷째 아들로서 유다는 배다른 동생 요셉을 죽이지 못하게 막아 주었고, 나중에는 배다른 동생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자기 어머니의 자식만 생각하지 않고 배다른 형제를 지키려는 그의 간절한 마음은 결국 그를 왕권의 계보를 잇는 자리까지 이끌어준다. 진정한 장자의 복은 남을 밀어내고 혼자 차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함께 복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주는 자라야 한다.
6. 야곱의 이십 년과 얍복강 기도는 승리의 길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그렇다면 야곱이 이기는 자로서 언제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20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있었다.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의 집에 도착함으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좋아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칠 년을 일했지만 며칠처럼 여겼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먼저 아내가 된 사람은 그녀의 언니 레아였다. 그를 붙잡아두려는 외삼촌 라반의 꾀임에 넘어간 것이다. 다행히 일주일 뒤에 라헬도 자신의 아내로 취할 수가 있었지만,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자 라헬은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내어 주어 자식을 얻는다. 그러자 시기질투심에 레아도 역시 자신의 여종 실바를 내어주어, 네 명의 여인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레아에게서 딸 디나가 태어났다. 그러자 야곱은 그 긴 세월을 지나 열한 명의 아들들과 딸 디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참고로 12번째 아들인 베냐민은 귀향할 때에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이미 그 허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 앞에는 두려운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이었다. 야곱은 먼저 예물을 보내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시도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얍복강에 홀로 남아 밤새 씨름하고 기도했다. 지팡이 하나만을 가지고 떠났던 사람이 이제 두 무리를 이룬 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된 것이다. 그때 야곱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결단을 잘 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만 살리겠다고 도망치지 않고, 함께 돌아가고 있는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 내놓으면서 필사의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기도의 중심을 이렇게 읽는다. ‘주님, 장자의 축복을 한 사람만 차지하려 한 일 때문에 형제 사이에 피 맺힌 아픔이 남았습니다. 이십 년이 지나도 형은 사백 명을 데리고 옵니다. 이제는 이 자녀들이 서로 죽이고 빼앗지 않게 하시고, 모두 언약의 계승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성경에 그대로 기록된 야곱의 기도문이 아니다. 그의 생애와 그 밤의 간구를 깊이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이다. 고로 필자가 보기에는 야곱이 그 밤에 자기만의 장자권을 뛰어넘어 모든 자녀가 함께 복을 받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시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 이르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가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벧엘의 꿈에서는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고, 귀향길의 마하나임에서는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다. 필자는 마하나임의 곧 ‘두 무리’의 군대를 묵상하며, 한 무리는 야곱 곁을 지켰지만 다른 무리는 에서에게 가서 그의 마음을 돌이켰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왜냐하면 야곱을 도우러 온 군대가 한 무리가 아니라 두 무리였음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살의 책은 그 중 한 무리의 군대가 에서에게 갔음을 들려준다.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나타났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야곱에게 두 무리의 군대를 보내어 돕게 하신 것이다.
야곱이 만약 그 밤에 자기만 살겠다는 두려움으로 끝냈다면 자녀를 위한 복을 붙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자기 자식들을 살려달라고 구했다. 필자가 주님께 받은 은사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자는 우상숭배의 흔적이 가득한 집안에서 태어나 뒤늦게 신앙을 배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직 성도 한 사람을 돕겠다는 일편단심이 특별한 은사를 받는 단계에까지 이끌었다고 본다. 그렇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돕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과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어놓았던 바울과 같은 심정이 오늘에 필자를 있게 한 것 같다. 그러므로 야곱이 보여 준 승리의 길은 하늘의 복을 사모하고 그 복을 함께 모든 자식에게가지 넓히려는 그의 간절함이 일구어낸 값진 승리의 길이다.
7. 요셉은 꿈을 붙들고 어떤 고난을 지나 맡겨진 사명을 완수했는가?
야곱에게서 시작된 복은 과연 그의 후손에게 이르러 어떤 열매를 맺게 하였는가? 야곱의 아들들 중에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사람은 그의 11번째 아들 요셉이다. 야곱이 이긴 자의 표상이라면 그 복의 꽃은 요셉에게서 핀다. 요셉이 열일곱 살 때였다.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다. 다시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도 겹쳐 꾸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겠다는 사실을 먼저 꿈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받았다고 곧바로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꿈과 성취 사이에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형들은 그를 미워함으로 죽이려 했고 그러다가 구덩이에 던졌다. 하지만 그의 형 유다로 인하여 건짐을 받고 종으로 팔려갔다. 요셉은 약 십 년 동안 종으로 살았고, 다시 삼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열일곱 살에 꿈을 꾸었던 그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애굽의 총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종으로 사는 동안이나 죄수로 지내는 동안 모두 그에게 그 시간은 기나긴 인고의 세월이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형들에게 팔리던 날에도 결코 그는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꾸었던 꿈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므로, 지금의 이 구덩이와 이 감옥이 나의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하는 믿음으로 그는 꿋꿋이 버텨낸 것이다.
필자는 주님께서 사명(使命, mission)을 알리실 때 이렇게 앞날을 미리 암시해 주시기도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뒤에 곧장 그 길이 열리지 않았았다고 해서 그 약속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요셉은 자기를 종으로 판 형들과 억울한 감옥 생활을 이유로 사람을 미워하며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그러한 마음이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원망과 살인의 마음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품고 오늘에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이라는 학교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큰 일이 맡겨지지 않는 것을 본다.
이때 요셉에게 맡겨진 일은 개인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의 가족이 흉년 속에서 살아남고, 약속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도록 길을 여는 일이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가족이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때가 아직 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땅에 살면서 가나안 땅에 사는 일곱 족속의 죄악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에 대한 약속은 계속 이어져 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요셉을 애굽에 보내어, 당시 큰 나라인 애굽의 통치자가 되게 하셨다. 바로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요셉에게 다 맡긴 상태였다. 그 권한으로 인하여 요셉은 자신의 70명의 가족이 살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야곱의 집안 사람들은 그때 칠십 명이었다. 이들이 애굽에 내려갔다(출 1:5). 그러자 총리 요셉은 자기 아버지의 가족들이 고센의 목축하기 좋은 땅에 머물도록 했다. 애굽 사람들이 목자를 가증하게 여겼기에, 야곱의 식구들은 애굽 사람들과 섞여 살지 않고 따로 살며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라암셋으로도 불린 고센 땅에서 그의 자손이 아주 많아졌다. 출애굽기 1장 5절부터 7절 말씀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그 시대 사람들이 죽은 뒤 이스라엘 자손이 얼마나 생육하고 불어나 온 땅에 가득했는지를 말해 준다. 야곱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 요셉의 수고를 거쳐 공동체의 열매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높은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 그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총리의 자리에 앉아서 와신상담 끝에 자기 형들에게 원수를 갚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 자리에 먼저 보내신 뜻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흉년에 곡식을 구하러 온 가족을 살리고, 야곱의 후손이 머물며 사는 땅을 마련해 주었을 때, 그에게 주신 꿈은 여러 사람의 생명을 보전하는 열매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사역의 성공을 개인의 지위와 능력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 맡겨진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다음 세대에 이어지도록 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흉년 중에 그의 형들이 요셉 앞에 섰을 때 요셉은 자기 생애를 새롭게 고백했다. 자신을 애굽에 판 일로 근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고 후손을 보전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보내셨다고 언급한다(창 45:5-8). 형들이 자기를 판 사실을 지운 것은 아니다. 그 아픔을 겪고도 그 사건 너머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을 붙든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다는 기억에만 갇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보내셨다는 믿음으로 가족을 살렸다. 이것이 바로 섭리 신앙이라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꿈을 붙들고 종과 죄수의 자리를 견뎌 낸 끝에, 미참내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완수했다.
8. 오늘의 사역자는 무엇을 사모하고 견디며 자신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야곱과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다. 나는 과연 무엇을 사모하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보다 귀하게 여겼던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복을 사모하면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 땅에서 편안해지고 이름을 얻는 일만을 바라고 있는가? 사모함이 없으면 주님께서 주실 미래의 복을 가볍게 여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정말 사모하면, 지금 주어진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야곱처럼 장자의 복을 붙들고,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가기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고난이 자기에게 왔을 때 비로소 사명자의 길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야곱은 이십 년 동안 타향에서 일했고 얍복강에서 사백 명을 데리고 오는 형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셉은 십 년의 종살이와 삼 년의 감옥 생활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렇다. 고난과 시련을 겪지 않고 큰 사역만 맡게 해 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맡길 사람의 마음을 먼저 다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찾아와도 자신에게 주신 말씀과 꿈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 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기다리는 동안 원망과 불평에 머물지 말고, 무엇을 배우고 돌이켜야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필자에게도 아직 걸어갈 길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없던 은사가 열리고 사역에 능력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길의 끝은 아니다. ‘왜 이런 것을 주셨는가’를 물어야 한다. 돈을 벌거나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살리고, 몸 된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은사를 자랑하다가 교만에 넘어지면 끝까지 가지 못한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필자를 더 훈련하시는 시간이 남아 있다면 저는 그 시간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회개기도문으로 회개하는 이들 중에 누구는 ‘왜 나는 오래 기도하고 회개(悔改, repentance)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내 문제가 풀리지 않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능력이 부족해서 막아 두신 것인가? 아니다. 필자는 이런 때가 찾아오면 자신에게 더 다루어져야 할 것이 없는지, 아직 배워야 할 훈련이 없는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요셉은 꿈을 받았지만 감옥의 문을 스스로 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했고 그렇게 고난을 통과하자 하나님의 때에 감옥문이 열렸다. 기도가 더뎌 보인다고 해서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다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승리의 면류관은 남과 겨루어 남을 떨어뜨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과업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사람을 살리고, 고난과 역경을 견뎌 내며 마지막까지 감당한 사람에게 주시는 상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을 맡았다면 거기서부터 충성하자. 여러 사람과 함께해야 할 일이라면 복을 독차지하려 하지 말고 길을 넓혀 가야 한다. 언젠가 주님께서 ‘네게 맡긴 일을 잘 마쳤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 길을 간 자가 결국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이다.
고난을 통과하는 동안 자신이 언제 쓰임받을지를 재촉할 필요가 없다. 야곱에게는 라반의 집에서 보낸 이십 년이 있었고 요셉에게는 종과 죄수로 보낸 십삼 년이 있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가족을 품고 한 백성을 살리는 자리에 이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 당장 모든 일이 풀리지 않아도, 주님께서 맡겨 주신 오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승리의 길을 걷는 방법이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충성과 의의 면류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끝까지 완성한 사람에게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야곱과 요셉의 생애를 통해 살펴보았다. 충성은 한 번의 열심이 아니라 변함없이 맡은 일을 감당하는 것이고, 의의 면류관은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킨 삶에 주어진다. 승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내 이루는 것이다.
야곱은 장자의 복을 사모하여 붙들었고, 이십 년을 지나 자녀들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얍복강에서 가족의 앞날을 위해 매달렸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생육과 번성, 왕들과 땅을 약속하신 까닭을 그 삶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열일곱 살에 받은 꿈을 놓지 않고 종과 죄수의 세월을 견뎠다. 서른 살에 애굽의 통치자가 되어 가족의 생명을 보전하고 그 후손이 번성할 길을 열었다. 형들의 악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붙든 그의 믿음은 맡은 사명을 완성하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보여 준다.
주님께서 아직까지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신 까닭이 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의 것만을 찾느라 하루를 보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부터 충실히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시련을 만날 때에는 사모함을 버리지 말고, 받은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주님의 때까지 견디어야 한다. 그리하여 각자에게 맡겨진 과업을 마침내 완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년 09월 25일(금)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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